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미안하다"는 말로 가득하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물속에 잠긴 가슴 아픈 일에 대한 어른들의 사과다. 위급한 순간, "배가 기울었다"며 신고한 이는 아이들이었다. 어른들은 그저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른들이 "탈출하라"라는 말만 했어도, 아이들은 살아 돌아왔을 것이다.
온 나라가, 모든 어른이 고민해야 한다. "미안하다"는 말이 단순 사과에 그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아이들에게 무엇을 배울게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편집자 주
'사회화'를 바라보는 시선
개인이 사회에 적응하고, 사회를 발달시키며 그 속에서 개인도 성장하는 일련의 과정을 '사회화'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사회화를 '모나지 않게 사회에 잘 적응할 능력을 획득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개인의 역할을 사회적 장면에 귀속시키는 이 관점에서는 사회적 질서와 안녕을 대단히 중요시 여긴다. 가능한 한 기존의 질서가 예측 가능하도록 유지되는 것이 사회화 과정에서 개인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해 나가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회에 원만하게 잘 적응하는 것'은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바라는 덕목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런 부모들은 자기 자녀가 '편안한 생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길 바랄 것이다. 간혹 자녀가 부모에게 저항하거나 비판적인 말을 하면 더럭 겁이 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당장 문제가 아니라 성인이 되었을 때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긴장과 갈등의 상태로 살아가게 될까봐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사회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와 같다면, 교육의 장에서 가르치는 자의 관심사는 부적응 상태에 빠진 인간을 잘 계몽하여 사회적 적응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다. TV는 부적응 자녀, 부적응 부모, 부적응 부부, 심지어 부적응 교사를 계도하고 훈육하여 마침내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은 한 인간이 부적응 상태에서 적응의 상태로 변화되어 '사회화 능력을 회복'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 입장에서 사회화는 일종의 학습이요, 반복적인 훈련의 과정이다.
부모 등 기성세대에게 순종적이지 못한 아이들을 잘 훈육해 마침내 '순한 양처럼 된 상태'를 보고 달라졌다고 하는 것 속에는 보이지 않는 은밀한 폭력이 숨어 있다. 기성의 권위에 저항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순화하는 과정에서 주체의 특별함과 개성을 모두 말살하는 폭력 말이다. 아울러 그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보호자(사실은 권력자)가 바라는 것을 눈치 빠르게 인식하고 그의 기대에 따른 행동을 함으로써 더 수월한 방법으로 원하는 자원을 획득하려는 교환과 거래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 과정에서 개성이 죽고, 주장이 멀리 도망가며, 결국 '그 자신'의 목소리는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권위에의 순종을 가르치는 교육
학교 역시 마찬가지다. 모범생을 일컫는 대표적 언술, '과묵하게 맡은 바 일을 잘함'이란 말 속에는 교사가 기대하는 사회화의 과정이 그대로 들어 있다. '되도록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주어진 일을 책임 있게 완수할 것', 이것은 누구의 논리인가? 이런 방법으로 사회화의 과정을 학습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결국 그들 역시 제 목소리를 갖지 못한다. 십여 년 전만 해도 학급회의에서 곧잘 자기들의 이야기를 펼치고, 급우들과 토론과 협상을 하던 아이들이 오늘날 학급회의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고작 1년에 한 번 수련회나 체육대회 전에 '학급티'를 맞출 때만 극도의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 '소비적 관심'의 반영일 뿐이다.
지적 전통주의자들은 학교의 임무가 인류의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전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에게 지식이란 인식주체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것으로, 개인이 함부로 훼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할 인류의 문화유산, 곧 선조들이 전하는 지식을 습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당연히 교사에 의해 전달되는 지식을 '잘 기억하는 것'이다.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은 지식의 절대적 속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일이다. 이 경우, 배우는 자의 미덕은 그저 주어진 지식을 의심 없이 외우고 기억하는 것. 그리하여 기성의 전통과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다. 삶의 모든 장에서 이러한 기성의 권위가 작동한다. 특히, 성인들이 모인 집단에서 '인화(人和)'에 대한 강조는 '네 목소리를 갖지 말라'는 경고이다. 학교의 교장, 기업의 대표 등 권위를 가진 사람이 말하는 인화는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 얻어지는 허위적 분위기 같은 것이다.
사회는 중립적인 상태에서 이상적인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다. 또 모든 인간들이 낱낱으로 개별화되어 자신만 성실하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은 더욱 아니다. 그곳에는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생기는 긴장과 갈등이 있다. 또한 사회구성원이 위임한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있다. 종종 국가 권력은 시민의 삶 속에 파고들어 순종적으로 살기를 강요하고, 국가적 과업에 토 달지 않고 과묵하게 맡은 바 일을 잘 처리할 때 불편한 삶을 살지 않게 된다는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시연한다. 국가에 의해 관리, 통제되는 미디어는 이를 교묘하게 포장하여 대중들을 현혹한다. 이 과정에서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 강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 그리고 소외계층의 사람들에게는 그 방식이 안정된 사회를 위해 바람직한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허위의식을 조장한다.
삶의 많은 부분을 소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기득권 세력의 위세와 영향력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소외자의 믿음은 기득권 세력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다시금 안정된 지배가 유지되도록 한다. 이것이 이른바 그들이 말하는 '사회 질서'이다. 누구든 사회에서 제 역할이 있으므로 분수에 맞게 처신하고 생활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권력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보지 못하며, 피폐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산다. 이들은 보잘 것 없는 삶의 원인을 '내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는 것이 사회화
그래서 사회화의 핵심 개념을 다시 생각해본다. 진짜배기 사회화는 사회에 잘 적응하여 작은 유익함이나마 내 것을 챙기며 사는 소소한 삶이 아니라, '내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금 아이들에게 "네가 편안하려면 잘 적응해", "모난 돌이 정 맞아"라는 한쪽 편의 사회화로 안내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린 그들에게 "네 목소리를 내어 봐", "담대하게 비판해 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의 목소리가 있고, 반대편의 목소리가 있을 때, 그것들은 서로 긴장하고 갈등하며 합리적 결말을 위한 의사소통을 시작한다. 비로소 일방적이었던 말의 방향이 주고받는 쌍방향의 그것이 된다. 이 상태가 번잡하고 시끄럽다 하여 피할 일이 아니다. 민주적 시민성이 전제되지 않는 사회화는 필경 누군가의 의도를 실현하는 구실일 뿐이다.('민주화가 진전되었다'라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절차적 민주주의'가 신장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시민의 정치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일 뿐,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서 민주주의가 공정하게 실현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립을 지켜야 할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하여 한쪽 편을 들고, 농약도 과학이라면서 친환경 무상급식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에도 집권 여당의 지지율은 야당의 지지율을 모두 합한 것보다 높다. 이 모든 것들이 '내 목소리를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롯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과묵하게 맡은 바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미덕으로 포장하는 동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방법을 찾는다. 무슨 일이건 의심과 회의를 가지고 따지며 묻고 토론하게 하는 것, 여기에 민주적 시민성이 있다. 이것이 '절차 민주주의'를 넘어 모든 이의 삶 속에 깃든 진짜배기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다.
* 위의 글은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 92호 "육아, 시장의 유혹을 넘다"에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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