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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나라 팔기 전에 이것부터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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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나라 팔기 전에 이것부터 팔았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36> 이완용과 조선 철도
조선 왕실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 군대를 불러들였다. 조정은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정부와 군대가 무력한 것도 원인이었지만 40년 전인 1851년에 시작되어 1864년에 끝난 역사적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태평천국의 난이라 불리는 청나라의 사건이다. 이는 중앙정부 대 농민의 싸움이었다. 동학과 같은 성격의 민란인 셈이다. 이 태평천국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청은 외국 군대를 불러들였다.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인 양창대(洋槍隊)는 1863년 태평천국 군대를 격파했다. 청의 왕실은 미국과 영국에 큰 은혜를 입었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국제관계에서 공짜란 없다는 교훈은 곧 드러나게 된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청의 지배 계급은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지 않았다. 관리들의 횡포와 부자들의 호의호식, 가혹한 세금은 떨어질 수 없는 '3종 세트'였다. 삶이 피폐해진 백성의 원성은 밀폐된 공간에 누출된 가스처럼, 작은 불꽃만 있다면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51년 중국 남부 광시 성에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지도자는 홍슈취안(洪秀全)이라는 사람이었다. 기독교를 받아들여 배상제회(拜上帝會)란 종교단체를 이끌던 종교지도자였다. 상제란 영어에서 신을 뜻하는 갓(GOD)을 중국식으로 번역한 것인데, 야훼를 뜻한다. 야훼를 숭상하는 회란 의미다. 배상제회는 말 그대로 기독교 모임이었다. 이것이 태평천국 봉기의 시발점이 된다. '하느님 아래 모두가 평등한 인간'이라는 내용의 사상은, 오랜 계급질서에 이골이 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기존의 질서를 뛰어넘는 사상, 그리고 백성들의 빈곤한 현실이 결합하면 혁명은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이 된다. 동학농민혁명과 태평천국 봉기는 이런 면에서 닮았다. 그러나 동학농민들이 탐관오리의 처벌과 조정의 개혁, 외세의 배격을 내세웠다면, 태평천국은 아예 시작부터 청의 타도를 통한 새로운 중국 건설을 기치로 내걸었다. 홍슈취안은 새로 만들어진 나라 태평천국의 왕이 되어 청과의 일대 결전에 나섰다. 홍슈취안은 "중국 인민을 살리자"라는 구호 아래, 세력을 확장할 때마다 부자와 지주들을 처단했다. 당연히 농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고, 농민들은 기꺼이 태평천국에 합류했다. 홍슈취안은 "토지를 농민에게"라는 슬로건을 통해, 농민들의 간절한 꿈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도록 했다. 봉기 2년 만에 태평천국의 군대는 50만에 이르렀고, 곳곳에서 관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난징을 접수한 뒤 수도로 삼았다. 중국에는 청과 태평천국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게 되었다.

태평천국의 군대가 청의 수도인 베이징까지 위협하게 되자, 다급해진 청은 영국과 미국에 손을 내밀었다. 기독교 교리를 기본으로 한 나라를 세운다고 하니 한편으로 관심을 갖고 있기도 했던 영국과 미국은, 태평천국이 청을 대체할 능력은 안 된다고 판단했다. 영미 연합군은 홍슈취안이 예수의 동생을 자처한 것을 빌미삼아 태평천국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진압에 나섰다. 태평천국이 붕괴하자 영국과 미국은 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이들이 요구한 것이 다름 아닌 철도 부설이었다. 태평천국 군이 점령했던 소주에 양창대가 진주했고 이들 외국군대의 관리 아래 영국과 미국의 상인들은 활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자국 군대가 진주해 있고, 청이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이 시기가 상해-소주 철도를 부설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미국 기술진이 1899년 7월 인천 공장에서 한국 최초의 기관차인 모갈1호를 조립하고 찍은 기념 사진. 일장기와 성조기가 내걸려 있다. <동아일보> 1999년 9월 18일자에 실린 사진 ⓒ동아일보

