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1, 2년 사이 'OO사회'라는 제목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 건 2012년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이 불러일으킨 열광적인 반응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지독한 피로감을 어떻게든 해석해내려 애쓰는 이들은 한병철의 책들을 통해, 사회라는 원인의 개별적인 결과로서의 개인을 호명하고 위치 지우려 시도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수많은 책들의 제목을 보며 사회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역설적인 안도감('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내 잘못만은 아니구나!')을 느끼는 상태에 벌써 접어든 걸까. 한병철의 신간 <투명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는 여기서 또 어떤 역할을 담당하게 될까, 그리고 <투명사회> '이후'의 '사회'는 무엇이 될까.
<투명사회> 출간에 맞춰 내한한 한병철은 지난 3월 24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렸던 '두산인문극장 2014:불신시대'의 기조강연자로 나섰다. 그는 먼저 현재 한국사회의 인문학 열풍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밝히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독일에서도 수업에서 가르치는 학생들 이외의 관객들을 앞에 두고 강연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인문학이 무대에 등장하면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장님을 만드는 것 같다. 아무래도 관객이 있으면 그들을 흥분시키고 그들이 좋아하는 말을 해줘야 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약장사가 되고 배우가 되고 광대가 된다"라고 밝혔다.
즉 "인문극장"이 "인문시장"으로, "인문백화점"으로 바뀌면서,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유아를 위한, 아동을 위한, 청춘을 위한 인문학"이 속속들이 등장함으로써, 안정된 사회를 끝없이 의심하는 저항적 사유라는 인문학 본연의 힘은 사라지고 오로지 안전한 소비의 대상으로만 향유되면서 인문학이 아주 좁은 대상과 범위로 끝없이 나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내한한 뒤 서점을 먼저 찾았다고 하면서, 인문학 베스트셀러로 꼽힌 철학자 강신주의 <감정수업>(민음사 펴냄)을 훑어보았을 때의 충격을 전했다. 그는 "강신주라는 개인"이 아니라 "강신주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어떤 모델"에 대한 비판임을 전제하면서, 이 같은 '달콤한 감정의 인문학'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리고 욕망이나 사랑, 긍정, 행복에 대한 권유만 있는 인문학을, 최근 자본주의가 '감정의 자본주의'로 완벽하게 자리 잡았다는 사실과 연결 지었다. "우리는 무언가가 '좋다'라고 생각하며 구매한다.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감정을 구매한다. 나도 모르게끔 무언가 하고 싶어하게 만드는 감정을 통해 착취와 통제가 가능해진다." 그는 이것이 투명사회에서 한 발 더 나아간 통제사회라고 생각한다면서, "독일이든 한국이든 왜 감정이 사유의 대상이 되는가, 왜 그렇게 인기 있는가에 대한 사유가 일체 없다는 사실이 흥미롭다"고 했다.
한병철은 투명사회가 성과사회, 피로사회와 같은 논리로 구성된다고 설명했다. 오늘날은 더 이상 감시와 통제를 통해 억압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판옵티콘적 시선에 자신을 내맡긴 채 스스로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디지털 판옵티콘 건설에 동참하게" 하면서 채 억압이라고 느끼지도 못한 채 편안하고 유혹적이며 스마트하게 구성된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타자를 통한 지배보다 더 효율적"인 자기착취가 피로사회를 구성하는 것처럼, 투명사회는 "자유라고 생각한 것이 통제로 변형"되는 "자유의 변증법"으로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는 신뢰란 '전부 안다'와 '아무것도 모른다'의 중간 상태라고 했다. "타인에 대해 어느 정도 무지한 상태여도 그만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 주는" 조건임을 전제하며, "모든 무지가 제거된 상태인 투명성에선 신뢰가 필요 없어"진다고 말을 이었다. 즉, "투명한 공간은 신뢰의 공간이 아니며, 투명사회의 전제조건은 불신이다."
