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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휘하 장군들에게 무릎 꿇을 뻔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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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 휘하 장군들에게 무릎 꿇을 뻔한 사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7> 제3공화국의 탄생, 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일곱 번째 이야기 주제는 제3공화국의 탄생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5.16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청와대 '부정 선거' 앞잡이, 정보부…어쩌다?

[5.16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전 재산 헌납' 삼성 약속은 왜 물거품이 됐나

[5.16쿠데타, 열 번째 마당] 박정희 거듭 구한 은인, 제대로 뒤통수 맞다

[5.16쿠데타, 열한 번째 마당] '박통'의 특별한 선배, 왜 간첩으로 죽어야 했나

[5.16쿠데타, 열두 번째 마당] '장면 맹비난' 박정희, 사실은 대부분 따라 했다

[제3공화국, 첫 번째 마당] '가만있어라' 강조한 '박통', 은밀히 뒤통수쳤다

[제3공화국, 두 번째 마당] '구악 쇼' 박정희, '적폐 쇼' 박근혜…닮은꼴 부녀

[제3공화국, 세 번째 마당] 주가 조작, 그 뒤에 정보 당국이 있었다

프레시안 : 1962년 말에서 1963년 초, 민정 참여 문제를 놓고 군사 정권 내부에서 심각한 갈등이 발생한다.

서중석 : 모든 준비를 끝냈다고 생각한 박정희와 김종필은 군복을 벗고 민정 이양에 참여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한 때에 이미 폭풍은 불고 있었다. 박정희가 1962년 12월 27일 군복을 벗고 민정에 참여하겠다는 얘기를 하기 바로 며칠 전, 최고위원들한테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의 전모를 브리핑했는데 바로 김종필 성토장이 돼 버렸다. 오치성, 조창대, 오정근을 비롯한 육사 8기와 9기들이 막 들고일어났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이 이원 조직이었다. 자기들을 바지저고리로 만드느냐 하는 불만이었다. 또 '모든 게 너무 김종필 중심으로 돼 있는 것 아니냐. 그러면 우리는 뭐냐', 이런 것도 큰 불만이었을 것이다. 결국 회의가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1일 정치 활동이 허용되면서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장에서 사임하게 된다. 자신이 신당을 구체화하려면 그렇게 해야 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장에서 사임하는데, 이때 또 큰 문제가 생겼다.

박정희는 김종필의 측근이고 자신에게 절대복종한다고 여기던 김형욱(육사 8기)을 후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유양수, 박태준, 유병현, 김진위 같은 군에서 영향력이 있는 장군들, 그리고 송요찬이나 김재춘 쪽도 작용한 것 같은데 이런 사람들 쪽에서 김형욱 임명에 반대하고 나섰다. 중앙정보부장이 얼마나 막강하고 중요한 자리인가는 이미 김종필이 너무나 잘 보여주지 않았나. 그러니 후임 중앙정보부장에 누구를 앉히느냐가 권력 관계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는 이 사람들이 김형욱을 반대한 것이다. 할 수 없이 박정희 의장은 1월 7일 최고회의 문사(文社)위원장이던 김용순을 중앙정보부장에 앉혔다. 그리고 김재춘이 최고회의 문사위원장 자리에 들어앉게 된다.

프레시안 : 제동을 건 사람들 중 박태준이 눈에 띈다. 훗날 포항제철을 맡는 바로 그 박태준이다. 5.16쿠데타 때 박정희가 '실패하면 내 가족을 돌봐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박정희가 신뢰한 인물이었다.

서중석 : 박태준은 군 온건파로서 영향력이 있었다. 이때뿐만 아니라 3선 개헌 때도 이를 지지한다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에게 다른 의견을 내면서도 충성했기 때문에 박정희가 신뢰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후 박지만 등이 어려울 때도 박태준이 도와줬다고들 하지 않나. 박정희 자신은 의리의 사나이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박태준이 의리의 사나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어쨌건, 이원 조직과 중앙정보부장 문제 등에서 크게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1963년 1월 10일 이 신당이 가칭 재건당의 이름으로 첫 발기 회의를 열었다. 1월 18일에는 민주공화당이란 이름으로 발기 위원회가 발족했고 그 위원장에 김종필이 앉게 된다. 창당은 아직 안 했으니 다 가칭인데, 이때를 전후해 최고위원들이 굉장히 강한 반발을 하게 된다.

