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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간부는 왜 깡패에게 맞아 죽어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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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간부는 왜 깡패에게 맞아 죽어야 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5> 4월혁명, 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프레시안 : 이승만은 부정 선거를 몰랐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는 일각의 주장이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짚었다. 3.15 부정 선거와 관련해 더 생각할 것이 있어 보인다.

서중석 : 그중 하나는 자유당이다. 참 우리나라 권력은 어떻게 그렇게 영구 집권을 어느 누구나 하려는 건지. 예컨대 이승만, 박정희만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 밑에 있던 사람들도 따라서 같이 하려고 그러더라. 이게 무서운 현상이다. 그래서 또 이상하게 '윗사람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장기 집권으로 끌고 갔다',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까지 나오고 그런다.

자유당은 1956년 선거에서 이기붕이 꼭 부통령이 돼야 한다고 봤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그때 신문에 이렇게 나왔다. '자유당은 초상집'. 이건 대통령 후보 문제하고 상관없이, 장면이 부통령이 된 것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헌법은 (1954년) 사사오입 때 고친 건데, 승계 문제에 대해 '대통령 궐위 시에는 부통령이 승계한다', 이렇게 명문화해놨기 때문이다. 러닝메이트 제도는 도입하지 않고 이런 것만 한 거다. 1956년 선거에서 장면이 당선돼 부통령이 되지 않았나. 가을 날씨하고 노인네 언제 죽을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당시 여든한 살이다. 그때는 여든한 살이면 보통 나이가 아니다. 몇 사람밖에 없던 때다. 그러니까 자유당으로선 이기붕이 꼭 당선돼야 한다고 봤는데, 그렇게 안 된 것이다.

프레시안 : 자유당으로선 초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서중석 : 그렇다. 그리고 3.15 부정 선거는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다. 이 점을 잘 알아야 한다. 부정 선거 노하우가 쌓일 대로 쌓인 것이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1948년 5.10선거,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 선거인데 (선거가 치러진 지역에서는) 동대문갑 구(이승만 출마 지역) 정도를 빼놓으면 이 선거는 그래도 무난하게 치러진 것으로 봐야 하지 않느냐. (분단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여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참여하지 않았고 제주도에서는 치러지지 못한 점 등) 몇 가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1950년 5.30선거 때에는 이 대통령이 주요 도시를 순방하며 '중도파 민족주의자를 찍지 말라'고 했다. 또 내각 책임제 개헌을 주장한 서상일을 비롯한 민국당의 일부 중진들은 선거에서 떨어지는 등 시련을 겪고, 이와 달리 중도파 민족주의자는 거의 다 됐다. 이 선거도 (그 이후에 비하면) 상당히 공명했다고 본다.

문제는 1952년 8.5선거부터다. 자유당에서 부통령 선거에 두 명이 나온 거다. 당시 선거법에선 이게 괜찮았다. 임시 전당 대회에서 자유당 부당수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는데, 이갑성도 자유당 후보로 나왔다. 그런데 (이승만은) 전당 대회에서 지명한 이범석을 외면하고, (선거에) 나오려고도 하지 않던 함태영을 출마하게 했다. 이승만보다도 나이가 많은 노인네이던 함태영은 (무소속으로 나와서) 112만여 표라는 큰 표 차이로 이범석을 눌러버렸다. 그 센 자유당 후보를. 함태영은 (다수의) 국민이 이름 석 자도 잘 모르던 사람이다. 지금도 시험 때 학생들에게 '제3대 부통령이 누구냐'고 물으면, 제대로 쓰는 사람이 없다. 그런 함태영이 부통령에 당선됐다는 건 이 선거가 어떻게 치러졌는지를 단적으로 얘기해준다.