한병철의 강연은 공동체가 불가능한 투명사회에서 벗어나 "연대와 친구를 통한 우정의 공동체"를 다시금 건설하자고 제안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투명사회 혹은 불신사회가 아닌, 서로를 신뢰하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동체 말이다. '자유'의 독일어 단어는 'Freiheit'라고 했다. 그 어원은 '친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라고도 했다. 나 혼자, 스스로 판옵티콘의 시선에 몸을 맡긴 채 이것이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다'라고 착각하는 자유가 아닌, "좋은 사람과 함께, 공동체 속에서 서로의 자아실현을 돕는" 자유를 향해 우리는 움직여야 한다는 결론과 함께 강연은 끝났다.
투명사회 속에서 어떻게 서로의 진짜 벗을 알아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문일 것이다. 그런 '답'을 들으러 오는 것이야말로, 한병철의 표현을 빌자면 '인문백화점'에 윈도우 쇼핑을 하러 오는 자세에 다름 아닐 것이다. 행동은 질문에서부터 시작되고, 답은 그 행동을 통해 비로소 도출된다.
아래는 철학연구자 문순표가 <투명사회>에 관해 보내온 긴 서평이다. <편집자>
아래는 철학연구자 문순표가 <투명사회>에 관해 보내온 긴 서평이다. <편집자>
투명성 2.0?
문순표 철학 연구자
얼마 전 <지젝의 농담(Zizek's Jokes: Did you hear the one about Hegel and negation?)>(The MIT Press, 2014)이 출간됐다. 그간 지젝이 여기저기 늘어놓은 농담들을 한데 그러모은 책이다. 이 농담들 중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반복의 기능'(the function of repetition)을 가장 절묘하게 예시하는 농담으로, 구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인이 언젠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일어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그가 가이드에게 "이 도시의 이름이 뭔가요?"라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이 "바덴-바덴(Baden-Baden)"이었는데, 이를 듣고 난 정치인은 "나는 바보가 아닐세. 나한테 그렇게 두 번이나 말할 필요는 없어"라며 화를 냈다는 이야기이다.
이 농담에 묘사된 상황은 두 번째로 내한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강연에 참석했던 인문학 '관객'들의 반응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되는 것 같다. '인문학 강의'가 아닌 '인문학이 무대에 올려지는' 현장에 있지 않았지만, SNS에 떠돌고 있는 후기들에서 당시 분위기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반응의 중핵은 예상대로 '힐링 담론'이다.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핵심 열쇳말이자, 그를 수용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던 틀 말이다.
관객들은 세간의 추측과 달리 이미 저 담론의 허무함을 체감하고 있었고, 개인(주체)와 사회(구조) 중 후자의 우위와 중요성을 안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현존하는 시스템 바깥을 꿈꾸라는 조언이 무력하게 들린다고 덧붙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나'를 또 다른 '우리(?)'에 이어주는 이로 믿고 싶은 멘토를 앞으로는 '강신주' 대신에 '한병철'로 삼겠다는 결심(?)도 발견할 수 있었다.
"<피로사회>를 읽는 매순간 내 얘기처럼 들렸다"는 어느 독자의 후기처럼 주어 '나'에 따라붙어 꾸며주고 자아를 규정하거나 확장해주지 않는 어떤 분석이나 술어도 별무소용이겠지만, 각 주어들이 처해있는 처지, 즉 자아 확장의 장애이자 디딤돌로 체감하는 것들이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여럿 가능성 중에서 이 (완벽한) 세계를 창조해 낸 소실점인 신의 의지에 기대고 있는 '창문 없는 모나드(단자)'에 불과한 게 아니다.