5.16쿠데타 전에도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사람인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 김동하가 1월 17일에 이미 박 의장에게 '당 기구를 전면 재검토하라'고 얘기했다. 이원 조직을 포함해 얘기한 것이다. 그리고 ‘중앙정보부를 개편하고 당 준비 과정에서 김종필은 손을 떼게 하라'고 건의했다. 당 사무국을 중심에 둔 구상은 자유민주주의 제도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이중적 정당 조직이고 국회의원을 거수기로 만드는 것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당 기구 전면 재검토를 요구했다. 그러면서 최고위원과 민주공화당 발기 위원직에서 사퇴했다.

민주공화당 발기 위원회가 발족하자마자 바로 최고위원들이 맹렬히 공격하고 나섰다. 김형욱 회고록을 보면 200여 명의 '혁명 주체 회의'가 열렸는데, 김종필에 대한 신임 투표로까지 사태가 악화됐다고 한다. 그때 170대 20으로 김종필 불신임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간부급에선 다 김종필을 반대했다. 김종필이 너무나도 앞서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참 못된 짓을 많이 했다고 봤기 때문에도 김종필에 대한 반발, 이원 조직에 대한 반발이 굉장히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최고위원들이 '김종필이 당에서 물러나야 한다. 물러나지 않으면 새로운 사태가 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을 볼 수 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민정 참여 문제 놓고 심각한 갈등에 휩싸인 박정희 군사 정권

프레시안 : 그것에 대해 박정희는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박정희 의장은 사실 김종필과 일체가 돼서 신당을 만들어놨던 것 아니겠나. 다만 김종필은 처음에 박정희를 이렇게 모셔 놓으면 나중에는 권력이 자기한테 넘어올 줄 알았을 텐데, 그게 아주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된다. 김종필이 박정희의 조카사위이긴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권력 앞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김종필과 박정희는 이때까지는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월 24일 김종필 발기 위원장이 사의를 표명했을 때, 박정희 의장은 당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 최고위원들한테 수습책을 지시했다. 그런데 이때 '최고회의와 당은 분리돼 있으니 당에 간섭하지 말라'는 식으로 오히려 김종필에게 유리하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원 조직에 대한 반발이 워낙 센 만큼 겉으로나마 '좀 고려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했음직도 한데 그런 얘기도 안 한다. 나중에는 애매하게 이원 조직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런 이야기도 나오지만 이원 조직은 그 후 상당 기간 유지된다.

그렇다고 해서 꼭 이원 조직이 박정희 마음대로만 움직였느냐. 그건 아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중대한 권력 분배 문제에서 엇갈릴 때, 한마디로 3선 개헌 같은 게 생기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이제 김종필을 공격하는 수준을 넘어 박정희 자체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된다.

서중석 : 2월 2일 신당 창당 준비 대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도 준비 위원장은 김종필이 됐다. 여전히 다른 최고위원들은 아주 강하게 반발한다. 이때를 전후해 특히 김재춘이나 김종오 육군 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들이 모여 문제를 논의하고, 김종필 거세에서 박 의장 견제로까지 나아가는 쪽으로 사태를 밀고 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문제가 심각해지니, 2월 10일 박 의장은 군사 정권 초대 외무부 장관을 했고 일제 강점기 때는 중국에서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군 원로 김홍일을 불렀다. 박정희가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라고 하니, 김홍일이 진짜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버렸다. '정권은 정치인에게 넘겨줘야 한다. 군으로 돌아가는 게 참된 애국자의 길이다. 당신은 민족의 영웅이 돼라. 3군 총사령관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렇게 상당히 오래 얘기했다고 한다. 군으로 돌아가고 정치는 민간인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아주 강하게 얘기했다. 이건 여러 자료에 다 그렇게 나온다.

그러면서 점점 고비에 들어가는데, 2월 12일 박 의장은 정구영 창당 준비 부위원장 등을 만나서 출마와 민정 참여를 포기할 수 있다는 의사를 조금 보여줬다. 이렇게 되니까 13일 밤 김종필이 급거 귀경해 결의를 촉구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면서 극적인 드라마가 17일에서 18일 새벽 사이에 일어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민정 불출마' 박정희의 2.18 성명과 군의 중립 선언

프레시안 : 넓은 의미에서 박정희 휘하에 있던 장군들이 집단적으로 박정희의 불출마를 요구한다. 이는 이때까지만 해도 박정희가 군을 속속들이 장악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서중석 : 17일 저녁 육군 참모총장 관사에 김종오 육군 참모총장, 이맹기 해군 참모총장, 장성환 공군 참모총장, 김두찬 해병대 사령관, 그리고 최고회의 온건파이자 군에서 성망이 높은 유양수, 박태준, 또 김재춘 같은 이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박병권 국방부 장관과 김진위 수도방위사령관, 이 사람들도 뜻을 같이한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다. 참고로 수도방위사령관이라는 직책은 나중에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이름이 바뀐다.

