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어려워진 것은 1990년대 중후반 들어서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들이 전국적으로 골목 진출을 개시한 것이 이즈음이었다. 그에 비례해 동네빵집은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신 사장이 살던 동네도 마찬가지였다. 십여 년이 지나고 보니 인근에서 장사하던 빵집 7곳이 문을 닫고 신 사장네 빵집 한 곳만 남았다. 그 사이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 6곳이 새로 들어섰다. 문을 닫은 동네빵집이 대기업 프랜차이즈 가맹점으로 이름을 갈아탄 경우도 있었다. “가맹점으로 바꾸지 않으면 바로 옆에 매장을 내겠다고 (대기업들이) 위협하니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고 신 씨는 말했다.
"처음엔 식당이 새로 들어선다기에 그런가 보다 했지. 불과 열 걸음 떨어진 옆옆 가게에 파리바게뜨가 들어올 줄 누가 알았겠나."
파리바게뜨가 옆에 생긴 이후 자꾸만 줄어가던 매출에 애가 타던 최 씨는 사실상 업종을 전환하는 결단을 내렸다. 매장을 카페로 리모델링하면서 판매하던 빵의 종류와 갯수를 대폭 줄여버린 것이다. 이를테면 커피가 주종이고 빵은 구색 맞추기 용이 된 셈이다. 함께 빵 굽던 종업원 2명도 내보냈다.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카페는 그런대로 성공적인 듯했다. 커피에 관심이 많아 바리스타 교육까지 이수한 둘째 아들이 직접 원두를 공수하는 등 정성을 들이면서 커피 맛이 괜찮다는 소문이 퍼졌고, 동네 이웃들도 사랑방인 양 이곳을 모임 장소로 삼게 됐다. 그러나 문제의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이 매장을 확장해 카페 공간을 새로 내면서 또 다시 시련이 시작됐다. "우린 커피 한 잔에 3000원을 받고 있는데, 그쪽에서 커피를 1500원에 판다는 얘길 듣고 맥이 풀렸다"라고 최씨는 말했다. 자기네가 좋은 원료를 쓴다고 아무리 강조해 봐야 대기업의 헐값 공세와 마케팅 공세 앞에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대기업에 치이고 자본은 딸리고…반도의 흔한 빵집 사연
네티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여기까지는 '반도의 흔한 빵집 사연'이다. 빵 굽는 기술이 있고 부지런하기만 하면 처자식 먹여 살리고 내 집 장만도 거뜬히 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고 이들은 회고한다. <제빵왕 김탁구>에서 마냥 동네빵집의 전성시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한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대기업들이 제과제빵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면서다. 물론 대기업들이 진출하면서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국내 제과제빵 업계가 생산·유통·마케팅 등 모든 분야에서 일대 혁신을 이룬 것은 부인하지 못할 성과다. 그러나 이들 대기업은 자기네 프랜차이즈에 들어오게끔 기존 동네빵집을 압박하고, 이를 거부하는 동네빵집이 있을 경우 바로 옆에 신규 매장을 오픈하거나 건물주에게 기존 동네빵집 임대료를 터무니없게 인상해 임대 계약을 해지하도록 유도하는 등 각종 불공정한 형태를 일삼아 골목상인들의 원성을 샀다. 이 같은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해가 사회문제가 되자 2013년 동반성장위원회는 기존 동네빵집으로부터 500m 이내에는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을 낼 수 없게끔 출점 제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마침내 현실이 된 빵집 주인들의 숙원
'반도의 흔한 사연'을 넘어 이들이 '특별한 사연'의 주인공이 된 것은 동네빵네협동조합이라는 협동조합을 만들면서다. 발단은 2013년 중소기업청 산하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시작한 '소상공인 협동조합 활성화' 공모 사업이었다. 소상공인 5명 이상이 모여 협동조합을 만들면 2억 원 한도 내에서 공동설비·장비 구매, 공동 브랜드 개발 등을 지원한다는 공고를 보고 서대문구·은평구 빵집 사장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솔직히 공모 참여 자격이 협동조합으로 한정돼 있어 협동조합 설립에 눈을 돌린 측면이 크다"고 신흥중 사장은 말했다. 그렇다고 정부의 '눈먼 돈'을 거저먹겠다고 달려든 것만은 아니었다. 배이성 노블베이커리 사장(51·은평구 수색동)에 따르면, 공동시설은 이들의 숙원이었다. 협회 활동 등을 통해 오랜 기간 친목을 다져온 빵집 주인들은 ‘우리도 제대로 된 공장만 있으면 대기업과 맞붙어볼 만할 텐데’라며 아쉬움을 토로하곤 했다. 지금처럼 가내수공업식으로 각자 자기네 오븐에서 빵을 구워내는 구조로는 다양한 빵 또는 숙성 시간이 오래 걸리는 빵은 생산하기가 어려웠다. 새로운 기술을 교육받고 신제품을 개발하는 데도 한계가 뚜렷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이를 지원하겠다고 나섰으니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때마침 '귀인'도 나타났다. 