'바덴-바덴'이라는 대답에 다 이해했으니 반복할 필요 없다고 성내던 정치인처럼 저 관객들은 (인문학적) '개인(주체)-개인(주체)'을, 혹은 (사회과학적) '사회(구조)-사회(구조)'를 반복하고 있는 멘토-철학자들을 향해 단언하고 있다. 이미 다 안다고, 그러니 그럴 필요 없다고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물음과 응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원근법의 소실점으로서 '안다고 가정된 주체(진단자)와 자율적 주체(상담자)'의 비대칭적 관계가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자율적 주체가 알고 보니 사회라는 타율성의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역설과 아이러니를 한병철은 마치 저 여행 가이드가 '바덴-바덴'이라고 반복하듯 '사회-사회'를 계속 외치고 있다. 심지어 이번 책은 "투명사회의 일차적 모습인 긍정사회"(한병철의 <투명사회> 13쪽)로부터 시작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르던 벽이 무너진 여러 사회계열을 거쳐 '통제사회'에 이르기까지, '피로사회'의 각 측면들을 '사회'의 자리에 격상시켜 두루 밝혀낸다.
1. (독일적) 소진 vs (한국적) 사회-사회
이는 2012년 그의<피로사회>가 국내 출판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을 뿐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만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를 저널리즘의 언어로 등록시킴으로써 격발된 '○○사회'로 총칭되는 출판 열풍의 짝패이기도 하다. 마치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밀레니엄 맘보>에서 여주인공 비키(서기)가 여름 타이페이의 문을 열자마자 겨울 유바리에 당도하듯, 또는 게토화로부터 저지되고 있는 서울의 대학가에 자리한 수많은 방들을 벗어나기 위해 방문을 열자마자 역설적으로 베를린의 게토 지역에 도착하듯, 우리는 한병철의 (독일에서 태어난) 사회-사회의 '아이들'(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들에 붙여준 이름이다)을 입양해 키워왔던 셈이다.
<투명사회> 출간 직후 한 신문 칼럼에서는 그의 '디지털 투명-통제 사회'에서 자유의 변증법에 대한 분석을 곧장 최근 발생한 '개인정보 대량 유출 사태'에 적용했고(☞바로 보기 : ), 급기야 한 인터넷 서점은 제목에 '사회'라는 (검색) 키워드가 들어간 책들을 한데 모아 '○○사회 총집합' 이벤트를 열기까지 했다.
만약 이것을 사회에 대한 '출판·저널리즘적 열광'으로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이것을 <연세대학원신문> 2014년 203호 13면에 쓴 '사회論, 혹은 사회Loan?'에서 이것의 이면에 대해 간략하게 분석했었다), 여기에는 정작 독일에서 2010년 <피로사회>가 출간된 후 뒤이어 벌어진 '(독일적) 소진 현상'과의 뚜렷한 시차를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차가 각 사회의 '사회적 성격'을, 혹은 엄기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와 같은) 사회의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징후처럼 보인다. 며칠 전 트위터에 올라온 누군가의 메모는 아주 짧지만 그 시차를 독일의 출판 경향을 빌어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독일 쪽 사회심리학 도서들을 조금씩 파고드니 한병철은 소진이란 개념을 '-사회'에 부합하기 위한 공감의 개념으로 격상시켰을진 몰라도, 그 대신 '-사회'로 규정되면서 가려진 정서적 그늘의 그물망에 대해 많은 걸 빼먹고 있단 생각을 해봤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이곳에서는 <피로사회>의 '피로'를 공백으로 비워놓고 (이 피로를 '과로'로 번역해 낸 경우조차도) 마치 이런 사회는 도대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각종 '○○사회'를 무한히 재생산해냈다. 반대로 정작 독일에서는 그 사회의 술어이자 거울에 해당하는 '피로/소진'의 (정서적) 증상 자체에 대해 대중적인 관심이 일었다. 이 증상이 1970년대 미국의 '사회복지업무'(social work)에 종사하던 이들을 진단하면서 그 개념이 처음 등장했었다는 역사적 분석에서 이 관심은 출발했다.