여기서 김종오와 김재춘이 분위기를 돋웠다. 그러면서 '박 의장의 불출마 결의를 굳히도록 하자. 우리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박 의장을 만나야겠으니 김종오 당신이 먼저 가서 시간을 정해서 와라', 이렇게 됐다. 김종오가 장충단에 있던 박 의장 공관으로 가서 간신히 저녁 9시로 시간을 잡았다. 상당히 오래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9시가 됐는데도 만나주지를 않았다.

이때 박 의장은 육사 8기 김종필 쪽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김종필, 길재호, 김형욱, 홍종철 이런 사람들이 버티면서 양자 대결이 된 셈이다. 김종필은 끝까지 밀어붙이려고 했다고 김형욱 회고록에 나오지만 홍종철이나 길재호 등 다른 사람들은 '일보 후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총을 쥐고 있는 자들이 저렇게 나오면 후퇴하는 수밖에 없다', 이거였다. 당연한 얘기다. 특히 박정희는 김진위에 대해선 심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서울에서 대규모 병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 수도방위사령관 아닌가. 여기서 군이 나와 버리면 어떻게 되겠나.

그러니까 유연하게 대처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는 18일 새벽 2시가 돼서야 김종오와 김재춘 일행을 의장 공관에서 만나줬다. 박정희는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군인들이라 성질이 굉장히 급하다. 그러면 이걸 국민들에게 바로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유명한 2.18 성명이란 게 나오게 된다.

프레시안 : 2.18 성명엔 어떤 내용이 담겼나.

서중석 : 새벽에 이렇게 회의가 끝나고 나서 박정희 의장은 2월 18일 9개의 정국 수습 방안을 제시한다. 군의 정치적 중립 견지, 이걸 첫 번째로 내세웠다. 그런 다음에 '새로 참여할 정치인들은 5.16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정치적 보복을 일체 하지 않는다', 이 내용을 넣었다. 자기들이 정치 보복을 많이 했으니까 이걸 넣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서 '이 제안을 완전무결하게 재야 정치인들이 수락한다면 난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 정치활동정화법은 거의 전면 해금하겠다. 선거를 5월 이후로 연기하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박정희는 여기서도 좀 떨떠름한 얘기를 보탰다. '혁명 이념의 승계 보장 없이 군정을 끝낸다는 것은 결국 5.16혁명의 의의와 가치를 상실하고 5.16 이전 시점으로 후퇴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내가 하고 싶어서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을 풍기는 얘기다.

어쨌든 박 의장의 이런 발표를 공식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박병권 국방부 장관은 김종오, 이맹기, 장성환, 김두찬 같은 사람들이 배석한 자리에서 '군의 결심'을 천명했다. 박정희 의장이 그런 결심을 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군은 정치적으로 엄정 중립을 지킬 것과 진정한 민의에 의해 선출되는 민간 정부를 절대 지지하며 국가와 민족의 군대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고 했다. 박병권 장관이 참 대단한 선언을 한 것이다.

▲ 1963년 2월 27일, 민정 불출마를 선언한 박정희의 2.18 성명을 수락하는 '정국 수습을 위한 선서식' 장면. 선서식에는 정치인들과 국방부 장관, 3군 참모총장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미국이 '박정희와 결별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이유

프레시안 : 이 무렵, 미국도 움직인다.

서중석 : 2.18 성명이 나오게 된 데는 군 실력자, 군에서 성망이 높던 군 온건파들, 그리고 최고회의 내 쿠데타 주동을 같이했던 일부 사람들의 반발, 이런 여러 가지가 작용했지만 그와 함께 미국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미 1962년 12월에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 대사가 '지도력으로서 대안이 필요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박정희 말고 다른 사람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인지를, 즉 이런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미국 국무부에 건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고회의도 그렇고 군부가 심각한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버거 대사는 알고 있었다.

최고회의건 군부건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건 미국으로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지 않나. 그래서 이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김동하가 크게 반발할 때, 미국 측은 박정희를 만나서 '여당은 폭넓은 기반을 가져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분열되면 되겠는가', 이런 뜻을 전했다. 폭넓게 다 수용해야 한다고 박정희에게 전한 것이다. 그리고 '야당도 때려잡고 분열시키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강한 야당도 필요하다. 선거도 중요한 것이다', 이런 식의 얘기를 했다고 한다.

