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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그들은 철도 국영화를 외쳤다…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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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그들은 철도 국영화를 외쳤다…왜?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27>프랑스 오르세역과 신촌역
1820년대에서 1870년대까지 영국과 미국이 산업혁명의 파도를 타고 기계문명을 꽃 피우는 동안, 프랑스는 엄청난 산통을 겪고 있었다. 때문에 산업화 초기, 프랑스에서의 철도 건설은 지지부진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감옥 공격사건으로 상징되는 대혁명은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까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면서 이어졌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궤도를 이용한 운송수단이 광산에 운영됐고 이것이 마침내 철도로 발전한 것처럼, 프랑스에서도 궤도를 이용한 운송수단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비록 미친놈 소리를 들으며 정신병동에 감금됐던 인물이긴 했지만, 이미 프랑스의 엔지니어 솔로몽 카우스는 기계장치를 이용한 마차의 견인이 현실화 될 것을 17세기 중반에 장담했었다.

증기기관의 개량은 거듭되고 있었다. 철도의 탄생을 위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이웃나라 영국에서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을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18 Brumaire)‘의 군사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1803년부터 1825년까지 유럽 전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게 된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의 철도개발과 건설은 완전히 중단된다. 근대 초기, 영국이 철도를 확장시켜 산업화의 길을 선도적으로 열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어준 덕분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난 뒤인 1827년에야 생 티엔느(Saint-Etienne)광산에 석탄운반용 철도가 처음 놓였다. 1830년에는 생티엔느-리용 라인의 지보(Givor)-리브드지에(Rives-de-Gier)간 화물철도노선에서 승객을 태우는 여객용 철도의 부분 운영을 시작했다. 1832년에야 전체노선에서 여객용 철도를 운영할 수 있었다. 이 최초의 철도가 개통된 이후 10년 동안 프랑스 철도 확장은 심각한 정체를 겪었다. 반면 영국의 철도는 대 확장 시기를 열었고, 벨기에, 독일, 스위스에서도 철도는 새로운 수송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과 프랑스의 유사점을 꼽으라면 아마도 수도가 갖는 위상이 일 것이다. 대한민국을 서울공화국이라고 부르듯이 프랑스는 파리이면서 파리는 프랑스와 동격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웃나라 독일은 프랑크푸르트나 함부르크, 뮌헨 등 여러 도시들이 수도 베를린과 더불어 특색 있게 발전했다. 독일이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던 현실도 작용했다. 런던도 대영제국의 일원 중 잉글랜드만을 대표 하는 것에 비하면 파리가 프랑스에서 갖는 위치는 절대적이다. 모든 것이 파리를 기점으로 뻗어 나가는 특성상 프랑스에서 철도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파리를 중심으로 한 노선이 놓여야 했다. 파리에 처음 여객용 철도가 놓인 것은 1837년 생 제르망(Saint-Germain)까지 운행하는 노선이었다. 철도가 놓이는 시점을 전후 파리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박흥수

