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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가 '암 덩어리'? 자살 부추기는 사회 안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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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가 '암 덩어리'? 자살 부추기는 사회 안 보이나? [안종주의 '건강 사회'] '자살 왕국' 깨부수어야 건강 사회
세 모녀의 비극적인 자살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이 자살공화국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세계 1위의 자살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이 '자살 왕국'이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7년 말 들이닥친 아이엠에프(IMF) 구제 금융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기업과 개인들의 갑작스런 파산은 많은 사람들을 절망과 고통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다. 그 가운데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가 한둘이 아니다.
그 뒤 사회에 만연한 자살 문화는 입시와 학교 폭력, 집단 따돌림 등에 내몰린 청소년, 양극화 심화로 밥과 꿈을 잃어버린 빈곤층, 고령화 사회의 그늘에 드리운 빈곤과 고독, 중증 질환으로 삶의 의미를 잃은 노인을 자살 열차에 탑승하게 만들었다. 또 오랜 가부장 문화에 시달리다 우울증에 걸린 여성, 아직 창창한 나이에 찾아온 실직으로 가장 노릇을 하지 못한 중장년 남성, 사업 실패와 자영업 부진으로 빚에 쪼들린 사람 등도 죽음을 향해 달려갔다.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사회 병리 현상의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독재에 항거해 자살하는 정치적 자살은 세계적으로도, 또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군사 독재 시절 심심찮게 있었지만 지금은 보기 드물다. 더 이상 이룰 게 없어 죽음을 택하는 철학적 자살도 있지만 이 또한 보기 어렵다. 이에 견줘 난치병이나 불치병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제법 있다. 우울증은 대표적인 자살 원인으로 꼽힌다. 최근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세 모녀 자살 사건에서 보듯이 빈곤으로 인한 자살이다.
자살 열풍이 식지 않는 사회는 비정상
아이엠에프 이후 급증하기 시작해 한때 잠깐 주춤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자살 열풍이 식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도 가난이나 빚 때문에 자살한 사례가 있다. 빈곤 자살이 현대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그 수가 요즘 많아졌을 뿐이다.
전문가들은 자살 증가율과 실업 증가율 사이에는 대체로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 예로 우리나라 아이엠에프 국가 부도 위기 때 실업률이 급증했고 자살 증가율도 덩달아 가파르게 올라갔다는 통계를 꼽는다. 실업률을 낮출 경우, 즉 생계를 충분히 꾸려갈 수 있게 해주는 이른바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면 분명 자살을 줄이고 자살률 증가 속도를 늦추거나 멈출 수 있다.
물질적 풍요가 반드시 자살자를 적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노인들이 향수(鄕愁)처럼 생각하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박정희 시절 경제 개발이 한창일 때도 자살은 지금과 거의 엇비슷하게 엄청나게 높았던 적이 있었다. 자살 문화 연구가인 성균관대 천정환 교수가 최근에 쓴 <자살론>을 보면, 박정희 집권 초기인 1965년 우리나라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9.8명이었다. 긴급조치의 남발과 폭압 정치, 반인권, 반민주가 정치와 사회, 경제 전반을 휘몰아쳤던 1975년에는 지금과 거의 같은 31.9명이었다.
박정희 시절에도 지금처럼 높은 자살률 기록
박정희식 독재에 기반을 둔 근대화는 국민 평균 소득을 급속하게 높여놓았다.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돈의 지배를 받는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 국민 대다수가 절대 빈곤에서 탈출하고 상대적으로 물질적 풍요를 더 누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를 위해 치른 대가도 만만찮았다. 가족과 지역 공동체가 와해됐다. 개발과 돈 앞에 노동자는 한갓 공장 부품에 불과했다. 박정희 시절 국민은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높은 자살률이 이를 증명해준다.
박정희 시절의 화두는 '잘 살아보세!'였다. 마을이나 동네 집집마다 설치된 확성기에 이 노랫말이 담긴 새마을노래가 동네 어귀와 집 구석구석을 귀 따갑게 휘감고 다녔다. 돈과 개발 앞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은 내동댕이쳐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높은 자살률에 대한 특단의 대책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처럼 세워 실행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1965년과 1975년으로부터 40년, 50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제는 박근혜 대통령 시절이다.
아버지 박 대통령 시절만큼 딸 박 대통령 시대에도 자살은 심각하다. 하지만 아버지 때처럼 자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같다. 자살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디엔에이(DNA)가 아버지에서 딸로 유전되기라도 했는가(물론 이는 비유적인 말이다. 이런 디엔에이는 있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가 경제 개발 5개년에 매달렸던 것처럼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에 다 걸고 있다. 이를 위해 기업에 대한 규제를 '암 덩어리', 심지어는 '원수'라고 지칭한다. 북한이 즐겨 쓰는 격한 말까지 동원해 경제 개발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이다. 자살 예방에 목을 맸으면 좋으련만.
세 모녀 사건이 터진 뒤 박근혜 대통령은 조용히 있다가 1주일이 지나서야 국무회의를 주관하는 자리에서 "이분들이 기초수급자 신청을 했거나 관할 구청이나 주민센터에서 상황을 알았더라면 정부의 긴급 복지지원 제도를 통해 여러 지원을 받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정말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고 밝혔다.
사실 이들은 기초수급자 신청을 하더라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참모가 써준 대로 읽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 복지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 발언은 대통령이 시행되는 복지제도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정말 안타까웠다.

▲ 세 모녀가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이라는 메모와 함께 남긴 현금 봉투. ⓒ서울지방경찰청

건강사회에서는 대통령이 자살 문제에 관심 가져
박 대통령은 복지도 복지지만 자살 예방에 대한 해결책을 언급했어야 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말을 뉴스로 전해 듣고 우리 사회에서 백신도, 치료제도 없어 유행하더라도 손을 쓸 수 없는 감염병처럼 되어버린 자살의 실상에 대해 박 대통령이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단박에 들었다.
자살은 암, 심혈관질환, 뇌혈관질환에 이어 우리나라 사망 원인 4위를 기록 중이다. 자살자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대통령과 정부는 국민의 재산과 안전, 그리고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헌법에 그렇게 돼 있다. 대통령 취임식에 반드시 헌법에 선서를 하지 않는가. 따라서 대통령은 경제 개발, 규제 완화 운운만 할 것이 아니라 연간 1만5000명이 목숨을 끊고 있는 이 엄중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 대책을 이른 시일 안에 내놓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자살 방지 대책을 지시했다거나 언제까지 이를 보고토록 했다는 이야기는 언론을 통해 듣지 못했다. 대통령이 자살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보건복지부 장관이나 고용복지수석과 같은 각료나 참모들이 온 힘을 기울여 자살을 막기 위해 애쓰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과 건강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세 모녀 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을 때는 일주일씩 뜸들이지 말고 즉각 성명을 내거나 기자회견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유사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 개선과 예산 투입을 하겠노라고 국민 앞에 천명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과 소통하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그런 대통령이 있는 나라가 건강사회가 아닐까.
대통령은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이를 받들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무한질주를 하는 자살 열차를 멈춰 세울 수 있는 사회가 진정으로 건강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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