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朴, 200명 가두고 사죄의 눈물? 진정성 없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朴, 200명 가두고 사죄의 눈물? 진정성 없다" [인터뷰]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 제안자 용혜인 씨
지난 18일, 세월호 참사 추모 침묵 행진단 100여 명이 연행됐다. 죽창이나 '꽃병' 하나 들고 있지 않았다. 국화꽃 한 송이, '가만히 있으라'라고 쓰인 종이 한 장 들고 청와대를 향해 걸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행진단을 포위하고 한 자리에서만 100여 명을 잡아갔다.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을 주도한 용혜인 씨는 "이것이 국가입니까"라고 외쳤다. (☞ 관련 기사 : ""이게 국가인가"…경찰, '촛불 행진' 100명 무자비 연행")

용 씨를 비롯한 연행자들은 꼬박 이틀을 유치장에서 보냈다. 용 씨는 시위 주동자라는 이유로 18일 연행자 가운데 꼴찌로 풀려났다. 용 씨가 유치장에 있는 동안 응원 행렬이 이어졌다. 용 씨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이 면회 오고, 그의 페이스북에는 수많은 격려글이 올라왔다.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의 첫 제안자이자 18일 행진을 주도했던 용 씨는 사법 처리 대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용 씨는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는 지난 21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세월호 사고를 해프닝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라고 했다.

▲지난 18일 세월호 참사 촛불 행진 도중 경찰벽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발언하고 있는 용혜인 씨. ⓒ프레시안(최형락)

용 씨가 연행된 날은 광주 민중항쟁 34주기였다. 용 씨는 "광주 항쟁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죽었던 일이 역사가 된 건 끊임없이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세월호 300명의 죽음을 끝까지 기억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의무이자 역할"이라고 했다.

그는 세월호 사고를 "생명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 사회가 낳은 참사"라고 규정했다. 그가 청와대로 향한 건 돈보다 생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달라는 말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공권력의 폭압이었다. 그리고 용 씨가 연행된 바로 다음날, 박 대통령은 대통령 담화를 발표하며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용 씨는 "200명 넘게 창살 아래 가둬놓고 국민 앞에서 사죄드린다고 우는 모습에 얼마나 진정성이 느껴질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경찰이 자신을 미행한 사실도 밝혔다. 아울러, 자신을 미행하고 심지어 유가족들까지 미행한 공권력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 사회와 국가에 끊임없이 묻고 있다. "이것이 국가입니까"

다음은 용 씨와 나눈 대화 전문.


프레시안 : 연행 과정에서 손목 통증을 호소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몸 상태는?

용혜인 : 연행 과정에서 여자 경찰들에게 손목을 세게 꺾여서 통증이 있다. 심각한 정도는 아니다.

프레시안 : 연행이 처음인가.

용혜인 : 처음이다. 그래서 좀 두렵기도 했다. 공식 행진은 청계 광장에서 마무리하고 해산하자고 했다. 이후 저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얘기를 전달하러 청와대 앞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시민분들이 나를 따라오셨다. 그래서 청와대로 가는 중에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경찰들이 몰려왔고, '오늘은 연행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마음은 먹고 있어서 잡혀갈 때 초연하게 잡혀가야지 마음 먹었는데, 막상 제 눈 앞에서 다른 분들이 끌려가고, 또 저를 잡아가고 그러다보니 화가 나더라.

프레시안 : 은평경찰서 유치장에 있었다고 들었다. 같이 유치장 들어간 분들 어떤 분들이었나.