1954년 선거는 경찰 선거, 곤봉 선거 아닌가. 선거 운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한때는 이승만 정권의 2인자라는 얘기까지 들었던 허정조차 선거 운동을 못했다. 참 무섭더라. 그래서 이 사람, 중도 사퇴(입후보 포기)한다. 이런 선거였다. 1958년 선거에선 선거 운동 및 투표 부정에다 1956년에 배운 개표 부정까지 했다. 올빼미 개표, 샌드위치 표, 빈대 잡기 표, 닭죽 개표 등 별의별 개표 부정을 다 했다. 그러고 3.15 부정 선거 전에 재선거, 보궐 선거가 있었는데 그 선거들도 3.15 부정 선거와 거의 똑같다. 이런 노하우가 쌓였으니까 3.15 부정 선거가 그렇게 치러진 것이다. (올빼미 개표는 개표 도중 전기를 끄고 표 계산에서 부정을 저지른 것, 샌드위치 표는 여당 표 다발 사이에 야당 표나 무효표를 끼워 넣은 것, 빈대 잡기 표는 개표 종사자가 야당 표에 인주를 묻혀 무효표로 만든 것, 닭죽 개표는 수면제를 넣은 닭죽을 먹여 야당 참관인들을 재운 후 조작된 투표용지로 바꿔치기한 것을 말한다. <편집자>)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부정 선거 그곳에 친일파가 있었다

프레시안 : 민주주의와 전후 복구에 힘을 쏟아야 할 때, 엉뚱한 노하우만 쌓은 셈이다.

서중석 : 인간들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 이렇게까지 개탄할 수밖에 없는 선거가 치러진 건 친일파가 이 선거를 관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3.15 부정 선거 당시 자유당을 보자.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를 제외한 자유당 최고위층 (즉) 3, 4, 5, 6순위였던 이재학, 한희석, 장경근, 임철호 다 친일파 아닌가. 일제 때 군수나 검사, 판사를 한 사람들이다.

장관들, (12명 중) 그때 외무부 장관이 궐석이었으니 11명을 보면 6명이 군수였거나 판사, 군 장교였다. 2명이 금융계, 2명이 의료계다. 이 사람들은 어디서 일했느냐에 따라 일제 기구에서 근무했느냐를 얘기할 수 있는데 그 점이 불분명하다. 1명이 보험 회사인데 이게 최인규다. 친일 보험 회사 간부였다. 그러니까 '일제 때 행적을 볼 때 이 중 떳떳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냐? 한두 명 있었나?',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차관 12명을 보면 8명이 (일제 때) 군수, 판사를 했거나 검찰, 경찰에 근무한 친일파다. 한 사람은 관공서 잡지 사장이었고, 한 명은 만선척식회사 과장이었다. 다 일제에 복무한 것이다. 한 명이 교수인데, 어디 교수인지 잘 나오지 않아 알기 어렵다. 한 명은 불명으로 나온다.

프레시안 : 해방 직후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오래도록 악영향을 끼쳤다.

서중석 : 그렇다. 선거를 지휘한 내무부를 보면 치안국장 이강학, 일제 때 육군 소위였다. 세도가 당당했고 실질적으로 당시 최고 권력자 중 하나이던 경무대 곽영주 경무관, 일제 때 지원병 군조(軍曹)였다. (군조는 당시 일본군 부사관 계급의 하나로 오장(하사)의 위, 조장(상사)의 아래였다. 오늘날 중사에 해당한다. <편집자>) 서울시경국장 유충렬은 일제 때 종로서 순사부장이었다. 나머지 도경국장은 한 명도 예외 없이 다 일제 때 경찰이었거나 일제에 복무한 친일파다. 이런 사람들이니까 권력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할 수가 있었다.

사실 이승만 정권 초기만 해도 친일파가 이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후기로 올수록 그야말로 맹종파, 아부파 이런 사람들로 채워진다. 이 사람들 학벌은 또 최고다. 경성제국대학, 일본 도쿄제국대학, 미국에 있는 대학 등 당시 최고 학벌이었다. 난 그게 더 개탄스럽더라.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하느냐. 그런데 일제 때 행위를 보면 글쎄 이럴 수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노쇠한 이승만의 권력욕, 병약한 이기붕의 충성심

프레시안 :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떠오른다.