수서발KTX 논란과 놀랍게 닮은 중국 철도 이야기

1864년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열강들이 청의 왕실과 지방정부에 집요하게 철도부설권을 요구한 해였다. 태평천국 군대를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워 그 위상이 높아진 청의 고위 정치인 이홍장은 상해주재 영국영사 파크스(Parkes)의 끈질긴 철도 부설 요구를 받아야만 했다. 광주 주재 영국영사 로버트슨(Robertson)은 양광총독 모홍빈을 찾아 철도부설권을 달라고 압박했다. 이홍장은 거듭되는 열강의 철도 부설 요구를 거절했다. 중국인만이 중국에서 철도를 부설하고 관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열강들의 외교 창구였던 이홍장이 철도부설권에 대한 중국의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하자, 구미 각국은 왕실로부터 철도 부설권을 얻기가 힘들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영국과 미국의 상인들은 교묘한 술책을 고안해 낸다.

1872년 영미상인들이 자금을 댄 오송도로공사가 설립된다. 도로 건설을 명분으로 내세운 오송도로공사는 상해에서 오송까지 14.8킬로미터(Km)에 이르는 부지를 매입한다. 영국과 미국의 영사는 새로 부임한 상해관리관 심병성에게 도로 부설 신청을 하여 허가를 받아냈다. 심병성은 오송도로공사가 상해에서 오송까지 차량 통행을 위한 도로를 놓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상해지방정부는 흔히 있는 도로부설 공사가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영국과 미국의 상인들이 모은 자본금이 은 15만 냥을 넘겼는데, 그것이 도로부설용 자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급기야 중국내 신문들도 상해에서 오송까지 철도가 놓일 것이라는 기사를 내놓았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오송도로공사는 설립 2년 만에 오송철로유한공사로 회사이름을 바꿨다. 새 회사는 기존 회사의 모든 권리를 승계하고 런던에 본부를 두었으며 10만 파운드에 이르는 자본금으로 철도건설을 서둘렀다. 공사는 1874년 12월 시작됐다. 1876년 2월 14일 전 노선의 4분의 3에 이르는 구간이 완공됐고 바로 열차 운행이 시작된다. 중국 최초의 철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파이오니어란 이름의 기관차는 8~9량의 객차를 연결했다. 총 구간 14.5킬로미터, 762밀리미터(mm)의 궤도간격을 갖는 레일 위를, 시속 30~50킬로미터 속도로 하루 여섯 차례 왕복했다. 영국과 미국은 일단 철도를 건설해 놓으면 청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국 최초의 철도는 열강의 속임수에 의한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셈이다. 공사 시작 1년 3개월 만에 운행을 시작한 오송 철도는 중국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왔다. 상해 수 십리 밖에서도 괴물처럼 달리는 쇳덩어리를 보겠다고 구경꾼들이 몰려왔다. 철도역 주변은 장이 설정도로 인파가 몰렸고 조용했던 마을은 번화한 중심가가 되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철도역이 생기면 일어나는 현상이다. 중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청 정부는 상해에서 철도가 운행되고 대성황을 이루자 크게 긴장하고 바로 운행중지 명령을 내리라고 상해지방정부에 명령한다. 심병성의 뒤를 이어 상해관리관에 부임한 풍준광은 주상해 영국영사 메드허스트(Medhurst)에게 열차 운행을 중단할 것을 통보한다. 중앙정부의 총리아문도 영국공사에게 운행 중단을 공식 요청했다. 메드허스트는 풍준관의 요구를 거부하며 이미 부설권을 전임자인 심병성으로부터 얻었기 때문에 합법적인 권리를 가졌다고 강변했다. 풍준광은 상해도가 허락한 것은 일반도로이지 철도가 아니었다며 당장 운행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 오송철도로 인해 청과 영국 사이에 격렬한 외교적 분쟁이 일어났다. 이런 분쟁 속에서도 오송철도의 나머지 구간 개통을 위한 공사는 계속되었고, 상해 책임자 풍준광은 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영국의 대청 외교 최고 책임자인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 메이어(Mayer)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영국해군 동양함대를 베이징 코앞인 텐진 항으로 집결시켰다. 해군제독을 뒤에 세운 메이어는 이홍장을 만나 담판을 짓자고 다그쳤다. 부설된 철도에 대한 영국의 권리를 인정하느냐,텐진과 베이징이 불바다가 되느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이홍장이 내세운 해결책은 청이 오송철도를 매입하는 안이었다. 메이어는 이홍장의 제안을 일단 받아들이는 모양을 취했으나, 또다른 역공을 준비했다. 상해 책임자 풍준광과 만난 메이어는 청이 오송철도를 매입하는 것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경영권만큼은 영국 자본 이화양행이 갖도록 하자고 제의했다. 풍준광은 메이어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중국이 철도시설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한들, 경영권만 가지면 얼마든지 영국의 이익은 보장받을 수 있다는 메이어의 생각을 풍준광은 간파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을 보면 근래 한국에서 국토부가 벌인 철도 정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

