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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극복의 지혜, 제주에서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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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극복의 지혜, 제주에서 배워라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제주를 부탁해 (5) 제주의 경험이 전하는 교훈
섬의 운명

크레타섬의 웅장한 미노스궁전 유적을 보노라면 섬들을 무대로 펼쳐진 에게문명의 면모를 실감할 수 있다. 문명 초기부터 상업이 발달한 지중해 지역에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섬 지방이 육지보다 선진문명을 누리고 요충지 역할을 맡는 일이 많았다.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지역도 마찬가지다.

이와 반대로 농업문명의 원리를 철저하게 지켜온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섬 지방의 의미가 변방에 그치고 말았다. 근세에 들어와 서양인들이 진출하면서 비로소 길목에 있는 몇몇 섬들이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가장 미개한 섬오랑캐로 꼽히던 일본인들이 근세에 들어와 서양인들의 자극을 받으면서 두각을 나타낸 것도 그런 예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제주 역시 12세기 초 고려에 복속한 이래 조선말까지 변방의 위치를 지켜왔다. 열악한 농업조건과 교통여건 때문에 공세(貢稅)를 통한 중앙정부에의 공헌은 변변치 못한 반면, 행여나 왜구의 거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안보상의 부담으로만 인식되었다.

아마 13세기 말부터 1세기 간의 원(元) 복속기가 요충지로서 제주의 가치가 이례적으로 발휘된 시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고려가 원의 지배를 벗어날 때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난 것도 1세기 간 상승해 있던 제주의 위상이 다시 추락하는 데 대한 반발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원의 직할지로서 탐라총관부는 고려에 대한 일방적 복속기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의 비극인 합방을 맞아서도 제주의 위상은 조선시대보다 높아진 면이 있었다. 조선시대 5백년을 통해 최고의 학술-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진출한 제주인이 몇이나 되었던가. 그에 비해 일제시대에는 상당수 제주인이 서울뿐 아니라 일본의 대학에 진출해 일류의 학문과 기술을 습득했다. 제주의 산업도 다각화되었고, 또 형편에 따라 육지나 일본으로 나가 일거리를 찾게 된 것도 조선조 후기의 출륙금지령에 비하면 제주인의 숨통을 풀어준 일이었다.

어찌 보면 제주의 운명은 민족의 운명과 궤적을 달리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것은 전 국토의 98%를 점하는 육지부(및 연안도서)와 기본조건이 다르다는 데서 오는 섬의 운명이다. 중앙집권적 농업국가는 전국을 획일적으로 다루려는 경향을 가진다. 대부분의 국토와 다른 조건을 가진 섬 지역은 다르다는 데서 오는 유리한 점은 묵살당하고 불리한 점만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앙의 국가가 세계제국을 지향하는 외부 세력에게 유린당할 때에야 비로소 요충지로서 그 유리한 점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해방 후의 역사를 봐도 대한민국의 폐쇄성이 심하던 시절에는 제주가 극심한 고통과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개방성이 늘어남에 따라 제주의 위상도 향상되어 왔다. 관광과 감귤 등 육지부와 다른 특징이 좋은 대접을 받게 되고 일본에 진출한 제주인들과의 유대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IMF사태를 맞아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떨어지는 상황은 지방자치 발전의 기회를 제기하고 있거니와, 그 의미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제주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다.

제주는 민족과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독자적 발전의 길을 찾아갈 여지가 있으며, 그것이 또한 민족과 국가에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신없이 닥쳐오는 세계화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풀뿌리민주주의와 풀뿌리자본주의의 실험장으로 가장 적합한 곳이 제주이기 때문이다. 민족의 과제인 통일을 위해서도 제주의 주체성 성장은 통일에의 접근로를 다변화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라일보> 1998. 1. 20)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일부이고 제주도민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이 엄연한 현실 앞에서 제주도 역사의 궤적 중 육지에 중심을 둔 국가의 역사와 어긋나는 점을 짚어내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국가와 국민을 분열시키는 범죄가 될까?

나는 우리 민족사의 가장 중요한 원리를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본다. 서로 다름을 용납하면서 어울리는 것, 어느 사회에서나 중요한 원리이지만, 한민족은 이 원리를 특히 잘 체현함으로써 오랫동안 남다른 평화와 번영을 누려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원리도 100퍼센트 완벽한 실현은 있을 수 없다. 서로 다름을 용납하지 못해 불필요한 고통을 겪은 일은 우리 역사에도 곳곳에 있었고, 지금 현실 속에도 있다. 원리의 실현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현을 가로막는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부단히 반성하며 극복의 길을 찾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화이부동의 원리가 특히 중요한 상황에 우리 민족은 처해 있다. 남북한 주민은 수십 년간 서로 다른 상황 속에 살아오며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길들여져 왔다. 통일은커녕 교류 확대만 되더라도 이 이질감이 어떤 문제들을 일으킬지, 탈북정착민(새터민)의 적응 문제에서 나타나고 있다. 민족사의 발전을 위해서는 화이부동 원리의 강화가 필요하다.

