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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변은 너희 탓' 떠넘긴 대통령, 결국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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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변은 너희 탓' 떠넘긴 대통령, 결국 쫓겨났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8> 4월혁명, 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월혁명, 여섯 번째 마당] 국민 죽이고 '야당 탓' 대통령, 미국도 안 지켜줬다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4.19 전에 이미 물러설 결심을 했다고 주장한다. 1960년 4월 12일 국무회의에서 그런 뜻을 밝혔다는 주장이다.

서중석 : 이승만 대통령이 일찍부터 사임할 의사를 내보였다? 이건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체제를 철폐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강변)하는 것처럼, 당시 상황을 완전히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또 이 대통령이나 박 대통령의 언동을 곡해하는 걸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3.15 부정 선거에서 (하야를 발표하는) 4월 26일까지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를 살피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마산의거 이후 국무회의 등에서 이 대통령은 역정을 자주 냈다고 하지 않았나. 신경질적 발언을 하면서 국무위원 즉 장관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러면서 자신은 좀 빠지는 식이다. 이런 태도 같은 걸 확대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4월 19일 그 '피의 화요일'에도 이 대통령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거나 적어도 거취와 관련해 어떤 의미 있는 발언을 하는 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매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났을 때도 그런 모습을 아주 분명하게 보이지 않나. 사실 자유당 간부들이나 국무위원들도 이승만, 이기붕과 똑같았다. 3.15 제1차 마산의거가 있었고 제2차 마산의거가 (4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 동안이나 더 큰 규모로 전개됐는데도, 3.15 부정 선거와 관련해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당근을 준다고 할 만한 걸 제시했느냐 하면, 그런 생각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그냥 밀고 나가면 된다(는 식이었다).

프레시안 : 문제의 4월 12일 국무회의가 열린 직후인 13일과 15일, 이 대통령은 마산의거를 '난동', '폭동'으로 규정하고 '공산당이 조종한 혐의가 있다'고 강변하는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물러날 결심을 한 사람의 모습으로 볼 수 없다.

서중석 : 그렇다. 그러다가 4.19를 맞았는데 그때도 '어떻게 하겠다', 이런 태도가 안 보인다.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신문을 면밀히 검토해봐라. 그러나 그 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태가 심각한 국면에 이른 것 아니냐'는 움직임이 이들 사이에서 조금씩 엿보인다. 그러면서 일부 국무위원은 '이기붕이 부통령 당선(자에서) 사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런 얘기를 한 걸로 알려져 있다. 이기붕은 즉각 환영의 뜻을 표했다. 4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의 뜻도 포함돼 있겠지만, 이기붕은 '당선 사퇴를 고려한다'고 발표했다. 이 '고려한다' 때문에 또 홍역을 치른다. 이기붕은 당선 사퇴를 얘기했는데, 여기에 '고려한다'는 꼭 이승만식 표현을 써서 논란이 있었다. (어쨌건) 이 대통령이나 장관, 자유당 간부들은 이런 정도로 넘어가려고 했던 것 같다.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자 이기붕은 4월 24일, 부통령 당선 및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발표했다. <편집자>)

이날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이때 장면은 '그래야 이 대통령이 물러날 것이다', 이렇게 밝혔다. 이 대통령의 퇴로를 열어주기 위해 부통령직을 사임하는 걸로 이야기했다. 이때 장면이 사임하지 않고 이승만이 정말 4월 26일 하야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면, 장면은 자동적으로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헌법에 그렇게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장면이 부통령으로 있는 한 이승만이 사임하려고 했겠나. 이 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장면 부통령 사임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이승만, 4.19 전에 이미 하야 결심? 눈곱만큼도 그럴 생각 없었다

프레시안 :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계속 버틴다.

서중석 : 이승만은 여전히 자유당 총재직에서만 물러나고, 3.15 부정 선거나 다른 문제에 대해선 국민에게 대책을 얘기하지 않는 걸 볼 수 있다. 4월 24일에 가서야 이승만 대통령이 '수습 방안'이란 걸 제시한다. 하나는 '장관을 새로 임명하겠다'(는 것이었다). 허정을 외무부 장관에, 권승렬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려 한 것이었다. 이때쯤 이 대통령이 교섭에 들어가 나중에 임명하는데, 이승만 측근 중에서 비교적 지탄을 받지 않고 능력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들을 임명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정당에 초연하겠다', 이렇게 나온다. 이 대통령은 전에도 이런 주장을 했었다.