국토부는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철도가 도달해야할 궁극적 목표를 민간경쟁체제 도입으로 정했다. 철도 민영화와 경쟁체제를 통해 철도 효율화를 이루겠다는 것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철도 민영화만이 살길이라던 국토부가 최근 몇 년간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정책이 절대 민영화가 아니라고 해명하고 있다. 극단적 무한경쟁체제인 신자유주의 시대의 민영화가 보여준 맨얼굴을 본 시민들에게, 감히 민영화란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시절 수서발 KTX(수서KTX주식회사) 분리를 추진하면서 국토부가 지속적으로 내놓은 해명은, 시설은 정부가 소유하고 운영권만 민간에 주기 때문에 민영화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1876년 영국공사 메이어가 청의 관리들을 회유하기 위해 한 말과 국토부의 해명이 신기할 정도로 닮아있다.

또 지난해 말 박근혜 정권이 기어이 수서발 KTX 자회사 분리를 밀어 붙이면서 내놓은 논리도, 운영권을 분리해 경쟁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단 운영권에 대한 민간 매각 방지 법제화는 절대 할 수 없다는 것이 국토부와 집권당인 새누리당의 입장이다. 만약 상해 책임자였던 풍준광이 지금의 국토부 행태를 보면 무엇이라고 할까? 나라의 주권을 팔아먹는 파렴치한 관료들이라고 일침을 가하지 않았을까. 19세기의 중국 관리보다도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협소한 세계관에서 허우적거리는 명문대, 고시 출신 높으신 분들을 받들어 모셔야 하는 대한민국 서민들은 불쌍하다.

메이어는 지속적으로 풍준광을 압박하고 이홍장을 찾아 중재를 요청했다. 메이어의 요구는 분명했다. 소유권은 청, 운영은 영국자본회사 이화양행. 이홍장은 메이어의 요구를 거절했다. 오송철도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진척되지 않은 채 답보상태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영국은 1876년 5월 9일, 완공된 노선에 더해 상해에서 강마까지 6.3킬로미터 구간 공사를 추가로 강행했다. 6월 30일에는 초청된 외국 교민들과 몰려든 수 천 명의 중국인들이 보는 가운데 성대한 개통식도 열렸다. 영국은 청에게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힘으로 밀어 붙였다. 오송철도는 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영업을 계속해나갔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 군인이 열차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고 이에 중국 병사들이 항의 행동에 나서는 등 열차 운행을 저지하려는 일련의 행위들이 이어졌다.

청의 오송철도 매입 요구와 메이어 공사의 경영권 요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부딪혔으나, 중국 철도는 중국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청의 의지가 마침내 승리했다. 1876년 10월 청과 영국 측의 메이어 공사는 오송철도협약을 체결한다. 청이 1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구입 비용을 나눠 내고, 그것이 완전히 청산될 때까지는 영국이 운영을 하기로 했다. 1877년 10월 20일 청은 영국 측에 오송철도 매입 자금 3차분을 완납했다. 이제 오송철도의 주인은 청이 되었다. 청 정부는 오송철도의 모든 시설을 철거했다. 레일을 뜯어 대만으로 보내 항구의 야적장 한 편에 방치했고 기관차는 장강에 빠뜨려 수장시켰다. 중국 최초의 철도는 우여곡절 속에 건설되고 운영되었지만 황량한 노반위에 흔적만 남긴 채 짧은 영광을 뒤로하고 사라졌다. 어느 나라든 최초의 철도가 놓이는 과정을 보면, 근대를 통과하는 그 나라의 운명과 닮았음을 느낄 수 있다.