서중석 : 더 한심하다고 할까, 국가의 장래를 위해 눈이 캄캄하다고 하는 건 이승만, 이기붕 후보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1960년) 85세가 된 분이다. 아무리 대단한 분이라 하더라도 85세가 되면 근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이분은 몇 년 전부터 꾸벅꾸벅 졸았다. 그래서 1958년부터는 사실상 이기붕이 대행했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정말 중요한 것에만 이 대통령이 관여돼 있지, 구체적인 것은 거의 다 이기붕을 통해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장차관, 경찰 간부, 자유당 간부들이 그렇게 당선시키려고 했다. 그런 분을 대통령으로 꼭 모셔야겠다? 아무리 권력이 좋기로서니 그럴 수가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

이기붕 이 양반은 사실 꼭 부통령을 하고 싶지도 않았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승만에 대해서만은 꼼짝을 못했다. 일제 때도 미국에서 이승만 밑에 있었고 해방 직후에 비서도 한 사람이다. 이 양반은 어떤 면에서 양심적인 일도 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을 재판에 다시 회부한 게 이 사람이 국방부 장관 때다. 그러고 나서 이 양반은 완전히 찬밥 먹었다. 이승만하고 사이가 나빠지니까 이승만이 밀어내버린 거다. (거창 학살 사건 진상 조사를 막으려 '가짜 공비 사건'을 연출한) 김종원을 (이승만 대통령이) 풀어주라고 하는데도 안 풀어주고 그러니까 내쫓은 거다.

프레시안 : 이기붕은 그 후 다시 이승만의 최측근이 된다.

서중석 : 그 부인 박마리아가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하고 가까이해서 다시 이승만한테 이기붕을 밀어붙였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 양자로 만든다. 그렇게 되니까 이기붕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게 됐다.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다, 하기 싫다를 떠난 문제가 된 거다. 어쨌든 대통령에게는 절대 충성했다.

1958년부터 중요 정사를 이기붕이 맡았는데, 이기붕은 국회의장이면서도 국회에 나가서 한 번도 사회를 본 적이 없다. 건강이 아주 나빴다. 3.15 부정 선거 때도 한 번도 유세에 나가본 적이 없다. 몸이 더 나빠진 것이다. 이 양반은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각부 신경통에 협심증이었다. 미국에 있는 월터 리드 육군 병원에도 가고 홍콩 쪽에도 가고 그러는데, 어디서나 치료가 잘 안됐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지명했다. 이 사람만이 자기에게 절대 충성하고 대통령 자리를 넘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서 충직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쓴 것이다. 자유당에서는 그런 이기붕을 떠받들며 부정 선거로 당선시키려 했다. 그걸 장관, 경찰과 모의해 저지른 것이다. (어쨌건) 이 대통령도 정사를 돌보기에는 너무 노쇠한 분이고 이기붕은 몸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었는데, 그분들이 우리나라를 맡는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나. 난 권력이란 게 그렇게까지 좋은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더라.

▲경무대(오늘날 청와대)에서 이승만 대통령 부부와 함께한 이기붕 일가(1957년 5월 2일). 맨 왼쪽이 이기붕의 큰아들로 이 대통령 양자가 된 이강석이다. ⓒ연합뉴스

세계 부정 선거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3.15 부정 선거

프레시안 : 이 시기에 엽기적인 부정 선거 유형이 많았다.

서중석 : 전 세계에서 부정 선거 유형을 3.15 부정 선거처럼 많이 보여준 선거도 드물 거다. 참 어떻게 이렇게 아이디어를 복잡하게 많이 냈는지. 아무리 노하우가 쌓였다 하더라도 정말 너무하다.