그 수준에서 더 나아간 게 없다. 예컨대 부정 선거를 취소하고 재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고, 개헌 얘기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냥 장관을 새로 임명한다는 게 이런 국면을 풀어나가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었겠나? 그렇게 볼 수 없지 않나. 오히려 이날 '수습 방안'을 발표한다고 하면서 "이 참변을 통해 몸을 바쳐 일하고자 하는 결심을 더욱 굳게 했다"고 했다. '대통령직을 굳게 지키겠다. 4.19 같은 게 나더라도 나는 몸을 바쳐 대통령직을 수행하겠다'고 얘기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기붕과 자유당, 국무위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그쪽에서 잘못했다는 식으로.

프레시안 : 위기에 빠진 최고 권력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대신 주변 사람들 탓으로 돌리는 건 이때만 있는 일이 아니다.

서중석 : 그렇다. 4월 25일 교수 데모가 벌어지고 그것에 이어 큰 시위가 일어나면서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가 이제는 주된 구호로 등장하게 된다. 밤 11시 40분경까지 시위가 계속됐고 그 이후엔 규모가 줄어들었다. 하여튼 (이 대통령은) 이날 허정을 외무부 장관에, 이호를 내무부 장관에, 권승렬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이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허정이나 권승렬이나 다 평이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이승만이 '누가 괜찮은 사람이다', 이걸 몰랐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승만 정권에 '아첨 장관', '지당 장관' 등 문제가 많은 장관이 그렇게 많았던 건 '그 사람들만이 내가 권력을 행사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는 (이 대통령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평이 괜찮은 사람들을 썼다는 건) 우리 사회와 국가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와 관련해 좋은 인재가 있다는 걸 이 대통령도 알고는 있었다는 걸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허정은 이승만 측근 중의 측근이긴 하지만 1954년 5.20총선 무렵부터 한때는 물을 먹었다. 나중에 서울시장이라든가 한일회담 수석 대표로 기용은 되는데 그때도 많이 따돌림 당했다. 그러나 이승만 측근 중에서 능력 있고 청렴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외무부 장관에 임명돼 수석 국무위원이 됐다. 부통령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만일 이승만이 물러나면 헌법에 따라 허정이 과도 정부를 이끌게 돼 있었다. 이승만이 24일경부터 허정에게 외무부 장관을 맡아달라고 거의 사정하다시피, 운다고 할까 간원(懇願)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까지) 하지만 허정은 계속 거절한 걸로 허정 회고록에 나온다. 그러다 25일에 가서야 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허정, 권승렬, 이호를 장관에 임명할 때까지만 해도 이승만은 눈곱만큼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이승만이) 그다음에 물러나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허정 기록을 봐도 이 점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프레시안 : 대통령이 책임지지 않고 자신만은 빠져나가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의 분노는 더 커진다.

서중석 : 26일 통금 해제 시간이던 (오전) 5시경부터 다시 군중과 학생이 모여들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나타났다. 그러더니만 6시 가까이 되자 인원이 확 불어나면서 이제는 모두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고 외치고 그게 엄청난 함성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허정이 경무대로 가보니 권승렬,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가 '하야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프란체스카가 귓속말로 '이제는 하야할 때다', 이렇게 결심을 재촉했다고 하고 김정열 국방부 장관도 '이제는 하야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허정도 '물러나셔야 합니다'라고 권유했다. 4월 26일 아침이라고 돼 있어서 이것도 정확한 시간은 알 수가 없다.

이때 85세 노인네는 완전히 기댈 데가 없게 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친일파로 돼 있는 자유당 간부나 국무위원을 (완전히)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제일 가까운 허정, 김정열, 프란체스카, 이 사람들까지 물러나라고 하고, 군은 중립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지켜줄 의사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4월 19일부터 그런 기색을 보였는데 그 후 더 확실해진 거다. 거기다 미국도 물러나라고까지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이날 오전 9시 10분 매카나기 대사가 김정열 장관한테 전화해) 재선거를 촉구했다. 그랬을 때 이 노인이 '어디 한 군데도 기댈 데가 없겠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러면 '내가 하야하지', 이렇게 얘기하게 되는 것이다. 상황이 그랬다. '내가 하야하지' 하고 이 대통령이 얘기했을 때 '매카나기 대사, 매그루더 주한 미군 사령관을 불러오자'고 허정, 김정열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둘이 오기 전에 또 하나의 사태가 일어났다.

