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의 장 (2) : interlude (2)>
필경사들의 밤
"어떤 이의 영광 또는 장점은 글을 잘 쓰는 데 있다. 어떤 이의 영광 또는 장점은 글을 쓰지 않는 데 있다." - 장 드 라 브뤼예르
1.
"내가 담배와 술을, 그래, 술과 담배를 끊는다면, 난 책 한 권쯤 쓸 수 있을 거야. 여러 권도 쓸 수 있겠지만 어쩌면 단 한 권이 될 거야. 난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나.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 타인의 증거>(용경식 옮김, 까치 펴냄) 133쪽)
2.
3.
문득, 언젠가 딸을 낳는다면 이름을 연주라고 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금연주. 만약 쌍둥이라면 금연과 금주라고 불러야지.
4.
하지만 빅토르 씨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그는 가게를 정리하고 누나의 시골집으로 들어간다. 누나가 빨래며 식사를 마련해주고 살림을 떠맡아주는 곳에서 균형 잡히고 건강한 생활을 하며 책을 쓰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책을 쓰지 못한다. 동생이 위대한 작가가 되기만을 기다리는 누나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베껴놓을 뿐이었다. 무의미한 필경에 지칠 때면 산책을 나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그는 무엇도 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와 다시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베끼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더 많이 마셨고, 점점 더 많이 피웠다. 그리고 계속해서 베꼈다. 원고 아닌 원고가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일 때까지 그는 그 일을 반복했다.
5.
그것이 지난 몇 년간 내가 해온 일이다.
6.
- 베끼다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 누난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 200페이지는 다른 책들 속에 있는 걸 베낀 거라구. 내가 창작한 것은 단 한 줄도 없어.
누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한참 동안.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난 널 못 믿겠다. 넌 취했어. 되지도 않는 소릴 지껄이고 있어. 넌 왜 그런 짓을 했지?
내가 비웃었다.
- 내가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그랬지. 하지만 나는 여기서는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었어. 누난 나를 방해하고, 끊임없이 나를 감시하고, 글을 쓸 수 없게 만들었어. 누나 때문에 글을 쓸 수가 없었다고. 누나가 모든 걸 다 망쳐놓고 타락시키고, 창의력, 생명력, 자유, 영감을 말살시켰어. 어린 시절부터, 누나는 나를 감시하고 통제하면서 나를 못 살게 굴었어, 어려서부터!
누나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천장을 보기도 하다가 낡은 양탄자를 내려다보기도 하다가, 잔소리를 시작했다. (186쪽)
7.
엔리케 빌라-마따스는 그것을 ‘바틀비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나는 문학계에 존재하는 바틀비 증후군의 다양한 예를 이미 오래전부터 추적하고 있으며, 현대문학의 병, 즉 문학 특유의 해악에 관해서도 오래전부터 연구하고 있다. 일부 작가들이 대단한 문학 의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정확히 말해 그런 문학 의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글쓰기를 하지 못하거나, 책 한두 권을 쓰게 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글쓰기를 포기하거나, 작품 한 편을 아무 문제없이 쓰기 시작해 어느 정도 진척시킨 뒤, 어느 날, 문학적으로 영원히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되는 부정적인 충동 또는 무에 대한 이끌림에 관해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엔리케 빌라‐마따스, <바틀비와 바틀비들>(조구호 옮김, 소담출판사 펴냄) 11쪽)
8.
빅토르 씨의 생각과는 달리 금연과 금주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빅토르 씨가 책을 쓰지 못하는 건 현대문학의 병, 즉 문학 특유의 해악 때문이다. 그러니 술과 담배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이지 그건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9.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될 만큼 인생이 좋은 적은 한 번도 없다!"
-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누군가
10.
다시, 엔리께 빌라-마따스의 말.
우리는 모두 바틀비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깊은 거부감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허먼 멜빌의 소설에 등장하는 필경사, 뭔가를 읽는 모습을, 심지어는 신문 한 장 읽는 모습도 보여준 적이 없는 바틀비의 이름으로 불린다. 바틀비는 어느 병풍에 가려진 어슴푸레한 유리창을 통해 오랫동안 밖을, 월스트리트의 어느 벽돌담 쪽을 내다보고 서 있다. 바틀비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맥주는커녕 차도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사무실에 기거하며 심지어는 일요일까지도 사무실에서 지내기 때문에 사무실 외에는 그 어느 곳에도 가본 적이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이 세상에 가족은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누군가 그에게 어디서 태어났냐고 물을 때에도, 일을 맡길 때에도, 그 자신에 관해 뭔가를 말해달라고 요청할 때에도 그는 늘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10쪽)
11.
