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당 정치와 대의 민주주의는 제 기능을 하고 있는가? 2014년 4월 16일 참사가 벌어진 이후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국 정치의 상황을 보면 그렇게 얘기할 수가 없다. 여당과 야당은 유가족들은 물론이고 많은 국민들의 뜻과는 다른 안에 합의하고 이를 통과시키려 했다. 지상파와 종편을 비롯한 거대 언론사들은 이 사안과 쟁점들을 제대로 보도하려 하기보다는 사건을 둘러싼 루머와 가십을 키우기 바빴고 때로는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에게 마타도어까지 일삼았다.
사실 세월호 참사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양상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와 파업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고, 한미FTA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 제기 때에도 심지어는 IMF 사태 직후 기업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문제에서도 동일했다. 정권을 어느 쪽이 가지고 있느냐에 상관없이 벌어진 문제였다. 일각에서는 계속해서 제대로 된 정당 체제가 들어서야 한다고 했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 제도 자체에 한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게다가 이는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흔히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 각국에서도 맞닥뜨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구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나선 이 중 하나가 중국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인 왕후이다. 그는 21세기 초두부터 '탈정치화된 정치'라는 테제를 꺼내놓았으며, 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중국과 세계의 문제들에 대해 발언해왔다. <탈정치 시대의 정치>(돌베개, 2014년 8월 펴냄)는 이 문제에 관해 왕후이가 쓴 글을 가려 뽑아 옮긴 책이다.
탈정치화의 정치
특히 이 탈정치화 과정의 한 축인 경제 영역의 시장화와 사유화 과정에서 권력 엘리트들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정당도 계급적인 조직에서 탈계급적인 조직으로 변해간다. 시장과 국가도 상대적으로 중성화된 영역으로 변해나가게 된다. 그래서 경제 발전 문제에 관한 여러 입장 차이가 단순히 시장과 국가 사이의 조절 비율에 관한 기술적 차이로만 변해버리게 되며, 좌와 우를 가르는 정치적 표지들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이런 식의 변화는 1970년대 말에 시작되어 1980년대를 지나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한 1990년대가 되어 거세게 일어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역사적 토대를 제공했다. 즉 탈정치화 과정은 세계적인 역사적 전환 속에서 일어난 지구적인 정치 현상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현상을 살펴보자면, 왕후이는 탈정치화된 정치를 정당의 국가화, 정부의 기업화, 미디어의 정당화(政黨化), 정치인의 미디어화라는 특징으로 요약한다. 먼저 대의제 민주주의 속에서 정당들이 본래의 의미에서 자신이 대표해야 할 사회적 토대를 상실하고 각각의 정치적 가치들이 수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본다. 그래서 정치란 선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4년 혹은 5년 단위의 일회적인 사회적 동원으로 제한되고, 실제로는 정당 간 권력이 교체되어도 결과적으로 별 차이가 없이 주기적으로 지도자만 교체되는 국가 기구나 다름없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왕후이는 이를 '정당의 국가화'로 표현한다.
또 한편으로 시장화와 사유화의 과정이 진행되면서 벌어진 정당과 자본의 유착으로 인해 이들이 기층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기보다는 '보편적 이익'이라는 탈을 쓴 채 실제로는 자본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정부 조직의 원리가 기업의 논리를 따르게 되는 '정부의 기업화'가 벌어진다.
그리고 정당과 의회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공공 영역인 미디어 역시 그 스스로 시장 속에서 거대 기업화되고 권력과 결탁함으로써 인민의 가치를 대변하지 못하고 독점적이고 편향된 정치적 가치를 일방적으로 선전하는 이데올로기적 기구로 전락해버리고 있다. 민의를 가장한 미디어의 권력화는 심지어 일반 인민들의 언론의 자유와 자유로운 정치적 토론을 억압하기조차 한다. 또 이 과정에서 정치인들은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만들기에만 열중하게 되며, 인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말로 인민의 말을 독점화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왕후이가 '탈정치화된 정치'라고 명명하는 이 현상은 작금의 대의제 민주를 표방하는 정치 모델들이 결국 엘리트 계급이 권력을 독점하는 과두제 정치로 변질되었음을 폭로하고 있다. 그리고 왕후이가 볼 때 탈정치화의 문제는 서구의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만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 일당 통치를 하고 있는 중국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는 세계적 현상이다. 이 속에서 생겨난 새로운 사회적 불평등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탈정치화' 과정에 대한 비판 속에서 '재정치화'의 조건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왕후이가 재정치화를 위해 중요하게 참조하는 것은 다름 아닌 20세기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적 경험이다.
