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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는 헛짚었다? 두 경제학자가 달리 처방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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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는 헛짚었다? 두 경제학자가 달리 처방한 이유

[프레시안 books] 제라르 뒤메닐 · 도미니크 레비 <신자유주의의 위기>

"내일 왜 비가 오는지 아나?"

눈을 찡긋하며 물어온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내게 말한다. "그게 다 신자유주의 때문이야!"

오래전 내가 재직 중인 학교에 초빙교수로 와 있던 그리스 경제학자(마르크스주의자였다!)가 어느 세미나에 다녀온 뒤에 소감을 묻는 내게 해 준 말이다. 바로 이 서평의 대상인 <신자유주의의 위기>(후마니타스, 2014년 7월 펴냄)의 지은이 중 한 사람인 프랑스 경제학자 제라르 뒤메닐이 진주 경상대학교 초청으로 한국에 왔을 때의 일이다. 그리스인 동료가 다녀온 곳은 다름 아닌 뒤메닐이 주요 연사로 등장하는 세미나였다.

뒤메닐은 실은 내 전공 분야이기도 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 분야에서 최고 수준에 다다른 학자이다. 그는 동료이며 이 책의 공저자인 (그리고 아마도 최근 삼십여 년 동안 거의 모든 글을 함께 써온) 도미니크 레비와는 주로 마르크스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윤율의 장기 동학을 연구하는 논문을 써 왔다. 그리고 그에 기초하여 신자유주의에 관한 책들을 발표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마 한국의 고위 공직자 청문회쯤에 나온다면 "자기 표절"이라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클 정도로, "신자유주의"라는 제목이 들어가는 비슷비슷한 책을 너무 많이 써 왔기 때문에 신선감이 떨어지기는 한다. 예의 그리스인 동료가 비아냥거린 것도 어쩌면 그런 맥락일지도 모른다.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자기 표절"이라는 개념은 스스로 평가 능력을 상실한 한국 학계에서 외부적이고 정치적인 잣대를 들이대다 보니 나온 해프닝이라 생각된다. 가령 똑같은 논문을 그대로 떠서(영어로는 "carbon-copy"라고 한다) 둘 이상의 논문집에 싣는다든가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이 늘 고민하고 궁리하는 주제에 관한 생각을 조금씩 발전시켜, 그것도 다른 계층과 언어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는 것은 학문 발전의 자연스러운 과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윤율 저하? 유효수요 부족? 2007∼2008년 위기에 대한 다른 해석

ⓒ후마니타스
각설하고, 먼저 뒤메닐과 레비가 왜 그렇게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에 집착하는지 이해하려면, 그들이 "신자유주의는 원칙 또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상위 계급의 권력과 소득을 목표로 한 사회적 질서"(319쪽)라고 규정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라는 단어 안에 "주의(ism)"라는 말이 들어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이념 체계나 원칙으로만 볼 수는 없다. 아마도 자유기업센터 따위의 한국의 자유주의를 가장한 극우파들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자본주의는 당연히 인류 역사의 한 단계에서, 그것도 지극히 짧은 세월 동안 성립된 경제 체제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뒤메닐과 레비는 신자유주의라는 단어 역시 단순히 근본적 시장주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단계 내지는 국면으로 이해하고 있다.

2007∼2008년의 위기를 주로 분석하는 이 책이 "정통적"인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의 분석과 다른 점은 위기를 이윤율 저하의 문제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 사회주의가 붕괴한 1990년대 이래로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어쨌거나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이라 생각했던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에 입각해서 위기를 설명하려는 점에서 예컨대 앤드루 클라이먼의 <자본주의 생산의 실패>(한울, 2013년)는 이 책과는 대척점에 놓인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뒤메닐과 레비만큼 이윤율의 장기 동학을 이론적·실증적으로 오랫동안 연구해온 마르크스 경제학자도 없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경제의 데이터를 중심으로 하는 이들의 이윤율 관련 해석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나 자신 스포일러를 쓰고 싶지는 않으므로, 독자들이 직접 읽어보도록 하기 위해 여기에서는 요약하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의 유력한 위기 해석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소득 분배의 악화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이 줄어듦으로써 유효수요가 부족해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도 전통적으로 대중의 소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위기가 발생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 즉 과소소비설적 경향이 있었으며, 케인스 경제학도 도식화해서 말하자면 유효수요 부족을 위기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포스트 케인스주의라 불리는 진보적인 케인스 해석자들과 마르크스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적어도 소득 분배 개선을 통한 위기 해결이라는 관점에서는 일종의 동맹이 맺어질 가능성이 있다.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토마 피케티의 분배에 대한 문제 제기나 한국에서도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소득 주도적 성장(원래 포스트 케인스주의적 이론에서는 임금 주도적 성장이다)은 이러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뒤메닐과 레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기간 동안 거시 경제 전체적으로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다. 단순히 임금소득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임금소득자 중에서도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의 격차가 커졌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 역시 실증적인 내용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판단하도록 맡겨두고자 한다. 참고로 임금소득자(wage-earner)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이분법으로는 포괄되지 않는 계층까지 다루기 위함이다.


