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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차지하려면 철도를 장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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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차지하려면 철도를 장악해야 한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34> 조선 침략 위해 철도에 눈독 들인 일본
한국이 프랑스와 월드컵에서 결전을 치른 사실은 알아도, 정규군끼리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1866년 10월 26일, 3척의 군함이 한강 하류에 나타났다.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이 이끄는 함대였다. 전투 태세를 갖춘 채 지금의 인천공항철도를 연결하는 마곡 철교를 지난 함정들은, 지하철 2호선이 건너는 당산 철교 밑을 지나 서강대교 부근까지 진출, 위력 시위를 벌였다. 한성에서는 난리가 났고 군사들에게는 긴급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수도방위사령부 역할을 하는 어영청 중군(대장) 이용휘가 조정의 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마포나루를 비롯한 한강변에 수비 대형을 갖춘 채 일촉즉발의 상황에 대비했다.

프랑스 함대는 조선의 천주교 탄압으로 자국 신부 9명이 죽은 것에 대한 사과와 보상, 그리고 통상을 요구했다. 조선이 요구를 거부하면 신부 1인당 1000명씩, 9000명의 조선인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 아시아에 경쟁적으로 진출한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외계 세력의 접근일 뿐이었다. 14세에 불과한 소년 왕을 대신해 권력을 행사했던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을 배척하자며 그 정신이 깃든 것으로 간주한 서학(천주교)도 8000명을 학살한 뒤였다. 프랑스 군대와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의 강변북로 쪽으로 배를 붙여 위력 시위를 하던 로즈 제독의 함대는 일단 청나라로 돌아갔다. 한 달 후 로즈 제독은 다시 인천 앞바다에 함대를 끌고 나타났다. 7척의 군함, 그리고 요코하마에서 주둔하던 해병대 보충병력 300명을 포함해 1200명이 넘는 해병을 전격적으로 강화도에 상륙시켰다. 병인양요로 불리는 서양 군대와의 최초의 전투가 시작됐다. 프랑스군은 조선을 동양의 미개한 나라로 얕잡아 보고 전투에 임했는데, 역사가 숱하게 보여주듯 전쟁터의 교만에는 큰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강화성을 점령하기도 했던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을 치기 위해 정찰하던 중 매복한 조선군에게 호되게 당했다.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정족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군하던 프랑스 병사들은, 몸을 숨긴 채 기다리던 500여 명의 조선군 포수들에게 손실만 입은 채 쫓겨난다.

위대한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는 대제국 프랑스 군대가 국제적 망신을 당하며 한 달 만에 강화도에서 철수를 결정한다. 도망가던 프랑스군은 점령지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방화했는데 이때 도적질해 간 것 중의 하나가 외규장각 도서다. 정조가 규장각의 책들 중 영구적 보존이 필요한 것을 별도로 보관하기 위해 강화도에 만든 왕립 도서관이 외규장각이었다. 외규장각과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수많은 책이 불타고 그 일부는 로즈 제독의 군함에 실려 프랑스로 갔다. 191종 279권에 달하는 책들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존됐는데, 이 책들이 한국에 반환된 계기가 있었다. 고속철도 때문이었다.

1990년대 초반 프랑스는 테제베(TGV)를 한국 고속철도로 채택하기 위해 독일의 고속철도 ICE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1993년 알스톰사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에 방한한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러 오면서 책 한 권을 가져왔다. 정조의 후궁 수빈 박 씨의 장례 절차를 담은 외규장각 도서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 상 1권이었다. 미테랑은 환하게 웃으며 TGV만 채택해주면 외규장각 도서를 모두 반환하겠다는 언질을 한다. 고속철도 수주전은 한국이 TGV를 선택하면서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바뀐다. 고속철도 도입을 계기로 시작된 문화재 반환 과정은 20여 년의 우여곡절을 겪게 되고, 결국 2011년 임대라는 형식을 빌려 일부가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병인양요 사건으로 배를 타고 떠났던 조선의 국보급 문화재가 KTX를 타고 돌아온 셈이다.