잘못 인정하지 않는 최고 권력자, 하야 발표 다음 날 최후의 몸부림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계속 대표를 데려오겠다고 하더니만 시민·학생 대표 5명을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이 대통령은 불신의 눈초리로 송요찬을 바라봤다. 그렇게 자기한테 충성을 바치겠다고 했고, 송요찬이 별을 달 때마다 그렇게 관심을 표명했는데 그 송요찬이 이제는 (이승만 기준으로 보면) '배신자'가 된 거다. 그래서 그런 눈으로 보는데, 송요찬은 시민·학생 대표를 데리고 와 애기하라고 했다. 대표들은 이승만한테 바로 사임을 요구했다. 그때 밖에서 뭔가 발사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대표들이 또 사임을 요구했다. 그러니까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사임하겠다"고 이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망명을 원하느냐"고 물어봤다. 대표들은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답변했다. '그것'이 사임인지 망명인지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사임에 더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전 10시경 이승만이 대표들한테 다음과 같이 비서가 쓴 하야 성명서를 보여준다. 아주 유명한 하야 성명서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여기서 매카나기 대사도 물어본 건데, 그러면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사임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러자 허정이 매카나기한테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명확히 이야기했다. '사임하겠다는 걸 그런 문자를 써서 표현한 거다.' 허정이 상당히 명확한 태도를 보인다. "2.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겠다." 아니, 3.15선거에 부정이 많아서 이렇게 들고일어난 것이고 그 많은 사람이 죽은 건데, 이 양반은 하야 성명서를 낼 때도 '부정이 있었다고 남들이 말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겠다', 이렇게 나왔다. 이분은 절대로 자기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다고 많은 사람이 쓰고 있다. 인정하지 않는 분이다. 여기서도 그걸 볼 수 있다. 이기붕을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겠다는 것이 세 번째이고, 네 번째로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고 해서 개헌 문제를 얘기한다. 여기에도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말이 들어갔다.

프레시안 :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최고 권력자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서중석 : 그다음에 또 문제가 발생한다. 27일에 '이제 대통령께서 국회에 사임서를 정식으로 제출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비서들이 사임서에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사임하겠다는 방송이 전날 이미 다 나갔는데도, 여러 비서가 번갈아가면서 '사인해주십시오'라고 하는데도 계속 버텼다. 정말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노독재자 최후의 몸부림이더라.

허정도 '사인을 하셔야 합니다'라고 했지만 실패했고 김정열이 옆에서 또 촉구했다. 그랬더니만 노인네는 '역시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그때 허정이 아주 세게 얘기한 걸로 기록돼 있다. '질서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했다. 허정이 그렇게 얘기하는데 이 대통령도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나. 그때서야 사인했다. 그걸 국회에 제출해 정식으로 대통령이 물러나고, 허정이 과도 내각 수반이 된다. 그렇게 한 시대가 끝났다. 지금까지 과정을 봐라. 이 대통령이 4월 25일까지 사임하겠다는 뜻을 조금이라도 비친 것이, 그렇게 해석할 만한 것을 한 게 있나? 없다.

▲ 이승만 전 대통령(가운데)이 1960년 5월 29일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공항에서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권력 2인자의 죽음은 너무도 쓸쓸했다

프레시안 : 이승만이 하야하면서 자유당 정권은 몰락한다. 2인자이던 이기붕 일가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서중석 : 4월 28일 새벽, 경무대 관사 36호실에서는 아주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다. 이기붕 일가가 자살한다. 이승만 밑에서 한때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이기붕과 이화여대 부총장을 했고 여러 여성 단체에서 제일 대표격으로 활약했던 부인 박마리아, 대통령 양자로 들어간 이강석, 그리고 연세대에 다녔고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았다고 알려진 이강욱. 이 일가족 네 명이 자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자살하는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기붕의 글을 보면, 한국전쟁이 났을 때 이 사람이 서울시장이었는데 나름대로 서울시를 돌보다 늦게야 피난을 가는 걸 볼 수 있다. 피난 가기 전에 자살하려 했다고 쓰고 있다. 그때 부인이 막고 해서 자살을 못한 것처럼 돼 있는데, 서울시가 함락되는 걸 보면서 책임감을 느꼈다, 이런 얘기다. 권력 2인자의 죽음은 너무도 쓸쓸했다. 조사(弔詞)도 읽지 않은 채 15분도 안 돼 영결식이 끝났고, 그러고서 값싼 목관에 허술한 수의를 입은 채 조봉암 등이 묻힌 망우리로 갔다. (이기붕 일가가 자살한) 4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으로 집을 옮겼다. 완전히 권력을 떠났다는 걸 이걸로 입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다음 날(29일) 최인규가 구속되는 걸 신호탄으로 장관의 대부분, 자유당 간부의 거의 전부가 구속된다. 5월 29일 미국 대사관의 알선으로 이승만이 하와이로 떠날 때 허정이 배웅을 나갔다. 이때 허정은 이승만이 왼쪽 눈을 잘 뜨지 못했고 그래서 안면 주름살이 쉴 새 없이 떨려서 마주 보기가 민망했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휴양으로 떠난다고 했지만 마지막이었다. 한국을 떠난 후 1965년 하와이에서 쓸쓸히 세상을 떴다.

