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이 아빠’의 미국 의료 체험기<1>: 미국에서 ‘제왕절개’ 가 두려운 이유?
미국에 오면서 우리 가족의 유일한 바람은 '몸 건강히 있다가 다시 돌아가는' 거였어요. 특히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기의 건강이 최우선이었죠. 그래서 열이라도 있는 것 같으면 아빠, 엄마가 노심초사했습니다. 실제로 갑작스럽게 열이 나서 한국에서 가져간 해열제를 먹인 적도 있었고요. 어쨌든 가능하면 병원 문턱을 넘지 않는 게 목표였죠.
그러다 결국은 선택의 순간이 왔습니다. 아파트 한 구석의 작은 피트니스센터에 놓인 러닝머신 벨트에 아기 오른쪽 손이 낀 것이죠. 그곳의 운동 기구를 하도 신기해해서 잠깐 데려갔던 것인데, 아빠가 한 눈 파는 사이에 사단이 난 것이죠. 피가 범벅이 된 아기를 안고서 거의 번개 같은 속도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당연히 엄마도 사색이 되었죠.
잠시 정신을 차리고서 찬찬히 살펴보니, 피부가 심하게 긁힌 찰과상이었습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지는 않았고요. 저녁 때라서 병원을 데리고 간다면, 응급실만이 유일한 선택지였죠. 잠시 미묘한 정적이 흐르다, 엄마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일단 소독부터 하고 경과를 보자." 한국이라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응급실, 하다못해 약국이라도 데리고 갔겠죠.
하지만 아빠, 엄마 둘 다 병원 특히 응급실을 데리고 갈 엄두가 안 나더군요. 분명히 한국에서 들고 간 보험으로 보장이 될 게 확실한 데도요. 그렇습니다. 둘 다 미국 온지 얼마나 됐다고 '위축 효과(chilling effect)'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낯선 의료 환경에 엄청난 병원비 걱정이 겹치면서 병원 문턱이 굉장히 높아진 것이죠.
여기서 잠깐 응급실 얘기를 안 할 수 없군요. 다행히도 우리 가족은 아직 응급실 신세를 진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절대로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 대신 한 지인이 겪은 응급실 얘기를 해보죠. 여기 보험비가 아까워서 젊음 하나만 믿고서 보험 가입을 하지 않고 미국 생활을 시작한 김상길(가명·31) 씨가 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평소 병원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김 씨에게 어느 새벽 참을 수 없는 복통이 찾아옵니다. 덜컥 겁이 난 룸메이트가 911 앰뷸런스를 부르면서 그와 응급실 간의 악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섯 시간 응급실과의 인연에 무려 약 7000달러(약 700만 원)의 병원비 폭탄을 맞은 거죠.
응급실에 도착하면 각종 검사가 시작됩니다. 미국에서는 "환자 보호를 위해서" (많은 이들은 이 대목을 "소송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읽더군요) 환자에게 온갖 검사를 합니다. 김 씨 역시 엑스레이, 시티(CT) 검사, 혈액 검사 등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검사에 든 비용 약 4000달러(약 400만 원)! (물론 한국 병원도 이런 검사를 합니다. 그 비용은 밑에서 공개합니다.)
김 씨는 이렇게 다섯 시간 정도 병원에서 누워서 진통제 등을 처방 받고 나서야 상태가 진정되어 퇴원합니다. 낯선 환경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고생하다 보니 위경련이 온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다섯 시간 동안의 입원비, 진료비, 약제비 등이 포함된 금액이 별도로 청구되어 약 2300달러(약 230만 원)!
일주일 후부터 병원에서 몇 장의 청구서가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더해 보니 약 7000달러(약 700만 원). 한국에서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위경련 환자의 총 진료비 약 50만 원, 그 중에서 국민건강보험 적용을 받고 나서 환자가 내야 하는 본인 부담금 약 25만 원과 비교해 보세요.
김 씨 생각을 하면서 정말 소독을 열심히 했습니다. (혹시 의료 담당 기자를 했다고 소독까지 잘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애를 다치게 한 데다 소독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욕 많이 먹었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혼잣말이 나왔습니다. "미국에는 나이롱환자는 없겠는데?" 아기 엄마 왈, "아니, 무서워서 병원 못 가다 병만 더 키우겠지."
실제로 그렇습니다. 지금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김 씨처럼 의료 보험 없는 삶을 선택한 미국 국민의 16%, 약 5300만 명입니다. (이들 중에는 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리는 상당수 재미 동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로 자영업자이거나 소규모 기업에 다니는 이들은 보험금을 감당할 만한 소득이 없거나 보험금이 아까워서 의료 보험 없이 살아갑니다.
올해부터 시행된 오바마 정부의 의료 보험 개혁도 이들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강제로라도 이들이 의료 보험을 가지게 하겠다는 것이죠. 그러니 오바마 정부의 의료 보험 개혁은 우리가 아는 '전 국민 의료 보험'과는 그 모습이 다릅니다. 의료 보험 미가입자로 하여금 민간 의료 보험이라도 들게 하는 것이니까요.
