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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꿈'은 왜 미국인을 사로잡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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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꿈'은 왜 미국인을 사로잡지 못했나? [의료 민영화, 재앙인가? 축복인가?] '준이 아빠'의 미국 의료 체험기<3>
- '준이 아빠'의 미국 의료 체험기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서 몇 주가 흘렀습니다. 어느 날, 아기의 기저귀 냄새가 심상치 않은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기저귀를 열어봤더니 설사였죠. 이런 날은 꼭 주말입니다. 주말 내내 아빠, 엄마 모두 노심초사하면서 하루 종일 아기의 엉덩이에 코를 박고서 냄새를 확인하고, 변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보냈습니다.

다행히 월요일 아침이 되자 설사도 멈추고, 주말 내내 쳐져 있던 아기도 기운을 차리는 것 같았어요. 잠시 마음을 놓았던 탓일까요? 아기 밥을 먹이고 나서, 아빠 엄마가 간단히 요기를 하고 있는 틈에 아기가 거실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장난감 차를 가지고 올라가는 걸 보았습니다. "내려와, 준아!" 하고서 잠시 한눈 판 사이에 "쿵" 소리가 들리지 뭐예요.

미국의 아파트는 카펫이 깔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아기가 웬만한 높이에서 떨어져도 다칠 일이 없습니다. (물론 카펫은 아기 키우는 입장에서는 최악의 인테리어입니다. 미국 와서 카펫 얼룩 지우는 전문가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은 달랐습니다. 아기가 장난감 자동차와 함께 뒤로 넘어지면서 하필이면 테이블 옆에 놓인 의자 받침에 머리를 박은 거예요.

아기는 금세 눈물을 그쳤지만, 왼쪽 뒤통수가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는 아기의 얼굴을 닦아주던 엄마가 "코피다!" 하고 외치는 거예요. 정말 한쪽 코에서 피가 좀 나오더군요. 그 때부터 엄마와 아빠의 신경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빠는 "별 일 아니야" 하고 판정을 내렸죠. 아기가 의식도 또렷하고 잘 노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런데 '폭풍' 검색을 하고 나서 엄마는 점점 더 불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를 부딪친 후 코피가 날 경우에는 병원에 가봐야 한데." 한국 엄마들이 끼고 사는 일명 '노란 책(<삐뽀∼>)'까지 언급하며 "당신이 의사야" 하고 나오니 당할 도리가 없더군요. 그리고 저 역시 "혹시나"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급기야 잠시 멈췄던 설사도 다시 시작됐죠. 곧바로 갈 수 있는 소아과와 이참에 연을 맺어둬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잠시 근처 소아과를 검색한 끝에 비교적 평판이 좋은 곳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서툰 영어로 아기의 증상과 보험 종류 등을 확인받고서, 다음 날로 예약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한나절이 지난 터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다음 날 차로 20분 거리의 소아과를 찾아갔습니다. 처음 찾은 환자라서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나니, 애초 예약한 시간보다 20분이 훌쩍 지나가더군요. 그러고 나서, 진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중년의 여의사가 들어왔습니다. 병원을 찾은 이유를 설명했더니 한 5분쯤 아기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더군요. "No Problem!"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멈췄던 설사가 다시 시작한 이유는 보채는 아기를 달래라 먹인 우유 때문인 것 같다며 일주일은 먹이지 말라는 조언도 줬습니다. 한 10분쯤 의사를 보고 나서, 아무런 처방 없이 진찰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그리고 원무과. 역시 결제를 하고서 나중에 보험 회사에 청구하라고 조언을 합니다. 10분의 진료비는 130달러(약 13만 원).

한국에서 이런 일로 동네 소아과를 찾으면, 국민건강보험이 부담할 금액을 빼고 환자가 직접 부담해야 할 초진료는 약 4000원 정도입니다. 애초의 총 진료비는 13500원 정도고요. 가장 기본적인 진찰비부터 미국이 한국보다 대략 열 배 정도 비싼 셈이죠.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자는 아기를 놓고서 거의 처음으로 경험해본 미국의 병원을 놓고서 엄마와 토론을 했습니다.

