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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 산소통 매달고 일인 시위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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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 산소통 매달고 일인 시위한 까닭은… [끝나지 않은 고통, 가습기 살균제 비극<20>] 피해자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
지난해 8월 31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대회 및 추모제(이하 추모제)가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렸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2011년 질병관리본부가 원인 미상 폐손상의 위험요인이 가습기 살균제로 추정된다고 밝힌 날인 8월 31일을 추모일로 정했다.

추모제에는 전국에서 모인 피해자와 유족들이 참석했다. 피해자들의 공통점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것 외에는 그리 많지 않다. 피해자는 국내 모든 시도에 걸쳐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 거주자도 있다. 연령은 태아부터 70대까지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 제품은 20여 종으로 한 가지 제품만 사용한 가정이 있는가 하면, 네 가지 이상 사용한 가정도 있다. 가족 모두 한 방에서 노출되기도 하고 가족 중 혼자만 노출된 가정도 있다. 집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직장에서만 사용한 피해자 등 사례가 매우 다양하다. 사망, 폐 이식, 중증으로 산소호흡기를 착용한 피해자, 폐 손상, 호흡기질환, 피부질환 등 피해 유형이 다양해 피해자 모임이 조직다운 면모를 갖추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주로 피해 대책활동은 온라인 카페 'cafe.daum.net/keepus'를 통해 이루어졌다.

지역 언론 활동 하던 강찬호 씨가 피해자 모임 대표

추모제에 이은 피해자 총회에서 모임 명칭을 기존 '가습기살균제피해자모임'에서 피해 가족을 포함하는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으로 정하였다. 모임의 대표로 강찬호 씨를 선출하였다. 강 씨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이 피해자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부터 피해자모임의 대표 역할을 해왔다. 당시 정부는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보상할 법적 근거가 없다, 피해보상은 업체들을 상대로 개별소송을 진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는 입장이었다. 피해자들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에 울분을 토했다. 개별 소송은 원치 않았지만 '변호사 설명회'를 마련했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사회에서 잊혀져 간다고 판단한 피해자들은 법률사무소에 의뢰해 손해배상 소송을 하게 되었다. 강 대표는 소송에 참여하면 변호사에게 의존하게 되고 피해자 대책 활동 없이 소송 결과만을 지켜보는 상황을 우려했다. 여러 건의 손해배상 소송이 각기 다른 피해유형별, 입원했던 병원별, 제품별 등으로 진행 중이다. 강 대표는 아직까지 소송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큰 틀에서 모든 피해자들의 입장을 한 목소리로 모아 대변하는 활동을 위해 힘을 쓰고 있다.

강 대표의 아내 안세영 씨도 피해대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안 씨는 서울대병원 간호사로 근무했다. 딸이 2011년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하면서 간병을 위해 휴직을 하게 된다. 환경보건시민센터가 주관한 일인 시위에 피해자 모임도 적극 참여해 2012년 5월부터 2013년 11월까지 547일 동안 무려 222차례나 이루어졌다. 일인 시위는 주로 광화문에서 점심시간 12시부터 1시까지 한 시간 동안 광장을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피해를 알리고 정부와 가해 기업에 대책을 촉구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안 씨가 사는 곳이 광명시라서 일인 시위를 하는 광화문까지는 한 시간이 걸린다. 안 씨는 매주 화요일에 일인 시위를 했다. 딸을 유치원에 보내고 집에 오는 동안 짬짬이 시간을 내 참여했다. 보통은 정오부터 일인 시위를 하지만 안 씨는 딸을 유치원에서 데려오는 시간에 맞추기 위해 30분 먼저 와서 12시 30분까지 한 시간을 꽉 채웠다. 계절이 여섯 차례 바뀌는 동안 408일째 200회차에는 국회 정문 앞에서 일인 시위까지 했다. 지금은 휴직을 마치고 서울대 보라매병원으로 복직해 간호사 일을 다시 하고 있다.

산소 호흡기 착용한 '울트라 긍정 에너지' 신지숙 씨

2011년 봄, 원인 미상 폐 손상으로 산모들이 사망할 때 신지숙 씨도 입원해 있었다. 동네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던 신 씨는 다른 산모들처럼 임신 기간에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2011년 4월 임신 28주차 예비 엄마였다. 감기 기운과 구토증세가 있어 동네 산부인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산부인과 의사는 정상이라고 했다. 임신을 해서 피곤하고 숨이 찬 줄로만 알고 계속 버텼다. 한 달 후 기침이 더욱 심해지고 숨이 차서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전화통화를 하지 못할 만큼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다니던 동네병원에서 검진을 한 의사는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한다. 신 씨는 5월 29일 중앙대학교병원에서 임신 36주차에 강제출산을 하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깊은 잠을 잤던 것 같은데 며칠 후 구급차에 실려 아산병원으로 이송했다.

검진결과는 심각했다. 폐 이식을 해야만 살 수 있다고 했다. 2011년 6월 그녀의 가족은 폐 이식 대기자로 등록했다. 폐 이식만이 살 수 있는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폐 이식 순서가 돌아왔을 때 수술을 포기했다. 수술 후 생존기간이 불투명하다는 의사의 말 때문도 있지만 실은 감당하기 힘든 수술비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산모 중에 폐 이식을 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유일한 사람이다. 폐 이식을 하지 않고는 평생을 산소호흡장치로 생명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는 '다음 아고라 이슈 청원'에 2011년 11월 "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정부는 피해를 속이지 마십시오"라는 제목으로 그녀가 처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글을 올렸다. 글 말미에 "저는 4월 4일 4950원에 가습기당번 550mL 상품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정당한 돈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이제 정부는 책임질 부분을 책임지시기 바랍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오롯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시길 촉구합니다"라고 네티즌들에게 피해 실태를 알려 서명을 받았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을 신청하여 정부의 대국민사과와 피해자 대책을 촉구했다. 그리고 손수 피해 실태를 그림으로 그려 만든 엽서를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다. 온라인 카페에는 그녀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작성한 글이 많은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응원과 용기를 북돋워 주고 있다.