연세대 학생들로 이뤄진 '인액터스'가 그들이었다. 인액터스는 탈북자가 중심이 된 도심 녹화 사업이나 자원 재활용 사업 등 사회공헌 활동을 주로 해온 대학 동아리다. 2013년 들어 이들이 새롭게 눈을 돌린 것이 골목상권 문제였다. “골목상권 문제를 공부하다 동네빵집들이 처한 안타까운 현실을 알게 됐다. 어떻게든 상황을 바꿔보고 싶었다”고 인액터스 조성열씨(연세대 영어영문학과)는 말했다. 이에 따라 동아리 내에 ‘동빵팀(동네빵네 프로젝트 팀)’을 구성한 학생 10여 명은 먼저 학교에서 가까운 서대문구·은평구의 동네빵집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는 상권 분석에서 마케팅 계획 수립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도울 수 있는 일을 돕고 싶다고 빵집 주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협동조합 설립 논의가 불거진 것이다. 각자 매장을 운영하며 생업에 바빴던 빵집 사장들이 협동조합을 순조롭게 설립하기까지는 이 학생들의 도움이 컸다. 학생들은 협동조합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공부하며 정관 작성에서 설립 신고까지 빵집 사장들을 서포트하는 한편, ‘동네빵네’라는 협동조합 공동 브랜드를 개발하고 홍보·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맛있게 부푼 빵을 형상화시킨 감각적인 로고 또한 이들이 소개한 디자이너들의 재능 기부로 탄생한 것이다.공장 함께 운영하며 히트상품 레시피도 공유
2013년 6월, 설립 신고를 마친 동네빵네협동조합이 맨 먼저 역점을 둔 것은 숙원사업이었던 공동 공장의 설립이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으로부터 공동 시설비 2억 원을 지원받게 되면서 동네빵네협동조합에 참여하기로 한 빵집 사장 11명은 각자 천만 원씩을 출자금으로 냈다. 정부 지원금의 20~30%에 해당하는 금액은 소상공인들이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이를 종잣돈 삼아 공장 부지를 물색하고 나선 조합은 2014년 1월 은평구 신사동에 마침내 공동 공장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아직 무더위가 한창인 8월 말, 이곳 공장을 직접 한번 찾아가 보았다. 지하철 6호선 새절역에서 걸어 3분 거리. 조합원들이 속한 빵집들로부터 가까워 언제든 신선한 빵과 반죽을 배달받을 수 있는 최적의 입지였다. 협동조합 2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신흥중 사장의 안내를 받아 공장 안으로 들어서니 제빵사들이 거대한 밀가루 반죽을 놓고 씨름 중인 선반대가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본즉 대형 반죽기며 숙성기, 오븐도 차례로 눈에 띄었다. 과거 개인들이 빵집을 운영할 때는 사들일 엄두를 내기 어려웠던 개당 2000만~3000만 원짜리 고가의 장비들이란다. 신 이사장이 특히 공을 들여 설명한 것은 천연효모 발효기. "시중에서 파는 빵 중에는 제빵 개량제를 써서 반죽을 강제로 발효시키는 빵이 많다. 그래야 발효 시간이 단축되기 때문이다. 개인 빵집들도 사정이 비슷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렇게 강제 발효시킨 빵을 먹은 사람들은 "밀가루만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다"라고 하소연하곤 한다. 그러나 소화를 저해한 범인은 밀가루가 아니다. 이들 빵의 식감을 오랫동안 부드럽게 유지하기 위해 다량으로 집어넣은 유화제·방부제 등 식품첨가물이 진짜 범인인 셈이다. 동네빵네의 경우 공동 공장이 생기면서 천연효모 발효기를 이용해 2~3회에 걸쳐 반죽을 천천히 발효·숙성시키는 일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더 건강한 빵을 손님들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됐다고 신 이사장은 말했다.협동조합, 결코 쉽지만은 않더라
동네빵네협동조합에는 아직 불안 요소도 많다. 심지어 동네빵네에 속한 한 조합원은 “누가 협동조합을 한다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다”고 말했다. "협동조합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협동조합을 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배운 점도 많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지만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협동조합을 만드는, 어쩌면 선후가 뒤바뀐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계속해서 불거졌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공장에서 발생했다. 배이성 노블베이커리 사장은 "처음에 공장을 너무 크게 시작했던 것 같다. 차근차근 규모를 키워갔어야 하는데 서로가 경험이 없다 보니 욕심이 앞섰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잘못된 지원 정책이 사태를 더 악화시킨 측면도 있다고 주장했다. "신규 설비 중심으로 지원을 하다 보니 골목상인들이 제대로 협동조합을 공부하거나 미래를 설계할 시간 없이 설비 투자에 매달리게 됐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비용도 발생했다. 