혁명과 반혁명, 혼돈의 시기의 파리

파리는 허물을 벗어 던지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 전체가 파리를 축으로 하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있었다. “모든 혁명은 기존 사회를 해체 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은 사회적이다. 모든 혁명은 기존의 폭력을 무력화 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은 정치적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온다면 파리는 파괴와 창조의 공간이었다. 또한 사회적, 정치적인 혁명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축이었다. 파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틈만 나면 발끈해서 거리로 나가 바리케이트를 쌓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봉건적 사회체제 및 문화체제가 새롭게 형성된 제조업, 상업, 금융, 행정 등과 제대로 조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시는 온갖 불평등과 갈등을 담아내기에 알맞은 구조와 환경을 갖고 있어서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되어있던 공간이었다. 어떤 사회질서도 기존의 여건 속에 이미 잠복해있지 않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면서도 과거를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파괴를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 사회체제에선 의미가 없었던, 새롭게 획득된 시민권은 자본주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적 요건이다. 시민권을 누리게 되는 시민의 범주에는 자유로운 예비 노동자와 이들을 고용할 자본가가 포함되어 있다. 귀족과 지주들은 새로 등장한 세력에게 훼손당할지도 모를 기득권에 대해 걱정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해 파리로 몰려든 사람들은 파리를 더욱 인화성이 높은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좁은 지역에 사람들이 몰려들면 주택단지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주택단지에 근대적 의미의 도시계획이 적용될 리 만무하다. 50~60년대 서울의 판자 집과 달동네처럼 조악한 형태의 주택들이 파리 곳곳에 생겨났다. 마치 세포들이 분열을 하듯, 유입되는 인구의 증가에 따라 확장되는 도시에 살고 있는 구성원들은 모두가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질퍽거리는 거리, 상하수도의 부재에 따른 식수의 부족과 오염물의 방치, 전염병, 실업, 빈부격차는 극빈층과 상대적 빈곤층, 상인과 중소 자본가, 대자본가, 귀족 모두가 서로를 혐오하며 제거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온갖 특권을 누리고 있는 귀족들은 불온한 사상에 오염되어 국가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갈 수 있는 천민들의 저항을 경멸했고 두려워했다. 비참한 사람들(Les Misérables)과 이들의 동맹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파리 시내 곳곳에서 왕과 귀족들에 대항했다. 가난한 이들의 구역은 구불구불한 미로 같아서 진압군을 피해 달아나기 좋은 환경이었고 좁은 도로 폭으로 인하여 바리케이트를 쌓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1848년 2월 혁명은 100년에 이르는 프랑스 혁명 과정의 변곡점이었다. 민중을 앞세워 혁명을 성공시킨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과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하층 계급을 노골적으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결국 1848년의 2월 혁명의 열매는 2년 뒤 루이 나폴레옹이 가로챘다.

파리의 혁명세력은 1948년 2월 루이 필립 왕을 쫓아내고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며 두 번째 공화국을 실현한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사관학교를 졸업한 포병장교 출신으로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혼란에 빠진 국가를 구하겠다며 군사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해 제1통령이 됐다. 이후 집권 연장을 위해 원로원의 추대를 받는 방식을 동원, 황제가 된다. 노회한 독재자 이승만을 물러나게 한 4월 혁명 이후의 시기를 혼란으로 규정하고 군사 쿠테타를 일으켰던 박정희는 나폴레옹의 열렬한 숭배자가 아니었을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1804년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나폴레옹에게 <영웅>이라는 제목의 3번 교향곡을 헌사 했던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황제에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악보를 찢어 버렸다. 공화국과 민중을 배신한 독재자에 실망한 대 음악가와 달리, 나폴레옹을 프랑스의 영광을 실현했던 인물로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피가 섞인 친족인 루이 나폴레옹이 다시 과거의 찬란한 시절을 재현해 주리라는 환상을 가졌다. 큰아버지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후광 덕에 최고 통치자가 된 루이 나폴레옹은 그러나, 혈육의 어두운 그림자만 계승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공화국 대통령으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1851년의 쿠테타, 1852년의 황제선언으로 1848년 2월에 만개했었던 파리 시민들의 희망을 꺾어 버렸다. 이후 프랑스는 1871년 파리 꼬뮌의 마지막 민중봉기까지, 혁명의 에너지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겪게 된다.

▲프랑스 최초의 여객 철도 노선인 파리-생제르망 철도의 초기모습 ⓒ위키피디아


프랑스 국영 철도 탄생, 그리고 국영화를 외쳤던 지식인들

1851년 이후 파리는 대 성형에 들어가게 된다. 이 성형수술의 주치의는 근대 파리의 설계자로 유명한 오스망(Baron Haussmann)이었다. 루이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았던 오스망은 도시를 강제로 근대성이라는 틀 안에 몰아넣었다. 부자들은 파리의 불결하고 끔찍한 상태에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1848혁명 시대를 관통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여성운동가, 개혁가들은 도시를 미래의 좋은 사회가 되어야 할 어떤 것의 기반이 되는 하나의 정치적, 사회적, 물질적 유기체 형태-하나의 신체정치-로 보고 관심을 가졌다.(데이비드 하비의 <파리 모더니티> 중-필자) 1851년 파리의 엘리제 궁에서 루이 나폴레옹과 저녁을 먹은 오스망은 지방 몇 곳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가 1853년 파리지사로 입성한다. 1851년부터 1853년까지는 파리 곳곳에서 대규모 철거가 이루어졌다. 불순한 노동자들이 도시에 머물도록 하는 공장들을 대거 외곽으로 이전시켰다. 하층민들의 마을에 철거반원들이 들이 닥쳐 건물을 부쉈다. 거금을 들여 새로 지어진 근대식 건축물들도 오스망의 계획에 어긋날 경우 가차 없이 헐렸다. 오스망은 ‘직선’에 꽂혔다.

