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료인은 기업을 만들면서 자신이 근무했던 병원의 환자 검체를 들고 나와 연구용으로 쓰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과학적으로 검증도 안 된 엉터리 유전자 검사가 성행하고 있기도 하다." (김병수, <한국 생명공학 논쟁>, 알렙, 2014년 6월 펴냄, 저자 서론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공학은 아직까지 '핫'한 과학기술 영역이다. 변변한 성과물이 없어도 관련 기술을 보유한 벤처 기업들의 주가는 상종가를 친다. 정부는 논란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개인 연구자에게, 산학 협력이라는 명분으로 기업에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한다."한때 국내에서는 논문으로 발표하기 전에 언론에 이 사실을 알려 세간의 관심을 끌고 인지도를 높이는 행위인 '기자회견 과학'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한동안 뜸하다 요즘에는 주로 벤처 기업들이 이 방법을 쓴다. 단기간에 주가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인지도를 높여 피험자를 모집하는 데 유리하다." (저자 서론에서)
생명공학 산업에서 허풍과 사기가 판치는 이유
지적 사기와 경제적 사기 등의 대형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온갖 탈법과 불법이 판을 치고, 연구자들은 논문을 조작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러한 생명공학 산업이 생명 혹은 건강을 내걸고 사업을 하기 때문인 측면이 크다. '건강' 혹은 '생명'이라는 가치가 특수한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건강, 생명 영역은 그 한계를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얼마나 건강해야 하고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개인마다 기준이 다르다. 더군다나 이 기준을 사회적으로 결정하여 강제할 수도 없다. 이 정도면 더 건강하기를, 더 오래 살기를 포기하라는 사회적 기준이 설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살기를 원하는 이들의 요구는 늘 있게 마련이고,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상품 개발 및 생산의 동력은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 있다. 그야말로 이는 '장사'가 되는 것이다. 건강권을 개인의 기본적 권리로 주장하며 그러한 서비스를 원하는 개인들이 있다는 논리로 무장할 수 있다는 것도 큰 무기다. 제대로 된 기술이 아니더라도 '기술을 개발하고 있고 상품화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분야 기술은 상품화되면 이윤율을 높일 수 있는 기제가 존재한다는 점도 이 분야 연구의 호황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가 된다. 생명공학 연구는 연구 개발, 특허, 전매, 독과점, 상업적 의료 서비스 제공 등의 일련의 과정으로 연계된다. 건강과 생명을 위한 것이라는 명목으로 연구 개발 시에는 국민의 세금이 포함된 대규모 공적 자금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그런데 성과가 나타나면 그것을 특허란 형태로 사적으로 전유하여 이를 통해 초과이윤을 달성하는 것이 일반적 패턴이 되었다. 이는 제약 회사가 사용하여 그 효과를 입증한 방법이다. 이에 생명공학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와 기업은 유전자와 같은 인체 유래 물질에도 특허를 붙여 본인들만이 독점적으로 이윤을 가져가려 하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도둑질이다. 인류 공동의 자산을 사유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과학기술 연구 및 상품 생산 영역에 비해 생명공학 분야는 특히 더 이러한 거품과 사기를 근절해야 한다. 비효율과 낭비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적 규제가 필요하다. 이는 이 과학기술이 생명과 건강을 다루기 때문이다. 생명과 건강 영역은 과학기술의 발전보다 안전성이 우선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쳐봐야 소용없다. 생명과 건강을 잃으면 그 무엇으로도 이를 보상할 수 없다. 이에 그 어떤 과학기술 영역보다도 더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이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할 영역이 생명공학 분야다.황우석 사태의 교훈 잊은 한국 사회
하지만 이런 규제를 책임져야 할 정부와 국가가 시장 논리에 포섭되거나 국가 발전 제일주의에 감염되어 있을 때 문제가 심각해진다. 연구 업적에 눈먼 과학기술자가 있더라도, 돈벌이에 혈안이 된 장사꾼이 있더라도, 국민의 생명과 건강이 우선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적절히 규제하는 정부와 국가가 있다면 문제는 최소화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희생해서라도 국가의 신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문제는 없다고, 국가 경쟁력과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하는 정부가 관련 규제를 책임지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런데 한국은 후자라는 게 문제다. 황우석 사태를 통해 확인된 사실은 이를 여실히 증명해 준다."황우석 사태 당시 정부, 정치권, 언론, 과학계 등은 황 박사팀의 비윤리적 행위에 적극 동조하거나 은폐하는 데 앞장선 바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황우석 박사 개인의 강력한 네트워크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부가 생명공학 활동을 경제 성장의 수단으로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정부는 규제 자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제6장 '황우석 사태, 한 국민 영웅의 몰락' 중에서)
그런데 한국의 경우 규제 기관인 정부가 시장주의와 국가 발전 제일주의에 물들어 있는 것과 더불어 상황을 더 꼬이게 만드는 요소들도 있다. 바로 정부 관료의 무능력과 부패다. 이는 한국의 생명공학 영역에서 비효율과 낭비, 거품과 사기가 판치게 된 주요 요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옥석을 가릴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 관료들이 각종 로비에 노출되어 '과학기술계 마피아'들의 입김에 좌우되는 게 현재 한국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신성장 동력 확보, 과학기술 입국이라는 목표가 더욱 허황될 수밖에 없다. 목표만 거창할 뿐 기술 발전도 없이 헛돈만 쓰고 장사치들만 돈을 버는 상황이 반복되는 이유다. 생명공학 연구와 적용이 거품과 사기의 대상이 되지 않고, 정말 효용이 있는 연구가 윤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연구 및 기술 적용 과정에 이윤 동기가 개입될 가능성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생명공학 기술의 공공성이 중요하다. 연구비 지원뿐 아니라 이후 연구 성과 활용도 공공성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자연 유래 물질이나 그 변용물에 대해서는 특허를 허용하면 안 된다. 어떤 연구에 공적 연구비를 지원할 것인지, 연구 과정에서 어떤 절차를 준수할 것인지 등에 대한 결정이 사회적, 민주주의적 논의와 합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더불어 이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고 시민의 능동적 참여를 권장하고 구조화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공적 연구 성과가 일부 계층의 부로 집중되게 되고 사회 불평등이 증가한다. 더불어 개인의 생명과 건강이 위협받는다. 생명공학 연구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연구비 지원 기관, 규제 기관으로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윤보다 안전, 돈보다 생명이라는 원칙 아래 생명공학 관련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감시와 압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은 생명공학 감시 운동과 과학기술 민주화 운동이다. 오랫동안 생명공학 감시 운동을 이끌고 생명윤리법 제정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던 저자의 관점과 경험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운동이고 현실을 바꾸어내려는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맥락을 무시하는 과학기술자와 경제 중심적 사고를 가진 관료를 설득할 이론적, 정책적 역량도 필요하다. 과학기술에 대한 경제적, 국가주의적 담론이 비대칭적으로 거대한 것에 비해, 이를 교정하기 위한 사회운동과 주체 형성은 더디고 미미한 이유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저자의 책은 이 모든 작업을 진행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하기에 손색이 없다. 생명공학과 관련된 한국의 논쟁 지형을 살펴보고, 그것이 가진 사회적 함의를 모색해 보고픈 연구자와 활동가는 이 책으로부터 시작하자. 저자는 과학기술학을 전공한 연구자이면서 과학기술 민주화 운동에 직접 참여한 활동가로서, 지금, 여기가 '로도스'임을 밝혀 보여주고 있다. 이런저런 말 할 것 없다. 여기서 뛰어서 실력을 보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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