프레시안 : 이기붕 일가가 살해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서중석 : 이기붕 일가가 자살했을 때 누가 총을 쐈느냐, 이 부분을 가지고 약간 논란이 있었다. 심지어 '이기붕이 도피했다', '다른 데 가서 살고 있다', '자살한 것처럼 꾸몄다', '가짜 시체다',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까지 나오고 그랬다. 또 모처에서 이기붕을 희생양으로 삼아 죽게 한 것이고 이기붕 일가가 자기들끼리 총을 쏴서 죽은 걸로 보기가 어렵다, 그런 설(設)도 있다. (희생양을 말한) 마지막 부분은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난 설로만 본다. 그간 이기붕에 대한 자료를 최대한 보려고 노력했고, 할 이야기가 많다. 그 사람의 성격 때문에도 자살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을 것이고, 이강석도 굉장히 프라이드가 강했다. 그래서 박마리아나 이강욱을 설득하지 않았을까? 이강욱은 정말 그 나이에 그렇게 죽는다는 게 얼마나 애달팠겠나.

더 짚어볼 것이 있다. 이승만 하야와 관련해 그간 벌어진 논란 중에는 (1979년) 10.26 때문에 생긴 것도 있다.

이승만 정권의 몰락과 언론의 힘

프레시안 : 어떤 것인가.

서중석 : 10.26 이후 김재규가 재판을 받을 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았는데 박 대통령의 성격은 절대로 물러설 줄 모른다. 국민과 정부 사이에는 반드시 큰 공방전이 벌어지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상할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자신이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했다. "심장"을 쏜 주요 이유 중 하나로 엄청난 희생을 막기 위해 그랬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정말 다르냐, 이런 문제가 부상한 것이다.