시간과 공간의 관점에서 인류사의 거대한 획을 긋는 사건은 철도의 등장이었다. 철도는 인위적 구조물이고 이것은 자연과의 단절을 전제로 했다. 과감하게 돌파하는 기계문명으로서의 선로는 직선을 요구했다. 파리에 들어선 철도역 사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산업과 상업지구, 주택지구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대폭 절감시켜줄 수 있는 대로들이 건설되었다. 또 이들 대로를 이용해 역과 역사이를 이어주고 도시를 순환하는 교통수단이 필요했는데, 파리에 존재하는 여러 옴니버스 회사가 하나로 병합되어 그 욕구를 충족시킨다. 18인승 합승 마차인 옴니버스는 확장된 대로를 다니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대규모 수송이 가능한 철도를 타고자 하는 사람들을 집단으로 실어 나를 수 있었다. 파리 옴니버스란 이름으로 통합된 회사를 만든 사람은 물론 오스망이었다. 철도 시스템에 맞추어 연결된 새 도로는 혁명 열기가 끓어올랐던 지역을 둘러싸고 있었다. 진압병력과 경찰들이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덤도 얹어 주었다.

파리에서 대규모로 이루어진 철거작업과 철도 건설은 불황기를 극복하는 촉매가 되었다. 물밀 듯이 몰려오는 이주민들로 인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파리 인구의 상당수는 토건개발이 가져온 일자리로 생계를 유지했다. 파리의 파괴와 생성은 공공개발로 이루어졌는데 미국의 뉴딜 정책처럼 일시적으로 실업과 빈곤의 해소, 경제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 철도는 사적 자본의 참여가 있기도 했지만 다른 나라들이 개별 자본가나 그들의 공동 투자에 의해 건설 되었던 것과 달리, 정부의 주도에 의해서 확장된다. 이 뿌리 깊은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파리는 강력한 공영철도 시스템을 갖고 있다.

프랑스 철도가 공영체제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00년에 이르는 혁명의 혼란기 속에서, 안정적으로 거대 인프라에 투자할 정신을 가진 자본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더 큰 이유는 프랑스의 혁명정신 때문이었다. 1800년대 중반을 풍미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의 한 그룹인 푸리에주의자들, 유토피아적 세상을 꿈꿨던 콩시데랑을 비롯해, 다양한 혁명 참가 그룹들은 철도망 국영화와 함께, 철도 건설이 개인의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이루어지도록 제안했다. 항상 혁명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던 정부는 ‘철도 건설을 위한 국민 협약‘을 합의, 공영철도를 원하는 시민들의 뜻을 반영한다. 물론 사적 수탈을 허용하는 조항을 슬쩍 첨가하는 꼼수도 빠뜨리지 않았다.

국토부가 수서발 KTX를 분리하려고 안달이 나 전횡을 일삼고 있는 일을 보면, 170년 전의 근대인들보다 형편없이 뒤떨어지는 한국 관료체제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철도의 통합운영 체계는,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네트워크 산업의 특성상 철도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여야 한다. 사적 자본들에 의해 중구난방으로 건설되고 운영되었던 세계 여러 나라들의 철도가 결국은 국영체제로 통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철도 산업이 제자리를 잡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프랑스 시민들은 국가의 개입이 토건 자본이나 금융가, 정부 관료들 등 특권적 엘리트나 부자들에게 이익을 보장하도록 작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파리라는 거대 도시 공간이 국가라는 전체 공간과의 관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주목했다. 1843년 <아름답고 웅장한 파리(Paris pittoresque et Monumentale)>를 출간한 메이나디에(Meynadier)는 철도에 대한 혜안과 장기적 안목을 자신의 저서에서 피력한다. 메이다니에의 구상은 모든 철도 체계를 통합하는 훨씬 더 합리적인 철도 체계를 건설하는 것이고 이에 맞추어 도시를 철거함으로서 도심부를 재활성화 하는 방안이었다. 이것은 오스망이 기획하는 도시구상과도 일치하는 면이었다.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방사성 철도망이 국가의 주도로 공영체제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은 바리케이트를 수호하며 자유·평등·연대의 깃발을 올렸던 레미제러블들이 흘린 피 덕분이었다.