용혜인 : 저와 함께 은평서에서 조사를 받은 건 9명이고, 서부서에서 조사 받고 나중에 은평서 유치장으로 옮겨온 분 10명. 총 19명이 함께 있었다. 본의 아니게 무단 결근을 하게 된 직장인 분들도 꽤 계셨다. 74세 노인 분도 계셨다. 이분은 어처구니 없이 끌려오셨다. 18일 광화문 광장 인근 서점에 가서 딸에게 줄 책을 사고 집에 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갔는데 사람들이 잡혀가는 걸 보고 항의하다가 연행되셨다. 광화문 동네 주민이신데 나오셔서 사진 찍다가 잡혀온 분도 있다. 100명 연행됐는데, 그 중 제가 아는 분들은 30명도 안 됐다. 나와서 보니까 다 모르는 분들이어서 정말 죄송한 마음이 크다. 나 때문에 괜히 연행되신 건가 싶다.

프레시안 : 유치장 안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용혜인 : 연행 과정에서 성추행 비슷한 일도 있었고, 유치장 들어가서는 여자분에게 '아가씨'라고 부르거나 욕도 좀 심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먹고 씻고 하는 일에 제약이 커서 불편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씻지 못하게 했다. 면회, 조사 핑계를 대더니 나중엔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고 못 씻게 했는데 결국 다 거짓말이었다.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길래 샤워실 들어가자마자 뜨거운 물만 틀었더니 너무 뜨거워서 데일 뻔 했다. 10분도 안 돼 탄로 날 거짓말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프레시안 : 면회에 어떤 분들이 오셨나.

용혜인 :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이 오셔서 놀랐다. 신부님도 왔다 가시고, 제가 은평서에 있다는 얘기 듣고 은평 사시는 주민들도 와주시고, 학교 후배도 오고, 이틀째엔 부모님도 오셨다.

프레시안 : 부모님 반응은?

용혜인 : 걱정을 많이 하셨다. 계속 걱정은 하시지만 "네 생각은 네 생각이니까, 네가 뭘 하든 네 생각이다"고 하신다. 제가 '가만히 있으라' 최초 제안자인 것도 알고 계신다.

프레시안 : 꼬박 이틀간 잡혀 있었다. 17일 연행자들은 하루 만에 풀려났다던데.

용혜인 : 하룻밤만 자고 다음날 오후 여섯시부터 나간다는 말이 많았다. 그런데 유치장 경관들 통해 월요일(19일)에 또 시위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와서 찾아보니 50여 분이 침묵 행진을 했더라. 아마 그거 때문에 좀 늦어진 것 같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사법 처리 대상으로 검토되고 있다고 들었다.

용혜인 : 제가 걸린 게 '해산명령불응죄'인데, 정확히 파악되는 바 없다. 조사 받을 때 경찰들이 자꾸 존재하지도 않는 '세월호 추모 청년 모임'을 만들어놓고 저더러 "거기 회원 아니냐"고 물어봤다. 그날 아침에도 일부 기자들이 똑같은 질문을 하기도 했다. 아침엔 그냥 넘어갔는데 경찰도 똑같은 질문을 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각 개인이 아니라 조직으로 엮으려는 것 같았다. 조사받을 때, 저는 신분만 밝히고 다른 거에는 답변하지 않았다. 만약 기소된다면 웬만한 얘기는 법정 가서 진술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다.

프레시안 : 청와대로 향한 이유가 무엇인가.

용혜인 : 세월호 참사로 300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첫날 이후 단 한 사람의 생존자도 구조하지 못한 데 대해 청와대 책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바로 전날(17일) 세월호 추모 촛불 집회 참가자들을 100명 넘게 연행해갔다. 이것 또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알았든 몰랐든, 경찰의 과잉충성이든 윗선에서 지시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대통령에게 항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연행돼서 청와대로 가지 못했지만 결국 저와 100명의 연행으로 박근혜 정부가 대답을 대신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걸 가만 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용 씨가 정치적으로 선동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용폐인 : 세월호 사고의 책임은 승객들을 두고 나간 선장, 청해진 해운 회사에도 있다. 제 때 대응하지 않은 청와대의 책임도 있다. 어쨌거나 이 사고의 책임을 묻는 건 대상이 박 대통령이든 선장이든 청해진이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한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는 게 정치적 선동이라고 한다면 그렇다고 하자. 어쩔 수 없다.

