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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눈으로 본 세월호…오보만 문제?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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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눈으로 본 세월호…오보만 문제? NO

[프레시안 books]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고백하자면, 나는 기자인데도 기사 읽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 매일 아침 조간을 의무적으로 훑는 일은 꽤나 지루한 노동이다. 여름휴가 기간이나 여행 중에는 신문 근처에도 가지 않고, 우연한 기회에 관심 가는 기사를 읽어도 뒤돌아서면 금방 그 내용을 잊는다. 나는 내가 왜 이러나 했다. 뉴스가 좋아 기자가 됐다는 사람들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또 하나 고백하건대, 나는 정치부 기자인데도 정치 기사가 제일 재미없다. 퇴근 후를 풍요롭게 해줄 문화생활 정보가 담긴 것도 아니고, 너덜너덜해진 휴대폰을 무엇으로 바꾸면 좋을지에 팁이 되는 경제 정보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멀게만 느껴지는 '개헌'을 둘러싼 그들의 다툼과 당장 나의 내일 사이의 연결 고리란 뭐란 말인가. 그래도 왠지 그것이 부끄러워 '재미없다'는 감정을 숨기고는 한다. 나는 내가 왜 이러나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재미없어라 하는 뉴스에 관한 책, 알랭 드 보통이 쓴 <뉴스의 시대>(문학동네, 2014년 7월 펴냄)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우리네 뉴스는, 특히나 정치 뉴스는 때때로 지나치게 피사체와 가까워 그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조금 더 잘 보겠다고 생눈을 포기하고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순간 좌표를 잃어버리고 동서남북을 헤매는 것과 비슷하다. 저자의 고상한 비유를 빌리자면, 16세기 화가 티치아노의 작품 <누비 소매 옷을 입은 남자>를 1~2밀리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감상해버려 결국엔 무의미한 멍 자국을 보고 있는 것과도 같다.

세월호 보도, '오보'만 문제가 아니었다

ⓒ문학동네
예컨대 이런 경우다.

"여야는 지난달 30일 세월호 특별법안에 합의하며 국회 정상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날 합의된 특별법안은 특별검사 후보군 4명을 양당의 합의로 특검추천위원회에 제시한다는 것이 골자다. 특검추천위 가운데 여당 몫 2명을 야당과 유가족의 동의를 얻어 선정키로 한 8월 19일 2차 합의안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다만 유가족의 특검 후보 추천 참여 여부는 추후 논의키로 해 논란의 불씨를 남겼다."

이 기사를 보고 세월호 특검의 향방을 즉각적으로 예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법 체계의 전문가라면 몰라도, 일반인의 눈으로는 이걸 읽고 특검 구성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리기는 제법 어려울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많은 뉴스는 이 이상의 설명이나 해설을 덧붙이지 않았다. 당장에 주어진 정보를 가지런히 나열하고, 독자에게 알아서 '독해'를 요구하는 것. 많은 뉴스(기자)가 상습적으로 벌이는 일이다.

<뉴스의 시대> 설명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독자가 느끼는 지루함과 당혹스러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이를 알랭 드 보통은 "근엄한 표정의 공무원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아서 끝내는 지치게 하는 일련의 사안들로 꽉 찬 서류 가방을 들고 급히 우리에게 달려오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다. 긴 시간 "다듬어진 안목을 통해서만 그 진짜 논리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이야기의 극히 일부만 뽑아낸" 탓에 "정치적 해결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 있기보다는, 근본적으로 혼란스런 우주 속에 던져진 듯한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고도 그는 썼다.

맞는 말이다. 고로, 언론의 이 같은 보도 행태가 미완의 세월호법 타결과 무관하다고 항변하기는 어렵다. 절대다수의 국민이 의회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여야 간 논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은 그때나 지금이나 뉴스다. 특별법을 둘러싼 논쟁이 길어질수록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한 사회적 이해도가 높아졌어야 하는데, 정작 실상은 '피로감'이 누적됐다. 언론이 특검과 정치적 독립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구성하는 데 실패한 결과, 어느 순간 '유가족의 포기를 전제한 조속한 여야 합의'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루가 다루게 떨어지는 지지율 속에, 수세에 몰린 야당은 그렇게 미완의 세월호법에 합의했다. 참사 당일과 그 후에 있었던 수많은 '오보'와 함께 언론이 저지른, 그렇지만 곧바로 은폐된 또 다른 잘못이다.


이정표 없는 무심한 뉴스, 과감히 버리자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저자는 "적절한 이정표만 세워지면 유감스러운 설명조차도 회복될 가망이 있다"고 말한다. "오갈 데 없이 떠도는 정보 조각들을 거기 감춰진 논리를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 주는 서가로 운반하는" 사서의 역할을 언론이 해야 한단 얘기다. 세월호법 보도에 이를 적용한다면, 그 이정표는 다름 아닌 '진상 규명'이었을 테다. 각종 기사에 등장한 수사권, 기소권, 특검추천위, 특검 후보 등의 단어들은 전부 그 하위 범주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것도 아주 한참의 하위 범주 말이다.

돌이켜 보면, 세월호법 논쟁의 핵심은 '성역 없는 진상 규명을 가능케 하는 제도란 무엇인가'여야 했다. 세월호법은 이전엔 성공한 적이 없는, 권력 기관이 얽힌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단 시도다. 따라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개념과 제도를 사회에 '장착'해야 하며, 이는 기존 체계에 대한 수정을 마땅히 '전제'해야 했다. 논쟁을 하며 우리가 가장 지양했어야 하는 것은, '체계 내 사고'였다.

여기서 언론이 했어야 하는 질문 또한 정해져 있었다.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것은 사법 체계의 근간을 흔든다'는 새누리당의 논리에 언론은 이렇게 물었어야 했다. '현재의 사법 체계를 흔들면 왜 안 되는데? 그것을 흔들지 않고 진상 규명이 가능하단 말이야? 지금의 사법 체계가 가장 완성된 상태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지? 왜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창의적일 수는 없는 거야?'라고 말이다.

혹자는 이런 이야기가 너무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라며 외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원래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많은 경우, 피사체가 너무 가까워 감각을 잃는다. 언론은 맥락과 배경 설명을 생략하기 일쑤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구체적 사건들의 단면만을 끝없이 쏟아낸다. 이제 그런 뉴스는 충분히 봤고 그를 통해 한계 지어지는 사회도 충분히 경험했다. 이정표 하나 없는 무심한 뉴스는, 과감히 버려도 될 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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