1월 23일엔 버거 대사가 가이 멜로이 유엔군 사령관과 함께 다시 박정희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는 '김종필이 정당에서 사임할 것이다. 선거 이후까지 외국에 머문다', 그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강상욱, 김윤근, 오정근, 박원빈 등을 반혁명 활동 혐의로 제거할 것이라는 얘기를 해버린다. 이건 버거가 듣기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이었다. 김종필을 치는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라 사실은 육사 8기와 9기 중에서 반김종필 핵심 세력을 치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음 날 박정희는 다시 수정해서 '김종필의 외유는 계획대로 하지만 이 사람들을 제거할 계획은 없다'는 태도를 밝혔다. 하여튼 이 시기에 미국은 여러 가지 압력을 넣고 있었는데, 제일 큰 건 역시 원조 중단 문제였다.

프레시안 : 미국은 5.16쿠데타가 날 때부터 박정희를 파트너로 삼아왔다. 그러나 나중에는 박정희에게 민정 참여를 하지 않도록 권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왜 이때는 '박정희와 결별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인 것인가.

서중석 : 제일 큰 건 역시 최고회의와 군부가 분열한 것이었다. 사전 조직, 이원 조직, 그리고 4대 의혹 사건에 대해서도 반발이 너무나 강했다. 미국으로서는 이 점이 얼마나 걱정됐겠나. 자기들이 일종의 후견인인 셈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게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김종필이 지금까지 너무나 월권한 것이 아니냐. 권력 남용도 너무 심했을 뿐만 아니라 김종필과 같이 당을 만들고 있다는 자들은 민족주의적인 냄새가 나고 통제도 잘 안 된다. 김종필을 만나서 얘기해보면, 여기서 한 말을 나중에 번복하는 것 같다', 이렇게 판단한 것 같다. 이를 결국 김종필과 밀착돼 있는 박정희와 연결된 문제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종필과 박정희 가지고는 정국 안정이 어려운 것 아닌가. 그러면 안 되겠다.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고 본다.

그런데 거기에는 4대 의혹 사건 같은 것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경제적으로 너무나 무리한 짓을 많이 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제일 큰 건 역시 화폐 개혁이었는데, 하여튼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실정을 거듭해 경제가 안 좋아진 것을 보더라도 박정희 정권이 기대만큼 가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작용한 것 같다. 한마디로 박정희 군사 정권이 총체적인 난맥상을 보이며 난국을 초래한 데다 권력을 지나치게 남용하고 부패도 아주 심했고 거기에다가 무능하고 말도 바꿔서 신뢰하기도 어렵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와 김종필을 분리하려고 해봤는데 그것도 잘 안됐고, 이래저래 통제도 안 되던 상황이 종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미국으로선 결정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김종필을 공격하고 박정희를 견제한 세력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난 이건 1884년 갑신정변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본다. 갑신 쿠데타라는 갑신정변을 일으킬 때 주도 세력들이 민 왕후 척당 세력을 죽이지 않았나. 그렇지만 민 왕후는 '국모'였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국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갑신정변 주도 세력은 왕과 왕비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 두 사람을 끼고서 그야말로 개혁 정치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특히 민 왕후가 그랬지만, 왕과 왕비는 이를 갈고 있었다. '기회만 있으면 저 역적 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이것이었다. 일가를 죽이고 자기 세력을 일망타진하지 않았나. 왕도 민 왕후 편이었다. 그러나 이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난 그렇다고 본다. 청나라 군대가 개입해 삼일천하로 끝났다고 돼 있지만, 그게 아니었다고 해도 (왕과 왕비가 그대로 있는 한) 정변을 주도한 사람들은 죽게 돼 있었다. 쫓겨나게 돼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박정희가 최고회위 의장으로서 인사권을 비롯한 실권을 쥐고 있는 한, 박정희를 견제해서 '이렇게 하라'고는 할 수 있지만 박정희가 그걸 바꿔버리면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게 바로 나타난다. 박정희는 어쩔 수 없이 일보 후퇴한 것 아니겠나.