여러 자료를 보면, 이렇게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환자가 되레 응급실을 찾거나 입원을 하는 비율이 보험 환자보다 두 배 정도 높습니다. 병원 문턱을 쉽게 넘지 못했던 환자가 병을 더 키워서 어쩔 수 없이 응급실을 찾고서 입원까지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보험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환자가 어떻게 응급실은 찾아갈 수 있느냐고요?
미국에서는 1986년부터 연방 법으로 병원이 응급실을 찾은 환자의 진료를 거부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 전까지 병원이 지불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환자를 거부하는 일이 문제가 되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레이건 행정부와 공화당, 민주당 양당이 이 법을 제정한 것이죠. 물론 미국의 일반 병원을 찾아가면 의료 보험 가입 여부(지불 능력)부터 묻습니다!
"아기가 팔이 빠진 것 같아!"
아빠가 소독을 열심히 한 덕분이지 아기의 손이 흉터 없이 나아갈 무렵, 또 한 차례 큰일이 터졌습니다. 평소 아기와 격한 장난을 치다 혼이 많이 나는 아빠가 또 문제였죠. 그날따라 기분 좋던 아기의 팔을 잡고 흔들고 있는데, 갑자기 아기가 울기 시작한 겁니다. 내려놓고 살펴보니, 아기가 왼쪽 팔을 쭉 늘어트린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띵 하면서 두 글자가 스쳐지나갔죠. '탈골!' 같이 울상을 짓고 있는 아기 엄마의 닦달에 병원을 찾기 시작했죠. 미국 병원은 응급실 외에는 예약 없이 병원 방문이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서 마음이 더욱더 급했습니다. (미국에서 이럴 때 이용하는 응급 진료 센터(Urgent Care)는 나중에야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다 문득 한인 병원에서는 예약 없이도 받아줄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의 한인 병원에서 점심시간 전 진료 예약이 비었다며 한 시간 후에 찾아오라고 합니다. 지역 동포를 대상으로 일차 의료 기관 역할을 하는 작은 병원이었지만, 의사의 경력이 오래된 것을 보고서 호감이 갔습니다.
병원에 달려가 의사에게 아기를 보였죠. 몇 번 아기의 팔을 만져본 의사가 반가운 소리를 합니다. "그냥 어깨 근육이 놀란 것 같은데…."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의사의 권유대로 엑스레이 사진까지 찍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엑스레이 사진을 찍으려고 침대에 눕히자마자, 아기가 그때까지 안 움직이던 왼쪽 팔을 포함해 양팔을 움직이면서 발버둥을 치는 거예요!
이렇게 한바탕 호들갑을 떨고 나서, 병원비를 정산할 시간이 왔습니다. 엑스레이 사진까지 포함해서 350달러(약 35만 원!). 행색이 초라해보였는지 원무과 직원이 당장 결제할 돈이 없으면 보험 회사에서 보험금을 받고 나서 가져다줘도 된다고 친절하게 덧붙입니다. (외상!) "아, 그냥 결제할게요!" 카드로 350달러를 결제하면서 미국의 비싼 의료비를 실감할 수 있었죠.
그러고 보니, 고작 위경련으로 하룻밤 새 700만 원의 병원비 폭탄을 받은 우리 김 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얘기를 안 했군요. 당연히 김 씨는 한 번에 이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던 큰 병원비를 접한 그는 주위에 수소문한 끝에 병원비를 깎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합니다. 미국 병원은 이렇게 남대문시장에서도 잘 안 해주는 외상도, 할인도 해줍니다.
지금 김 씨는 나머지 2900달러를 열두 달에 걸쳐서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응급실 괴담'과 '사랑의 리퀘스트'가 합쳐진 이 김 씨의 사연은 미국 의료 현실의 또 다른 맹점을 짚고 있습니다. 즉, 비싼 의료비가 부메랑처럼 병원의 목을 겨누며 돌아오고 있는 거죠. 사정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김 씨처럼 보험 없이 응급실을 찾은 환자는 물론이고, 보험이 있더라도 우리 가족처럼 보장성이 낮은 보험을 가진 환자들은 자칫하면 엄청난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파산한 가정의 절반 정도는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한 탓인데, 그 중 3분의 2는 어떤 형태든 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환자가 파산하면, 병원으로서는 의료비를 회수할 길이 사라집니다. 그러다 보니, '할인'에 '자선'에 온갖 수단을 써서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병원과 한 푼이라도 덜 내려는 환자 사이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는 보험 회사의) 힘겨루기가 끊임없이 계속되죠. 심지어 여기에는 '추심' 업체까지 등장합니다.
벼랑 끝에 몰린 환자 중 일부가 '배 째라'고 나오면, 병원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죠. 그래서 병원은 그런 환자를 병원비를 받아주는 일종의 '추심' 업체에 넘기고("떼인 병원비 받아드립니다!"), 그 업체는 수수료를 챙기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환자를 닦달해 병원비를 받아냅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통장에 350달러 정도는 있었기에, 또 그 정도는 보장할 보험도 있었기에 이국에서 자선에 호소할 필요도 없었고, 추심 업체에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계속)
- 의료 민영화, 재앙인가? 축복인가? |
* 이 기사는 미디어 다음과 공동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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