이완용, 나라 팔기 전 '예행연습'은 철도?

동학농민군을 진압해달라며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조선 왕실은 껄끄러운 손님, 일본군을 맞아야만 했다. 사실 일본군은 껄끄러운 손님이 아니라, 조선 안방을 노리는 용역깡패 집단이었다. 태평천국 군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병한 영국과 미국 군대는 연합군을 이뤘지만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들어온 청군과 일본군은 서로 적이 되었다. 청일전쟁에서의 승패가 가져온 결과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몰락하는 중국과 승천하는 일본. 일본이 승천하기 위해 탄 유니콘의 이름은 조선이었다.

태평천국이 무너지면서 중국 최초의 철도가 생겨났듯, 일본은 동학을 진압하고 청일전쟁에 승리한 후 한반도에 철도를 깔고자 하는 노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서의 이권을 손쉽게 얻을 것이라던 일본의 예상은 빗나갔다. 북쪽의 능청스런 곰, 러시아가 일본의 발목을 잡았다. 여기에 불붙기 시작한 동아시아에서의 이권쟁탈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열강들도 자기 몫을 챙기겠다며 일본을 가로막았다. 조선의 관리들은 이런 혼란 속에서도 가장 힘이 세다고 생각하는 나라, 혹은 자신과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나라에 줄을 섰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자는 이완용이었다.

이완용은 신동 소리를 들은 총명한 아이였다. 고종의 의전비서관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간 뒤에는 양부를 지성으로 섬기며 관직 진출을 준비한다. 10대 시절부터 관직 진출에 필요한 수험과목을 착실히 준비하고 서예와 글짓기를 익혔는데 그 실력이 출중했다. 이완용은 관직에 오르고자 응시한 공무원시험인 증광별시에서 문과에 가볍게 합격한다. 본격적인 수험생활을 시작한지 4년만인 25세 때였다. 1882년 10월에 실시된 증광별시는 임오군란 이후 쫓겨났다가 복귀한 황후 민씨의 환궁을 축하하는 특별 시험이었다. 자리가 없어 4년이나 임용 대기자로 세월을 보낸 이완용은 1886년 관직을 시작하자마자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매사에 신중하고 말수가 적은 이완용은 고종의 신뢰를 듬뿍 받았다. 공무원 생활 1년 만에 세자를 가르치는 자리에 오른 것은, 고종과 왕실 각료들의 신망을 얻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조선 최조의 근대식 국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이 설립됐고, 이완용은 여기에 입학하게 된다. 육영공원 입학정원 중 현직 공무원에 할당된 부분이 있었는데, 이완용은 자원해서 그중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육영공원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결과로 미국을 이해하고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교였다. 미국인 교사들이 영어로 수업을 했으며 미국식 문화와 제도들을 가르쳤다. 이 과정에서 두드러진 성적을 낸 이완용은 육영공원에 입학한지 1년 만에 미국에 외교관으로 파견된다. 1887년 7월 미국에 최초로 개설된 미국주재 조선공사관의 참찬관에 임명된다. 7개월 만에 요양 차 귀국한 이완용은 고종의 명을 받아 다시 미국공사관의 대리공사로 2년 동안 미국 생활을 한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은 근대 산업국가의 거인으로 등장한 미국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미국이라면 조선이 충분히 기댈만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미국 정치인들과 인맥을 쌓고 능숙한 영어 실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친미적 성향을 갖게 된 이완용이, 최초의 조선 철도 경인선 부설권을 미국인 모스에게 안겨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스가 이완용을 만난 것은 이완용이 주미 참찬관으로 있던 시기였다. 일본을 주 무대로 활동하던 모스는 조선의 광산과 철도에 대한 이권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의술을 가진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외교관이 된 알렌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미국 외교관 봉급으로 별장까지 거느린 알렌이 자신의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게다가 외교관 신분으로 대놓고 투자를 할 수 있는 조건도 아니었고 투자비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알렌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미국 상인인 '아메리칸 트레이딩' 사장 모스였다. 갑신정변 때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자신의 후원자이자 절친인 모스에게 조선의 이권을 넘겨 주기위한 브로커 역할을 마다하지 않게 된다.