반(反)근대성의 근대성
여기서 왕후이가 20세기 중국의 혁명 경험과 사회주의를 어떻게 사고하는지, 그리고 그 배경으로 중국의 지식인 사회 속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8년은 중국에서 개혁 개방이 시작된 해이며, 현대 중국 역사를 구분하는 기준점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1949년부터 1978년까지를 마오쩌둥의 시기라 부르고, 1978년 이후의 시기를 덩샤오핑의 시기라 부르기도 한다. 중국 지식인들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로 이 1978년을 기준으로 갈린다. 각 지식인마다 그 입장은 매우 복잡하지만 다소 거칠게 정리하자면, 일단 크게 나누어서 그 앞의 시기를 긍정하고 뒤의 시기를 부정하면 바로 구좌파(老左, 마오주의자)이고, 그 반대이면 개혁파가 되는 것이다.
이 개혁파들의 이론적인 바탕이 된 사유가 바로 '신계몽주의'이다. 신계몽주의는 1980년대 개혁 개방과 더불어 학문적으로도 서구의 사상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당이 학계에 틈을 열어주면서 새로 생겨난 흐름이다. 신계몽주의가 주장하는 중국 현대사의 문제점은, 위기 극복이라는 점에 치중하여 개인의 가치를 무시하게 되었고, 이것이 전체주의적이고 봉건주의적인 사회주의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신계몽주의 철학자인 리쩌허우(李澤厚)는 중국의 근현대사를 '계몽(啓蒙)과 구망(救亡)의 이중 변주'로 파악하는데, 마오 시기에는 구망이 계몽을 압도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의미에서 과도한 격정과 부족한 이성은 혼란(대약진, 문화대혁명 등)을 가져왔고, 이제 중국에서 필요한 것은 '혁명'이 아니라 '개량'이라고 주장하며 '고별혁명(告別革命)'을 선언하였다. 이런 점에서 신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중국/서구', '전통/근대' 그리고 '계획/시장'이라는 이원 대립의 모델을 설정하였으며 향후 중국의 과제를 아직 형성되지 못한 '근대화'(즉 서구화 및 시장화)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 신계몽주의가 분화하고 보수화하는 계기는 1989년 톈안먼 사건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거치면서 개혁파들은 다시 정치적인 자유도 주장하는 자유주의 좌파와 시장의 자유만을 인정하는 자유주의 우파로 갈리지만, 개혁파의 주류, 그리고 권력을 차지하게 된 이들은 정치적인 자유는 인정하지 않되 시장의 자유는 인정하는 제3세계 개발 독재의 경험을 중시하는 신권위주의자(혹은 신보수주의자)들이었다.
1990년대 이후, 특히 1990년대 후반부에 이르러 중국 사회의 지역 격차, 빈부 격차, 구조조정, 정리해고 등이 심해지자 새로 나타난 지식인들이 바로 신좌파(新左)다. 사실 이들은 톈안먼을 겪은 세대 중 서구 신좌파의 흐름을 받아들인 사람들로 하나의 사조로 묶어내기가 힘들 정도로 생각하는 바나 구체적인 대안들이 다 제각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종속 이론, 세계체계론 등을 기반으로 하고, 어떤 이들은 분석적 맑스주의를 기반으로 하기도 하고, 이 외에도 프랑크푸르트 학파, 후기 구조주의 등 다양한 이론적 맥락에서 중국을 해석해내려고 한다. 이들의 이론적인 기반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현대 중국을 인식하는 공통적인 틀을 열어준 이가 바로 왕후이다.
왕후이는 신계몽주의가 받아들인 근대화 이론이 서구의 근대화론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반근대성의 근대성(反現代性的現代性)'론을 내어놓는다. 그는 중국에서 근대화 개념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용으로 하는 가치 지향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오 시기 중국의 역사적 경험은 자본주의적 근대를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반근대적이지만 발전주의와 국가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핵심적 특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이기도 하다는 중국 근대성의 역설적인 구조를 발견한다. 이어서 왕후이는 개혁 개방 이후 중국의 개혁적 사회주의는 마오의 이상주의적인 근대화의 방식은 폐기하고 근대화의 목표만을 계승한 것으로 반근대성적 경향을 지니고 있지 않은 '근대화 이데올로기로서 맑스주의'이자 실용주의적 맑스주의로 규정짓는다. 이러한 정의는 마오 시기의 근대화의 방식과 개혁 이후의 근대화 방식을 근대화라는 커다란 틀에서는 '연속'으로 보지만, 반근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단절'로 파악하고 있다. 그가 제기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기존 개혁파들의 신계몽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역사적 맥락에서 해체해버리면서 신좌파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들은 이를 기반으로 하여 마오의 시기를 부정하는 개혁파와 추억하는 구좌파들과는 달리 마오주의와 마오 시기의 역사적 경험을 재발견하고 재평가한다.