이러한 시차를 단순히 한 철학자의 대중적이고 저널리즘적인 예민한 감각이나 출판 시장의 성격 차에서 비롯되는 것만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병철의 각종 '사회 모나드'(social monad)라는 이율배반적인 기획과 의도가 오히려 이곳에서 보다 잘 관철되고 확장·재생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시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960년대 초반 이곳의 대통령이 '미국 대신에' 제국의 칭호를 아무런 주저함 없이 붙였던 그 독일(당시 서독)에서, 또 그가 현지 유학생들을 불러 모아 놓고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에 충실한 저 젊은이들의 근면·성실을 본받으라고 연설하던 그 곳에서, 단언컨대 "어느 유럽 국가보다도 소득수준과 삶의 전반적인 질이 월등하고, 통계상으로 볼 때 OECD 국가 중 네덜란드 다음으로 최소 노동 시간을 보유하고 있는 곳에서 왜 '소진'(Erschöpfungsdepression/ Burn-out)이 대중적인 이슈가 된 걸까? 왜 독일인들은 소진되었다고 느끼는 걸까?"(☞바로 보기 : )
이 의문에 답해보기 전에 한병철의 책으로 촉발된 '소진 현상'에서 소진의 용례 차이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피로사회의 '피로'(Müdigkeit)는 들뢰즈가 베케트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철두철미한 스피노자주의'(<소진된 인간>(질 들뢰즈 지음, 이정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24쪽)라고 불렀던, 즉 온갖 가능성을 남김없이 소거한 뒤 그 자리에 잠재성이 대신 들어서게 되는 '소진'(Erschöpfung)과 대비된다. 여기에는 보다 먼 가능성을 위해 눈앞의 가능성을 포기하거나 미루는 선택의 자유가 범람한다. "날이 밝았어"라고 말한 뒤 바로 외출할까, 아니면 밤이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위해 집에 머무를 것인가의 선택이 피로(한 인간)과 관련돼 있다면, "태어나기도 전에 [삶을] 포기했다"는 고백은 소진(된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인 것이다.
가능성을 타진하고 실현하다가 지친 뒤 찾아오는 '피로의 시간'과 달리 한병철이 '깊은 심심함'으로 묘사한 적 있는 '무위의 시간'이 곧 들뢰즈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로 인해 소진 상태에 이른 시간'으로 불렀던 바로 그것에 대응한다. 그 뒤 남아있는 것은 '무의 각종 변양'이고 한병철은 이것을 강연 마지막 무렵 '백치 상태'로 암시한다. 물론 그는 늘 그렇듯 대안이나 처방을 내려주길 바라는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다만 진단하는 데서 멈춘다.
다시 독일의 '소진 현상'으로 돌아와 보면 여기에는 우리의 '감정 사회(인문)학' 혹은 한병철이 강신주의 그것을 가리켜 '사춘기 인문학'으로 비판했던 것과 상당히 닮아 있는 특정 경향과 접목돼 있는 것 같다. 오스트리아의 문화철학자 로베르트 팔러(Robert Pfaller)가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언급들에서 최근 두드러지는 이 경향의 실마리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예전의 (의사소통 행위에 터를 둔) 공론장이 붕괴되고, 그 대신 곳곳에서 금연을 비롯한 각종 쾌락에 대한 금지들을 통해 국가로부터 공공성을 빼앗긴 상황에서 지극히 '사적인' 욕망을 '공적인' 차원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기대어 '모든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므로' 각자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금연에 반대하는 정치적 행위를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즉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을 끝까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공통의 공간을 국가의 금지 행위로부터 회복하는 바로 이 지점이 각자의 행복 추구가 가장 정치적인 순간과 접촉하는 곳이라고 역설한다. (☞바로 보기 : )
유대인 학살에 대한 형사적·도덕적·정치적 책임과 더불어 '형이상학적 책임'(칼 야스퍼스)까지 걸머지게 된 독일인들에게, 또 '자아 강화'가 목표인 미국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이 지배적인 곳에서,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 집 건너 '심리 테라피소'를 발견할 수 있는 곳에서, 돌연 등장한 '즐기라!'는 지상 명령은 이들에게 안도감과 동시에 무력감을 동반하는 것 같다. 증상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대신에 이를 '사회적 징후'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줄을 잇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병철의 저서가 독일에서 유달리 대중적으로 주목받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그와 동일한 문헌을 참고하고 동일한 분석틀을 사용하는데도 이른바 '비판이론 3세대'가 아무런 사회 비판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분명 대조되는 지점이다.
