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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성 질환, 언제까지 '괴질'로 방치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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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환경성 질환, 언제까지 '괴질'로 방치할 건가 [끝나지 않은 고통, 가습기 살균제 비극]<16> 가습기살균제 재앙, 뒤늦은 원인 규명
환자와 가족,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의 실력을 지닌 일류 대학병원 의료진에게조차 괴질처럼 여겨졌던 의문의 간질성 폐질환의 원인이 2011년 8월 31일 마침내 밝혀졌을 때 기쁨과 탄식이 엇갈렸다. 정부와 의사들은 괴질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로 밝혀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됐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좀 더 일찍 밝혀냈더라면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며 또 다른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석면 질환의 일종인 석면폐증은 1900년대 초반부터 환자가 속출했지만 그 원인은 1930년대가 되어서야 밝혀졌다. 석면으로 인한 폐암과 악성중피종도 1930년대부터 환자와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많은 희생자가 생긴 뒤 1960년대가 되어서야 그 원인이 석면임이 드러났다. 일본의 대표적인 공해병(환경병)인 카드뮴 중독에 의한 이타이이타이병과 유기수은 중독증인 미나마타병도 오랜 기간 괴질로 불리며 주민들과 일본열도를 공포에 떨게 하다가 10~20년이 지나서야 그 실체를 밝혀냈다.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라는 사실도 적어도 수세기가 지난 뒤에야 드러나지 않았는가.

20세기 말 전 지구를 강타하고 아직도 아프리카 등지에서 공포의 감염병으로 자리 잡고 있는 에이즈의 경우도 1960년대 중반부터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감염학자, 미생물학자, 의사 등 아무도 그 원인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괴이쩍게 숨져간 사람들의 혈청을 병원에 보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그리고 삽시간에 전 세계 곳곳에서 동성애자들과 수혈자, 마약주사 사용자, 혈액제제 사용자 등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면역결핍 증상으로 속속 희생되자 본격적인 원인 밝히기, 즉 역학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2년이 지나서야 겨우 새로운 바이러스 질환임을 밝혀낼 수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비롯해 전 세계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인 암의 경우도 아직도 그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위암의 원인으로는 오랫동안 짜게 먹는 식습관을, 자궁경부암은 이른 성경험과 불결 등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으나 최근 그 원인은 위암의 경우 세균, 자궁경부암의 경우 바이러스가 주요 원인으로 드러났다. 일부 백혈병과 간암 등의 주요 원인이 바이러스라는 사실을 인간이 밝혀낸 것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감염병, 직업병, 환경병의 이러한 역사를 살펴보면 공통적인 것은 많은 희생자가 집단으로 드러나야만 의사나 역학자, 정부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또 환자 발생 초기에 그것이 새로운 질환이며 그 질환이 앞으로 심각한 피해를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서울 종로구 온실가스정보센터에서 윤성규 환경부 장관과 가진 간담회에서 자신의 피해 이야기를 말하며 눈물을 닦고 있다. (2013년 12월 17일) ⓒ연합뉴스

가습기살균제 재앙, 질병의 오랜 역사 그대로 답습

이런 질병의 오랜 역사를 살펴볼 때 가습기 살균제 재앙도 이들과 같은 길을 걸었다고 보면 된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 들어와서도 과거와는 질병 발생과 원인 규명 사이의 기간 차이, 즉 그 기간이 짧아지기는 했지만 새로운 질병이 인간 사회에 등장할 때는 늘 재앙 또는 비극의 원인을 좀 더 일찍 밝혀낼 수는 없었느냐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해 한여름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가족이 생명을 잃었거나 중증환자가 되어 아직도 육체적·정신적·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전국 곳곳의 가정을 방문해 가습기 살균제 사용실태 환경조사를 벌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아쉬움을 나타냈다.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 피해를 입은 가정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2000년대 초반부터 나오기 시작했고 중반 이후는 해마다 상당수의 사람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피해자들은 살균제 제조·판매 회사에 대해 울분을 터트리는 것은 물론이고 의료진과 정부에 대해서도 때론 강한 분노를, 때론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과연 2011년 질병관리본부가 그 원인을 밝혀내기 전에는 가습기 살균제 비극의 범인을 잡아내기 어려웠는가? 잘라 말한다면 '아니오'다. 하지만 의학자와 역학전문가는 더 일찍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질병의 특성상 좀 더 일찍 밝혀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일부에서는 2011년에 밝혀낸 것도 상당한 운이 뒤따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지적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환자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산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어느 특정요인을 의심해 역학조사를 벌여 그 원인을 밝혀내기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6년과 2009년 등 2000년대 중반부터 봄철이면 어린이와 산모들이 원인 모를 간질성 폐질환에 걸려 병원에 응급환자로 왔지만 환경성 요인을 의심해 정부의 역학조사를 벌일 정도는 아니었다.

병원들은 감염병예방·관리법에 따라 1·2·3·4·5군 감염병(옛 전염병)과 지정감염병, 세계보건기구 감시대상 감염병, 생물테러감염병, 성매개감염병, 인수(人獸)공통감염병 및 의료관련감염병 한자나 사망자의 경우 즉시 또는 정기적으로 방역당국에 의무적으로 보고하게 돼있지만 폐렴이나 기관지염, 간질성 폐렴 등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물론 호흡기 또는 사람 간 전파가 가능한 감염병이고 사망률이 높은 신종 감염병이 의심될 경우 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하지만 이 가습기 살균제 질환은 사람 간 전파가 의심되지 않았다.