세상의 모든 요청을 거절하는 것 — 그것이 바로 바틀비가 하는 일이다. 누구든 청탁을 해주기를 기다리는 것 — 그것은 프리랜서가, 그러니까 바로 내가 하는 일이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인 동시에 밥벌이의 문제다.
빅토르 씨에게 필경, 즉 베껴 쓰기는 ‘실존’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선택한 미봉책이었다.
12.
이까기 이까끼예비치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행복한 필경사였다. 그는 단지 새 외투가 필요했을 뿐이다.
13.
그러니 이쯤에서 고백해야겠다. 나는 지금 곤경에 빠졌다. 마감을 코앞에 둔 이 원고를 어떻게 써야할지, 과연 쓸 수는 있을지, 아니 써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14.
빅토르 씨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곤경을 빠져나왔다. 그는 페테르에게 필기도구들을 규칙적으로 보내달라며 이렇게 말한다. "종이, 연필, 내가 필요한 건 그것뿐이야. 난 마침내 나의 책을 쓸 수 있게 됐어."
- 그래요, 빅토르 씨는 책을 한 권 쓰고 싶어 했어요. 그는 내게 서점을 팔 때 그 얘기를 했지요. 그래서 서점을 판 거구요.
- 그랬군, 그는 벌써 글을 쓰기 시작했어, 그의 책을.
페테르가 손가방에서 타자기로 친 종이뭉치를 꺼냈다.
- 나는 기차 안에서 읽어봤지. 집에 가져가서 읽어보고 내게 다시 돌려주게. 그는 누나의 시체 옆에서 그걸 썼다는 거야. 그는 누나를 목 졸라 죽이고 글을 쓰기 위해서 그의 책상 앞에 앉았어. 그런 상태로 사람들 눈에 발견된 거야. 그러니까 빅토르의 방에서 누나는 목 졸린 채로 침대에 누워 있고, 빅토르는 브랜디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더라는 거야. 그 이튿날 그의 누나의 고객들이 경찰에 신고했다네. 그 사건이 일어난 날, 빅토르는 집을 나온 뒤, 은행에서 돈을 찾았고, 브랜디와 담배를 사러 갔어. 그날 가봉을 하기로 약속한 손님들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는 누나가 더위를 먹어서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그들에게 말했다는 거야. 새옷을 빨리 입어보고 싶은 손님들은 그 다음날 다시 와서 문을 두드리다가, 서로들 의논 끝에 뭔가 심상치 않다는 판단 아래, 경찰에 신고한 거야. 경찰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빅토르는 만취된 상태에서, 조용히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었다는군. 그는 이미 활자로 가득 채워진 종이들을 가지고 순순히 끌려갔대. 그걸 읽어봐. 결점 투성이이면서도, 잘 읽히고 재미있더라고.
루카스는 빅토르의 원고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밤새도록 그의 노트에 옮겨 적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 타인의 증거> 173쪽)
15.
내게 누나가 있었다면 나는 그녀를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16.
"나쁜 책은 정신을 파괴하는 지적인 독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각기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최고의 책을 읽는 대신에 최신간만을 읽고, 작가는 유행하는 각종 관념의 좁은 범주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독자는 자기 자신의 수렁에 갈수록 깊이 빠져든다."
- 소크라테스
17.
하지만 읽지 않으면 쓸 수 없다. 그게 내가 하는 일이다. 마감 시간은 이미 지났고, 여전히 신년 계획을 찾지 못한 나는 하릴없이 책을 펼친다. 이 난삽한 필경을 마무리할 수 있는 멋진 필경거리를 찾기 위해. 그리고 찾는다. 나는 언제나 찾는다.
18.
"카네티는 그의 저술에서 20세기 최고의 작가 카프카가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처음 피를 토한 날 이후로 그 무엇도 자신과 글쓰기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글쓰기와 떨어질 수 없다는 말로 난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나는 카프카가 여행과 섹스, 책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길이며, 그럼에도 뭔가를 찾아서 그 길에 들어서고 길을 잃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뭔가가 책이든, 몸짓이든, 잃어버린 무엇이든,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그 어떤 것이 됐든, 그걸 찾아서 말입니다. 운이 따르면 늘 거기에 있었던 것, 바로 새로운 것을 찾을지도 모르지요." (‘문학+병=병’, 로베르토 볼라뇨, <참을 수 없는 가우초>(이경민 옮김, 열린책들 펴냄)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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