'박근혜 퇴진'을 말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하야를 하든 않든, 박근혜 퇴진은 이러한 사고의 고리를 끊는 시작이 될 수는 있지만 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연행되면서 계속 '이것이 국가입니까'라고 물었다. 현재 어떤 국가인가. 어떤 국가가 되기를 바라나.

용혜인 : 세월호 사고는 결국 생명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 사회가 낳은 참사다. 지금 이 나라에서 안전 비용은 그저 비용으로 치부되고 있다. 기업에선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안전 비용을 계속 줄여 나간다. 정치권에서도 '암 덩어리'라고 표현하지 않았나. 이런 인식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식이 결국 300명을 죽게 만들고 더욱이 사회적 약자인 학생 다수를 희생자로 만들었다.

이번 행진 참가자들이 무더기로 연행되면서 공권력의 민낯도 드러났다.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았고 그저 평화 행진을 하는 이들을 잡아갔다. 이번 18일 연행 건이 아니라도 저는 경찰의 감시를 받아왔다. 음식점에 있는데 몰래 사진을 찍어가더라. 유가족들도 미행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국민을 그저 통제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이상한 나라가 됐다. 안타깝다.

프레시안 : 연행 다음날,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용혜인 : 유치장에서 TV 화면을 직접 보진 못하고 소리만 들었다. 울었다고 하더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17일, 18일 이틀 동안 200명 넘게 창살 아래 가둬놓고 국민 앞에서 사죄드린다고 우는 모습에 얼마나 진정성이 느껴질지 의문이다. 해경 해체 방안, 소용 없는 일이다. 해경이 문제라면서 부처를 해산하면 결국 그 업무들이 다른 부처로 이관된다. 관료 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한 해경 해체만으로는 안 된다.

프레시안 : 대국민 담화에 대한 유가족들의 반응도 시큰둥한 것 같다.

용혜인 : 제가 유가족분들에게서 계속 듣는 이야기는, '생계비 지원이나 추모 공원같은 거 다 필요 없다. 우리 애가 어떻게 죽었는지 밝히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부가 최선 다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돈 몇 푼 받는 게 부모 입장에선 무슨 소용이 있나. 이미 자식이 죽었는데. 돈 주고 이 사건을 끝내려는 게 아니라 정말 유가족이 원하는 얘기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석방되고 뭐 했나.

용혜인 : 나오자마자 휴대폰 켰더니 페이스북에 친구들 요청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왔다. 그래서 일단 친구 요청 버튼부터 눌렀다. 저녁엔 집에서 잘 먹고 잘 잤다. 사실 유치장 안에서도 잠은 많이 잤다. 4월 이후로 시험도 있어서 쉬질 못했는데 오랜만에 잠도 자고. 연행된 게 처음인데 생각보다 별거 아닌 것 같다.(웃음)

프레시안 : 영락 없이 '시위 주동자'로 낙인 찍혔다. 앞으로 생활이 불편할 수도 있을 텐데.

용혜인 : 주변에서도 걱정하신다. 부모님 친구분들이 '그래서 취직은 하겠니'라고 하신다. 장래를 생각하면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저도 취업하려고 2년 가까이 쉬다가 오랜만에 복학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제 삶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잘 모르겠다. 그런 고민들은 지금 해도 답이 안 나오는 것 같다. 이미 제가 선동꾼, 시위 주동자로 몰렸다면, 제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유치장에서 만난 어떤 분이 그러더라. '어제(18일) 내 청춘은 꽤 멋진 청춘이었다'고. 공감되는 말이다.

전 지금 '세월호 사고를 해프닝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다. 제가 연행된 날이 5월 18일이었다. 광주 항쟁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일이 역사가 된 건 끊임없이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300명의 죽음도 끝까지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게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의무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두려워하지 않고. 결코 가만히 있지 않겠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2-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