"친절하다. 미국 병원이 한국보다 비싸긴 해도 의사들도 친절하고, 3분 진료 같은 것도 없잖아."(아빠) "그런데 요즘엔 한국 병원도 의사들이 다 저 정도는 친절해. 한국 병원도 웬만한 소아과는 시설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낫고."(엄마) "그래도 한 10분 봐 줬잖아."(아빠) "우리 맨날 찾아가는 의사도 5분 이상은 봐 주잖아."(엄마)

가끔 "미국 의료비가 비싸지만 의료 서비스의 질 면에서는 한국과 비교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한국 의사의 실력, 병원 시설 또 다른 서비스의 질이 과연 그렇게 열등한지 의문입니다. 단 한 번의 소아과 경험을 절대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에서 내놓는 각종 건강 통계를 보면, 한국은 거의 모든 지표에서 미국보다 낫습니다.

국민건강보험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의료 체계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만 놓고 봤을 때는 미국과 비교해도 그렇게 열등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도대체 미국의 의료 체계는 어떤 점에서 그토록 한국의 정치인이나 공무원을 매료시키는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살펴 볼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브레이킹 배드> 주인공은 왜 마약 제조에 나섰을까

▲2012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오바마케어'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리자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AP=연합
내 코가 석 자인데, 남의 나라 일까지 걱정할 처지가 아니죠. 하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오바마 정부는 전 국민이 의료 보험을 갖도록 하는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몇 번의 위기 끝에 2014년부터는 '오바마 케어'라는 이름의 정책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지의 분위기는 약간 당혹스럽습니다.

우선 오바마 정부의 의료 보험 개혁에 기꺼이 찬성하는 미국인은 절반도 안 됩니다. 각종 여론 조사에서 이 개혁에 대한 반대 여론은 늘 40%를 웃돌며 찬성 여론을 압도합니다. 이런 조사 결과를 일부 정치 세력(공화당)이나 기존 의료 체계의 수혜자(민간 보험 회사)의 선동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습니다.

이곳에 와서 살펴보니, 그 이유를 짐작할 만했습니다. 우선 정작 미국인의 대다수는 지금의 미국 의료 체계를 큰 불편 없이 받아들입니다. 앞에서 보험 없는 16%, 약 5300만 명의 미국인 얘기를 했었죠. 다시 생각해 보면, 미국인의 약 80% 이상은 어떤 식으로든 의료 보험을 가지고 있는 셈이죠.

그들이 보기에 미국 의료는 겉으로는 문제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시장이 도저히 손을 쓰지 못해 구멍이 난 부분을 어떻게든 땜질 처방으로 막고 있습니다. 65세 이상의 노인 등은 '메디케어(Medicare)'로, 저소득층은 '메디케이드(Medicaid)'로 정부가 지원을 하죠. 미국 인구의 27%나 되는 이들 중 '일부(!)'는 자기 부담 한 푼 없이 병원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더구나 보험 없는 이들도 병원 이용이 아예 차단된 것은 아닙니다. 자선 단체가 병원비를 대신 내주기도 하고, 병원이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서 병원비를 깎아주기도 하고, 심지어 제약 회사에서 샘플로 제공한 약들을 모아서 이런 환자에게 투약하는 눈물겨운 사연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자선'으로 시장이 방치한 구멍을 때우고 있는 것이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당장 일정 규모 이상의 직장을 다니는 절반(54%)이 조금 넘는 미국인은 기업과 개인이 보험금을 나눠서 내는 민간 의료 보험에 가입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반반씩 나눠서 내고, 사내 복지가 좋은 기업은 80% 이상 심지어 100%를 내주기도 합니다. 물론 직장에 따라서 가입한 보험의 혜택은 천차만별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갑자기 폐암 판정을 받은 미국인이 있습니다. 한창 잘 나가는 '구글'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병원에서 약 10만 달러(약 1억 원)에 달하는 항암 치료를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회사에서 가입시키고 보험료도 내준 보험이 모든 걸 보장해 줄 테니까요.

그럼, 몇 년간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는 어떨까요? 한 공립학교의 화학 교사로 일하던 그는 당연히 의료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폐암 판정을 받고서도 드라마 속에서 약 9만 달러(약 9000만 원)에 달하는 항암 치료를 받을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마약 제조에 나서 돈을 손에 쥔 뒤에야 치료를 받지요.

드라마 속 주인공 화이트는 지금 미국의 보통 사람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최고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기업으로부터 제공받는 사람은 굳이 의료 보험 개혁에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화이트처럼 그저 그런 의료 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도 큰 재앙이 닥치기 전에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아채기가 힘듭니다.

(이건 마치 평소 세금처럼 빠져나가는 국민건강보험료를 보면서 투덜대기만 하던 우리가 암과 같은 중증 질환에 걸리고 나서야 그 고마움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국립암센터의 분석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폐암 진단 이후 첫 해 수술, 항암 치료 등에 들어가는 총 진료비는 (국민건강보험 적용이 되는 항목만 놓고 보면) 약 1400만 원입니다.