2. 부정성과 주체
<투명사회>의 옮긴이 김태환은 한병철을 '부정성의 철학자'로 규정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한병철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부정성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렇다면 대체 부정성이란 무엇인가? 부정성 개념은 한병철의 저술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꼽는다면 '타자', 즉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역자 해제: 불투명성의 옹호', <투명사회>, 227~228쪽)
이 말이 옳다면, 한병철이 옹호하려는 부정성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최종적으로 긍정하기 위해 내던져지고 늘 곁에 머물러야 하는 그런 부정성, 즉 변증법적 부정성으로 봐야 할까? 그의 말대로 "긍정사회가 작별을 고했고"(위의 책, 20쪽), "무엇이 여기 속하는지 속하지 않는지를 결정하는 결단"(22쪽) 행위인 이론에 구현돼 있는 부정성을 그는 회복하려는 걸까?
그의 것은 차라리 '비-변증법적' 부정성에 가까워 보인다. 이른바 운동권 문법에서 인용·발췌되던 부정성, 즉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역사적 유물론'을 발판삼아 사회적 모순을 해소해 나가는 운동으로서 진보를 규정할 때의 그런 변증법이나 여기에 동원되던 부정성이 아니다. 그가 '사회적 모순'을 말할 때조차 이 모순은 오히려 역설과 아이러니와 같은 감정을 유발하는 데 사용될 뿐이다. 그가 자유를 말하면서 동시에 통제를 말하고, 통제를 말하면서도 자유를 말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공감을 불러오는 그런 종류의 역설 혹은 아이러니 말이다.
한병철이 2012년 방한 후 독일로 돌아가 쓴 '방문기'에 나와 있는 다음 구절은 이러한 집단적이고 개별적인 자각의 짝패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렇게 내 책 <피로사회>는 한국인들을 집단적인 자기회의로 부를 수 있는 상태에 실족시켰던 것이다." (☞바로 보기 : , 번역은 필자)
이 부정성을 글로벌한 차원에서 보자면 이는 1970년대 이후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들이닥친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 즉 1차 세계대전 발발부터 70년대 초반까지 60년간(1914~1973) 지배적인 사회 규범의 역할을 떠맡았던 '(복지)국가 - 시장(자본가) - 노동조합(노동운동)'의 삼위체가 전환을 맞게 된 이후의 대체물로 등장한 것이다.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이 변화를 통틀어 '노동 해방'을 역설적으로 성취해버린 자본주의의 반혁명,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출현으로 부를 수 있다.