(공통점부터 살펴보면) 둘 다 혼자서 절대 권력을 가지려고 했다. 그것도 영구적으로. 85세 노인네가 초인적으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둘 다 2인자는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는 점도 같다. 박정희는 더 나아가 부통령을 두지도 않았고 부정 선거 대신에 아예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고들 얘기하지 않나. 자유당과 공화당 둘 다 관제 정당이고, 두 사람 모두 냉전 체제에 철두철미하게 순응하며 반공, 반북 정책으로 권력을 유지한 점도 같다. (다른 점을 짚으면) 이 대통령은 경찰, 그중에서도 사찰계 경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정보 경찰이다. 그에 비해 박정희 정권은 정보부 권력이라고 할 정도로, 중앙정보부가 경찰도 통제하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권력 유지를 위해 경찰과 중앙정보부를 사용했지만, 그 힘에서 양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이것도 (이승만 정권이 박정희 정권에 비해) 쉽게 무너진 한 요인이지만, 다른 요인도 몇 가지 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하나는 언론이다. 앞에서 군이 중립을 지키고 미국이 개입한 것도 이승만 하야의 한 요인이라고 했는데, 이와 함께 많은 사람이 '언론이 4.19 때 적극적으로 보도했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이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주장을 참 많이 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이라고 언론을 왜 통제하고 싶지 않았겠나. 언론을 통제하려 여러 번 노력했다. 법안도 만들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잘 안됐다. 마지막에 성공한 것이 1958년 12월 24일 통과시킨 국가보안법 개정안에 그 유명한 언론 조항을 집어넣은 것이다. '유언비어나 유해한 내용을 보도하면 엄벌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1959년 언론이 된서리를 맞은 대표적인 예가 천주교 쪽에서 발간해 '장면 지지 신문'이라는 얘기도 있던 <경향신문>이었다. <경향신문>은 정간, 폐간을 당한다. 사실 국가보안법으로 정간, 폐간된 건 아니지만 이것과 관련은 있다. 그러나 4대 신문 중 (<경향신문>을 제외한) <동아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가 1960년 3~4월 시위를 상세히 보도했다. 4월 19일엔 정말 세게 썼다. 그래서 '이제 이승만 정권은 더는 있기가 어렵다. 저 많은 시위자가 죽은 것도 문제지만 이렇게 언론이 보도하는 걸 봐서도 이승만 정권 존립이 쉽지 않겠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박정희의 언론 통제와 군 장악, 이승만과는 차원이 달랐다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 말기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서중석 : 그렇다. 그때는 언론을 거의 완벽하게 통제했다. 단적으로 1979년 부마항쟁이라는 정말 큰 사태, 계엄령까지 선포한 큰 사태가 일어났지만, 계엄령 선포 전엔 부산, 마산 지역 사람을 제외하고는 부마항쟁이란 게 있는 줄 아무도 몰랐다. 왜냐하면 한 줄도 보도가 안 됐으니까. 10월 18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니까 그때서야 신문이 대서특필을 했다. 국가 중대사니까 정부에서도 그건 안 막았다. 막을 수도 없는 거지만. (이승만 정권 말기와 박정희 정권 말기는) 그 정도로 언론의 차이가 컸다. 하나는 (4월혁명 때 이승만 정권을) 매섭게 때렸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가 18년간 계속 때려잡아서 언론을 무력화하고 거의 완벽하게 통제했던 차이가 있다.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차이로 군에 대한 통제를 얘기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4월 19일 오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그날 밤에 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군은 정권 쪽에서 기대한 권력 유지 도구로서 역할을 하지 않았다. 거기엔 송요찬 계엄사령관의 의지만 작용한 건 아니다. 당시 영관급들이 써놓은 글이라든가 다른 여러 사람이 써놓은 수기 등을 보면, 군은 출발할 때부터 '총은 아주 특별한 사태가 있을 때에만 쏴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도 3.15 부정 선거에 분노하고 있었고 그런 분위기를 상관들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써 놓은 것도 있다. 당시 군이 이 대통령한테 충성을 바치기가 어려웠던 측면이 그 내부에 있었던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누구나 3.15 부정 선거가 너무 심했다는 것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지 않았나. 실제로는 위관급·영관급 장교, 실제로는 이 사람들이 (일선에서) 군을 끌고 나가는 건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위에 있던 서울 지구 계엄사령관도 그럴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자기가 앞장섰던 것처럼 글을 썼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측면을 생각할 수가 있다. (어쨌건) 그래서 이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할 때까지 군은 중립을 지켰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시민·학생 대표까지 데리고 경무대에 가지 않았나.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은 그와 달랐다.

서중석 : 박 대통령은 군 출신이고, 군에 대한 통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미국과 교섭해서 특전사와 수도경비사령부, 이쪽을 자신의 직접 관할 아래 둔다. 이 대통령과 이기붕도 군에 상당히 많은 정치를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군 사단장을 임명하는 것 하나만 해도 신경을 많이 썼다. 사단장급한테도 여러 가지로 뭔가 가고 그러지 않았나. 그럴 정도로 자신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 철두철미하게 자신한테 충성하는 조직으로 군을 통제하려 했다.

물론 차지철 경호실장의 권력 남용 같은 것들이 작용해 나중에는 군에 균열이라고도 볼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그러니까) 박 대통령에게 무조건 충성만 하지는 않았다는 몇 가지 증언이나 자료도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박 대통령은 군을 이 대통령과는 비교가 안 되게 강력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걸핏하면 계엄령을 선포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박 대통령은 계엄령을 자주 선포했다.

제 몸 하나 못 가눈 이기붕, 전두환·노태우 거느린 차지철

프레시안 : 본인이 총으로 권력을 잡았으니, 군대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중석 : 그렇다. 그다음에 2인자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 이것도 중요하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이나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최고 권력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권력에 있어 2인자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것 아닌가.

