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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봐, 너도 어쩌면 '침팬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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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봐, 너도 어쩌면 '침팬지'야 [이명현의 '사이홀릭'] 제인 구달의 <인간의 그늘에서>
나는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그가 무얼 하고 있는지 보려고 했다. 그는 흰개미굴의 붉은 흙더미 곁에 쪼그리고 앉아 흙더미의 구멍 안으로 긴 풀줄기를 조심스럽게 집어놓고 있었다. 잠시 후 데이비드는 그 풀줄기를 꺼내어 끝에서부터 무언가를 훑어 먹었다. 너무 멀어 그가 무엇을 먹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실제로 풀줄기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가장 흥미로운 일은 때때로 이들이 잎이 달린 잔가지를 집어서 잎들을 떼어 내며 용도에 맞게 다듬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야생동물이 물체를 도구로 단순히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물체를 변형시켜서 사용하는 도구 <제작>의 시초를 보여주는 예로서, 기록된 것 중에는 최초의 것이었다. 이전에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도구를 제작하는 동물로 간주되어 왔다. 사실은 인간의 정의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조항 중 하나가 <도구를 규칙적이고 정해진 양식으로 만드는 동물>이다. 물론 침팬지들은 도구를 어떠한 정해진 양식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원시적 도구 제작 능력에 대한 나의 초기 관찰로 인해, 많은 과학자들은 인간의 정의가 좀 더 복합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의를 새롭게 세우는 작업이 없다면 우리는 루이스 리키의 말대로 정의에 따라 침팬지를 인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인간의 그늘에서>(제인 구달 지음, (최재천․이상임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제인 구달이 쓴 <인간의 그늘에서>(최재천․이상임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에서 뽑은 문장들이다. 여기 등장하는 루이스 리키는 '감사의 글' 글머리에, 데이비드는 끝자락에 먼저 그 이름을 올렸다.

우선 가장 고마운 분은 말할 나위 없이 리키 박사님이다. 내게 처음으로 침팬지를 연구해 보라고 제안하셨고, 나의 초창기 연구에 필요한 연구비를 마련해주었으며, 내 연구 결과를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다.

루스는 내가 침팬지들에게 고마워하며 이 감사의 글을 마치기를 원한다고 믿는다. 우리들 자신에 대해 너무나 많은 걸 가르쳐 주는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그들 자신에게 매료되게끔 만드는 저 영화로운 동물들에게 말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는 데이비드 그레이어드와 플로에게 큰 빚을 졌다.

루이스 리키는 야생 침팬지를 관찰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1960년 제인 구달을 탄자니아의 곰비로 보냈던 인물이다. 인류학자였던 그는 당연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갖고 살았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진화론적 사촌들인 영장류들의 야생 생활을 관찰하고 연구하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침팬지 연구를 위해서 제인 구달을 탄자니아에 보낸 것처럼, 고릴라를 연구하는 다이앤 포시를 콩고로 보냈다. 비루테 갈디카스는 리키의 후원 아래 우랑우탄을 연구하러 인도네시아 보르네오로 떠났다. 영장류 동물행동학 연구의 시작이었다.

언젠가 친구인 장대익 교수가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친인척이나 주변 친구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면 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을 연구한다면서 여전히 '동물이 아닌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고집하는 분야가 현존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그 평범한 말이 보편적으로 실천되기까지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공동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사촌들인 침팬지, 고릴라, 우랑우탄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당시의 리키의 혜안이 놀랍다. 생뚱맞은 이야기 같지만, 정직한 직구만을 스트라이크존 한가운데 꽂아 넣는 투수보다 스트라이크 비슷한 볼을 잘 던져 넣는 투수가 훨씬 더 좋은 투수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주변과 관계와 역사를 고려해야 더 크고 더 넓은 범위에서 인간을 볼 수 있는 창이 열릴 것이다. 리키의 혜안에 따라 제인 구달이 그 창문 중 하나를 열었다. <인간의 그늘에서>는 그 과정에 도달하는 생생한 관찰기이자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 <안개 속의 고릴라>(다이앤 포시 지음, 최재천·남현영 옮김, 승산 펴냄). ⓒ승산
<인간의 그늘에서>보다는 대중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또 다른 고릴라 이야기를 담은 <안개 속의 고릴라>(다이앤 포시 지음, 최재천, 남현영 옮김, 승산 펴냄)와 오랑우탄 이야기가 담긴 <에덴의 벌거숭이들>(비루테 갈디카스 지음, 홍현숙 옮김, 디자인하우스 펴냄)도 우리들의 진화론적 사촌인 영장류를 이해하는데 (결국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인들 중에는 아직도 '인간은 동물'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친구가 '동물하고는 다르게 인간은'이라는 말로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면 나는 말을 가로채서 조금은 의도적으로 침팬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곤 한다. 그럴 때 제일 먼저 시작하는 이야기가 제인 구달의 <인간의 그늘에서>에 나오는 도구를 사용해서 개미를 잡아먹는 데이비드 이야기다.

친구들은 자주 데이비드라는 이름에 미혹되어서 그가 침팬지가 아니라 원시 부족의 어느 누구라고 착각하곤 한다. 하품을 하거나 외면하거나 내 말에 끼어들려고 하는 친구들을 앞에 두고 나는 기어이 <인간의 그늘에서> 이야기를 다 마치곤 한다. 그러고는 그 이후 영장류 연구의 결과 이야기까지 강연하듯이 이어가서 끝을 보고야 만다. 친한 친구들이니 맘껏 몽니를 부려보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답답함을 그런 모양새로 토로하는 나의 만용을 받아주는 친구들이 그래도 고맙다.