▲ 1950년대에 신병 면회장이 설 때면 논산 일대는 흥청거렸다. 돈이 많이 도는 만큼 부패도 심했다. 그 때문에 1959년 폐지됐다가 1988년 부활했다. 사진은 2011년 논산 육군 훈련소에서 면회 온 가족들이 장병들과 식사하는 모습. ⓒ연합뉴스

1950년대 '돈산'의 추억과 박병권

프레시안 : 박정희는 휘하 장군들의 반발 등에 밀려 뜻을 꺾고 무릎을 꿇을 뻔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반격한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끝내 관철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2.18 성명, 그리고 그에 뒤이어 나온 군의 중립 선언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서중석 : 박정희가 민정 불참을 선언한 2.18 성명을 불러온 게 박병권 장군이냐 김재춘이냐, 이걸 가지고도 조금은 논란이 있다. 박병권은 군에 대한 영향력이 워낙 컸다. 군에서 존경받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3군 참모총장 같은 사람이 움직이는 데 박병권의 영향력이 컸던 건 틀림없다. 그리고 박병권은 원칙론을 주장한 사람이다.

내가 논산 출신인데, 이 사람은 내 고향 사람이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2~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박 씨들이 살고 있는데 거기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고향 사람들에겐 욕을 먹고 있다. 신병 면회장을 없앴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나도 많이 겪었지만, 예전엔 논산을 '돈산'이라고 불렀다. 면회장 때문에 논산에서 연무 일대까지 아주 흥청거렸다. 신병 면회장이 설 때마다 돈이 많이 돌았다. 1950년대는 군대 가면 죽는 줄 알던 때 아닌가. 그러니까 다 털어가지고 면회 오고 그랬다.

아 그런데 세상에 그 면회장 옆 동네 출신이 훈련소장으로 오자마자 면회장을 없애버렸다. 지독한 사람이다. 그래서 수십 년간 면회장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다가 나중에 부활했다. 박병권이 면회장을 없앤 건 부정부패가 심했기 때문이다. 훈련병 혼자만 거기 오는 게 아니라 훈련병이 하사 등과 함께 오지 않았나. 그러면 부모들이 간부들에게 돈을 찔러주고 그랬다. 내 자식 패지 말라고, 기합 주지 말라고 그런 것이다. 그건 어떤 부모든 바라는 것 아닌가.

(논산에 있던 육군 제2훈련소 면회장은 1959년 9월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면회장 곳곳에서는 닭튀김과 불고기 잔치가 벌어졌다. 닭튀김과 불고기는 당시 귀한 음식이었다. 또한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면회객들이 하루 이틀씩 묵으며 쓰는 돈으로 연무읍은 '면회 특수'에 따른 호경기를 누렸다. 그러나 박병권은 "국민 소득이 95달러도 안 되는 터에 가난한 부모들이 면회를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 건 국력 손실"이라며 면회장을 폐쇄했다. 훈련병 면회 제도는 29년 후인 1988년 2월 부활했다. <편집자>)

하여튼 이렇게 엄격한 사람이다.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이 앞장서서 모사를 할 사람인가를 생각하면, 역시 모사는 김재춘하고 김종오 육군 참모총장이 했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김재춘은 김종필 반대 세력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서중석 : 김재춘이 이때부터 정면에 등장하지만 사실 김재춘은 5.16쿠데타 때 CP(Command Post), 그러니까 지휘소를 이끌었다.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데 핵심 역할을 한 군인 중 하나라고 얘기한다. 육사 5기인데, 장도영 숙청 때 육사 5기가 대량으로 당하지만 김재춘하고 채명신은 괜찮았다.

김재춘은 방첩부대장, 그리고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이라는 권부를 쥐고 있어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다음으로 힘이 셌다. 이 사람은 5.16쿠데타 때 34세에 불과했다. 기수로는 세 기수 선배였지만 나이는 김종필보다도 어렸다. 김재춘은 지프차를 타고 다닐 때 앞뒤에 기관총을 걸고 막 몰고 다니고 그랬다더라. 일을 밀어붙이는 데 대단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언젠가 김종필과 대결하는 건 숙명이라고 얘기하고 그랬다.

김재춘이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바로 박병권 장군이다. 박병권 아래 있었을 때 그의 식견과 지도력, 그리고 특히 청렴결백한 인품에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장도영이 9사단장일 때 박정희를 불러왔다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때 군수 참모가 김재춘이었다. 그러면서 긴밀한 관계를 박정희와 맺었다. 그러면서 박병권과 박정희, 이 두 사람에 대해선 각별히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하더라. 원래 하사관(부사관) 출신인데 육사 5기로 들어갔다.

쿠데타에서도 주역으로 활약하며 군사 정권에서 실권자였는데, 이렇게 최고회의의 반발이 있으니까 김종필을 정면으로 치는 데 앞장선 것이다. 군 수뇌부를 모이게 하고 박병권 장군한테 연결하고 하는 것도 다 김재춘이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18 성명까지 오는 데는 김재춘이 제일 공로자라면 공로자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인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쉰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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