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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 우울하고 가슴 답답…혹시 나도 화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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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 우울하고 가슴 답답…혹시 나도 화병? [안종주의 건강사회] '감정 노동자 화병'이란 새로운 유행병?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협하는 새로운 유령이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노동자 화병'이라는 이름의 유령이다. 이 유령은 일반인 대다수에게는 그 이름이 아직 낯선 감정 노동자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노리고 있다. ‘노동자 화병’이라는 말은 필자가 지어낸 것이기는 하지만 화병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정식 질병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이름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통용되는 이름이다. 우리말 이름을 지닌 질병 이름은 화병(火病)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부끄럽고 서글픈 현실이기는 하지만 화병은 한국의 가부장적 여성 억압 문화와 '여성은 어떤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며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일그러진 가정 도덕이 빚어낸 정신질환의 일종이다. 주로 중년 또는 갱년기가 지난 중장년 여성이나 노인 여성에게서 발병하고 있다. 우울증과는 다른 질환이다. 미국 정신과학회에는 1996년 화병을 문화 관련 증후군의 하나로 등록했다. 영어로는 Hwabyeong 또는 Hwabyung이라고 부른다.

요즘은 사회와 가정에서의 여성 지위가 많이 달라졌지만 1950~1970년대만 해도 결혼한 여성, 즉 어머니들은 남편이나 시어머니, 올케 등 시댁 가족들과의 불화가 있더라도 이를 가정 안에서는 물론이고 가정 밖 사회에서도 드러낼 수 없었다. 남편의 외도를 알아도 모른 척 해야만 했다. 폭언과 폭행이 있어도 웬만하면 참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야만 했다. 고부 갈등이 있어도, 시누이와 갈등이 있어도 어디 하소연할 곳이 마땅히 없었다. 친정에 말하기도 어려웠고 남편에게도 말하기 어려웠다.

이런 가정에서 여성들은 수십 년간 엄청난 스트레스 상태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삶이었다. 이들의 절망은 결국 끝없는 고뇌, 즉 한(恨)이 되어 마음 깊숙한 곳에 켜켜이 쌓인다. 결국에는 우울 증상이 생기고 입맛도 떨어지며 만사가 귀찮아진다. 수시로 불안에 휩싸이고 가슴은 답답하다. 잠을 잘 못 이루는 날도 많다. 성에 대한 욕구도 떨어진다.

서민 여성일수록 화병 흔하게 나타나

이런 화병은 대개 저소득층이나 서민층 가정의 여성들에게서 더 흔하게 나타난다. 이혼을 해보아야 받을 위자료도 거의 없다. 이혼하면 사회적 낙인이 찍히는 분위기여서 이도 쉽지 않다. 최근까지도 이혼 여성은 재혼하기도 쉽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기가 쉽지 않은 노동 환경이어서 이혼과 재혼에 걸림돌이 되었다. 이 때문에 저소득층 여성일수록 화가 쌓이더라도 참고 견뎌야만 했다. 한 조사연구에서는 우리나라 농촌 지역 주민 가운데 4.1%가 화병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 우리가 화병이라고 부르는 정신질환은 70년대 이전부터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당시는 살기가 어려웠고 병원의 문턱이 높아 의료기관을 이용하기가 쉽지 않아서 수면 아래에 있었다. 1980년대 후반 건강보험 시대가 열려 서민과 중산층도 병원 이용이 쉬워져 화병을 앓던 사람들이 처음에는 신체적 요인에 의한 질환인 것으로 잘못 알고 병원을 찾았다가 나중에 마음의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 않나 싶다.