최인규 내무부 장관은 이성우 내무부 차관, 이강학 치안국장 등을 대동해서 1959년 11월 28일부터 12월 20일경까지 그리고 1960년 1월 초순에서 2월 초순까지 거의 매일같이 각 시도 경찰국장, 사찰과장(오늘날 정보과장), 경찰서장 그리고 시장, 군수, 구청장 이런 사람들을 모았다. 거기서 부정 선거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정했는데, 그게 민주당을 통해 (1960년) 3월 3일자 신문에 대판 터진 거다. 이때 최인규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세계 역사상 대통령 선거에서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살아도 내가 산다." 대단한 사람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위대한 분이니 여러분은 국가 대업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이 대통령 당선에 차질 없게 하라', 이렇게 당부하면서 그 방법으로 4할 사전 투표, 3인조·9인조 공개 투표, 완장을 착용해서 투표소 근처를 싸늘하게 할 것, 민주당 참관인을 내쫓을 것, 이런 것들을 제시했다고 돼 있다. 또 이강학 치안국장은 각 시도 경찰국장 회의, 그리고 각 시도 사찰과 간부, 그러니까 사찰계장이라든가 과장을 모은 회의를 여러 번 열었다. 최인규 장관 지시를 전달하고, 이미 그 이전에 해본 짓인 투표함 바꿔치기, 표 바꿔치기 같은 수법을 제시하면서 '자유당 후보가 80% 이상 득표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시를 내린 것으로 돼 있다. (전남) 보성이나 (경북) 영일 지구 재선거에서 다 했던 것들이다. 1958년 5.2선거가 워낙 엉망이어서 대법원에서도 (선거 관련) 판결을 많이 했고, 재선거와 보궐 선거가 꽤 많았다. 그 당시 신문을 보면, 이런 재선거와 보궐 선거에서 어떤 식으로 부정을 저질렀는가 하는 것이 아주 구체적으로 나온다.

수면제 먹이고 두들겨 패고 죽이고…엽기적인 이승만 정권

프레시안 : 부정 선거 지침이 선거 전에 폭로되지만, 이승만 정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인다.

서중석 : 3월 3일 민주당이 정부의 부정 선거 감행 방법, 일명 '부정 선거 비밀 지령'을 터뜨린다. 이건 아마 한 하급 경찰관이 준 것 같다. 무지하게 길어서 신문 여러 면에 걸쳐 자세하게 소개돼 있는데, 요점을 얘기하면 이렇다.

총 유권자의 4할이 미리 투표하게 한다, 4할은 당일 번호표를 주지 않고 대리 투표나 다른 방식으로 한다, 그때는 오전 7시부터 투표를 했는데 3인조·9인조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투표소 입구를 한 개로 하고 (그러니까) 한 군데로만 들어가게 하고, 완장 부대 300명과 20명이 투표소를 확보한 다음 경찰관이 외인 출입을 억제하는 속에서 투표하게 한다(는 것이다). 완장 부대 300명, 이건 깡패나 자유당 당원들을 동원하는 것이다. 또 기표할 때 빤히 쳐다보고 하는 게 나중에 나온다. 야당 선거 위원은 투표가 진행되기 전에는 투표소에 입장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도 있는데, 이건 개표 때도 마찬가지다. 야당 선거 위원과 참관인에게 수면제를 넣은 술과 음식을 먹여 자게 할 것, 이런 것까지 지시했다. 어떤 데에선 주먹으로 구타해 내쫓았다. 실제로 3.15 부정 선거 때 그대로 다 일어난 일이다. (3월 3일 폭로 후에도) 3월 7일 이성우 내무부 차관과 이강학 치안국장이 대전의 모 부대에서 비밀리에 연 '전국 경찰국장 회의'에서 4할 사전 투표 같은 것을 그대로 하라고 지시하고 '경찰국장 목은 장관과 대통령이 책임진다', 이렇게 얘기한 걸로 돼 있다.

프레시안 : 야당이 선거 운동을 하기도 어려운 때였다.

