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즐겨 탄다. 더운 여름날만 아니면 출퇴근도 한다. 집 앞 자전거 길은 불광천에서 홍제천, 한강으로 이어진다. 직장이 있는 합정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고 루트의 90퍼센트가 전용 도로이니 꽤 운이 좋은 편이다.
'자출'의 백미는 퇴근길. 아침의 천변처럼 상쾌하지는 않지만 빨리 달릴 이유가 없는 여유로운 저녁에 음악을 들으며 석양의 강변을 달리는 시간은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낭만적이다. 서정적인 음악은 아련한 기억들을 건드리기도 하고, 심란한 마음을 별일 아닌 것처럼 진정시키기도 한다. 고달픈 현실을 달관하게 만드는 힘이랄까. 노을 붉은 강변의 라이딩에는 그런 힘이 있다.
어릴 적 보조 바퀴가 달린 자전거로 혼자 배운 뒤 학창 시절과 대학 생활 내내 자전거를 즐겨 탔다. 해외여행을 가도 자전거 여행은 빼놓지 않았고, 길지 않은 외국 생활에서도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녔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자전거와 함께했지만 자전거 도둑과 평생을 두고 인연을 나눈 탓에 늘 곁을 지키는 친구 같은 자전거는 없다. 이 점은 늘 아쉽다.
크리스 해던의 책 <자전거를 좋아한다는 것은>(이케이북, 2014년 9월 펴냄)에는 유난히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65가지나 되는 에피소드는 자전거가 인간과 얼마나 친숙한지를 설명해 준다. 지금은 영국인 최고의 디자이너가 된 폴 스미스의 이야기(그는 집안에서도 자전거를 탄다)나 우리에게 생소한 자전거 도서관 이야기, 생선 장수용 자전거를 개조해 이동식 무대를 만든 암스테르담의 바크피츠 4인조 밴드 이야기 등 풍부한 볼거리가 소개된다. 이 중 몇 가지만 소개해 본다.
목요일은 자전거 타는 날…장례는 없다
목요일 클럽(Thursday Club)은 1977년 에디 슁클러와 노먼 헤이즈록이 영국 스롭셔 지방에서 만든 자전거 동호회다. 매주 목요일이면 이 지방 일대의 시골길 40마일(약 64킬로미터) 정도를 달린다. 전직 레이싱 선수와 베테랑 사이클리스트들로 구성된 이 모임은 가장 젊은 멤버가 쉰다섯 살이고 최고령자가 아흔셋일 만큼 역사와 연륜을 자랑한다.
얼핏 들으면 '목마른 클럽(Thirsty Club)'으로 들리기도 하는데 라이딩 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갈증을 해소하는 시간. 실제로 라이딩 중 술집이 한 군데씩 있게 마련이고 이 술집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먼저 떠난 창립자 에디의 딸이 매년 그의 생일이 되면 클럽에 보내오는 것도 한 병의 고급 위스키다.
헐렁한 바지와 셔츠, 크라바트(넥타이)를 매고 라이딩에 나서기도 하고, 라이딩 중 한 잔 술을 즐기기도 하는 이 자유로운 클럽에는 그러나 한 가지 엄격한(?) 룰이 있다. 목요일에 죽더라도 장례가 목요일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 40여 년 이어 온 목요일의 멋진 라이딩을 망칠 수 없다는 노인들의 애착이다. 나이가 들면 하루하루가 다르다고 하던가. 노인들에게 목요일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날이자, 서로 존재를 확인하는 날이다.
자전거로 세계 일주
자전거로 세계 일주를 하면 며칠이나 걸릴까? 2007년 8월 마크 보먼트는 프랑스에서 터키 이스탄불로 향하는 3540킬로미터 구간에서 첫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출발 직후 9일 동안에만 펑크가 세 번 났고, 스포크가 두 번 부러졌다. 여정 동안 자동차에 치여 다치기도 하고 강도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유럽에서 시작해 터기, 중동을 거쳐, 동남아와 오세아니아, 미주를 여행하고 다시 리스본으로 들어와 파리로 향하는 일정을 택했다. 위치 수신기와 루트 기록기로 중무장한 채 여정을 마친 그는 결국 기록을 공인받았는데, 종전 세계기록 276일을 무려 82일이나 당긴 194일 17시간이었다. 그는 이 기록을 2년 반이나 가지고 있었다.