일단 공장 내 위생·냉각·자동주문 시설 등을 갖춰가는 데 끊임없이 추가 비용이 들었다. 초기 운영비를 따로 떼어놓지 않은 것도 실책이었다. "처음에는 특히나 수요공급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다 보니 재고가 쌓이면서 적자가 늘었다. 외부 이벤트에서 빵을 엄청나게 팔아놓고도 뒤로는 남는 게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구멍가게 수준으로 사업하던 사람들이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매 순간 도전이었다"고 신흥중 이사장은 말했다. 하다못해 세금 비용도 발생했다. 신 이사장은 "올해 처음 법인세를 납부하면서 깜짝 놀랐다. 정부가 말로는 협동조합을 지원한다면서 일반 기업과 똑같이 법인세를 물리더라"고 말했다. 이런 과정에서 구멍 난 재정은 조합원들의 갹출로 메울 수밖에 없었다. 천만 원으로 시작됐던 조합원 1인당 출자금은 일 년여만에 2000만~3000만 원 수준으로 늘었다. 한 조합원은 "매장에서 돈을 좀 만지게 되면 뭐하나. 공장 빚 메우느라 꼴아박아야 하는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이러니 조합원 간에 불화가 빚어지기도 했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언성을 높이는 일도 발생했다. 일부 조합원의 이기적인 행동 또한 협동조합을 위태롭게 했다. 공장의 경우 이들 조합원 매장이 필요로 하는 수요에 따라 공급량을 조절하게 돼 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에 이어 전통적인 빵집 비수기인 여름을 맞으면서 매출이 하락하자 애초에 약속했던 물량을 구입하지 않은 채 자기 매장에서 직접 밀가루를 반죽하고 빵을 빚는 조합원들이 생겨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장 매출이 하락하고, 이것이 다시 조합원들의 부담 증가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배이성 사장은 “조합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이걸 제재할 방법이 전혀 없어 답답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협동조합이라는 조직 형태를 선택한 이상 문제를 풀어나갈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는 것 같다"고 신흥중 이사장은 말했다.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는 것이 결국 조합원 모두에게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협동조합의 작동 원리를 믿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집(공장)이 잘돼야 내 집(개인 매장)도 잘된다. 우리 집이 잘못되면 내 집도 미래가 없다"는 신 이사장은 요즘 조합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우리 집'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방책을 궁리 중이다. 조합원 이외 가게들에도 빵 반죽을 제공하면서 공장 거래처를 늘리고, 학교들을 상대로 빵 만들기 체험학습을 유치하는 등 사업을 다각화하는 방안 등이 그것이다. 마실ing의 안주인 안미진씨(47)는 협동조합을 하면서 생각지 못한 우여곡절과 시행착오를 겪기는 했지만 과거처럼 한 치 앞이 안 보여 낙담하는 일은 사라졌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 지금은 그나마 이렇게 하면 동네빵집을 계속해 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녀가 전공을 바꿔 가업을 잇겠다고 나선 큰아들을 환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달라진 가게를 보고 제 일처럼 좋아하는 단골손님들을 보며 새삼 자부심도 생기더라고 안 씨는 말했다."언젠가부터 파리바게뜨가 빵집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우리조차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협동조합을 하면서 그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더 오랜 기간, 더 가까운 곳에서 이웃들의 건강과 추억을 챙겨온 것은 우리들 아닌가. 혼자서는 어렵겠지만 여럿이 힘을 합치면 동네 빵집이 다시 빵집의 대명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 계간지 <생협평론>은 (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가 펴내는, 협동조합을 다루는 본격적인 전문잡지로서 협동경제·나눔·평화에 대한 의견들이 교환되는 공간입니다. 정보지이자 실천적 교육서로서 협동조합 활동가뿐 아니라 협동조합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고, 협동조합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경제·문화적 이슈를 다룹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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