저자들이 파악한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두 번째 금융 헤게모니의 위기

뒤메닐과 레비는 신자유주의의 시작을 1979년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금리를 인상한 것에서 잡으며 그것을 <자본의 반격>(필맥, 2006년)이라는 키워드로 묘사한 바 있다. 이 책에서 그들은 훨씬 더 명확하게 그것을 자본가 계급과 관리자 계급(그중의 상위 분파)의 금융을 매개로 하는 정치적 동맹으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이윤율 저하의 위기도, 소득 분배 악화의 위기도 아닌 두 번째 금융 헤게모니의 위기로 파악된다.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뒤메닐과 레비는 "관리직 가설"을 주장해왔으며 심지어는 교과서 수준으로도 정리한 바 있다(<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그린비, 2009년). 자본가 계급과 민중 계급 이외에 관리자 계급이라는 별도의 계급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분명히 마르크스주의의 틀을 중대하게 수정한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인 분석틀을 수정하는 것 자체가 결코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먼저 관리직은 "구상과 결정의 직무를 수행하는 임금소득자 중 상위 분파"(<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112쪽)라고 정의된다. 한국식으로 번안하자면, 재벌 그룹의 고위 경영자(그러나 오너의 가족은 아닌), 고위 경제 관료, 어쩌면 이른바 엘리트 경제학자까지도 합친 개념일 것이다. 뒤메닐과 레비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케인스주의적 타협(혹은 포드주의)은 관리직 상층과 민중이 결합한 좌파 버전의 관리 자본주의였던 반면, 신자유주의는 관리직 상층과 자본가가 결합한 우파 버전의 관리 자본주의였다. 참고로 관리 자본주의란 20세기 전반부에 벌리와 민즈가 경영자 혁명을 말한 이래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경영자 자본주의"의 번역어이다. 단지 번역의 문제만은 아니고, 민간 기업의 최고경영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관리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의 소득은 굳이 임금이라고만 하기도, 이윤이라고만 하기도 어려운 성격을 갖는다. 옮긴이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뒤메닐과 레비의 이론은 케인스적인 테크노크라트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진보적 성격, 아마도 어쩔 수 없이 민중적 이해와 정치적 동맹을 맺는 것에 기대를 거는 좌파 케인스주의 혹은 케인스적 마르크스주의의 경향을 연상하게 만든다.

▲ 2008년 금융 위기는 수많은 사람의 삶을 뒤흔들었다. 위기의 한복판에 있던 아이슬란드 사람들도 격랑에 휩싸였다. 사진은 아이슬란드 수도인 광역 레이캬비크의 한 지역에서 은행이 집을 압류하고 경매에 넘기자 그 집의 전 주인이 장비를 빌려 집을 부수는 모습. ⓒ위키미디어커먼스


옮긴이가 강조하듯이, 뒤메닐과 레비는 대안(alternative)이라는 용어를 규범적인 의미, '그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실증적 의미에서 사용한다. 즉 단기간 안에 가능한 미래의 시나리오는 두 가지, 관리직 상층이 민중과 결합하는 방식과 여전히 자본가와 결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쉽게 예견할 수 있듯이, 전 세계적으로 민중 운동의 역량이 사라진 지금, 가능한 것은 후자의 방식, 즉 암울한 시나리오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서구 좌파들이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는 중국마저도 우파 버전의 관리 자본주의로 옮아갈 가능성이 크다. 19세기에 토머스 칼라일이 말한 바, 우울한 과학(dismal science)으로서 정치경제학은 여기에서 다시 불려온다.

이 책을 다루면서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다. 뒤메닐과 레비도 피케티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참고로 이 책은 피케티가 "록스타급 경제학자"가 되기 몇 년 전에 쓰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처방은 사뭇 다르다. 어찌 보면 경제학, 나아가 사회과학이란 것이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그럴듯하게 꾸며낸 이야기(narrative)일는지도 모른다. 피케티의 이야기, 그리고 뒤메닐과 레비의 이야기와는 다른 우리들의 이야기를 찾아 나가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사족 : 방대한 분량의 번역서를 만든 노고는 충분히 인정하나, 마음 편하게 읽기에는 수시로 거슬리는 문장, 예컨대 주술 관계가 맞지 않거나 조사가 틀린 오류에 대해 한마디 해둔다. 아마도 번역자의 오류 같지는 않고 출판사에서 교열 작업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부디 제2쇄에서는 바로잡히길, 그보다 먼저 한국에서 이 책이 많이 팔리면서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힘으로 생각하는 젊은 경제학자들이 비 온 뒤의 대나무순처럼 쏟아져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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