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치라는 말이 유행이다.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영어표현의 번역어로 글자 그대로 보면 협력하여(協) 다스린다(治)는 말이다. 더불어 정치권 제1의 화두는 소통이다. 서울시와 수원시에서 시작해서 경기도지사와 제주도지사가 협치와 소통 ‘경쟁’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많이 헷갈린다. 누구와 협력해서 어떻게 다스린다는 말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모든 정책결정 과정에서 지역 주민과의 소통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어떤 절차를 통해 소통하고 소통의 결과를 어떻게 정책결정과정에 반영할지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솔직히 거버넌스를 협치로 번역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확신이 서질 않는다. 그래서 이글에서는 협치보다는 거버넌스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소통과 협력이 이렇게까지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만큼 소통이 안 되고 힘의 논리만이 작동하고 있는 현실을 반증한다. 소통의 가장 기본인 남의 이야기 듣기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정치인들이 소통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말끝마다 협치를 갖다 붙이지만 그 말뜻을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국, 특히 정치권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경박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벤치마킹이라는 이름 아래 무수히 많은 개념들과 제도를 들여오지만 그것들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을 어떻게 발전시켜 한국에서 실현시킬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정치인들 스스로를 멋진 상품으로 포장해서 시장에 내다 팔 때 얼마만큼의 광고효과를 가질 수 있는가를 고민할 뿐이다. 거버넌스의 주요무대는 지방정치일 수밖에 없다. 거버넌스를 내세우는 유력 지방 정치인들이 그 뜻을 진중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그들이 한국 지방정치의 특징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의심에서 나온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의 풀뿌리 지역정치를 좌지우지 하는 집단은 극히 보수적이며 그 보수적 정치집단을 뒷받침하는 것은 건설자본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동맹이다. 토지소유자, 개발업자, 부동산업자, 지역정치인, 학계, 언론 사이에 맺어진 굳건한 동맹을 타고 돈이 흐른다. 이들은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고 그들의 ‘사적’ 이익을 ‘공적’인 것으로 조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다. 이러한 부와 권력의 극단적인 쏠림 현상을 고려하지 않고 협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작동하고 있는 기득권 동맹을 그럴듯한 새로운 개념으로 포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협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결국 그들뿐이지 않겠는가? 지역의 개발동맹은 정치권과 학계에 그치지 않고 관료사회까지 뻗쳐 있다. 협치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주체는 공무원들이지만 이들은 중립적인 조정자나 자원의 배분자가 아니라 기득권 동맹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만약 유력정치인들이 실질적인, 또는 이념형적인 의미에서 거버넌스를 실현할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은 거버넌스가 실현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의 심화 내지는 급진화에 대해 애초부터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거버넌스의 실현가능성은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다.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거버넌스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면 거버넌스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에서 첫 번째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자원, 정보, 지식의 급진적 재분배여야 한다. 이것이 시정되지 않고서는 참여는 형식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부와 권력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자원, 정보, 지식의 급진적 재분배는 지배집단, 즉 기득권동맹의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의미의 거버넌스를 구현하는 길은 존재하는 갈등을 ‘협력’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지배집단에 의해 억눌려 온 갈등을 정치적 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어야 한다. 거버넌스가 민주주의의 깊게 하고 넓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투표장의 표와 비용-편익분석의 지불의사를 통해 표현될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가 대화와 토론의 과정에서 표현될 수 있는 장과 통로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매우 시끄럽고 때때로 혼란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거버넌스는 그 시끄러움과 혼란스러움을 회피하고 않고 겪어서 견디어 내면서 서로의 의견을 조정하고 합의에 이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까지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거버넌스가 기존의 권력관계를 허무는 과정이라면 그것의 실현은 사회적 ‘연대’를 회복하는 것과 동시에 ‘적대’를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거버넌스는 단순히 참여의 통로를 만들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을 만드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거버넌스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과정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주체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제도의 변화와 그에 따른 부와 권력의 재분배는 그것을 지탱하고 지지하고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만들지 못하면 주기적인 선거정치의 부침 속에서 쉽게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거버넌스는 참여일 뿐만 아니라 학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참여와 학습은 곧 보통사람들의 정치적 역량(capability)을 강화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거버넌스를 협치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연대뿐만 아니라 적대를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거버넌스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지방자치정부와 그것을 통해 정치적 주체로 성장해 나가는 지역주민들 사이의 관계도 협력으로만 치우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전세계에서 실험되었던 수많은 거버넌스의 사례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주민의 자치적 역량을 키우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하지만 정부에 의한 간섭과 통제로 귀결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버넌스는 시민사회의 압력에 반응하는 정부에 의해서 준비되고 집행되지만, 즉 지방자치정부가 권력과 부를 급진적으로 재분배하는 조정자 역할을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강화된 시민사회는 정부를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것은 결코 일방적인 협력 관계일 수 없다. 긴장, 하지만 적대적이지 않고 생산적인 긴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발 앞선 주자들인 서울시와 수원시가 거버넌스의 주된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기업과 마을 만들기인 것 같다. 그런데 자치정부와 정치주체화 된 주민들 사이의 적절한 긴장이 유지 되지 않으면서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다. 겉으로는 지원과 협력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한된 자원을 경쟁을 통해 배분한다. 자율적인 자치역량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치정부의 심사 기준을 통과해서 재정적 지원을 받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지원을 받은 후에도 지표화 된 성과에 맞추는 것이 사업의 최우선 목표가 된다. 거버넌스의 핵심은 사회적 연대의 회복과 권력과 부의 재분배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학습의 과정이며 평범한 사람들의 자기통치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분기별로 계량화된 수치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버넌스와 소통을 이야기하고 민주주의의 강화를 이야기하면서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심각한 장애인 시장의 논리와 성과주의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이 글에서는 거버넌스의 번역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협치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앞에서 밝힌 대로 거버넌스는 협력보다 적대와 긴장을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버넌스는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거버넌스를 통해 길러진 평범한 사람들의 역량은 관료적인 속성을 가진 국가제도를 견제하고 지속적으로 민주화하는 힘으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기본적 필요(needs)와 욕구(wants)를 충족시키는데 적절하지 못한 시장을 사회적 관리 하에 두는 시장의 사회화로까지 뻗어 나가야 한다. 그럴 때에만 특정정치인의 대권도전을 위한 이미지 만들기에 동원되는 말뿐인 ‘협치’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민주적인 역량을 성숙하게 하는 지속적인 민주화, 민주주의의 급진화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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