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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는 비디치를 보내도, 나는 이 책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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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는 비디치를 보내도, 나는 이 책을 품는다 [이명현의 '사이홀릭'] 수전 그린필드의 <브레인 스토리>
몇 달 전쯤의 일이었다. 아들 녀석이 갑자기 뇌과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들 녀석은 원래 미국의 한 대학교의 심리학과에 입학했었다. 범죄학으로 전공을 바꾸려고 다른 대학교의 예비학교에서 과목을 이수하던 중 휴학을 하고 군복무 중이다. 장래 희망이 그때그때 변하고 있는 중3 딸아이도(현재 시점에서 그녀의 장래 희망은 '백수'다. 아빠가 돈을 많이 갖고 있는지 그걸 자기와 평생 나눌 수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온 적도 있다.) 얼마 전에 뇌과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이라는 상황이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어서 의사가 되었다는 후일담을 흔히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두 아이가 모두 비슷한 시기에 뇌과학에 대한 관심을 보인 것은, 뇌과학이 21세기 과학의 화두 중의 화두로 떠올라 있는 환경에서 비롯된 우연이라는 데 좀 더 무게를 두고 싶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 금성과 아폴로11호에 매혹되어서 천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내가 21세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면 분명 뇌과학에 훨씬 더 자주 노출이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우연이 숙명을 만든다. 나는 뇌과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의 흔들림이 찾아온 아이들에게 뇌과학 공부로 나아가는 길이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일러주었다. 내 좁은 소견일 수도 있지만 뇌과학을 연구하는 지인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를 정리해서 전달한 것이기도 하다. 첫째, 뇌는 생물학적인 존재이니 당연히 그 출발점에 생물학이 있을 것이다. 둘째, 뇌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보고 연구하기에는 물리학이 적합하다. 실제로 복잡계 이론을 뇌의 연구에 도입해서 흥미로운 결과들을 많이 얻고 있다. 셋째, 인간의 뇌를 직접 다루는 것이 궁극적인 관심사라면 의사의 길로 들어서서 뇌과학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생물학이든 물리학이든 의학이든 뇌과학 공부를 위한 출발점은 심리학이 아니라 기초과학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덧붙여서 아들 녀석에게 수전 그린필드가 지은 <브레인 스토리>(정병선 옮김, 김종성 감수, 지호 펴냄)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아직 어린 딸아이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책 대신 청소년들이 볼만한 책을 급히 수소문해서 권했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지금, 1990년대가 '뇌의 10년'으로 불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랍기 그지없다. 우리 인체 가운데서 가장 매혹적인 기관의 거대한 신비가 그 10년 안에 다 풀릴 것처럼 보였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렇게 근시안적인 견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지난 세기를 통해 뇌 전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크게 진보했으며, 우리는 뇌가 기본적인 수준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지만, 뇌 연구자들은 이제 기본적인 개념의 상당 부분을 잘 알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에게 있어 앞으로의 과제는 이미 자리 잡은 이론적 틀을 고수하면서 간극을 메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그 모험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 <브레인 스토리 : 뇌는 어떻게 감정과 의식을 만들어낼까?>(수전 그린필드 지음, 정병선 옮김, 김종성 감수, 지호 펴냄). ⓒ지호
<브레인 스토리>는 원래 BBC 다큐멘터리 6부작으로 먼저 만들어졌는데 그 내용에 보강을 해서 책으로 나온 것이다. 다큐멘터리와 책이 나온 때가 2000년이니 <브레인 스토리>는 20세기의 뇌과학의 성과를 담은, 조금은 낡은 책이다. 21세기를 뇌과학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로 뇌과학의 새로운 성과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위에 인용한 수전 그린필드의 서문에서 '1900년대'를 '2000년대'로 바꿔도 그 문장이 그대로 유효하게 보이는 것처럼 뇌과학의 발전은 21세기에도 현재형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브레인 스토리>는 오래된 책이지만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는 몇 권 되지 않는 훌륭한 뇌과학 책이다.

제대로 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감정이나 의식이나 마음 따위가 뇌의 산물이라는 보편적 결론에 대해서 동의할 것이다. <브레인 스토리>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주제가 바로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뇌는 어떻게 감정과 의식을 만들어냈을까?'이다. 이런 보편적인 주제를 독자적인 관점과 서술로 이어갈 수 있는 힘이 <브레인 스토리>에 있는 것 같다. 바로 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는 대상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뇌병변 환자들의 임상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지만 뇌가 물리적 변화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통해서 뇌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

"이 책은 입문서와 전문적인 연구서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책이다. 이것은 마음에 관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동시에 과학에 기초한 견해이다. 바로 여러분의 뇌 이야기다."

