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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제주도를 육지의 모범으로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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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무현, 제주도를 육지의 모범으로 만들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제주를 부탁해 (4) 특별자치도 출범의 의미
"이제는 하나의 도시다."

미국의 50개 주 중 49개 주에는 지방자치가 주(state)-군(county)-읍(township)의 3단계로 되어 있다. 유일하게 하와이 주만은 읍이 없이 두 단계로 되어 있다. 하와이의 네 개 군 가운데 하나는 전체 인구의 70%를 점하는 오아후 섬이고, 또 하나는 전체 면적의 60%가 넘는 하와이 섬이다.

하와이만 두 단계의 지방자치를 행하는 것은 다른 주들보다 작아서가 아니다. 미국 본토에 하와이보다 인구가 적은 주는 열 개 가까이 되고 면적이 더 작은 주도 둘이나 있다. 이유는 하와이가 섬이라는 데 있다. 하와이, 오아후, 마우이, 카와이 등 네 개의 큰 섬에 인근의 작은 섬들을 붙여서 각각 하나의 군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개발과 관리의 단위가 된다. 각각의 단위를 일관성 있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 밑에 별도의 자치단위를 안 두는 편이 좋은 것이다.

제주도의 과거 행정조직을 본다면 조선시대의 1목(牧) 2현(縣)이나 지금의 2시 2군이나 모두 육지부의 조직방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섬 지역이라는 특성을 감안하지 않은 방법이다. 일제시대의 도제(島制)처럼 제주도 전체를 도보다 작고 군보다 큰 하나의 단위로 보아 1읍 12면으로 편성한 것이 제주의 고유한 조건에는 오히려 합당한 방법이었다. 크고 작은 섬을 많이 가진 나라라서 섬 지역의 특성을 인식하는 안목은 나았던 것인지.

면적이 1만 평방킬로미터가 넘는 하와이 섬, 인구가 백만 가까이 되는 오아후 섬이 모두 지방자치의 기초단위 노릇을 하는데 제주도가 통일된 지방자치단위를 이루지 못하고 그 밑에 기초단체를 따로 두고 있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이 섬 위에 쓰레기처리장 만드는 일을 네 개 단체가 각각 결정하는 것이 좋은 일인가? 아스팔트 포장도 개설계획을 네 개 시-군이 제가끔 세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당장 월드컵경기장만 해도 그렇다. 이 섬에 월드컵 경기를 유치하는 일을 놓고 서귀포시와 제주도 사이에 적지 않은 혼선이 있어 왔고 유치가 결정된 이제 경기장 건설비 문제가 막막하다. 서귀포시와 다른 자치단체들 사이의 분담률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도민의 입장에서 볼 때 월드컵 경기는 제주도에 오는 것이지, 서귀포에 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월드컵 경기 개최가 도시 단위로 결정된다는 데 있다. 가로지르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제주도는 실질적으로 하나의 도시다. 그런데 그중 구(區) 하나의 크기로 볼 지역을 쪼개 '시'라고 이름을 붙여놓은 때문에 월드컵 경기 유치의 주체가 혼란스러운 것이다.

제주는 도-시-군의 강요된 구획방법을 벗어나 자신에게 적합한 지방자치 체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섬 전체의 장래가 달려 있는 일들은 모두 하나의 자치단위로 묶는 것이 바람직하다. '도(道)'라는 이름 대신 '도(島)'라는 고유한 자치단체명을 가져도 좋고 '광역시'의 이름을 취해도 좋다. 그 밑의 하위단체의 경우는 행정관만을 선출하고 의회는 따로 두지 않는 정도가 어떨까 한다.

거품경제가 꺼져가는 요즈음 지방자치도 과감한 구조조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9년 전 지방자치 실시에 즈음하여 기존 행정체계의 대폭 조정을 구상하다가 무산된 일을 기득권층, 특히 공무원 집단의 밥그릇 걱정 때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작년의 여수 지역 3개 시-군 통합을 보면 주민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주의 자치구조가 주민들의 의지에 따라 새로 만들어질 날을 기다린다. (<한라일보> 1998. 1. 16)

내 희망사항 가운데 제일 화끈하게 실현된 항목이다. 행정구역 제주도(濟州道)는 2006년 7월 제주특별자치도로 전환되었고, 기존의 2시 2군은 기초단체가 아닌 2개 행정시로 바뀌었다(의회가 없고 시장은 도지사가 임명한다). 이 변화가 진행될 때 나는 연변에 체류 중이어서 그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반가운 소식이었다.