최근 들어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지위 향상, 그리고 가부장적 문화의 쇠퇴, 핵가족화 등이 급속히 진전돼 지금의 30~50대 여성들은 지금의 60~80대 여성들에 견줘 울화를 마냥 마음속에 담아 두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들이 나중에 화병에 걸릴 가능성은 과거 여성보다는 낮을 것이다. 전통적인 화병은 점차 줄어들거나 나중에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화병 걸린 직장인 35%

▲ 백화점 노동자들은 대표적인 감정 노동자다. ⓒ프레시안(김윤나영)
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화병이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위협하고 있다. 최근 들어 점차 그 이름이 상식처럼 변해가고 있는 감정 노동자들이 과거 우리 어머니들이 겪던 화병의 제물이 될 위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자 가운데 35%가량이 일종의 화병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필자가 '노동자 화병'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들 노동자 가운데 아마 대부분은 감정 노동자일 것이다.
감정 노동자 모두가 여성은 아니지만 여성이 주를 이룬다. 감정 노동자를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사회문화를 지금 당장 바꾸지 않으면 앞으로 10~20년 뒤 새로운 형태의 화병, 즉 여성 노동자 화병의 유행으로 우리 사회의 건강에 빨간 등이 켜질 것이다. 연구자들이 감정 노동자수를 국내 임금 노동자 약 1770만 명 중 560만∼740만 명으로 추정하며, 앞으로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감정 노동자들의 건강한 삶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건강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저명 사회학자인 캘리포니아주립대(버클리) 앨리 혹실드 교수는 감정 노동을 “배우가 연기하듯 직업상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자신의 감정을 고무시키거나 억제하는 등의 자신의 감정을 어느 정도 관리해야 하는 일”로 정의하고 있다. 대표적인 감정 노동자로는 항공기 승무원, 매장 판매원, 콜센터 노동자, 공무원과 공공기관의 민원창구 근무자 등을 꼽을 수 있다. 넓게는 사회복지 관련 직종이나 간호사 등 의료직 근로자도 감정 노동자에 포함될 수 있다.

감정 노동자의 건강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지난해 한 대기업 임원이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여성 승무원에게 욕설을 퍼붓고 급기야 폭행까지 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져 사회적 파장이 확산되면서다. 그 뒤 백화점 직원, 콜센터 직원들이 시도 때도 없이 폭언과 폭행, 협박, 성희롱 등에 시달리고 있는 문제가 잇따라 알려지기도 했다. 언론도 이를 계기로 감정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회사와 고객 양쪽으로부터의 스트레스 실태에 대해 심층보도를 하거나 주요 의제로 다루고 있다.

▲ 이른바 '라면 상무' 논란에 대해 포스코에너지가 지난해 4월 자사 공식 블로그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정치권에서도 최근 감정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감정 노동자법'을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녹색소비자연대 등 소비자단체와 엔지오 등도 이 문제에 적극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지난 7월 6일에는 서울시와 녹색소비자연대, 기업소비자전문가협회, 한국야쿠르트, 애경산업, 엘지전자, 동아제약 등이 기업이 함께 손잡고 감정노동 문제 해결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은데 이어 7월 18일에는 산업안전보건공단과 한국노총,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 등 10여개의 관련 기관과 단체가 모여 감정노동을 생각하는 기업 및 소비문화 조성 전국협의회를 발족하는 등 감정노동 문제 해결을 위한 걸음마를 시작했다(상자 실천약속 참조).

시민 4명 중 3명 "감정 노동이 뭔지 잘 모른다"
2년 여 전 녹색소비자연대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로 수도권 시민 300여 명을 대상으로 감정 노동자에 대한 소비자 인식과 여성 감정 노동자들이 겪는 문제들을 조사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시민 가운데 4분의 3은 감정 노동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응답이었다. 본인이나 가족이 감정 노동자인 경우가 4분의 1에 달해 가족이 아니면 아직 감정 노동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감정 노동자의 문제가 개인이 해결해야 할 성격이 아닌 사회 문제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서는 감정노동에 대한 홍보·소통을 통해 감정 노동자의 친척이나 친구, 동창 등이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또 이 조사에서 5명 중 한 명꼴로 이유 없이 감정 노동자에게 화풀이를 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사회에서 감정 노동자들이 사실상 무방비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대목이다. 그리고 이를 방치하면 머지않은 장래 우리 사회는 노동자 집단 화병이라는 희대의 유행병을 겪을지도 모른다. 세계 최초로 화병을 만들어낸 오명(汚名)을 뒤집어쓴 대한민국을 또 다시 세계 최초의 노동자 화병 진원지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 콜센터 노동자들에게 '전화기를 내려놓고 숨 쉴 틈을 주자'는 퍼포먼스. ⓒ프레시안(김윤나영)