교수가 정부에 역학조사 의뢰

2011년 3월 서울중앙아산병원에는 2009년과 2010년 때처럼 어린아이들과 산모들이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여러 명이 응급으로 입원했으나 대부분 숨져갔다. 호흡기 내과 고윤석 교수는 과거 많이 경험했던 폐렴이나 간질성 폐렴과는 많이 다른 이 질병의 증상과 예후에 베테랑 의사로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답답했다. 특히 환자들이 죽어가는 모습은 그를 힘들게 했다. 그는 더 이상 병원에서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하루빨리 정부 당국에 알려 그 원인을 확실하게 밝혀내야만 새로운 희생자를 만들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4월 질병관리본부에 이 질병의 심각성을 알리며 역학조사를 의뢰했다.

병원 임상의사인 고 교수가 정부에 역학조사를 의뢰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대개 언론의 보도 등에 따라 역학조사가 이루어진다.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의 레지오넬라 집단발병도 그러했고 농촌괴질로 맹위를 떨치다 10여 년이 지난 뒤 원인이 드러난 렙토스피라증도 그렇다. 이에 대해 역학전문가인 성균관대 의대 사회의학교실 정해관 교수는 이렇게 평가한다.

"민간병원의 의사가 정부에 역학조사를 의뢰한 것은 지금까지 거의 볼 수 없었던 일입니다. 아마 제 기억으로는 처음이 아닌가 싶네요. 만약 당시 고 교수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그래서 2011년에 이 질병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더라면 2012년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피해자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왜 원인 규명이 일찍 이루어지지 않았느냐는 비판과 아쉬움도 물론 있겠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고 교수의 의뢰로 질병관리본부는 바빠졌다. 5월초 중앙역학조사반을 꾸렸고 민관합동의 감염병관리위원회가 즉각 소집됐다. 감염병관리위원회에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권위 있는 감염학·역학 또는 미생물학 전공 교수와 임상의사들이 참여한다. 이들은 그동안 대학병원에서 돌본 환자들의 임상양상과 질병관리본부가 확보하고 있던 바이러스·세균 균주를 가지고 실험한 결과를 검토했다. 그리고 감염병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제 의심의 화살은 환경요인에 돌아갔다.

환경성질환의 조사는 질병관리본부 즉 보건복지부의 소관사항은 아니다. 질병관리본부 일부 실무자들은 환경성 질환 조사는 자신들의 영역이 아니므로 환경부로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이종구 당시 질병관리본부장(현 서울대병원 대외정책실장)은 기왕 시작한 것이고 어차피 정부가 해야 할 일이므로 원인을 밝혀낼 때까지 질병관리본부가 해야 한다고 밀고 나갔다.

사실 환경성 질환을 규명하는 등 환경부의 환경보건 관리행정의 역사는 매우 일천하다. 행정조직도 2009년에서야 본격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2009년부터 옛 석면광산 주변 주민들의 석면폐증과 석면암 조사와 시멘트 공장 주변 주민에 대한 진폐증, 만성 폐쇄성 폐질환 등의 건강조사 등을 한 것이 고작이었다. 이들 환경성 질환 조사는 석면섬유와 시멘트먼지처럼 누구나 다 아는 확실한 발병인자가 있었기 때문에 병의 원인을 캐기보다는 환자의 규모와 실태를 파악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또 환경부는 병원과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맺어온 보건복지부와 달리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일들과 환자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더 일찍 밝혀낼 수 없었는가?"

질병관리본부는 폐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 모든 환경요인을 용의 선상에 올려놓고 하나씩 검토해나가기 시작했다. 새집에서 뿜어져 나올 수 있는 폼알데하이드를 포함한 새집증후군을 일으킬 수 있는, 실내 환경오염 유발 화학물질과 곰팡이, 비둘기 똥, 각종 화학물질이 들어가 있는 세제와 표백제, 염색약 등 생활환경용품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황사까지도 검토했다. 하지만 이들에서 아무런 혐의점을 찾지 못해 차례로 용의선상에서 빠졌다.

그리고 마침내 가습기 살균제를 마지막 용의자로 올렸다. 역학조사반에 살균제가 의심스럽다고 가장 먼저 이야기한 사람은 누구인지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11년 봄에 살균제 성분을 조사해달라고 한 환자 가족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런 환자들의 주장을 중앙아산병원 의료진이 받아들여 핵심 용의자로 꼽았을 가능성이 있다.

여러 환경성 요인 가운데 가습기 살균제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떠오른 뒤 생체 외(in vitro) 세포실험과 생쥐를 대상으로 한 생체 내(in vivo) 동물실험을 통해 살균제가 원인미상 폐질환의 범인으로 사실상 확정됐다. 그리고 사망자가 있거나 중질환에 걸린 가족 사례를 중심으로 역학조사를 벌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문제가 된 구아니딘 계열의 고분자화학물질이 원료로 들어간 가습기 살균제를 가습기에 넣어 장기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마침내 연쇄살인마의 모습이 드러났다.

세계에서 처음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인한 집단사망 사건. 그것은 분명 환자나 그 가족, 그리고 우리 국민 모두 떠올리기 싫은, 우리 질병의 역사와 환경보건 역사에서 정말 부끄러운 사건이다. 하지만 한편으로서는 그래도 이만큼이나 일찍 병의 원인을 밝혀내 더 이상의 피해를 막은 것 또한 매우 보기 드물기 때문에 우리 역학의 역사에서는 쾌거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늘 아쉬움은 남는다. 또 "더 일찍 밝혀낼 수는 없었는가?"라는 물음에 반성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재앙을 막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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