변화의 출발점은 2003년 10월 31일 제주를 방문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노 대통령 '제주특별자치도 복안'"

노무현 대통령은 31일 "제주 스스로 자기 발전 방향을 추슬러 나가면 제 임기 안에 제주특별자치도가 되도록 지원했으면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제주도를 방문, 지역인사들과 가진 오찬간담회에서 "특별자치도엔 권한을 대강 넘겨주는 게 아니라 세금도 따로 부과할 수도 있고 깎아줄 수도 있고 그 밖의 행정규제도 스스로 판단해 할 수 있도록 권한을 대폭 이양하는 복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것(특별자치도)이 제주도에 무조건 이익을 가져다줄지는 모르겠으나 도민의 의견에 따라 창의적 방향 설정에 의해 중앙정부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된다 싶으면 집중 지원이 가능하고 이는 제주 발전만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수준을 높이는 모델케이스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이를 위해 여러분이 방향을 잡아 중앙정부에 제의하고 협의하면 힘껏 도와드리겠다"며 "큰 건 하나 하자"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의 '특별자치도' 개념은 중앙정부로부터 사실상 독립해 행정, 입법, 조세권 등을 상당 부분 독자 행사할 수 있는 수준의 지방정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

4.3사건에 대해 제주도민들에게 국가 차원의 사과를 한 자리였다.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 이정우는 이 사과 장면을 TV 뉴스로 보는 순간 "이런 대통령 밑에서 일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며 지금도 "참여정부에 들어가 일한 것 중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뭐냐고 누가 물으면 주저 없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고 대답한다"고 회고했다. ("형가, 제주도, 그리고 노무현의 추억", <김기협의 페리스코프-10년을 넘어>, 서해문집, 319쪽)

50여 년 전의 국가 폭력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란 획기적 의미를 가진 일이었다. 특별자치도 전환 제안에는 4.3사건에 대한 국가의 사죄를 뒷받침하는 뜻이 있었다. 실제로 추진 과정에서 반대파가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지만, 이 사죄의 의미 덕분에 그런 반대를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입장에서도 제주도를 위해 국가가 일방적 손해를 감수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자치 입체화는 그의 주요 정책 노선 중 하나인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중요한 방향이었다. 그로서는 4.3사건 사과의 의미 위에 지방자치 입체화의 출발점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니, "도랑 치고 가재 잡은" 격이었다.

얼마 후 주민투표법과 이에 근거한 조례가 제정되면서 특별자치도 추진은 주민투표란 방법을 갖추게 되었다. 2004년 7월 제주도의회의 주민투표조례 제정을 앞두고 특별자치도 전환을 위한 주민투표가 그해 12월로 예정되었다. 그 무렵 기초자치단체 폐지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일어났다. 기초단체의 폐지가 "민주주의의 역행"이라는 비판이 기초단체의 장과 의회를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난 것이다. (<한겨레신문> 2004년 8월 23일 "제주 '자치권 없는 행정구 도입 반대'", <경향신문> 2004년 9월 4일 "시-군 폐지는 지방자치 역행")

김태환 당시 제주도지사는 야당(한나라당) 소속이면서도 특별자치도 추진에 있어서 정부 및 여당(열린우리당)과 긴밀하게 협조했다. 그러나 기초단체 폐지에 대한 일각의 반대가 격렬해지자 주민투표를 늦추고 특별자치도와 행정계층 조정을 별도로 추진하기로 했다. 민심의 향방이 분명했기 때문에 한나라당도 특별자치도 추진에 정면으로 반대하지는 못했지만 국가보안법 개정을 둘러싼 논의 중 부정적 태도를 은연중 드러내기도 했다.

"제주도민 두려워 국보법 폐지 못한다(?)"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와 관련해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이유로 "제주도가 독립할 경우 처벌 근거가 없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아 제주도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 지난 21일 국가보안법상 '참칭 조항'의 존치 이유에 대해 "굳이 북한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정부 참칭 조항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제주도 주민들이 주민투표로 독립을 선언하고 제주민주공화국을 선포할 경우 참칭 조항이 없다면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

여기에 한나라당 최병국 의원 역시 비슷한 발언을 하고 있다. 최 의원은 최근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할 경우 헌법상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영토 조항에도 부합하지 않고, 통일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한 후 "(참칭조항을) 삭제할 경우, 예를 들어 제주도가 탐라국으로 독립을 선포하면 국가 변란 목적은 없다고 할 경우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한나라당 의원들의 발언에 대해 "보수 정치인들이 제주도와 도민을 정부에 대한 '예비 반란자'로 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들게 한다"며 4.3의 굴레를 벗는 데 반세기가 걸린 제주도민들의 가슴에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노컷뉴스> 2004년 9월 23일, CBS제주방송 김대휘 기자)

결국 2005년 7월 27일 제주도 주민투표에서 기초단체를 없애는 '혁신적 대안'이 기초단체를 그대로 두는 '점진적 대안'을 누르고 선택받음에 따라 그해 말 국회에서 "제주도 행정체제에 관한 특별법안"이 통과되고 이듬해 7월 제주특별자치도 출범에 이른다.

특별자치도 출범과 별개로 주민투표에 의한 행정체계 선택도 매우 뜻깊은 일이다. 기초단체 통합에서는 민의가 행정 체계 선택에 이미 작용하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광역단체 차원에서는 국가의 기본 구조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 후 부산-경남-울산 통합론이 일각에서 나온 일이 있고 2012년 대선에서는 강원도의 특별자치도 전환이 문재인 후보의 공약으로 나온 일이 있다. 이 논의들의 타당성을 여기서 논하지는 않겠으나, 논의가 쉽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제주도의 선례 덕분이며, 이런 논의를 통해 지금의 제도보다 더 좋은 방향을 찾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제주도가 그 특수한 조건을 잘 살림으로써 다른 지역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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