오스망의 파리 재구성은 3단계의 도로 계획을 통해 실현된다. 개선문과 불로뉴 숲을 잇는 새 대로의 폭은 애초 설계했던 규모의 세 배로 늘어난다. 오스망이 파격적으로 바꾼 공간은 사람들의 사고와 행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십자형의 대로들이 건설되고 도로는 마카담(Macadam)이라는 새로운 공법으로 포장되었다. 마카담 공법은 현대의 도로 건설에 일반화된 것인데, 자갈을 깔고 그 위에 아스팔트를 부어 굳히는 방법이었다. 이에 급진파들은 저항을 봉쇄하는 공법이라고 비난했다. 포장 돌을 빼내어 바리케이트를 쌓거나 진압군에 대항한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파리의 건물을 철거하고 건설하는 현장, 그리고 철도 건설 공사장 등을 가득 메웠던 노동자들 덕분으로, 자본주의의 최대 위기인 공황을 탈출할 수 있었다. 노동력 과잉이 도시 재건과 교통시스템의 장기적 재편 작업을 통해 해소되었기 때문이었다. 1850년 몇 가닥에 불과했던 철도망은, 1870년에 1만7400킬로미터(km)에 달하는 거대한 신경망이 되었다. 철도 운송망이 생기자 교통량과 산업생산량은 더 빠르게 증가했다.

▲프랑스 시민들의 피가 공화국과 공영체제를 만들었다. 에른스트 메소니에가 그린 1848년 6월 모르텔르리 거리의 바리케이트에서 죽은 시민군의 모습.

오르세역과 오르세미술관, 그리고 우리의 신촌역

단 한 번,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저마다 가고 싶은 시대를 고민하느라 머리를 싸맬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분야에 빠져있는 사람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타임머신 티켓이 주어진다면 혁명과 반혁명이 충돌하고 철도가 세상을 바꾸는 19세기 파리행을 주저 없이 선택할 것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파리로 여행 온 소설가 길(오언 윌슨)은 자신이 동경하던 1920년대의 파리로 가게 된다. 이곳에서 헤밍웨이와 살바도르 달리 등,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를 만나고 피카소의 연인 아드리나아(마리옹 코티아르)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현재로 돌아온 길은, 노트르담 성당 건너편의 작은 서점,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rspeare and Company Bookshop)를 나와 센 강변에 늘어선 중고책 서점에서 눈에 띄는 낡은 책을 한 권 사게 된다. 바로 아드리아나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이 책에서 아드리아나가 자신에게 마음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 길은 다음 시간 여행에서 더 적극적으로 아드리아나에게 다가간다.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2층으로 된 아주 작은 서점인데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오기 전에도 영화에 등장했던 적이 있다. 젊은 청춘들의 로망인 여행에서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비포 선 라이즈>의 속편인 <비포 선 셋>이 시작되는 장소이다. 열차 안에서 눈이 맞은 두 청춘은 열차가 정차한 비엔나 역에서 각자의 길을 가야 했지만, 딱 하루 밤을 같이 지내는 조건으로 의기투합한다. 흔들리는 열차는 언제든지 마주치는 이성 앞에서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사랑을 하려면 기차를 타라. 비엔나에서의 하룻밤을 보낸 뒤 6개월 뒤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진 두 남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몇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장소가 바로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이다.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에서 센 강을 따라 노틀담 성당을 등지고 계속 걷게 되면 강 건너편에 루브르 박물관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왼편으로는 오르세 미술관이 있다. 이 오르세 미술관이 있던 강둑 자리는 1782년에서 1788년 사이에 세워진 삼 호텔(Hotel de Salm)이 있던 곳이다. 1810년과 1838년 사이에는 기병대의 막사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 시기 시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군부대의 막사가 이곳에 있었던 이유는 그 만큼 파리의 곳곳에 쉽게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파리시의 새로운 재건 시기에는 외무부로 청사로 계획되기도 했지만, 회계법원 등의 정부 기관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센강 오르세 둑 위의 여러 정부 기관들을 포함한 건물들은, 1871년 파리 꼬뮌기간 동안 모두 불타 없어진다.

