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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여 년 전, 일본 '철도 마피아'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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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여 년 전, 일본 '철도 마피아'의 정체는?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32>일본 철도와 영국 철도
7월 4일 여러 언론사에서 코레일의 보도자료를 기초로 기사를 게재했다. 코레일이 판매하는 자유 기차 여행 패스인 '내일로'의 판매량이 급증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코레일에 따르면 지난 한 달간 '내일로' 이용객이 1만5459명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31.5%나 증가했다. 특히, 각 대학들이 여름 방학에 들어가면서 지난달 20일부터는 1일 이용객이 1000명을 넘어섰다. 5일 권이나 7일 권의 패스를 구매해 철도를 이용할 수 있게 한 '내일로'는 놀이공원의 자유 이용권처럼 마음대로 기차를 탈 수 있게 해준다.

아쉬운 점은 이런 패스에 고속철도 이용 제한을 두거나, 일반 열차에 한해서도 입석이나 자유석만 이용하게 한다는 것이다. 최대 이용기간도 7일에 불과하다. 한 번 여행을 시작하면 제한된 기간 안에 본전을 뽑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왕 코레일이 젊은이들의 철도 이용을 유도하고 철도 친화적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방침을 가졌다면, 15일이나 한 달의 유효기간을 두고 선택적으로 철도를 이용할 수 있는 플렉서블 패스(Flexible pass) 같은 상품도 고려해볼 만 하다. 유레일 패스나 기타 여러 나라의 철도 패스들과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철도 수준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한국 철도의 구조적, 고질적 문제인 선로 용량 부족에 따른 좌석 공급 부족은 자유 여행 패스에 더 많은 혜택을 줄 수 없게 만든다. 철도의 구조가 철도공사 영업 기획팀의 상상력조차 막아버려 고루하고 빈약한 열차 패스만을 내놓게 한다.

민영화 로드맵으로 진행되고 있는 수서발KTX 분리 같은 일은, 자본과 관료의 검은 거래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자유 여행 열차 패스 같은 것에도 영향을 미친다. 작은 땅덩어리에 빈약한 철도망, 더 협소한 고속철도망을 찢어서 서로 다른 회사들로 나누게 되면 철도 패스 제도가 활성화 될 수 없다. 수서발KTX가 개통되어 선로 용량이 증가해도, 백성들이 다니고 싶은 바가 있어도 여행을 쉽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코레일이 통합 운영하게 되면 전체 철도망을 고려해 철도 이용을 더욱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다양한 할인 제도와 철도 패스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잘게 찢어진 철도 회사들은 자신들의 관할 구간을 벗어나는 사업 구상을 할 수 없다.

일반 철도 노선 운행을 못하는 수서KTX주식회사는 '내일로' 연계 티켓 같은 것을 만들 수도 없다. '내일로' 티켓 이용자에게 주는 혜택인 2회한 KTX 50% 할인 제도 역시 코레일의 경쟁회사인 수서발KTX에는 적용할 수 없다. 두 회사가 설사 공동 이용 패스를 만든다고 해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상호간 수익 배분을 둘러싼 정산과 계약 이행에 따르는 여러 가지 쓸데없는 거래 비용도 발생 한다. 국토부 관료들은 효율성을 이야기하지만 자유 여행 패스 하나만 보더라도 수서발KTX 분리가 얼마나 무익한 일인지, 아니 유해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어쨌든 누구라도 5일이나 7일 동안 젊음을 밑천 삼아 마음껏 기차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3500킬로미터(km) 정도의 영업 거리에 불과한 한국 철도라도, 철로를 따라 이어진 길마다 담고 있는 이야기들과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정말로 흥미진진한 일이다. 혹시 이번 여름에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못한 만 25세 이하의 청춘들이 있다면 5만6500원이나 6만2700원짜리 '내일로' 패스를 구매해 질리도록 기차를 타보길 권한다. 장담하건대 한국에서는 질리도록 기차를 타기도 쉽지 않다.

