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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의 혁명가'가 친일파? "극우, 참 비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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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의 혁명가'가 친일파? "극우, 참 비열하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 해방과 분단, 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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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1945년 8월 패망을 앞두고 일제가 여운형이 아니라 송진우에게 치안 협조를 부탁했다는 주장도 있다. 송진우가 하지 않겠다고 해, 일제가 할 수 없이 여운형에게 맡겼다는 주장이다.

서중석 : 그런 주장이 수십 년간 일종의 정사(正史)인 것처럼 강요됐다. 건준을 불온하게 여긴 기간에 특히 심했다. 그런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고 그랬다.

예컨대 한민당 쪽에서 낸 여러 자료나 한민당 관계 인사인 김준연이 쓴 <독립노선> 같은 책을 보면, 조선총독부에서 송진우한테 치안을 맡기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정권까지 맡기려 했다는 식의 주장을 편다. 그런데 '송진우는 떳떳한 분이니 딱 거부했는데 친일파인 여운형이란 자가 덥석 받아먹었다', 이런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참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프레시안 : 근거가 무엇인가.

서중석 : 1957년 8월 엔도 정무총감이 일본 <국제타임스>와 회견을 했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이 문제를 물었다. 그랬더니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에게 치안 대책을 위촉했을 뿐이며 송진우와는 교섭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에서 한국인으로는 가장 중요한 관리라고 얘기되던 최하영이란 사람도 조선총독부에서 만나려 했던 건 여운형이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혔다.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송진우를 안 만난 건 아니다. 하급 관리, 엔도 정무총감보다 급수가 훨씬 낮은 쪽에서 송진우를 만나긴 했다. 일제가 되게 위급한 것 같으니 그 사람들도 엔도 정무총감과 똑같은 걱정을 한 거다. 일제가 망하면 한국인들이 엄청난 보복을 할 것 아니냐(고 우려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총독부 고위층을 만나 치안 문제 같은 걸 상의해 봤으면 좋겠다' 등의 몇 가지를 송진우한테 부탁하고 그랬다.

프레시안 : 송진우는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그 당시 송진우는 그런 문제를 조선총독부와 상의한다든가 '내가 치안을 맡을 테니 당신들이 총독부 고위층에 얘기해봐라', 이렇게 얘기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1944년 일제가 점점 어려운 상황에 빠지는 것을 알고 안재홍은 여운형 쪽을 만나면서 (해방을) 준비한다. 여운형이 들어오라고 한 건국동맹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하여튼 안재홍은 그런 준비 작업을 했다. 이때 안재홍은 송진우도 만났다. 어쨌든 송진우는 지주·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중요 인물로 돼 있지 않았나. '위급한 상황이니 우리가 이제 준비를 좀 해야 할 것 아니냐', 안재홍이 이런 이야기를 하니 송진우가 뭐라고 대답했느냐면 "긴박한 이 시국에서 오직 침묵밖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송진우 전기에는 뭐라고 쓰여 있냐면, 일제 말에 이불 펴고 누워 중병을 가장하고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었다고 쓰여 있다.

아, 송진우와 가까운 사람들이 그 당시에 친일을 비롯해 문제가 있는 행동을 얼마나 많이 했나. 지주·부르주아 세력은 친일 아니면 민족 개량주의자로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송진우가 나서서 조선총독부하고 함께 뭘 한다는 건 송진우 자신이 생각해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운형이 아니라 송진우에게 맡기려 했다는 주장은) 조선총독부 상황을 봐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일제가 패망하면 일본인들이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지 않았나.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한국인한테 치안 협조를 부탁하자', 이렇게 하려고 할 경우, 아 한국인에게 영향력이 없는 사람에게 부탁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일제 말에 조선총독부 핵심 권력에 깊이 접근해 있던 다른 일본인이 쓴 글에도 '첫 번째로 꼽은 게 여운형, 그다음이 안재홍', 이런 식으로 나온다. 그건 누가 봐도 뻔한 것이었다.

▲ 1945년 8월 16일, 휘문중에서 해방의 감격을 담아 연설하는 여운형.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소장

