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불경한 감정
"휠체어 이용자가 밭에 들어갔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한 것처럼."
그러나 이런 생생한 묘사는 도리어 나와 그들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동시에 역시 나는 그들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다. 사실 비장애인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의 근원에는 단순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데서 오는 안도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더해 내가 장애인이었더라면 불편함을 견디며 장애를 극복할 자신이 없다는 점도 있다. 우리는 이미 장애를 소재로 한 많은 픽션, 논픽션에서 인간 '승리' 사례를 목격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이 '팔다리가 없이 태어나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의지와 용기로 장애를 극복하고 누구보다 밝고 건강하게 사는 인간의 이야기' <오체불만족(오토다케 히로타다, 창해)>이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장애라는 거대한 벽을 뛰어넘고 결국은 '성공했습니다'로 끝나는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이 장애라는 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장애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는 데 결코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비교적 투쟁하지 않는 일상을 살아온 나는 오히려 장애를 극복하고 신화가 된 이들을 보며 경외감을 느끼고, 때론 비인간적이라고 느끼기까지 했다. 이들은 나와 달리 고난을 견딜 준비가 된 채로 태어난 초인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나를 돕기 위해 왔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나만의 오해는 아닌 모양인지, 저자는 국내 장애인 운동의 들불을 지핀 노들장애인야학 공동체의 20년 역사를 담은 이 책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거라는 환상을 내려놓아 달라"고 간청한다. 장애인들의 'ㄱ, ㄴ' 배우기, 어렵게 말해 학습권 투쟁에서 시작한 노들 야학은 이동권 투쟁을 통해 저상버스를 탄생시켰고, 활동 보조 서비스 제도화를 이끌었다. 노들의 탄생을 지켜보고, 20대 초반부터 노들과 함께 나이테를 그려간 저자는 노들의 20년 역사를 아름다움으로만 포장하지 않는다. 노들 야학을 찾는 장애인들은 생각보다 배움에 대한 열의도 적고 투쟁에 대한 의지가 미약했고, 다수의 강학(講學)이 때가 되면 언덕을 내려가 다시 올라오지 않아 야학에 남은 학강(學講)들이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화합하자며 어렵사리 다 함께 간 놀이동산에서는 휠체어 입장이 불가하자 결국 비장애인들만 즐기다 오는 '분열의 추억'이 탄생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이 글을 읽어 줄 당신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모든 것을 기꺼이 견딜 만큼 소중하게 지켜 주고 싶은 것을 가졌지만, 그럼에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한 잔 술이 간절할 때'의 느낌을 잘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쿨하지 못한 연애를 해봐서 사랑 뒤에 따라오는 쿰쿰하고 복잡한 마음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한 잔 술이 간절할 정도로 서로 지지고 볶고 다퉜지만, 그들은 쉽게 절망하지 않고 서로 견뎠다. 활동가들은 학강들에게 보채지 않았고 학강들은 무조건적인 도움이나 동정을 바라지 않았다. 그게 그들이 공동체를 지켜나가는 방식이었다."만약 당신이 나를 돕기 위해 이곳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봅시다."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 쉽게 절망하지 않기
노들은 '노란 들판'의 줄임말이다. 농부처럼 우직하게 땀 흘려 일하고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함께 나누자는 뜻이다. 우직하게 이어져 온 노들의 20년 역사를 훑고 있자니, 소설가 김연수가 저작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쓴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저자는 쿰쿰한 과거를 내뱉으면서도 또 동시에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도 그 길을 자꾸만 걷게 되는 매혹의 순간"을 얘기한다. 그것은 노들의 구성원이 장애라는, 어쩌면 메울 수 없는 간극을 사이에 두고도 서로 이해하려는 행위를 통해 살 값어치를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하여 노들은 이름답게 온갖 차별이 몰아치는 위험한 세상 속에서도 저항의 가치를 잃지 않고 우직하게 공동체를 지켜나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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