▲진짜 기차. 일제 강점기때 경부선을 달렸던 증기기관차. 통감부가 미국 볼드윈사로 부터 수입해 부산 초량공장에서 조립해 운행했다, 현재 한국교통대학교 교정에 전시되어있다. ⓒ박흥수

기차는 왜 기차가 됐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에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우리가 부르는 기차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왔을까? 근대 이후 세계를 언어의 측면에서 보면, 쉬지 않고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지는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의 머리와 혀에 익숙할 정도로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말 중, 빈도가 높은 것일수록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말들인 경우가 많다. 의미가 완전히 변해버린 것도 있다. 1980년대의 대학생이 노트북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는 깨알같이 손으로 필사된 종이책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4년의 같은 부탁은 와이파이 안테나 성능이 좋고 이왕이면 속도가 빠른 CPU를 장착한 휴대용 컴퓨터를 의미한다. 자기부상열차, 우주정거장, 비정규직, MRI 촬영, 해커, 블로그, 페이스북, 스마트폰, 프레카리아트 같은 말들은 언어의 단층 제일 꼭대기에 있으며, 최근에 쌓인 것들이다.

르네상스와 근대 산업 혁명을 지나면서 서양에서는 새로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천문학, 생물학, 화학 분야에서 생겨난 생소한 말들이 중세 종교적 세계관의 억압적 체제를 먼저 뚫고 나왔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반(反)성서적 불경죄를 저지른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그가 주장한 말들이 종교 재판에 넘겨진 것은 당연했다. 갈릴레오의 낙하 실험으로 알려진, 공중에서 던져진 무게가 다른 두 금속의 동시 지상 도달 현상은 중력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갈릴레오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대공국의 사람이었기에 낙하 실험의 결과를 그라비타(gravita)라는 이탈리아 말로 불렀다. 그라비타는 영어권에서는 그래비티(gravity)로 명명됐다.

르네상스를 횡단한 기계 문명의 발전으로 사전은 수시로 개정판을 내야 할 정도였다. 서양의 언어들은 19세기까지 중국을 거쳐 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퍼졌다. 일본 역시 유럽 문화를 중국의 한자어 번역 자료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일본에 수입된 유럽 책 <직방외기(職方外紀)>는 1623년 한역된 것으로 이탈리아인 예수회 수사 줄리오 알레니(Giuilo Aleni)가 쓴 세계지리서였다. 지구·지중해·병원·대학·문과·이과 등의 사회 용어가 이 책의 한자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막부(바쿠후) 말기부터 가속된 개방 정책, 메이지 유신 등을 통해 새로 만들어진 말들은 '일본제' 말이 됐다. 지구 중심에서 당기는 힘을 뜻하는 그래비티는 무게와 힘을 합친 일본식 조어 '중력'으로 번역되었다.

난해하거나 생소한 서양의 말들을 쉽게 일본어로 풀어쓰기 위한 작업은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노력으로 성과를 거둔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나라의 <강희자전(康熙字典)>을 바탕으로 용어를 만들어 냈다. 조선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들이 일본에서 수입될 때 거부감 없이 채용되었던 것은 조선이 일본과 같은 한자 문화권에 속했던 탓이기도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만든 말 중에는 '기차'도 있었다. 증기(蒸汽)를 이용한 동력을 쓰는 교통수단은 '기(汽)'를 붙여 만들었다. 범선을 구시대의 유물로 밀어버린 동력선을 기선(汽船)으로, 새로 등장한 육상 교통수단 철도에 운행되는 차를 기차(汽車)로 명명했다. 결국 기차란 증기기관차가 모는 열차를 말하는 것인데 세월이 흘러 철도 위를 달리는 차량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한국에서 증기기관차는 1967년 공식적으로 퇴역한 뒤 경부선이나 호남선 등의 주요 간선에서 운행을 중단했다. 그리고 지선의 화물 운송용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소멸되었다. 이후 27년 만인 1994년, 중국에서 수입된 증기기관차는, 관광 열차로 서울역에서 의정부까지 이어진 교외선을 운행하였으나 1998년 IMF의 카운터펀치를 맞고 2000년 운행이 중단되었다. 당시 IMF가 요구한 것은 공기업의 민영화와 강력한 구조 조정이었다. 돈이 안 되는 증기기관차 운행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돈이 최고의 숭배 대상이 되어버리자 문화나 사회, 역사적 가치같은 것들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덕분에 근대를 다루는 시대물을 찍는 영화감독들은 진화된 CG기술에 의존해야 했다. 혹은 곡성 기차 마을에서 폐 선로를 이용해 관광용으로 운행 중인, 겉모양만 증기기관차 꼴을 하고 있는 짝퉁 기차를 소품으로 써야 했다. 가끔은 추억의 기차를 타고 싶을 때가 있는데, 온 국민이 경제 살리기에 매진해야 하는 이때에 이런 불손한 생각을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을 것 같다, 국토부로부터 '국가에 반하는 일'이라고 지탄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일본의 '천지개벽', 그 선두에 철도가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새롭게 부상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철도 붐' 때문이었다. 철도는 산업 혁명의 원동력이었던 증기 기관을 사회에 적용시킨다는 의미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철도를 이루는 거의 모든 것은 강철로 만들어진다. 이 때문에 철강 산업의 폭발적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철강 산업의 발전은 철을 다루는 기술도 향상시킨다. 이는 사회 전 분야에 파급됐다. 메이지 유신 이전, 이미 나가사키와 요코하마에 제철소를 갖고 있던 일본은 철도의 도입을 계기로 더 많은 철을 생산해야 했다. 곳곳에 광산이 개발되고 제철소가 생겼다. 철강 대국으로 도약은 철도뿐 아니라 조선업과 기계 공업의 발전도 초래했다. 광산과 제철소, 숱한 공장은 대규모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이것은 일본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확장시켰다.