한병철이 '투명사회'는 '피로사회'와 같은 논리를 따른다고 분명히 밝히면서 '피로사회로부터 더 나아간 사회가 곧 통제사회'라고 말할 때(강연문 참조), 그는 전작에서 부정성 과다를 이유로 들며 긍정성 과잉의 '성과사회'로 대체했던 '통제사회'로 되돌아온다. '통제사회'를 다시 분석틀로 차용할 때, 이는 들뢰즈가 푸코의 분석을 따라 '안전하게 자유를 실현시키는' 통치 기술로서의 (신)자유주의를 분석할 '규율사회에서의 통제사회로의 전환'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 전환은 한병철의 주장과 달리 "기존의 규범 자체를 철폐하지 않고" 이뤄진다. 더 정확히 말해서 "통제사회의 주체화 기술은 규율 사회의 그것들을 대체하지 않지만, 그것들의 우위에 서게 된다."(마우리치오 라짜라토, '통제 사회의 생명 개념과 삶 영위(The Concepts of Life and the Living in the Societies of Control',<들뢰즈와 사회적인 것(Deleuze and the Social)>, 182쪽) 규율사회와 통제사회의 각 특징이 어느 사회에나 각기 다른 우위의 강도로 공존하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 부정성은 주체(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종래의 것과 구별된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체제의 안팎에서 저항하는 주체를 상상할 때 매번 맞닥뜨리는 난관이 일정 부분 이 달라진 주체의 위상 탓이다. 그렇다면 이 주체는 부정성이 '없는' 과잉 긍정의 투명한 상태로부터 다시금 계몽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일정한 거리를 둔 부정성'을 회복했을 때, 즉 '아직 미완성된 근대적 계몽의 기획'을 변함없이 추진할 때 등장하게 되는 것일까?
김예슬(<김예슬 선언>(느린걸음 펴냄))과 노영수(<기업가의 방문>(후마니타스 펴냄))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서로 다른 개인은 기존의 주체와 어떻게 다를까? 얼핏 보면 이들에게는 '대학의 기업화'에 저항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약 지금까지의 논의, 즉 '규율사회에서 통제사회로의 패러다임 변화'를 이들에게 적용해 본다면, 두 주체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잠시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떠올려 보자. 여기에는 규율사회의 공간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제목처럼 그 서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만약 어느 난민 소년 '로비 보이'(Lobby Boy)의 엄격한 학교로도 지칭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제로'(Zero, 이는 소년의 이름이기도 하다)에서 소년이 호텔 주인으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이 영화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모티브로 볼 수 있다면, 호텔(학교)에서 대저택(가정)을 거쳐 감옥에서 다시 호텔로 이동해가는 주인공의 여정에서 마주치는 그 공간의 규칙과 규범에 강박적일 정도로 충실한 등장인물들을 규율사회의 형상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규율사회의 주도권을 통제사회에 빼앗긴 대학에서 김예슬은 영화 속 '제로'가 회고하던 성장 이야기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에 매번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무한트랙을 스스로 거부하며 그 곳에서 '단독으로' 이탈했다면, '기업가의 방문'을 받은 대학을 다니던 노영수는 "학생들과 대화를 해보면 두산을 대환영하는 분위기다. 솔직히 말하면 자본주의의 논리가 어디를 가서나 통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박용성)며 점점 '가속이 붙는' 그 트랙 한가운데서 트랙이 멈춰 서는 방식을 고민해 왔던 게 아니었을까?
어떤 이는 두 주체를 체제와 현실 안팎의 다른 처지에 따라 각기 '판타지 속' 대리인과 '투명인간'으로 구별해 불렀다.
"김예슬은 체제에 편입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나마 삶을 돌아볼 거울이 될 대리만족의 대상이거나 책임을 떠맡기고 스스로는 현실에 굴종하고 있는 우리 삶에 위안을 주는 대표선수로 기능하게 됐다. 결국 김예슬은 우리의 지독한 현실 너머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인식됐을 뿐이었다."(☞바로 보기 : )
"김예슬은 체제에 편입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나마 삶을 돌아볼 거울이 될 대리만족의 대상이거나 책임을 떠맡기고 스스로는 현실에 굴종하고 있는 우리 삶에 위안을 주는 대표선수로 기능하게 됐다. 결국 김예슬은 우리의 지독한 현실 너머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인식됐을 뿐이었다."(☞바로 보기 : )
하지만 "노영수는 달랐다. 노영수는 철저하게 우리가 사는 지독한 현실 그 어딘가에 존재했다. (…) 주변에서 끊임없이 현실의 불편함에 대해 얘기하는 존재, 공고하게 굴러가는 거대한 자본의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비슷한 위치 그 어딘가에서 목소리를 내는 존재지만 늘 우리 주변에서 '고립되어 지쳐가는' (…) 잊힌 존재였던 셈이다."(같은 곳)
3. 투명성 2.0?