ⓒ박흥수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친 조선, 일본에 무릎 꿇다

1866년은 조선에 서양 세력의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였다. 프랑스 군대와 충돌이 있기 두 달 전인 8월에는 미국의 상선이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 들이닥쳤다. 남북전쟁의 영웅 셔먼 장군의 이름을 딴 무역선은 함포를 장착한 무장 상선이었다. 천주교 박해에 따른 프랑스 함대의 침공설이 돌던 시기에 서양인들이 탄 배가 나타나자 평양 시내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통역사로 탑승한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 토머스는 셔먼호가 조선과 교역을 원한다고 밝혔다. 셔먼호는 네덜란드 선장, 미국인 선주와 항해사, 영국인 통역, 길 안내를 맡은 중국인, 말레이시아 선원 등 다국적 인물들로 채워진 배였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통상 불가를 주장하며 돌아갈 것을 요구했지만, 셔먼호의 서양인들은 고집을 부리며 만경대에 닻을 내렸다. 이를 제지하던 관군이 포로로 잡히자 강변의 평양 민중은 격노했다. 이에 대응해 셔먼호가 발사한 대포와 총에 7명의 조선인이 숨지자,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서양인들은 자신이 소유한 대포와 소총의 위력을 과신한 나머지 평양 백성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썰물로 움직이기 어려워진 셔먼호는 독 안에 든 쥐 꼴이 됐다. 평양 민중들은 기름 먹은 짚단을 가득 실은 소형 배에 불을 붙여 셔먼호를 향해 돌진시켰다. 관군의 불화살 공격과 화포 공격도 이어졌다. 불이 붙은 셔먼호에서 탈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선교사 토마스와 중국인 안내원들이 분노한 평양 민중들에게 맞아 죽었다. 셔먼호의 승무원이 몰살당한 후 이 소식은 조선 각지로 퍼져나갔다. 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가 연이어 일어나고 조선의 관군이 서양에 맞서 승리한 형국으로 귀결되자 흥선대원군 정권은 자신감을 가졌다. 서양 오랑캐도 별거 아니라는 판단 속에 쇄국을 통한 외세의 배격이라는 깃발을 더 높이 들었다. 5년 뒤인 1871년 미국의 조선 침략도 강화도 전투의 경험을 가진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실패한다. 어수룩한 무장 상선이나 소규모 함대의 무력시위는 조선 정부가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큰 장애물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자 조선의 문을 두드리는 세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세지고 있던 일본만 남게 됐다. 1875년 초겨울 강화도는 세 번째 도전에 직면한다. 일본 군함 운요호는 강화도 앞바다에서 조선군 수비대의 제지를 뚫고 들어와 충돌을 유도하고 돌아갔다. 1876년 새해가 되자마자 일본은 병력을 가득 실은 최신예 군함 6척을 강화도 앞바다에 대놓고, 운요호 사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적반하장의 떼를 쓰기 시작한다. 미국이 일본을 개방시킬 때 썼던 방식 그대로였다. 빌미를 만들고 압도적 무력으로 압박을 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일본을 물리력으로 제압할 힘도 없고 외교적 수단을 발휘할 조건도 못 갖춘 상황이었다. 청나라를 빼고는 어떤 나라와도 외교 관계가 없었던 조선은, 동방에 숨겨진 그저 그런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조선의 집권 세력은 선택의 여지 없이 일본에 빗장을 풀게 된다. 한일수호조규, 즉,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호의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이제 배가 기우는 일만 남았다.

"조선을 차지하려면 철도를 장악해야 한다"

일본이 조선의 손목을 비틀어 대문을 열자마자 제국 일본의 꿈을 실현코자 발 벗고 나선 이들이 있었다. 1885년 미야자키 현 출신 마쓰다 고조, 그가 조선 땅에 발을 디뎠다. 마쓰다 고조는 신식 의료 기술로 지역민들의 환심을 사면서 조선 곳곳을 답사했다. 마쓰다 고조는 4년에 걸쳐 조선의 교통로, 지형, 민심, 경제 상황들을 일일이 조사, 향후 일본의 조선 진출에 필요한 사전 자료를 만들었다. 우편장관 마에지마 히소카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조선에 일본 철도 진출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사회적 여론을 일으켰다. 히소카는 조선과 만주, 중국과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유럽에 이르는 철도 길을 예상하고 그 실질적 출발점인 조선철도를 일본이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일본에 이어 미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조선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열강들이 조선의 철도 부설권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현실은 일본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군부도 조선 철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했다. 1891년 참모총장 가와카미 소로쿠는 조선을 시찰하면서, 부산에서 출발해 경성으로 이어지는 경부철도를 건설해야 조선에서 경쟁 중인 다른 나라들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로쿠 참모총장은 1892년 부산 주재 총영사 무로타 요시아야에게 외무대신 에노모토 타케아키를 만나도록 주선한다. 무로타 요시아야 총영사는 외무대신에게 곧 경부철도를 부설해야 할 시기가 올 터이니, 미리 선로 답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탄원했다. 미개한 조선에 먼저 철도의 깃발을 꽂는 자가 주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철도로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락시켰던 미국의 서부 개척과 닮았다. 결국, 그해 8월, 체신성 철도국에 조선 답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노우에 마사루 철도국장은 철도 기사 고노 다카노부를 부산에 파견했다. 고노 다카노부의 측량 팀은 조선 남단의 산과 들을 측정했다. 갑자기 나타난 일본 사람들이 줄을 늘어뜨린 채 생전 처음 보는 기계로 땅의 이곳저곳을 조사하자 인근의 주민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방해하는 일도 벌어졌다.