제철 산업과 조선업의 발전은 해군력을 비롯한 군사력 증강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의 지배 세력들은 자본주의와 군사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생생한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개국 과정에서 서양이 보인 행태가 선의와 우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능 좋은 대포를 코앞에 대고 협박을 했었다. 철도의 확장은 전신의 전국적 확대를 촉진했다. 철길을 따라 늘어선 전신주와 전선은 각종 소식을 번개처럼 수 천 리 떨어진 다른 지역으로 보낼 수 있었다. 사람의 물리적 이동이 촉진되고, 각종 정보 유통망이 벼락처럼 발전하자, 일본 사회는 짧은 시간 동안 천지개벽을 맛보게 된다. 질주하는 철도,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근대 자본주의, 곧 '진격의 거인'이었다.

기존 사회의 가치가 붕괴되고, 서양 문명에 대한 경외심이 열등감으로 바뀌면서 일본은 더 적극적인 서양화를 부르짖게 되었다. 철도는 이 과정을 맨 앞에서 이끄는 상징적인 장치였다. 에도 시대는 막번(바쿠한)체제로 불린다. 조선이나 중국이 중앙의 권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지방에 관리들을 파견했던 것과는 다르게, 일본은 에도(지금의 도쿄)의 쇼군이 직할하는 지역 외에는 다이묘라 불리던 지방의 영주들이 번을 지배했다. 여러 지역의 번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쇼군의 통치 기구인 바쿠후의 승인을 받아 특화된 사업을 벌였다. 가령 조선과의 교류는 쓰시마번이 책임을 지는 식이었다.

이 같은 체제에서 특정 번의 세력 확대는 바쿠후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번의 우두머리인 다이묘들은 새로운 부의 원천이 되는 광산을 개발하거나 서양과의 교류 과정에서 얻은 신식 무기, 새로운 기술 등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시킬 수도 있었다. 바쿠후는 유일한 서구와의 교류 창구인 나가사키를 직접 관할해 무역 이익을 독점했다. 광산이나 상공업 중심 도시 역시 직할 체계로 꾸려 번들을 경제적으로 압도했다.