서중석 : 이때 구타 사건, 야당 사람들이 두들겨 맞고 도망 다니고 하는 건 부지기수다. 이미 그전부터 그랬다. 이야기하지 않았나. 1954년 선거가 각목 선거, 곤봉 선거였다고. 두들겨 패니 도망 다닐 수밖에 없었다. 1950년 5.30선거 때도 (이런 일이) 있긴 했어도, 1954년 5.20선거부터 이게 본격적이고 특히 1960년 3.15 부정 선거 때는 아주 심했다.

선거 운동 기간이던 (1960년) 3월 9일엔 민주당 여수시당 재정부장이 깡패한테 얻어맞아 절명했다. (경찰이 깡패를 동원해 저지른 일이고 그 대가로 경찰이 깡패에게 돈을 건넨 사실이 훗날 드러났다. <편집자>) 3월 10일에는 전남 광산군 송정읍에서 반공청년단이 주최한 마을 회의에서 자유당 송정읍 당 위원장이 공개 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니까, 천주교 신자가 이의를 제기했다. 장면은 천주교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지 않았나. (그러자 그 지역 반공청년단장이 칼로 찔러) 한 명은 절명하고 한 명은 중상을 입은 걸로 보도됐다. 그전에도 그랬다지만 정말 무서운 폭력 선거였다.

그러면서 예행연습을 여러 군데에서 많이 했다. 이것도 신문에 그대로 보도된다. 예컨대 자유당 월성갑 구 당에서는 공무원, 자유당원이 입회한 가운데 3인조로 주민을 동원해서 공개 투표하는 걸 연습시켰다. 더 나아가서 모의 투표용지를 가지고 투표까지 하게 했다. 그 모의 투표용지가 실제 투표용지와 같았다. 그래서 문제가 심각해진 거다.

일요일 시험에 토끼 사냥…2.28의거, 4월혁명 문을 열다

프레시안 : 4월혁명의 문을 연 2.28의거를 촉발한 것도 이승만 정권의 무리수다.

서중석 : 30년 동안 계속되는 우리 민주화 운동이 1960년 2월 28일 경북고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그날 대구고 등에서도 조그맣게 (시위를) 했지만 특히 크게 한 건 경북고다. 이것도 엽기적인 부정 선거 문제로 시작된 것이다.

뭐냐 하면, 2월 28일이 일요일이었는데도 경북고 학생들한테 학교에 나오라고 했다. 3월 3일에 치르게 돼 있던 기말 시험을 이날 치른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새 학기가 4월 1일에 시작됐다. 3월 2일로 된 건 5.16쿠데타 이후다. 대구고 학생들한테는 토끼 사냥에 가라고 했다. 대구상고 학생들에겐 졸업생 송별회에 가라고 했고, 경북대 사대부고 학생들에겐 일요일에 나와 임시 수업을 받게 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공무원과 상인들한테도 다 '어떻게 해라', 지시를 내렸다. (이승만 정권으로선) 믿을 수가 없으니까. (관련 기사 : 박근혜, 아버지 뒤이어 교사에게 칼 겨눈 속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 이날 장면 부통령 후보가 연설하러 대구 수성천변에 나왔다. 사람들이 거기에 못 가게 하려고 (이승만 정권이) 그런 것이다. 장면이 쓴 글이 있다. '내가 가는 어디서나 싸늘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가 감돈다. 이 선거 하나마나이지만, 대통령 후보가 죽었는데 부통령 후보마저 선거 운동을 안 하고 다니면 이 땅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되겠는가. 안 되는 걸 뻔히 아는 싸움이지만 어쩔 수 없이 내가 하고 다니는 것인데 험악한 분위기였다', 이렇게 쓰고 있다. 바로 이런 것 아닌가.

프레시안 : 항쟁은 대구 이외의 지역에서도 전개된다.