일본 영사는 조선의 외무대신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을 찾아 "남도에서 일본인들의 활동은 학술적인 일로 조선의 새를 연구하는 것이다. 새 중 몇 종을 포획하여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기증하여 조선의 새를 조류 연구자들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총을 사용하게 되는데, 조선 사람들이 다칠까 봐 접근을 못 하도록 줄을 치는 것이다"라는 거짓말을 한다. 조선의 대신들은, 일본의 조류 조사팀의 조선인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하다며 칭찬을 하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선의 관료들이 일본의 사기 행각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조선 정부의 제지는커녕 조사팀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조선 관료들의 후원 속에서 고노 다카노부는 2개월 만에 부산에서 한양까지 약 386킬로미터(km)의 철도노선 답사를 마치고 보고서를 제출한다. 일본은 철도 부설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공사에 들어갈 수 있는 준비를 마치게 된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1894년은 조선 침략의 대장정에 큰 획을 그은 해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세력 간의 대립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청과 일본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조정은 기운을 다한 권력이었다. 중앙 관료들은 썩어 있었고 지방 관료들의 전횡은 도를 넘어섰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제 것부터 챙기자고 나서는 이들이 당당해지기 마련이다. 공동체의 이익보다 자기 파당의 이해를 앞세웠던 사람들이 앞장섰다.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언제나 그렇듯이 "현실적 고려"였다.

내 나라 백성 죽이려 외국 군대에 SOS?

민심은 정부에 등을 돌린 지 오래였고, 전국적으로 새 시대를 열망하는 민중들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설파한 동학은 분노한 민중들의 가슴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모든 사람은 하늘 아래 평등하다는 생각은 끔찍한 신분 사회에서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던 대다수 천한 백성들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유교적 도덕관과 계급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의 노래는 바람이 되어 산을 타고 강을 넘었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이 동학이라는 혁명의 공동체에 뛰어든 이유 중 하나는 "동학에 가면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민중들이었지만 평등의 공동체, 평화의 공간에서는 모두 제 것을 탐하지 않고 먼저 나누게 되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다툼이 사라지고 우애가 넘쳐났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스스럼없이 내놓자 수천 명이 뒤를 따르고 결국엔 음식이 남게 됐듯, 동학을 따른 민중들은 기꺼이 내 것을 공동의 몫으로 내놓았다. 백성들은 혁명의 불길 속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그동안 감수했던 비참한 가난과 굶주림은 먹을 것이 모자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한 사람이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심지어 곳간마다 식량과 재물을 가득 쌓아놓은 인간들은 단 한 번도 땀 흘려 제 손으로 일한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고을을 다스리는 관리들이었다. 그들 위에는 한양의 양반들이 있었고, 그 위에는 왕이 있었다.

기운이 다한 왕조의 무기력한 왕과 그 주변을 둘러싼 모리배들이 열강에 기대어 나라를 팔아먹고 자신들의 안위만 챙기는 것을 본 백성들은, 그들 스스로 군대가 되어 죽창을 들었다. 혁명은 민중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낡은 체제와 부패한 지배 계급이 자초한 것이었다. 1894년 2월 고부에서 봉기한 혁명군은 5월 정읍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6월에는 전주성을 장악했다. 미천한 인간들, '레미제라블'이 정읍과 태인, 전주를 비롯한 각지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코뮌을 세웠다.

입으로는 백성을 말하던 자들이, 자국 백성들을 죽이기 위해 허겁지겁 군대를 빌려 달라며 청나라에 읍소했다.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자, 기다렸다는 듯 일본도 군대를 보냈다. 갑신정변 후 1885년 청과 일본이 맺은 텐진 조약이 빌미가 됐다. 텐진 조약에는 "장래 조선국에 변란과 같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 중일 양국 혹은 1국의 군사파병을 요할 때에는 마땅히 우선 상대방 국가에 문서로 알릴 것이며, 그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회하고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전주성의 동학군은 외국 군대만큼은 안 된다며 자진 해산을 하게 된다. 끝까지 나라를 사랑했던 이들은 결국 백성들이었다.