역사 속에서 화이부동 원리의 실패가 가장 컸던 사례의 하나가 제주도의 경험이다. 육지와 다르다는 조건 때문에 제주도민은 많은 고통을 겪어왔다. 먼 옛날 일만이 아니다. 1948년 정부 수립 때 제헌국회에 빈자리가 둘 있었다. 제주에서 뽑아 보낼 세 자리 중 둘을 치안상태 때문에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제주도에서는 다른 지방에 비해 여당도 야당도 아닌 무소속 국회의원이 많이 선출되었다. "여당도 야당도 제주도에서는 괸당(친척) 앞에 힘을 못 쓴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1948년 발발한 4.3사건의 본질은 미군정과 대한민국의 악랄한 폭력사건이었다. 1980년대 후반 군사독재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진상규명 작업이 <제민일보> 취재팀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미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도 제주도민을 이유 없이 적대시하며 부당한 폭력을 행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그 책임을 인정하고 2003년 10월 대통령이 사과함으로써 50여 년 만에 겨우 매듭지어졌다.

그런데 4.3사건은 제주도민이 역사를 통해 반도국가로부터 당해 온 차별과 억압의 한 사례일 뿐이다. 1272~1274년의 목호(牧胡)의 난은 자료 부족으로 정확한 실상을 밝히기 어렵지만, 4.3사건보다 더 참혹한 도민 탄압이었을 것 같다. 이 난 진압에 최영을 필두로 2만5000명의 대군이 동원되었다. 당시 섬 인구를 5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면, 공식 기록처럼 일부 친원(親元) 세력의 반란으로 보기 힘들다. 전 주민의 항쟁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처럼 격렬한 상황은 아니라도 장기간에 걸친 철저한 억압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1629년부터 200여 년간 시행된 출륙(出陸)금지령이다. 금지령이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도민들이 섬을 떠나고 싶어 하던 열악한 상황을 말해준다. 제주도는 조선시대에 가장 엄중한 죄인들의 유배지로 활용되었거니와, 출륙금지령은 전 도민을 죄수로 감금한 셈이다.

제주에서 지낼 때 어느 단체에도 가입한 일이 없지만 몇몇 시민단체 간부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시민운동 의논하는 자리에 무심코 끼어 앉아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어느 해 4.3 기념행사 준비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한 친구가 새로운 의견을 낸 일이 있다. 4.3 기념행사에서 미국 비판에 치우쳐 왔는데, 다른 지역 시민운동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일본 비판에도 비중을 좀 두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었다.

나는 반대했다. '식민지근대화론'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다른 곳에 비해 근대화론이 꽤 타당성을 가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식민지시대 일본인의 억압은 종래 조선 정부의 억압보다 더 심한 것이 아니었고, 일본 지배를 통해 제주도가 큰 발전의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1901년 이재수의 난 때 이재수 세력이 일본인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실도 그런 측면을 보여준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이 여러 면에서 현실적 어려움을 가져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때 이 어려움이 특히 큰 곳이 제주도였다. 식량 자급률이 원래 낮은 지역에 귀환에 따른 인구 증가가 40%에 육박했다. 4.3사건의 중요한 배경조건의 하나였다.

제주 역사의 기존 서술에서 섬과 반도국가 사이의 갈등 측면이 은폐-축소되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가 입장에서는 민족국가의 정합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도민 입장에서는 '반역의 섬'이라는 누명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로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국가폭력의 위협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1987년 대한민국이 폭력국가의 성격을 벗어나는 것을 계기로 4.3사건의 진상규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06년 특별자치도 위상 획득은 그 부산물의 하나다. 갈등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밝혀내는 것이 부당한 폭력의 위협 대신 현실조건에 합당한 대우를 가져오는 시대에 이 나라는 들어선 것이다.

지난 3년간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1948년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에는 정통성이 매우 취약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정통성은 60여 년의 기간을 통해 점진적으로 확충되어, 이제 남부끄럽지 않은 수준에 올라와 있다. 2003년 제주도민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가 정통성 향상의 중요한 한 단계였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인정하는 것이 개인의 인격 확립을 위해 중요한 일 아닌가. 한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안팎으로 많은 갈등을 품고 있는 국가다. 1987년을 계기로 갈등의 수준이 크게 완화되었지만 여러 방면의 갈등이 아직도 심각한 수준으로 남아 있고, 근년에는 갈등 해소보다 격화를 향한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목전에 놓여 있는 민족문제 해결의 과제를 위해 갈등 수준의 또 한 차례 대폭 완화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 시점에서 연일 전해지고 있는 갈등 격화의 소식이 해밑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어두운 마음 한구석을 밝혀주는 한 줄기 빛이 지난 20여 년간 제주의 경험이다. <제민일보> 4.3취재팀, 폭력국가의 그림자가 아직 가시지 않고 있던 작업 초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낸 덕분에 참혹한 갈등을 극복해내는 소중한 경험을 이 나라에 가져왔다. 고마운 일이다.

지역 간 갈등, 계층 간 갈등, 세대 간 갈등, 그리고 앞으로 더 크게 닥칠 남북한 주민 간 갈등, 많은 갈등을 우리 사회는 품고 있다. 갈등의 정직한 인식이 그 극복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제주의 경험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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