감정 노동자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갉아 먹는 일은 고객에 의해서만 빚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절반의 책임은 감정 노동자를 고용해 관리하는 회사 또는 기관 쪽에 있다. 사회에는 악덕 소비자(블래컨슈머)가 존재하듯이 감정 노동자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악랄하게 괴롭히는 사실상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들에 대해 여전히 관대하다. 관리자들은 이런 사람과의 다툼이 벌어져도 ‘소비자가 왕이다’(소비자가 왕이 아닐 때가 분명 있음에도)라는 것만 머리에 박아두고 감정 노동자를 외려 나무란다. 또 악덕 민원인 또는 고객의 일이 자신에게까지 넘어오는 것을 극력 기피하는 관리자도 있다. 감정 노동자들이 양쪽에 치여 일해야만 할 때 쌓이는 화는 배가된다.

우리 감정 노동자들이 겪는 문제는 소비자들이 저지르는 반말, 성희롱, 욕설과 화, 성차별, 생트집 등도 있지만 고용주에 의한 실적 압박과 해고·인사고과 압박, 열악한 근무·고용 환경, 과중한 업무 등 매우 다양하다. 이런 문제들을 모두 풀어내기 위해서는 관련 법 제정과 개정뿐만 아니라 악덕 소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감정 노동자 관리 우수 기업과 불량 기업에 대한 당근과 채찍 양면 전략,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정 노동자를 우리의 사랑스런 딸, 누이와 어머니, 친구로 대하는 사회문화 정착이 중요하다.
감정 노동자를 대할 때 따뜻한 한마디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감정 노동자가 건강한 사회야말로 건강사회이다.

<감정 노동자와 함께하는 소비자 실천 약속>

0. 감정 노동자의 인권을 존중하고 해당 서비스의 전문가로 인정한다.
0. 감정 노동자들도 내 가족, 이웃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0. 서로가 고객이 될 수 있다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진다.
0. 반말, 욕설, 희롱, 무시하는 언행을 하지 않고 존중하는 언행을 한다.
0. 서비스를 받을 때는 감사 인사만 하도록 한다.
0. 나의 부당한 요구가 다른 소비자에게 피해가 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0. 서로 잘못했을 때는 인정하고 사과한다.
0. 문제 제기는 합리적으로, 목소리는 부드럽게 한다.
0. 감정 노동자를 위하는 기업을 찾아보고 격려한다.
0. 감정 노동자를 위한 입법 활동을 위해 노력한다.

<감정 노동자와 함께 하는 기업 실천 약속>

0. 감정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적극 지원한다.
0. 감정노동 업무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처우를 보장한다.
0. 감정 노동자를 위한 안전한 근무환경을 조성한다.
0. 감정 노동자를 위한 적정한 휴게시간과 휴식공간을 보장한다.
0. 감정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소비자 응대 매뉴얼을 마련한다.
0. 감정 노동자가 부당한 소비자행동(폭언, 폭력, 성희롱 등)에 대하여 자신을 보호할 적절한 권한을 보장한다.
0. 감정 노동자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전문조직을 둔다.
0. 감정 노동자의 자기보호를 위한 정기적 교육을 실시한다.
0. 감정 노동자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을 적극 지원한다.
0. 감정 노동자를 위한 고충처리 창구를 상시적으로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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