쟁점 : 중국 혁명의 경험은 보편화될 수 있는가?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왕후이는 "한편으로는 세계적인 지적 상황을 통찰하면서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이를 항상 중국이라는 특수한 문맥 속에서 사유해온" 지성이다. 즉 왕후이의 사유에는 한편에서 보편적으로 전 세계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그 속에 중국을 두고 바라보는 관점이 존재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 중국 고유의 특수한 문제에서 보편적 인식을 끄집어내는 관점이 존재한다. 그의 '반현대성의 현대성' 테제와 '탈정치화의 정치' 테제도 이와 같은 이중적 시좌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왕후이는 탈정치화된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중국의 정치적 변혁은 탈정치화된 한계를 나타내고 있는 서구식 대의 민주주의도 아니며, 공개적인 토론을 거부하여 인민들에 대한 대표성을 상실한 특정 엘리트들의 과두 정치인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권 국가에 존재해왔던) '밀실 정치'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가 볼 때 중국에 필요한 것은 대중의 참여와 공개 토론을 동력으로 하여 사회의 공공 이익에 부합하며, 어떠한 패권에도 반대하는 세계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반(反)신자유주의적인 사회주의적 민주의 길이다. 다양한 사회 조직과 사회운동이 공공 정책의 결정 과정에 원활하게 결합할 수 있는 제도적 메커니즘을 만들어내는 인민의 자주적 관리와 직접적 정치 참여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민주'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런 길을 모색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난 시기 중국의 사회주의 경험, 구체적으로는 아래로부터 인민의 목소리에 근거하여 벌어진 이론 논쟁 및 노선 투쟁이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당과 국가의 대중노선과 자기 교정 능력, 그리고 자주성이다.
이러한 왕후이의 주장은 현재의 중국 당국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읽히며 그가 기존의 비판적 지식인에서 국가주의자로 변절했다는 비판들을 불러왔다. 하지만 실제 그가 특권화하는 것이 '중국'이라기보다는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그가 국가주의자나 중화주의자로 변절했다는 비판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 왕후이가 '국가'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사유의 중심에 두고 있다기보다는 여전히 '사회'와 '인민'을 위해 '당'과 '국가'를 어떻게 구상할 것인가가 문제의식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이를 '국가주의'라고 단정하고 일반화하는 것은 성급해 보인다.
도리어 그를 비판할 수 있는 측면은 마오쩌둥 시기의 역사적 경험의 부정적 측면을 도외시하는 부분이다. 왕후이를 비롯한 중국 신좌파들에게는 (비록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은 하고 있지만) 마오 시기의 경험들이 낭만화되어 수용되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왕후이가 자신의 연구와 사유의 시작이었던 루쉰으로 더 회귀한다면 마오 시기 경험들의 긍정적인 부분을 선취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모순과 복잡성, 무엇보다 부정적인 유산까지도 함께 껴안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가 서구의 보편성에 대항하여 또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퇴조에 조응하여 중국의 역사적 경험을 새롭게 보편화하는 작업을 서두르기보다는, '중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철저한 비판이라는 이상주의와 실천적 타협이라는 현실주의 사이에서 곤혹스러움과 맞부딪혀 그것을 짊어지려는 "역사적 중간물"로서 모습을 볼 수는 없을까?
우리는 왜 여러 이론가들이 민족국가와 거대 자본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지 캐물어야 한다. 만약 역사적으로 '속류 마르크스주의자'가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면, 그들은 곧 '속류 자유주의자'이다. 그들은 역사적 관계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거부하며, 현재 세계의 변화 속에서 자신들의 사회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특정한 사회적 양상, 그 자체의 함의 역시 역사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되게 마련이다. 어제, 비판의 투사였던 사람이 오늘, 신질서의 변호인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원하느냐고. (왕후이, '승인의 정치, 만민법, 자유주의의 위기', <죽은 불 다시 살아나>, 삼인, 2005, 350쪽)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