모스는 알렌의 주선으로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통정대부이자 대변조선상무위원으로 임명되어 미국에 특파된다. 미국에 특파된 조선의 통정대부는 조선의 이익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인 통정대부는 이완용과 이하영 등 조선주재 공사관의 관리들을 만났다. 모스는 이완용과 이하영에게 조선에 철도가 꼭 필요하고 자신이 그 부설 책임자가 될 것이니 철도 부설을 할 수 있도록 왕실과 연결시켜 달라고 설득했다. 모스가 조선에서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미국에 있는 한국 공사관의 외교관들을 찾은 이유는 분명하다. 철도를 본적이 없는 조선의 관료들에게 철도 부설의 필요성을 설명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완용과 이하영은 과거 유길준이 그랬던 것처럼 미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서부에서 동부로 이동한 적이 있다. 철도의 효용성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완용과 이하영도 조선에서의 철도 부설 필요성에 공감했고, 세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이하영이 조선 귀국길에 조정에 바칠 선물로 가져온 것이 다름 아닌 기차 모형이었다. 고종과 문무백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관차와 객차를 보여줌으로서 신문명인 '철도'의 도입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완용과 이하영은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고종에게 모스를 초청해달라고 요청한다. 고종도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마침내 1891년 3월 25일 모스는 경복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다. 고종은 이완용과 이하영에게 모스와의 철도부설 계획을 논하게 했다. 어거스틴 허드 미국 공사의 막후 교섭과 서기관 알렌의 적극 중재 속에 이완용과 모스는 철도창조조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을 중심으로 철도창조조약의 무효와 철도부설 반대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막대한 부설비용 등이 그 이유였다. 결국 철도 부설 논의는 중단되었다. 이에 실망한 모스는 미국에서 조선까지 왕복 여비와 주미본국공사관원자량구조비(駐美本國公使館員資糧救助費)명목으로 은 1만원이라는 거액의 배상을 청구했다.

그 과정에서도 일본은 끈질기게 철도부설에 대한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는 조선에서의 이권 보장을 기정사실화하는 듯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최초의 철도부설권은 결국 모스의 차지가 된다. 모스가 조선 정부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넘겨받은 때는 1896년 3월 이었다. 러시아 주도로 이루어진 3국 간섭으로 일본이 위축된 시기였다. 또 청일전쟁을 치르느라 일본 정부의 재정상황도 좋지 않았다. 여기에 조선의 왕실과 관료들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기고만장한 일본의 행태에 거리를 두었다.

조선 정부가 일본에 등을 돌린 결정적인 원인은 일본이 주도면밀하게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을미사변 때문이었다. 무장괴한들이 왕실로 쳐들어가 왕비를 무참하게 살육한 사건은 조선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고종은 언제든지 살해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1896년 2월 11일, 일본 무력의 공포에 시달리던 왕과 대신들은 왕궁을 버리고 안전한 곳이라 판단한 러시아의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이른바 아관파천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지금의 정동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덕수궁 뒤편의 미공사관 북서쪽 담벼락을 따라 걸어가면 만나게 된다. 이 길을 따라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마자 미국은 고종의 최측근이자 친러 내각의 고위직을 차지한 이완용을 회유한다. 미국 공사가 되어 있는 알렌, 왕실과 이완용에게 철도부설권 대가로 금품을 제공할 의사를 밝힌 모스는, 그간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친미파 이완용과 일사천리로 조선철도 부설권에 대한 협상을 진행한다.

같은 해 3월 29일, 아관파천 50일 만에 서울-인천간 철도 부설권이 모스에게 주어진다. 특혜로 채워진 전문 13조의 경인철도허가서를 손에 쥔 모스의 기분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근대를 여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장치인 철도를 덥석 외세에 넘겨준 이완용. 하지만 이것은 나라를 팔아먹기 전의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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