1894년 5월 27일경, 휴가차 귀국해 있던 주한 공사 대신 대리, 스기무라 후카시가 본국에 기밀 문서를 보낸다. 이 문서의 내용에는 "조선 정부가 청에 군대를 빌려서 농민들을 진압하려는 것 같다"는 첩보가 들어 있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일본도 파병 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보고도 첨부됐다. 사태가 긴박하게 흐른 것은 5월 31일이었다. 조선 정부가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기로 의결했다. 6월 1일에는 영의정 명의로 청의 조선 주재 총리교섭총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있던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에게 공문을 전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이 공문은 연착됐다.

동학에 진땀 흘린 조선, 이토 히로부미는 미소를 지었다

일본 공사관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스기무라는 "전주가 적군(동학농민혁명군)에게 점령되었고 위안스카이로부터 조선 정부의 청국 군대 파병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음"이라는 내용을 본국에 타전한다. 2일 스기무라의 전보를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국내 정치의 난맥상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터에 군사적 충돌만큼 매력적인 타결책은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탈출구를 찾은 이토 내각은 각의를 소집하고 중의원 해산과 조선 파병을 전격 결정한다. 각의 소집 3일 전 스기므라로부터 타전된 전보 중에는 "전라도의 소동이 진정되고 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지만, 이는 당연히 무시되었다.

파병 목적은 "조선에 거류 중인 우리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병을 파견하고자 한다"는 메이지 왕의 칙어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구실에 불과했다. 거류민 보호 목적이라면 파병 규모는 많아야 1개 대대, 500~600여 명 정도면 충분했다. 오토리 주한 공사도 제물포조약 제5조의 "일본 공사관은 병사 약간을 두어 호위할 것"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전례에 비춰봐도 1개 대대급 이상의 파병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일 열린 각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혼성 1개 여단 파병이었다. 혼성 여단은 보병 2개 연대, 총 3000명에 달하는 일반 여단급을 넘어선다. 전시 편성 1개 연대, 기병, 포병 1대대, 공병, 수송병, 위생대, 야전병원, 병참부를 포함해 총 8035명으로 독자적 전투 수행이 가능한 대규모 병력이었다. 6월 5일에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전시 대본영이 히로시마에 설치되어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참모총장이 대본영 참모부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전시 체제를 구축했다. 애국심이라는 허구적 돔 아래에 갇히게 된 것이다.

6월 3일 한성에서 위안스카이는 주한 대리공사 스기무라와 한가한 대담을 나눈다. "조선 정부가 전주를 폭도들에게 잃자마자 원병을 요청했지만, 아직 공문을 받지 못했다, 공문을 받으면 청국 정부에 원병 요청을 타전할 셈이다"라는, 극히 따분한 투의 말을 들은 스기무라는 "조선 정부의 원병 요청이 오면 텐진 조약에 따라 문서를 전달해 달라"고 요구했다. 위안스카이와 스기무라가 만나 대화를 나눈 이날 저녁 조선 정부의 공문이 위안스카이에게 전달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다음 날인 4일 조선 정부의 공문 내용을 스기무라에게 전달했다. 위안스카이가 전한 청국의 파병 인원은 약 1500명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 농민 반란 진압이 애초 목적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준비했고, 청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었다. 8000명에 이르는 중무장 전투병을 준비한 일본군에 청국 군사 1500여 명은 애초에 적수가 될 수 없는 조건이었다.

6월 6일 오후 일본군 대본영은 보병 1개 대대에 선발로 출발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공병 1개 소대를 포함한 1024명의 일본군을 태운 수송선이 히로시마의 우지나항을 떠났다. 일본군 선발대는 12일 오후 인천 제물포에 도착했다. 앞서 10일 밤 한성에 도착한 오토리 공사는 11일에 "경성은 평온하니 선발대 외의 대대는 파견을 보류하기 바란다"는 전문을 본국에 보냈다. 열강들이 몰려 있는 한성에서 외교적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외교관의 순진한 바람에 불과한 이 전문이, 정치적 야욕에 불타는 군부의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이토 내각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츠는 "일본군 나머지 부대는 모두 출발했으며 되돌릴 수 없다"는 통지문을 오토리 공사에 보냈다.

제물포에 상륙한 일본군은 한성을 향해 행진, 노량진을 통해 한강을 건너 용산에 자리를 잡았다. 이 길은 마침내 한국 최초의 철도 노선인 경인선이 된다. 일본군은 지금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촌과 서빙고 일대에 진을 쳤는데 조정이 있는 경복궁까지는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였다. 중무장한 외국 군대가 군사력 없는 국가 원수의 집무실 코앞에 주둔한다는 것은, 국가 원수가 허수아비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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