한국인이 사랑한 지도자 여운형을 물어뜯은 세력들

프레시안 : 여운형과 안재홍이 당시 국내에 있던 주요 인사 중 마지막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은 이들이었다는 점과 떼놓을 수 없는 대목으로 보인다. 특히 여운형은 해방 후 실시된 첫 여론 조사(1945년 11월)에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 항목에서 모두 1위를 할 정도로 대중의 신망이 높았다. 그런데도 친일파 등이 오히려 여운형을 친일파로 몰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해방 공간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서중석 : 이번에 교학사 책을 만든 뉴라이트 쪽도 여운형을 헐뜯지 않았나. 뉴라이트가 그러는 건 근래의 일이지만, (오래전부터) 한국의 극단적인 반공 세력도 여운형을 참 많이 헐뜯었다. 특히 해방 직후 한민당은 여운형에 대해 무지무지하게 중상모략을 했다. 공산당보다 건준과 여운형을 더 심하게 공격했다. 비열한 언사, 있을 수 없는 말들을 써가면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그랬다. 그 후 건준을 불온하게 여기고, 최근에는 다시 뉴라이트가 그런 짓을 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히다. (교학사 고교 한국사 집필자인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여운형에 대해 "소련의 충실한 동맹국이 되려 한 것일 뿐 합리적·이상적 독립국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는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운형이 "스탈린의 선택을 받아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는 수십 년간 학계에서 쌓아 올린 객관적 연구 성과와는 매우 동떨어진 주장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여운형은 송진우 쪽에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여운형은 '송진우 세력도 해방을 맞는 데 동참하게 하는 게 필요하다. 해방은 좌우가 힘을 모아서 맞을 때 큰 힘으로 나타나는 거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1945년) 8월 11일경에 독립 선언서를 만들게 하는 등 구체적인 건국 작업에 들어가면서 12일, 13일에 송진우 쪽에 (거듭) 사람을 보낸다. 일제가 며칠 안으로 망할 것이(니 함께 준비하자는 뜻이었)다. 포츠담 선언을 일제가 수락한 것 같다고 귀띔했을 수도 있는 건데, 사실은 송진우도 단파 방송 내용을 알고 있던 소수 중 하나였다. 유명한 단파 방송 사건(경성·개성 방송국에서 일하던 한국인 직원들이 미국의 단파 방송을 듣다가 1942년 말부터 1943년 초 검거된 후 정치 문제로 비화된 사건. <편집자>)에 송진우 쪽이 연루됐다. 그리고 8.15 바로 그날에도 여운형은 자신의 왼팔로 불리던 이여성을 직접 송진우에게 보낸다.

그런데 송진우 쪽에서는 분명히 거부감을 나타냈다. '중경에 있는 임정을 봉대(奉戴, 공경해 높이 받듦)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한다. 난 이 '봉대'가 너무 심한 말이라고 보는데, 하여튼 (송진우 등은) 봉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임시정부 이름을 빌려서 지주·부르주아 세력이 강한 정치적인 힘을 회복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 (한민당이) 심지어 임정 측에, 건준과 여운형을 (근거 없이) 아주 심하게 비방하는 글을 보낸다(는 것이다). 임정이 있는데도 여운형이 정부를 참칭하고 있다는 식으로 헐뜯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문제의 글은 중경 임시정부 인사들이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14일, 한민당의 조병옥과 원세훈이 김구 등에게 보낸 편지를 말한다. 한민당은 이 편지에서 "일본 총독이 여운형을 통해 친일 정부를 세우려고 시도했"으며 여운형이 대중을 속이고 있다고 매도했다. <편집자>)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건준과 인민위원회는 처음부터 좌편향? 그렇지 않다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여운형과 건준이 좌편향이었다고 주장한다.

서중석 : 뉴라이트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수구 냉전 세력이 강하게 주장한 내용이다.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송진우와 관계 문제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건국동맹을 만들 때도 여운형은 좌우를 꼭 같이 주요 간부로 놓는 것을 볼 수 있다.

건준도 초기에 좌우 연합적인 성격이 대단히 강했다. 해방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 첫 번째 간부를 발표하는데, 그때 7명의 간부 명단을 보면 안재홍 부위원장 등 4명이 우파거나 중도 우파다. 좌파나 중도 좌파는 3명(뿐)이다. 여운형은 중도 좌파다. 그만큼 배려를 많이 하면서 일했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그 후 건준 구성에 변화가 생긴다.

서중석 : 8월 25일 무렵부터, 미군이 38선 이남에 들어온다는 소문이 확 퍼졌다고 한다. 난 이것도 이상하다. 용산에 있던 일본의 조선군사령부는 미군이 (38선) 남쪽에 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송진우, 김성수 쪽도 (그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했나 보더라. (어쨌건 그 소문이 퍼진 게) 자료상으로는 8월 25일, 26일쯤인 걸로 나온다.

그러면서 우파가 건준에서 우르르 빠져나갔다. 또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강하게 헤게모니를 행사하면서 건준에 막 들어오기 시작했다. 건준이 중요 단체니까 그렇게 한 것이다. (그 결과) 9월 4일에 3차 개편을 할 때쯤엔 사실 좌편향됐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우파가 다 빠져나갔고 안재홍도 나가면서 그렇게 된 거다. (안재홍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송진우, 김성수 쪽에서 강력하게 임시정부 추대를 밀어붙이는데 자기만 빠져버리면 우파에서는 낙오자가 될 수 있는 거다. 그러니 건준을 나가서 같이 임시정부 추대를 하게 된 거다.