서중석 : 그다음에 큰 시위가 3월 8일 대전고에서 일어났다. 충남에서 큰 시위가 벌어졌다. 이게 3.15 마산의거 전에는 제일 큰 시위다. 이것도 바로 (대구와 마찬가지로 권력이 학원을 도구화하는) 그런 문제와 관련돼 있었다. (정부 기관지 역할을 하던) <서울신문>을 학생들한테 강제 구독을 시키고, 수업 시간에 이승만 대통령 후보 연설을 틀고 이기붕 뉴스 영화를 보여줬다. 이날 있던 민주당 강연회에 못 나가게 하려고 그런 거다. 그러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역효과를 낸 거다. 우리 민주화 운동이 이런 식으로 시작됐다. 참 기가 막힌 일이다.

3월 15일엔 어떤 선거 부정이 저질러졌느냐. 마산시장 같은 데에선 번호표를 나눠주지 않아가지고 소동이 벌어졌다. 거기에다, 3인조로 가서 투표하려고 하는데도 누군가 바깥에서 구멍을 뚫고 그걸 쳐다봤다. 세상에. 그리고 야당 참관인들을 두들겨 패서 대부분 내쫓아 버렸다. 이건 말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오후 들어 그 유명한 3.15의거로 불리는 시위가 나타난다. 경남 전체가 다 이런 식이었다. 한 교사는 혼자 투표하려 하다가 경고 처분을 받았다. "내가 투표하려 하는데 뭘 그러느냐" 하고 찍었더니만 교장이 불러서 사표를 제출하라고 했다. 그래서 사표를 냈다. 그런데 며칠 후 4.19가 날 거라고 누가 알았겠나. 그러면서 학교에 돌아갈 수 있게 된 거다. 기가 막힌 나라다. (민주당) 경남도당에서는 이날 오후 1시 30분에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그다음에 민주당(중앙당)에서 오후 4시 30분에 '선거의 이름 아래 이루어진 국민 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불법 무효 선언을 했다.

▲ 김주열 열사 추모 사업회와 4.11 마산 시민 항쟁 50주년 행사준비위원회 활동가들(좌우 양쪽)이 2010년 2월 17일 마산 3.15기념탑에서 동상을 새로 만들 것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남녀 고교생과 지식 청년만을 표현한 기존의 동상은 항쟁의 전모를 담지 못하고 있으며, 구두 통을 멘 청년과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는 여성을 추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한 주체들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연합뉴스

부정 선거의 부작용과 자유당의 다급한 감표 지시

프레시안 : 조작을 너무 심하게 해서 유권자 수보다 자유당 후보들이 얻은 표가 더 많은 일도 벌어진다. 이걸 덮으려 투표함을 통째로 태우기도 한다.

서중석 : 강원도 화천 같은 데서는 '개표하는데 100퍼센트가 넘는다'고, 선거대책위원회를 경유해서 자유당 기획위원회에 연락했다. 기획위원회는 선거를 총괄하는 곳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다급해서 연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나 보더라. (자유당 쪽 득표율을) 빨리 낮추라고, 감표 지시를 내렸다.

개표 상황을 지켜보던 국무위원, 자유당 기획위원, 선거대책위원들이 자유당 후보(의 표)가 95퍼센트 어쩌면 97퍼센트가 넘을 것 같은 상황이 되니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최인규, 이강학 이런 사람들이 (각 도 경찰국장을) 한밤중에 경비 전화로 불러냈다. '이승만은 80퍼센트, 이기붕은 70~75퍼센트 선으로 조정하라', 이렇게 지시했다. 나중에 (실제 득표율은) 더 올라갔다. 이승만은 88.7퍼센트, 이기붕은 79퍼센트로 나온다. (어쨌든) 이렇게 지시가 내려오니까 각지에서 부랴부랴 감표에 들어갔다고 돼 있다.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이 '50퍼센트 선으로 조정해라', 이렇게 말을 잘못하는 바람에 혼란이 일어났다고 돼 있다. 선거가 이랬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서른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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