<브레인 스토리>가 오래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낯설지 않고 고루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책이 입문서이지만 꼭 필요한 전문적인 내용들을 비켜가지 않고 적절하게 다루었다는 점이다. 결론만이 아닌 과정의 과학성이 풍부한 책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가 먼저 나왔었다는 것도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요즘 들어서 책을 읽는다는 것, 특히 대중과학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자주 생각해 보게 된다. 책보다 더 책 같은 다큐멘터리가 많다.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키우는 것은 책읽기의 오랜 장점이자 매력이다. 하지만 과학의 경이로움을 느끼기에는 실제 영상과 애니메이션으로 무장한 다큐멘터리가 훨씬 더 큰 기능을 하는 것 같다. 상황이 이런데도 고전적인 책읽기만을 고집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있다. 나는 <브레인 스토리>를 다른 사람에게 권할 때면 늘 다큐멘터리와 함께 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것까지 포괄해야 온전한 대중과학책 독서가 된다는 생각에서다.

▲ 다큐멘터리 <브레인 스토리>의 한 장면

청년 시절을 보냈던 네덜란드에서 나는 많은 문화적인 충격과 각성을 겪었었다. TV 방송 내용도 내가 처음 부딪혔던 문화적 충격 중 한 부분이었다. 생생한 성기와 체모 노출은 기본이고 섹스 장면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금기라는 것이 최소화되어 있는 열린 문화는 충격이었지만 신선한 바람으로 다가왔다. 한번은 뇌수술 장면을 생중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환자의 얼굴 가죽을 통째로 벗겨서 고정시켜놓고 뇌수술을 하는 장면이었다. 여러 시간을 해설과 함께 생중계 했다. 나는 늘 물질적인 뇌로부터 마음이나 정신이 비롯된다는 너무나 보편적인 결론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날 그 뇌수술 장면을 보면서 처음으로 강렬하게 물질적인 뇌의 실체에 대한 각성을 하는 경험을 했었다. <브레인 스토리> 책 속에서는 뇌병변 환자들의 임상적인 결과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6부작으로 방영된 다큐멘터리 <브레인 스토리>의 영상의 생생함은 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칫 오래된 낡은 뇌과학이 될 수도 있었을 <브레인 스토리>가 여전히 설득력 있는 책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런 현장의 감흥이 이 책 속에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학생들과 함께 대중과학책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을 십년이 넘도록 이끌었었다. 열 권 남짓 읽어야 할 책을 정해주는데 뇌과학을 대표하는 책으로 주로 <브레인 스토리>를 내세웠었다. 뇌과학 책들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당연히 내용면에서나 시의성면에서나 <브레인 스토리> 보다 훌륭한 책들도 많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브레인 스토리>를 축구의 주전 수비수처럼 계속 기용하고 있다. <브레인 스토리>를 생각하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비수로 그 구단의 영광의 시절을 같이했던 비디치나 퍼디낸드 같은 선수들 생각이 난다. 오랜 시간 팀의 기둥 역할을 해왔던 베테랑들이다. 그들의 스피드는 세월과 함께 약해졌고 몸싸움에서도 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최근까지도 여전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수비 전술의 핵심이었다. 드디어 비디치의 이적이 확정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퍼디낸드는 주전 수비수에서 밀린지 오래됐다. 그들의 시대가 가고 있다. <브레인 스토리>도 내 수업 책 목록에서 든든한 수비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좋은 책으로 교체되기를 기다리는 운명도 함께 갖고 있다. 아직은 <브레인 스토리>를 온전히 대체할만한 책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당분간 이 책은 주전 수비수로서 내 과학책 읽기 팀의 기둥으로 버티고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수업에 온 학생들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강의를 시작하곤 한다.

(1) 이 책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가 자신의 자유의지라고 확신할 수 있는 생물학적 또는 논리적 근거가 있는가?
(2) 그렇다면, 사랑이란?
(3) 오늘의 토론 주제 한 가지를 제안하라. 제안 이유는?

우리가 인간인 한 뇌과학 연구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 될 것이다. 그 중심에 자유의지가 자리하고 있다. <브레인 스토리>는 자유의지에 관한 임상보고서이기도 하다.

"인류의 뇌는 그 모든 상상을 뛰어넘어 우리의 생활을 몰라보게 바꾸고 있다. 우리는 개성과 인간성의 다양함이 구가되는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환경과 양육의 조건 모두가 획일화·표준화된 생지옥으로 자신을 내몰 수 있는 것도 우리다. 우리의 뇌인 것이다. 자유의지가 뉴런의 교묘한 속임수일지라도 선택은 늘 우리의 몫이다."

수전 그린필드는 다소 감상적인 해석 투의 문장으로 <브레인 스토리>를 마감하고 있는데 나는 이것이 사족이라고 생각한다. <브레인 스토리>는 그 자체로서 훌륭한 책이고 사랑스러운 텍스트다. 비디치나 퍼디낸드 같이 듬직한 수비의 기둥이다. 은퇴조차도 아름다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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