이기붕은 자기 권력은 물론 이승만 권력을 지켜줄 능력도 결여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1960년) 4월 19일 시위가 컸을 때에도 6군단으로 빠르게 피신했고, 25일 다시 시위가 커지니까 또 빨리 피신했다. 이기붕이 국회의장이고 부통령 당선자로 발표된 사람인데도 그런 이기붕을 지켜줄 수 있는 건 약간의 경찰력밖에 없었다.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걸 생각하지 못할 때여서 그렇겠지만, 그 당시엔 그랬다. 그래서 이기붕은 개구멍을 빠져나가듯 뒷문으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전에 이기붕은 각부 신경통에 협심증으로 계속 고생했다. 6군단 군인이 쓴 글을 보면, 25일 오후 6시경 집 뒷문으로 빠져나갈 때 이기붕은 대소변 변기와 신경통을 앓고 있는 다리에 덮을 담요, 수건, 약간의 돈 등이 든 간단한 가방만 싣고서 6군단으로 왔다고 한다. 그런데 몸을 가누지를 못했다고 한다. 대소변을 제대로 못 봤으니까 변기를 가지고 다닐 수밖에 없던 데서도 짐작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자기 몸 하나 제대로 못 가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 대통령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차지철은 그와 달랐다. "각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경호실에 딱 써 붙였다. 차지철은 그런 신념에 따라 강력한 병력을 휘하에 두었다. 심지어 경호실 차장이 군단장급인 중장이었다.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 다 (준장 때) 경호실 차장보를 거쳤는데, 그런 소장, 준장을 갖다가 차장보에 앉히고 그랬다. 이렇게 강력하게 국가 권력, 군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면서 박정희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과시했다. 부마항쟁이 났을 때도 김재규가 큰일 났다고 얘기하자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루즈가)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 200만 명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이렇게 나왔다. 또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대행사'(박정희 대통령이 측근들과 젊은 여성들을 불러 즐긴 연회)가 열리고 바로 거기서 총탄이 쏟아지지 않았나. 그 '대행사'에서 신민당 얘기가 나왔을 때, 차지철은 '(신민당이건 학생이건) 까부는 놈들은 전차로 쓸어버리면 된다'는 발언까지 하면서 박 대통령을 안심시키고 그랬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의원) 제명 문제로 시끄럽지 않았나. (차지철은)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에 정말 맞는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현대사에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문제적 인물이다. 사진은 2011년 11월 14일 박 전 대통령 생가(경북 구미) 부근에 세워진 고인의 동상 제막식 모습. 박근혜 대통령이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박정희 "내가 발포 명령…누가 나를 총살하겠나"

프레시안 : 그런 인물의 문제 행동을 방임 혹은 조장한 건 명백히 최고 권력자가 책임져야 할 사항이다.

서중석 :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의 붕괴와 관련해 제일 큰 건 역시 본인이라고 봐야 한다. 이 대통령은 아주 보수적인 개신교도로 미국의 보수적인 개신교의 입장과 같은 게 상당히 많았다. 그러면서 군주적 권위 의식을 가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직접 군인이었던 적은 없다. 민간인이었다. 군과 관련 있을 때도 이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거기다 85세라는 나이도 (고려해야 한다.) '모든 것이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고 할 때 노인한테는 갑자기 큰 좌절감이 올 때가 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이 아무리 권력욕이 강했다고 하더라도, 4.19 때 100여 명이 죽은 것에 대해 '이거 잘못하면 큰일 나는 거 아냐' 하는 생각도 가질 수가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4월 25일 밤에서 26일 아침까지 일어나는 상황은 결국 85세 노인으로 하여금 더는 권력에서 버티기 어려운 때를 일시적으로나마 갖게 했고 그래서 사임하게끔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박 대통령 이 양반은 일본군 출신일 뿐만 아니라 일본군 출신 중 어느 누구보다도 강력한 군인 정신을 가졌다고 많은 사람이 말하지 않나. 일본의 강한 군인 정신에 대한 굉장한 존경심이라고 할까, 그리고 해방 이후에 향수 같은 것도 갖고 있었다. 다른 친일 군인들은 1950년대에 친미파로 돌아섰지만 박정희는 그것하고는 좀 달랐다. 미국적인 분위기엔 잘 안 맞았고 일본적 분위기가 상당히 강하게 밴 사람이었다고들 말한다. 일부 박정희 추종자는 여차하면 할복하려는 각오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나. 박정희는 부마항쟁이 나서 김재규가 부산 상황을 얘기할 때도,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 명령을 하겠다", "자유당 말에는 최인규라는 사람과 곽영주라는 사람이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대통령인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나를 총살하겠느냐", 이렇게 나왔다. 이렇게까지 말하면서 어떤 유신 체제 도전 세력에게든 강력하게 나갔다. 김영삼한테 본때를 보인 것처럼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하지 않았나. 총재 직무 정지 가처분 신청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진 것도 그렇고 더군다나 국회의원 제명이라는 마지막 수단까지 썼다. (이를 볼 때) '박 대통령은 쉽게 물러날 분이 아니었다. 김재규 말대로 굉장히 심각한 유혈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던 거다'라고 여러 사람이 얘기하고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서른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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