한 종으로서 인간의 놀라운 성공은 무엇보다도 도구의 사용과 제작, 논리적인 사고, 신중한 협동, 언어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뇌가 발달한 결과이다. 침팬지와 인간이 생물학적 측면에서 놀랄 만큼 유사한 점 중 하나는 뇌의 구조이다. 침팬지는 원시적인 추론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현존하는 다른 포유류들보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형태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침팬지의 뇌는 수백만 년 전 최초로 유인원의 행동을 지배했던 뇌의 형태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과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 침팬지 간의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침팬지가 말하는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린 침팬지에게 말하기를 가르치려는 열성적인 노력들은 결국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말로 하는 언어는 인간의 진화에 있어서 실로 엄청난 진보였다.

<인간의 그늘에서>에 적힌 이런 구절들은 이제는 너무 당연해서 식상하기까지 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영장류의 진화론적인 보편성에 대한 관찰 결과를 받아들일 때 오히려 인간의 특성이 도드라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현장의 기록물로서 이 책의 가치는 더 빛날 것이다. 제인 구달의 관찰 연구 이후 영장류들의 행동학적 연구는 큰 진전을 보였다. 뇌과학이나 진화심리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과학적으로 더 낮은 분자 단계에서의 연관성과 보편성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간을 구별 짓는 특성 중 하나인 음성 언어의 발달에 대한 진화생물학적 연구도 한창이다.

제인 구달의 <인간의 그늘에서>는 그 모든 것이 시작되던 탄자니아 곰비에서 한 과학자와 침팬지들 사이에 벌어진 교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위대한 이유는 발견의 기록에만 머무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발견으로 다가가는 과정에서의 객관성과 주관적 관찰 사이의 경계에 대한 자체적 실험의 기록이기 때문에 더욱 빛이 난다. 교감도 관찰의 일부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따뜻한 책이다.

<인간의 그늘에서> 이후 제인 구달의 책들이 '생명'에 초점을 맞춰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교감 있는 관찰의 결과 생겨난 연민이야말로 제인 구달의 핵심일 것이다. 그런 그녀의 '시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 <인간의 그늘에서>다.

만약 침팬지가 멸종되지 않고 계속 살아남는다면 갑자기 <슈퍼 두뇌>를 지닌 침팬지 종족이 만들어지고 전혀 새로운 도구 문화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제인 구달은 이렇게 적어놓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구달이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혹성 탈출>이라는 영화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혹성'은 일본에서 쓰는 용어이고 우리말 용어로는 '행성'이다. 하지만 영화 제목으로 계속 사용되어왔던 것이니 구태여 <행성 탈출>로 바꿀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잘못 사용된 것도 하나의 문화이니만큼.) 특히 뛰어난 지능을 갖고 있는 실험실에서 살고 있는 몇몇 보노보 침팬지들을 보면 정말 '슈퍼 두뇌'를 지닌 침팬지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2014년 개봉 예정인 영화<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 ⓒ20세기 폭스

하지만 다른 한편, 멸종 위기에 처한 그들을 보면 아무리 뛰어난 몇몇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해프닝일 뿐, 그들의 삶의 구조가 이미 인간의 조작에 의해서 결정되는 구렁텅이로 떨어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도 같다. 침팬지가 인간의 뒤를 이어 문명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단선적인 생각보다는, 오히려 공동 운명체로서 침팬지를 바라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100% 장담이라는 것은 어리석겠지만 어떤 원인에서든 인간이 멸종의 길로 접어든다면 침팬지도 그 궤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진화의 긴 세월 속에서 보편성의 일부를 공유하는 동시대 친척으로서 침팬지를 대하는 태도가 중요할 것이다. 제인 구달의 <인간의 그늘에서>는 그런 정서로 흠뻑 젖어 있는 감성이 철철 넘쳐흐르는 책이다.

침팬지는 고사하고 사람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의 기반이 무너져가는 이 수상한 시절에 <인간의 그늘에서>를 권한다. 침팬지라는 거울을 보고 다시 성찰해야 할 시간이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계속 주장하려면. 반드시.

사족: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부제를 단 과학책 읽기 수업을 오랫동안 진행했었다. <인간의 그늘>에서는 그 책읽기 여정에서 꼭 거쳐 가야만 하는 위치에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책을 읽고 온 학생들에게 토론에 앞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쪽글을 작성하도록 했었다. 내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1) 같이 수업을 듣는 모든 친구들의 학과와 이름을 써봅시다. 최소한 세 명의 친구들과는 침팬지 인사법으로 서로에게 인사를 해봅시다. 인사를 주고받은 친구들의 서명을 받을 것.

(2) 인간들이 수행하는 야생 침팬지 연구가 왜 중요한가?
(a) 인간의 관점에서 (b) 침팬지의 관점에서

(3) 인간과 침팬지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한 내용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4)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물 중 하나로서 침팬지의 기본권(인간의 인권 같은)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또한, 우리에게 침팬지를 멸종시키는 따위의 행위를 통해서 침팬지가 진화하는 것을 막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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