열두 살에 가족의 도움으로 스코틀랜드를 횡단한 적이 있는 마크는 열다섯 살에는 영국 최북단 마을인 존오그로츠에서 영국 남서부의 땅끝 마을인 랜즈엔드까지 혼자서 종단하기도 했다. 세계 일주는 그의 평생의 꿈이었다. 그는 업적을 세우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정이 힘들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고달프지만 계획을 세우고 일곱 달의 여정에 나설 때면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고 한다. 단순하다. 그에게 꿈을 이루는 일은 멋진 일이다.
낡은 자전거를 위한 헌신
대서양의 영연방 섬나라인 바하마에서 건너온 브리기는 2002년 런던 워털루 역에서 자전거포를 열었다. 주로 고장 난 자전거를 가져다 수리해서 되파는데, 빈티지 스타일부터 픽스드 기어(변속기와 브레이크가 없는 트랙용 자전거)까지 다양하다. 브리기는 낡은 자전거를 가져다 수리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도 하고 노숙자들을 위해 무료 음식도 제공한다. 여기선 손님이 공구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역 근처 시장 한편에 외양간으로 쓰려고 비워둔 창고에서 무허가로 시작한 자전거포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형편이지만 지역에서 꽤 중요한 거점이 됐다.
"장사 수완이 형편없다는 건 나도 알지만, 뭐 대가를 돈으로만 받는 건 아니니까. 많은 사람이 돈에 꽉 붙잡혀 사는데, 나는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게 더 만족스러워요.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더라고." 브리기의 말이다.
어쩌면 자전거는 발명 이후 가장 진보하지 않은 기계일 것이다. 대중화된 것이 1890년대부터라고 하니 120년이 넘지만 형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두 바퀴를 체인으로 연결해 발로 구르는 방식은 처음의 형태 그대로다. 그래서일까. 자전거는 다소 복잡한 디지털 문물이 대체하지 못하는, 마치 몸의 연장처럼 친근한 존재다. 책 <자전거 여행>에서 김훈이 말한 대로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자전거를 좋아한다는 것은>에 담긴 이야기들은 자전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전거가 인간과 얼마나 가까운 존재인지, 또 인간이 자전거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사물들과 교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자전거가 아니더라도 손에 닿는 많은 사물들이 우리 삶의 방식과 철학을 드러내준다. 사람만이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변 넓은 자전거 문화와 우리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미덕은 폭넓은 자전거 문화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겠지만 자전거 도서관이라든가(박물관이 아니다), 자전거 폴로 경기, 패니파딩 자전거(앞바퀴가 큰 '빈폴' 자전거)와 픽스드 자전거 등 빈티지 자전거를 사랑하는 수많은 괴짜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현대 문명의 발전에도 뒷자리로 밀려나지 않은 자전거가 우리 주변에 어떻게 문화로 자리 잡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거품이 낀 고가의 브랜드 자전거가 위화감을 조성하고, 일상에서 자전거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인프라가 부족한 우리의 풍토를 생각하면 신선한 자극이다. 서울의 지하철역 자전거 거치대에 버려진 수많은 고물 자전거는 도심 속 천덕꾸러기가 된 지 오래다. 자전거 도로의 상당수는 자동차가 차지해 버린 지 오래고 정감 어린 자전거포는 사라져간다. 고가의 수입산 빈티지 자전거를 제외하면 낡은 자전거를 만들고 타는 문화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어쩌면 책이 의도하는 것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빈티지 문화는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경륜과 격조, 미학, 품위 같은 고상한 식견이 바탕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120여 년의 역사만큼 풍성한 자전거 문화를 찾아내기 위해 작가 크리스 해던과 사진가 린던 맥닐은 유럽의 여러 도시와 뉴욕부터 중국과 아프리카까지 취재하는 노력을 보였다. 린던 맥닐은 책 속의 사진을 모두 연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찍었다. 도시마다 다른 문화를 직접 담아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가을이다. 자전거 타기 더없이 좋은 계절. 나의 자전거 로드맨의 바퀴에도 팽팽하게 가을바람을 넣어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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