또한 혼인을 통한 중층적 인척 관계로 번들과의 관계가 어긋나는 것을 막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그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여러 조치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바쿠후는 다이묘들을 통제하는 제도를 또 만들었는데, 역시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적 방식인 '인질 제도'였다. 바쿠후는 산킨고타이(參勤交代, 참근교대)를 실시하여 지방의 통치자인 다이묘들을 바쿠후의 최고 통치자 쇼군이 있는 에도로 불렀다. 다이묘들은 1년은 자신의 영지에서, 1년은 에도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산킨고타이를 위해 이동하는 다이묘의 행렬은 장관이었다. 특히 다이묘의 세력이 강할수록 에도로 향하는 행렬의 규모가 컸고 화려했다. 다이묘의 행렬은 특별한 구경거리이기도 했지만 지역 주민들의 원성을 사는 불편한 일이기도 했다. 일반 백성이 다이묘 행렬 앞을 무심결에 지나치기라도 하면 참수형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절대적 권위가 부여됐다. 다이묘들은 자신의 번을 떠나 에도로 이주하고, 또다시 돌아와야 하는 생활을 싫어했다. 많은 가족과 하인, 무사들을 거느리고 에도로 이주해 집을 구하고 생활비를 대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게다가 에도에서의 생활은, 쇼군이나 중앙 정부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 만큼 늘 벌어지는 연회 등으로 많은 비용을 소요해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산킨고다이 제도는 다이묘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정치적 기반을 중앙에 복속시키게 해 중앙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바쿠후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관철시켰다. 더불어 산킨고다이 제도는 에도를 중심으로 일본 전역에 길을 놓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전국 각지의 번에서 에도로 들어가고, 또 돌아오는 다이묘 행렬을 위해 제대로 된 길이 놓여야 했다. 등짐을 든 도보 행상꾼의 길이 아닌지라, 다이묘 행렬의 통행을 위해서는 그 규모에 맞고 이동하기 편한 길이 따로 필요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고대 서양 세계를 정복한 로마와 일본의 중요한 공통점을 가도에서 찾고 있다. 벽을 쌓는 것이 아니라 길을 내어 사방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로마의 인프라 정책과 에도 시대 일본의 도로 정책은 똑 닮아있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아피아 가도나 플라미니아 가도를 비롯한 많은 도로를 만들어 여러 나라와 끊임없는 정복 전쟁을 벌였던 데 비춰보면, 일본이 섬나라인 것은 천만다행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좋게 정비된 가도라 할지라도 바다를 넘을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산킨고다이 때문에 일본 전국에서 에도로 이어진 길들을,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철도 노반이 대체해 나갔다.

에도 시대의 가장 중요한 길은 에도를 출발해 나고야, 교토, 오사카를 잇는 노선이다. 일본의 국도 1호선이기도 한 도카이도(東海道)선도 그것과 같다. 교토는 왕이 살고 있는 곳이고 나고야, 오사카는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한 대도시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이묘간 세력 다툼을 평정하고 에도 바쿠후 시대를 열게 되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 한 1년 뒤인 1601년, 도카이도는 기존의 도로를 대대적으로 개량해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도쿄 니혼바시에서 시작해 교토의 산죠오하시까지 약 495.5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이 원조다. 이후 오사카까지 이어진 길을 통틀어 도카이도라고 말한다. 간토(關東)와 간사이(關西)를 잇는 도카이도는 정치, 군사, 산업적으로 일본의 가장 중요한 간선이다.

일본 철도가 영국 철도와 비슷한 이유는?

주일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Harry S. Parkes)는 1869년 12월 7일 철도와 전신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일본 정부의 고위 관리들을 만났다. 메이지 유신이 선포된 후 이를 반대한 바쿠후의 군대와 이에 맞서 진압하려는 관군이 도쿄 전투를 앞두고 대치하던 상황이었다. 해리 파크스는 두 세력 사이에서 협상력을 발휘, 에도의 역사를 담고 있는 도쿄가 전쟁의 불바다가 되는 것을 막았다. 대세를 장악한 관군은 도쿠가와 바쿠후의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목을 원했다. 그러나 바쿠후 군대가 에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목숨을 부지하게 되는데, 이 막후 교섭의 중재자가 해리 파크스 공사였다. 해리 파크스는 일본의 수도가 불바다가 될 경우, 영국이 이익을 얻을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

이후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입성하고 유신 과업이 진척되자 해리 파크스는 일본 정부의 신뢰를 받게 된다. 해리 파크스가 일본에 철도와 전신의 도입을 서두른 것은, 보다 많은 물류와 정보의 이동을 통해 영국의 무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해리 파크스와 마주앉은 일본 정부의 관리들은 이와쿠라 총리대신을 비롯, 재정대신 시게노부 오쿠마, 재정차관 이토 히로부미 등이었다. 파크스와 일본 정부는 일본 철도의 첫 노선으로 도쿄와 고베를 잇기로 결정했다.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간선인 도카이도를 따라 철도를 놓겠다는 원대한 청사진이 마련된 것이다.

