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세월에?"
3월 14일 <한겨레> 신문에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홍세화 선생의 칼럼이 실렸다. 전체 내용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구는 "오늘날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구체적인 요인으로 꼽히는 주거, 건강, 교육·양육, 노후, 실업 문제에 하나하나 대응하기엔 '어느 세월에?’라는 물음이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는 대목이다.
그렇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지금 너무 지쳐있다. 주거불안은 말할 것도 없고, 스트레스와 과다노동으로 건강이 나빠져도 의료비 때문에 병원에 가기가 두렵고, 사교육비와 대학등록금을 대느라 노후를 준비할 여력도 없고, 좋은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여 절절매고 있는 청장년이 넘쳐나고 있다. 조금만 둘러보아도 불안하고 억울하고 고단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것이 바로 기본소득과 같은 ‘획기적인 복지’가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인 것이다.
필자 역시 홍세화 선생처럼 기본소득 찬성론자다. 하지만 필자는 기본소득을 자본주의의 부분적 치료책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다르게 표현하면 기본소득이 ‘자본주의 없는 시장경제’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롤스의 ‘재산소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없는 시장경제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도 '자본주의 없는 시장경제'를 구상했다는 점이다. 롤스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정의론에 부합하는 사회가 북유럽 복지국가가 아님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는 소유와 타고난 재능의 원초적 분배에서 발생하는 실질적 불평등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사후(事後)적인 소득 재분배에만 매달리는 복지국가 자본주의(welfare-state capitalism)는 자신의 정의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사전(事前)적으로 자산을 공평하게 분배하여 출발부터 사람들이 평등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재산소유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를 제시했다.
여기서 우리는 롤스의 정의론이 문제 삼는 것이 '시장경제'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생산수단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자본주의 하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힘의 비대칭성이 현저해지고, 이것이 바로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구조적 착취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이런 까닭에 롤스는 사후적 소득 재분배에 집중하는 복지국가는 정의롭지 않다고 보고 재산을 균등하게 소유하는 재산소유민주주의를 주창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롤스는 상속을 제한하는 다소 조심성 있는 제안을 제외하고, 자신이 제안한 재산소유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행할지 또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계급불평등을 어떻게 제거할지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재산소유민주주의의 알맹이, 즉 자본주의 없는 시장경제로 가는 길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철학, 정치학, 경제학, 심지어 심리학까지 모든 학문을 섭렵한 롤스의 이런 한계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필자는 그 원인이 롤스가 자본주의의 중요한 토대인 토지사유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토지와 일반물자를 구분하지 않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이라는 안경을 쓰고 자본주의를 분석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학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정립한 이론에 활용하는 모든 재료를 자체 조달하지 않는다. 두말할 것 없이 주변 학문에 도움을 받는다. 특히 분배정의 경우에는 그가 끼고 있는 안경, 즉 경제학이 그 내용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과도한 해석이라 할지 모르겠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토지의 중요성과 토지가 일반물자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 추이즈위안이 제창한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추이즈위안의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중국의 신좌파로 알려진 추이즈위안은 중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자유사회주의와 중국의 미래>(돌베개, 2014)에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소(小)자산계급으로 만드는 것, 즉 모든 사람이 일정한 자산을 소유할 수 있는 사회가 중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역설한다. 기존의 사민주의에 대해서도 "사민당 강령은 기존 시장경제 체제의 형식에 도전하고 이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회의 구조적 격차와 계급계층 제도로 인한 후유증을 완화시키는 데 치중한다"(24쪽)고 비판했는데, 이는 복지국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롤스의 생각과 거의 일치하는 대목이다.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구체적인 모델로 제시된 것인데,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바는 그가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토지제도'의 차이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중국 헤이룽장성 허강시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광시성 베이하이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표본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허강시에서는 해당 지역 정부가 토지투기를 금지하자 부동산시장이 이 지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에 비해 베이하이시에서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토지시장에 투기하는 방식으로) 부동산개발자와 은행이 서로 결탁했고, 그 결과 일반 민중들이 가격 폭등으로 집을 살 수 없게 되었다(30~31쪽).
추이즈위안의 구분법에 따르면 토지 불로소득을 완전히 환수하는 것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이고 금융권과 결탁된 토지투기가 주기적으로 발생해 수많은 사회경제적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인 것이다.
그런데 추이즈위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알래스카 사례를 들며 기본소득을 제안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알래스카의 석유는 전체 주민의 소유이고, 석유채굴권의 전매를 통해 얻은 수익은 모든 주민이 기본소득의 형태로 향유된다. 알래스카 주민 전체는 2008년엔 1인당 3269달러를 받았고, 2009년에는 1305달러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렇게 금액이 매년 다른 이유는 '영구기금'의 운용수익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는 "알래스카의 경험을 귀감으로 삼아서 '중국인민영구기금'을 설립하여, 공유자산 가치 증가분을 토대로 해서 사회적 분배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178쪽)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없는 시장경제로 가는 길
두말할 것 없이 여기서 말하는 '공유자산 가치 증가분'은 바로 토지가치 증가분을 가리킨다. 그는 사회가 창출한 토지가치 증가분을 공유해야 소(小)자산계급이 많이 생겨나고 더 나아가서 이 책이 소개하는 중국의 충칭 사례처럼 민간자본도 활성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추이즈위안이 말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에서 '사회주의'에 해당되는 것은 '토지가치공유'인 것이다.
그러면 토지가 이미 사유화된 한국사회에서 과연 토지가치공유가 가능할까? 가능하다! 재산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고서도 토지가치증가분만 환수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하면 토지 불평등이 초래한 힘의 불균등과 경제력의 집중도 상당히 완화될 것이고, 즉 재산소유가 보다 민주적인 모습으로 바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의 주거·교육·의료·노후·일자리 불안도 상당부분 해소될 것이다. 요컨대 한국 사회에서도 자본주의 없는 시장경제의 구현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공허해서도 안 되고, 극단적인 변화를 수반해서도 곤란하다. 또한 대안은 상식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사회 구성원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토지가치공유를 기본으로 하는 기본소득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요약하자면 토지가치공유를 바탕으로 한 기본소득 실행은 단순히 복지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롤스가 말한 재산소유민주주의로 가는 길이기도 하며, 자본주의 없는 시장경제의 방안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 극복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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