1899년 프랑스 정부는 오를레앙 철도 회사에 폐허로 변해있던 오르세 부지를 양도했다. 이미 1897년부터 파리 중심부에 역을 건설하고자 후보 지역을 물색했던 오를레앙 철도회사는 루브르 궁전 등의 여러 후보지 중 오르세를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파리의 가장 우아하고 품위 넘치는 지역에 철도역을 건설하게 된 철도회사는 주변에 걸맞는 역사 건물을 짓기 위해 노력한다. 오르세역은 다른 파리의 역에 비해서 천장이 낮고 폐쇄된 형태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당시로서는 희귀한 전기철도전용 역이었기 때문이다. 증기기관이 내뿜는 수증기와 연통의 연기를 확산시켜 배기할 필요가 없었기에 거대한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의 유서 깊은 건물과 어울리는 격이 필요했다.

설계자 빅터 라루(victor laloux)는 근대적 건축물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떠오른 강철 구조물로 역을 만들기로 했다. 강철로 마감된 골격과 아치형 지붕과 기둥들은 고대의 신전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현대 건축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화물전용 리프트와 승객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됐고 지하층에 16개의 선로가 놓여졌다. 강철위에 유리로 덧대어진 오르세 역의 천장을 통해 태양 빛이 굴절돼 들어왔고 승객들은 이 화려하고 신비로운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떠나기 위해 줄을 섰다. 32미터(m)의 높이에 40미터의 폭, 138미터 길이의, 증기나 연기가 없는 산뜻한 역의 모습은 승객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철도역으로 쓰이던 시절의 오르세 역 모습(구글 이미지 검색)

모두가 알다시피 오르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이다. 미술관 입구에서 입장권을 사고 길게 늘어진 줄을 따라 들어가 보안검색대를 지나고 나면 왼편으로 전시장 입구가 나타난다. 이 입구로 들어가면 로비가 나오는데 이 로비 한가운데가 오르세 역의 승강장들이 있던 자리이다. 중앙에 세 개의 승강장 양쪽에 선로가 놓였고 그 선로 위로 열차가 들어왔다. 중앙 쪽 승강장 외에 건물 벽 가장자리 쪽에도 승강장이 있었는데, 이 승강장 안쪽의 여러 방에 지금은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서 보면 오르세 미술관의 전체 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천장이며 건물기둥, 계단, 벽면 등 그 자체로 멋진 예술 작품이다. 1851년 런던 산업박람회가 열렸던 수정궁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한, 강철과 유리가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오르세역은 파리에서 남서부를 향하는 노선의 최고역이 된다. 그러나 오르세역은 1939년까지만 철도역으로 이용됐다. 처음부터 큰 규모로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점점 커지고 길어지는 열차들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짧은 승강장 길이와 새롭게 진보된 전기철도 시스템을 적용할 수 없는 구식 역이 되어버린 오르세역은 파리근교 교외선 전용으로 이용되다가 아예 폐쇄되었다.

만약 오르세역이 한국에 있었다면 오늘날 그 실체를 볼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역사적 의미와 문화적 가치 따위는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돈만이 최고의 가치요 선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오르세 같은 역이 보존될 리 만무하다. 흉측한 민자 역사로 변신한 수많은 역들을 드나들 때면 저절로 한숨이 나오게 된다.

그 중의 압권은 서울 경의선의 신촌 역이다. 민자 역사 건설이 추진될 때 서울 한 복판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근대 문화유산인 신촌역 보존 운동이 일어났다. 거대한 상업건물이 들어서더라도 신촌역만큼은 철거하지 말고 보존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정부의 조정에 이어 민자 역사 건설사도 신촌역을 살리자는 시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기사를 봤다.

신촌역 바로 위에 대형 건물이 들어서 작은 신촌역을 압박하는 모양이라도, 역이 보존된다면 차선책이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건설자본은 시민들을 속였다. 신촌역은 간단하게 흔적도 없이 철거되어 버렸다. 민자 역사 귀퉁이 한편에 영화촬영장의 미니어처처럼 조악한 형태로 재현돼 놓여 있을 뿐이다. 볼 때마다 분통이 터진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도로에서부터 곳곳에 근대문화유산 신촌역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데, 진짜 신촌역은 없다. 가짜로 만든 신촌역은 더 이상 근대문화유산 일수도 없다. 버젓이 가짜를 내놓고 또 이를 진짜처럼 안내하는 대한민국에서 역사나 문화를 제대로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윤과 효율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무엇인들 제대로 지켜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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