이 철도의 건설 책임은 시게노부 오쿠마와 이토 히로부미가 맡기로 했다. 이후 철도 건설은 주일공사 파크스가 메이지 정부에 소개한 영국인 사업가 호레이쇼 넬슨 레이(Horatio Nelson Lay)에 의해 진행된다. 레이는 철도 엔지니어를 고용하고 건설에 필요한 장비를 사들였다. 레이는 철도 건설 차관과 관련해 10년 상환, 연리 12%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는 런던 채권 시장에 1년 9%의 이자로 일본 철도 채권을 팔기 시작했다. 레이는 앉아서 자신이 소유한 일본 철도 채권이 팔릴 때마다 3%의 이자 차액을 챙기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해 오랫동안 서양인과 사업을 해본 경험이 있는 일본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영국은행이 운영하는 동양은행 요코하마지점을 찾아 상담을 한 일본 측은 레이와의 계약을 취소한다.

철도가 워낙 거대한 인프라여서, 건설과 운영 과정에서 눈먼 돈을 챙기려는 사기꾼들은 늘 있었다. 철도 종주국 영국은 물론이고 미국의 대륙 철도 건설 과정에서도 역시 온갖 거짓과 사기로 연방 정부의 돈을 챙기려는 일당들이 등장한다. 주일 영국공사 파크스가 철도 건설자 레이를 일본 정부에 소개할 때 파크스와 레이는 어떤 이면 계약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파크스가 아무 대가 없이 레이를 일본 철도 건설에 나설 수 있도록 일본 정부에 주선을 해 주진 않았을 것이란 심증은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영국뿐 아니라 미국과 독일에서도 철도 건설을 추진했었기 때문이다. 일본 측이 영국은행 요코하마지점에 레이의 채권 수익률을 문의하고 계약을 철회하는 과정에는 아마도 경쟁국의 은밀한 언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도 건설에 나선 업자들은 철도 정책에 관여하는 고위 인사나 정부 관료들과 한팀이 되어 이권을 나눠 가졌다. 요즘 한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철도 관피아'나 '철도 마피아'의 뿌리는 상당히 깊은 세계사적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일본 최초의 철도는 간토와 간사이를 종주하는 도카이도의 장대한 노선 대신, 도쿄의 심바시에서 29킬로미터 떨어진 요코하마로 이어진 짧은 노선이 됐다. 이 선은 1872년 개통된다. 이마저도 영국의 재정 지원과 기술 지원을 받고, 영국인 기관사와 영국제 기관차, 객차를 수입하여 겨우 건설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일본 최초의 노선에 설정된 궤간은 표준으로 공인된 궤도 간격 4피트 8.5인치(1435mm)가 아니라 협궤로 불리는 3피트 6인치(1067mm)로 결정되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재정이었다. 협궤로 만드는 만큼 건설비가 적게 들고 기관차와 객차, 화차의 제조 비용도 적게 들었다. 영국이 식민지 철도 건설에 차용한 방식 그대로였다. 협궤열차는 표준궤에 비해 고속운행을 할 수 없고 수송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 이런 특성을 영국 측이 모를 리 없었다. 한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근대적 인프라조차 제삼자의 손에 휘둘릴 때에는 상업적 고려와 관련자들의 사익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영국이 주도한 일본 철도는 영국식 통행 방식을 따라 좌측통행을 하게 되었고 기관사 석의 위치는 운전실의 오른쪽에 마련되었다. 이는 마부의 채찍이 옆에 앉은 사람을 치지 않기 위해 고안된 마차의 '오른쪽 운전석' 방식이 이어져 온 것이다. 이는 일본 철도에 이어 한국에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도쿄-요코하마 철도는 메이지 유신의 상징이 되었다. 에도 시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7~8시간을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를 메이지 시대에 와서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이 획기적으로 변했고, 앞으로는 더 큰 변화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증거, 그 자체였다.

근대를 상징하는 인프라인 철도가 에도의 심장부이자 메이지 유신의 발원지인 도쿄에 자리 잡게 된 후, 일본 사회는 예상했던 것 보다 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철도가 생기게 되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시간의 지배'를 경험하게 되었다. 철도가 개통된 지 두 달 만에 일본 전통 역법이 폐지되고 태양력인 그레고리력이 채택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갑자기 12월 3일을 1월 1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 겪게 될 변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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