▲가습기살균제와피해자가족모임 카페에 신지숙 씨가 올린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그녀는 스스로 '울트라 긍정 에너지'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한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기침을 하다가 호흡이 잘 안 되어 20~30분간 숨넘어가는 발작을 하면서도 '울트라 긍정'이라니, 그녀가 폐 이식을 거부하고도 살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일인 시위나 기자회견 현장을 나올 때는 휠체어에 산소통을 매달고 나타난다. 외출은 거의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활동을 위한 자리가 있으면 홀로 택시를 타고 나온다. 나올 때마다 목숨을 걸고 피해자 운동을 하는 것이다. 오는 중간에 호흡이 안 돼 발작을 하면 극도의 안정을 취해야 한다. 그럼에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의 피해 사례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시급한 피해대책을 촉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녀가 강제 출산한 딸 정아는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 아기가 자랄수록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안타까워한다. 체력이 약해 아기를 챙기는 것이 벅차지만 아이를 위한 일을 할 때면 딱 그만큼 신기하게도 힘이 생긴다고 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먹을 힘도, 씻을 힘도 버거운데 말이다. 정부의 의료비 지원이 이루어지면 폐 이식을 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녀의 현재 체력으로는 수술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여서 폐 이식을 할 수 없다. 2013년 3월 카페에 올린 글에 "꿈이 생겼다. 열심히 맛있는 것 먹고, 좋은 생각으로 행복하게 지내며 체력을 정비하다가 딸이 엄마가 아파서 병원 갔다 올 테니 기다리고 있음 된다는 걸 알쯤 폐 이식 수술을 받고 싶다. 그래서 우리 세 식구 모두 건강하게 소풍 갔으면 좋겠다. 근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것일까?"라고 소망을 적었다.

지난해 피해자 총회에서 지역 대표로 일할 운영위원을 정하는 시간이 있었다. 서울 지역이 안건으로 나오자 참석자들은 주변을 살필 뿐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때 신 씨가 손을 번쩍 들어 작은 목소리로 전화연락을 하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신 씨가 서울지역 운영위원이 되었다.

신 씨가 피해자의 마음을 시로 대신해 읽었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그대는 충분히 고통 받아 왔고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에서 단 하나 두려워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대의 고통이 가치 없이 되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고통 앞에서
나는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헛된 위안을 택하겠는가
쓰라린 진실을 택하겠는가

두려워하지 마라
믿음을 잃지 마라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우정은 절망보다 강하다
희망은 패배보다 강하다

(박노해 시인의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부인을 잃은 택시기사 최주완 씨

그의 직업은 택시기사다. 아내를 2008년 가습기 살균제로 잃었다. 그에게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이 안 되었냐고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택시 일이 밤새 운전하고 새벽에나 집에 들어오니 자신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내를 원인 모를 폐질환으로 잃고 그의 가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사춘기였던 아들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도 큰 충격을 받아 입이 마르는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다. 병원, 한의원, 민간요법 등 다양한 치료를 시도했지만 입 마름 증상은 낫지 않았다. 요즘도 입이 말라 껌을 항상 씹는다고 한다. 어떤 택시 손님은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이 예의 없게 껌을 씹는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매번 구구절절 설명할 수가 없어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체력도 많이 떨어져 한 달에 열흘 정도만 일을 나간다. 생활이 넉넉한 것도 아니다. 목동에 있는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열흘 일한 대가로는 임대료에 생활비로 쓰기에도 부족하다. 그런데 피해 대책활동에는 그 열흘 중에도 어떻게든 참여하려고 한다. 일인 시위가 있는 날이면 새벽에 들어와 두세 시간 자고 나온다. 200여 회가 넘는 일인 시위에 매주 참여하려고 애를 썼다.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 살균제 39차 일인 시위를 하는 최주완 씨.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주완 씨는 방송 인터뷰에 많이 나온 유족 중 한 사람이다. 피해대책을 촉구하는 일인 시위, 기자회견, 사진전, 국회 방청, 등에 많이 참여하다 보니 방송과 언론에서 취재 요청이 자주 있다. 그럴 때마다 개인사를 이야기해야 되고 집으로까지 찾아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불편함에도 거절을 안 하고 취재에 응한다. 한 번은 방송사에 인터뷰를 하고 며칠 후 출연료를 준다는 전화가 왔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어려운 분들 도와 주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지난 13일 국회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피해조사결과 설명회'에서 참석한 피해자들에게 판정결과를 통보했다. 그런데 최 씨의 아내는 '가능성 낮음' 이라는 판정결과를 받았다. 그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피해자 운동은 갈 길이 멀다. 우선은 판정결과와 정부의 의료비 지원안에 피해자의 의견이 수렴되도록 하는 과정이 남아있고, 생존한 피해자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피해자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 이전에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았다. 가족을 잃고 건강에 심각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나서서 불합리를 바로잡는 운동에 이들 외에도 많은 분들이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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