우리나라는 2009년 12월부터 암 환자는 전체 진료비의 5%만 부담합니다(약 70만 원). 물론 실제 폐암 환자가 지불하는 비용은 수백만 원이 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왜냐하면, 1, 2인실 같은 상급 병실, 새로운 수술 기법이나 신약 등은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월터가 우리나라의 교사였다면, 확신하건대 마약 제조 따위에는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막상 겉으로만 보면, 미국의 의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이 사회에서 가장 약자(극빈층, 장애인, 노인 등)는 병원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절반이 약간 넘는 직장인도 (사정이 천차만별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병원 이용에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평소에 병원에서 잘 보이지 않는 보험 없는 이들마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선의 손길이 있습니다.

이렇게 겉으로는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오바마 정부가 의료 보험 개혁을 들고 나왔으니 찬성보다는 반대가 많은 게 당연합니다. 오바마 정부는 '전 국민이 의료 보험을 갖고 있는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전망이 부정적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 병원 곳곳에서 이런 광고를 볼 수 있으니까요.

"최소한의 비용으로 보험을 가입해 오바마의 벌금을 피하세요."

글을 마치며 : 의료는 '권리'인가, '선택'인가?

▲건강보험개혁안(오바마케어)를 극렬히 반대한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과 마주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이제 긴 글을 끝낼 시간입니다. 애초 20매 정도로 써야 할 원고가 무려 네 배나 길어졌습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많은 미국인 친구 또 동포의 얘기를 듣고, 이런저런 자료를 살폈습니다. 그러고 나서 새삼 미국이 고마워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감히 다른 나라에서 하지 못한 초유의 실험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수십 년째 진행하고 있으니까요.

바로 의료와 관련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실험이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끼셨겠지만, 미국인은 시장에서 자신이 얼마나 발언권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서, 쉽게 말하면 은행 잔고가 얼마냐에 따라서 받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의 질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대다수 시민은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미국 사람은 의료 서비스를 시민의 '권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으로 간주합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만큼만 선택해서 또 그 만큼만 누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죠. 그리고 바로 그런 체계에 적응하지 못해 실패한 이들에게는 정부 혹은 제3자가 나서서 자선을 베푸는 것이죠.

반면에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암묵적으로 우리나라의 많은 시민은 의료 서비스를 '권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대다수 시민이 지금까지 장황하게 설명한 미국의 의료 현실을 놓고서 어처구니없어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권리에 따르는 의무로서 우리는 (때로는 아깝기도 하지만) 자신의 형편에 맞게끔 국민건강보험료를 꼬박꼬박 내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질문에 답할 때입니다. 도대체, 왜 미국 의료는 정치인, 공무원 혹은 기업인을 그토록 매혹시키는 것일까요? 이명박 또 박근혜 정부의 의료 산업 육성 정책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만, 사실 노무현 정부도 비슷한 '의료 산업 선진화' 정책을 추진한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합니다.

굳이 따져보면 미국 의료가 가지는 산업으로서의 잠재력 때문이겠죠. 미국처럼 의료 체계를 바꾸면 새로운 일자리가 엄청나게 늘어나겠죠. 보험 시장, 병원 시장, 광고 시장 심지어 병원비를 안 내는 환자를 상대하는 추심 업무를 담당하는 시장까지 지금은 상상도 못할 새로운 시장이 열릴 것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경제를 지탱해온 몇몇 산업의 한계가 빤히 보이는 상황에서, 이런 의료 산업의 잠재력은 분명히 매혹적입니다. 당장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도 분명히 새로운 기회를 잡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광고 시장이 포화된 상황에서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고 있는 제가 속한 언론 산업도 이 대목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을지 모릅니다.

반면에 지금까지 살펴본 미국 의료의 문제점에서 확인했듯이, 분명히 그런 변화에 대한 대가도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어쩌면 우리가 당연히 '권리'라고 생각해온 것들이 뿌리째 흔들리는 혹독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박근혜 대통령의 의료 산업 육성 정책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더 열띠게 토론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길고도 장황한 얘기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디 우리 가족이 남은 5개월도 미국 병원 신세지지 않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원해 주십시오. 참, 한국으로 돌아가서 복직하면, 월급 명세서에 찍힌 국민건강보험료 납부 내역이 새삼 다르게 보일 것 같습니다. 한국 시민으로서 내 권리를 보증하고, 다른 시민과의 연대를 확인하는 징표로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준이 아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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