참 해방 직후 양쪽으로 갈라져서 이러는 걸 보면 너무 심하다. 각자가 자기 판단대로 움직이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프레시안 : 인민위원회 역시 좌편향이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서중석 : 인민위원회는 그 이름 때문에도 (처음부터) 좌편향이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나. 이에 관한 상황을 짚을 필요가 있다. 여운형이 (1945년 8월 15일) 엔도 정무총감을 만났을 때 첫 번째 요구 사항이 정치범 등을 즉각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일제는) 여운형 얘기를 듣기 전에는 정치범을 풀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건 연합군이 와서 해야 할 문제(라고 봤다). 다른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사람한테 맡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여운형이 주장했고 워낙 황급했으니 엔도는 여운형이 요구한 5개 항을 수락한다고는 했지만, 정치범 문제에 대해선 이렇게 답했다. '여운형 당신 말대로 하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절차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정치범은 수속 절차라는 게 있어야 한다. 그러니 내일(16일)부터 당신이 가거나, 당신 편지를 가지고 오거나, 당신이 보낸 사람이 오거나 하면 다 석방하겠다.' 16일부터 전국의 옥문이 다 열렸다. 아, 이 양반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다 지하투쟁을 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고 한 사람들 아니었나. (풀려나자마자) 곧장 지방에 가서 조직 사업에 참여했다. 그래서 건준 지부 활동이 그렇게 활발하게 각지에서 이뤄진 것이다.

(9월 6일) 중앙에서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이게 다 인민위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그 인민위원회가 정말 좌편향이었나? 그렇지 않다.

프레시안 : 그간 인민위원회에 대해서도 적잖은 연구가 이뤄졌다.

서중석 : 나중에 인민위원회는 동, 리, 면 단위에도 조직됐다고 한다. 굉장히 많이 조직됐는데, 이 인민위원회에 대해선 1990년대 초부터 많은 연구가 나왔다. 지방 조직이 어떠했는지가 궁금할 것 아닌가. 브루스 커밍스의 그 방대한 저작(<한국전쟁의 기원>)도 인민위원회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있나.

전라남도를 시작으로 여러 지방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다. 그 연구에 따르면 우파 세력이 강한 곳도 여러 군데 있고, 좌파 세력이 강한 곳도 있고, 양쪽이 동거한 곳도 있었다. '(인민위원회에서) 어느 한쪽이 아주 우세했다고 보긴 어렵다', 논문의 결론이 그것이었다. 경상남북도와 더불어 좌익이 대단히 우세한 지역으로 알려진 전라남도에서조차 (인민위원회에서) 좌익이 조금 더 우세했던 것 같긴 하지만 어느 일방이 아주 우세했다고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에 (건준에서) 인민위원회로 조직 개편이 이뤄지고 할 때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얘기할 수 없다. 그런데 10월부터 미군 전술 부대가 지방에 내려가서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인민위원회를 해체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니, 인민위원회가 그냥 해체된 게 아니라 이름이 존속하면서 우파는 빠져나가기 시작한 거다. 그러니까 이게 좌파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런 조직엔 공산당이 또 잘 파고들지 않나. 조선공산당 세력이 인민위원회에 많이 파고들어갔다. 그 결과 (처음과 달리) 나중에 가서는 좌편향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3.7제와 3.1제, 농민과 해방의 의미

프레시안 : 지방 상황을 조금 더 짚어보자. 소작료 문제에서도 적잖은 변화가 이뤄졌다.

서중석 : 앞에서, 많은 한국인이 해방의 뿌듯한 감격을 (본격적으로) 맛본 건 8월 16일부터 치안대가 각지에서 활동하는 걸 보면서였다고 말했다. (그에 못지않은 것이) 3.7제였는데, 이건 인민위원회가 활동할 무렵 실시됐다. 3.7제는 소작료를 소출의 3할로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인 대다수가 농민 아니었나. 3.7제가 실시되니까 농민들은 '이게 진짜 해방'이라고 느꼈다. '우리가 소작농으로 설움을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 그렇게 힘들게 농사를 지어도 다 소작료로 빼앗기지 않았느냐. 그런데 7할을 우리가 차지하고 3할만 지주한테 주면 된다? 아, 이런 세상을 만나게 됐으니 이거야말로 해방된 세상 아니냐', 이런 기쁨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군정에서도 나중에 3.1제를 실시한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해방을 맞은 한국 농민들의 그 기쁨을 미국도 묵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인들이 스스로 누리고 있던 자유를 (미국이 아주) 묵살할 수는 없었던 것하고 똑같은 일이 여기서도 일어난 거다.

3.1제는 (소출의) 3분의 1만 지주한테 주고 3분의 2는 농민이 차지하라는 거다. 66퍼센트를 농민이 차지하게 됐으니 3.7제랑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선 농민들이 고마워했다. 농민들이 3.1제도 좋아했다. (해방 공간을 살필 때) 이런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열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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