<투명사회>의 2부에 해당하는 장 '무리 속에서 - 디지털의 풍경들'은 우선 진보·좌파 운동권들이 한병철의 전작을 두고 시대 진단의 필수항목인 '정의론'이나 '계급 분석'이 결여돼 있다는 비판에 대한 응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인구 관리를 주목적으로 삼았던 (이를테면 실업률이나 출산율처럼 외적 요인을 중심으로) '생명관리 정치'(푸코)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있는 '디지털 심리 정치'의 윤곽을 인간의 심리와 내면까지도 두루 밝히고 통제하는 것으로 대강 그려낸다.
여기서는 뒤의 측면만을 민주주의라는 보다 한정된 틀에서 살펴보는 게 좋겠다. 흥미롭게도 그는 아즈마 히로키가 루소의 일반의지를 업그레이드시켜 '일반의지 2.0'을 고안해 냈던 문제의식과 동일하게 "빅 데이터에서 대중의 행동 패턴을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디지털 심리 정치가 출발한다"(220쪽)고 지적한다. 여기에는 카메라가 거울상과 달리 무의식적 이미지를 가시화시키듯 이와 유비적인 집단 무의식이 발자국처럼 남아있다.
물론 그의 문제제기는 '지배' 및 '감시' 그리고 '종언'의 표상에서 종결된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대중의 사회적 행동에 담긴 무의식적 논리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대중의 행동을 지배한다. 집단적 무의식을 파악하여 대중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예측까지 가능하게 된 디지털 감시사회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발전시킨다. (…) 이로써 생정치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다."(같은 곳)
"제비뽑기의 우연성이 본질이라기보다는 '숙의의 외부'를 제안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깥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입장이 갈립니다. 저는 가라타니가 너무 낭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비뽑기는 아주 알기 쉬운 외부인데 반해, 제가 제안하는 데이터베이스는 '외부인 척한다'고 해야 할까요?" (<일반의지 2.0>(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천 옮김, 현실문화연구 펴냄, 280쪽))
<투명사회>보다 몇 달 앞서 독일에서 출간됐던 <디지털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행위의 종언 :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사유(Digitale Rationalität und das End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Gedanken zur Krise der Demokratie)>에 대한 출판사 소개문을 통해 예상해 보건대, 아마 이 책에서 한병철은 아즈마 히로키의 문제의식과 구체적인 대안에 가 닿아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책의 한국어본이 언제든 출간된 뒤에 비로소 지금의 대략적인 윤곽을 바탕으로 이들을 각기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병철은 <디지털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행위의 종언 :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사유>로 하버마스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담론 이론에서 근본적으로 단절하는 민주주의 이론을 내놓는다. 그는 디지털 혁명을 정치적인 것으로 번역하고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을 디지털 합리성으로 대체한다. 그 결과는 압도적인 만큼 소스라치게 놀랍다. 한병철은, 현행 정치 논쟁들 일반에서 뻔히 보이는 것처럼 단순히 보다 많은 참여를 제안하지만은 않는다. 그는 직접 민주주의나 '떼 민주주의'(Schwarmdemokratie)를 넘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와 민주주의의 형식에 대해 하나의 전망을 기획한다. 그는 '정치가들'이 없는 정치와 '의사소통'과 '공공성' 없이도 가능한 민주주의를 기술한다. 한병철은 정치 정당과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알린다. 디지털 민주주의에 대한 이 대담한 기획은, 해적당과 이탈리아의 베페 그릴로(코미디언 정치인)의 성공에 반영된 오늘날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바로 보기 : , 번역은 필자)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