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집에서는 주전자에 끓인 물을 마십니다. 생수보다 수돗물이 낫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트에서 파는 생수에 적용되는 수질 기준은 모두 52개 항목입니다. 수돗물은 55개 항목의 기준을 지키게 돼 있습니다. 서울의 경우엔, 수질 기준이 더 까다로워서 163개 항목입니다. 수돗물이 더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한다는 거죠. '기준을 제대로 지키는지 알 게 뭐람.' 물론, 이런 불신을 품을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죠.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투명한 감시'가 중요합니다. 어딘가의 지하수였을 생수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마트 진열대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수돗물은 상대적으로 낫습니다. 예컨대 서울의 경우, 수질 관련 정보가 온라인으로 실시간 공개되거든요. (☞)
또 수돗물은 안전성 의혹이 있다면, 정치인이 나서서 지자체장, 관련 기관장 등을 국정감사장에 불러내 따져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잘하는 정치인에겐 '인기'라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런 보상은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한 발판이 되죠.
반면, 생수업체에 대해선 감시가 훨씬 어렵습니다. 의혹이 있다 해도, 따져 묻기가 쉽지 않죠. 물론, 정의감 투철한 기자 혹은 소비자 단체가 나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칫하면 소송에 휘말리기 십상이죠. 설령 기사를 쓴다고 해도, 보상은 없습니다. 좋은 기사 쓴다고 월급 더 받는 건 아니잖아요.
생수보다는, 수돗물에 대한 감시가 더 잘 이뤄지는 쪽으로 인센티브 체계가 짜여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안전성 면에선 수돗물이 더 낫다고도 할 수 있겠죠. 감시가 더 활발할 테니까요. 꼭 더 낫다고까지는 못하더라도, 수질과 안전성 면에서 수돗물이 생수보다 떨어진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이른바 '물맛'이 조금 다른데요. 이는 수돗물에 포함된 염소(Cl) 성분 때문입니다. 수돗물 안전성을 위해 일정 농도의 염소를 포함하게끔 법으로 규정돼 있죠. 염소는 휘발성이 강해서, 공기 중으로 날아갑니다. 요컨대 수돗물을 받아서 한나절쯤 묵혀 두거나 끓이면, 물맛 차이도 없습니다. 그런데 생수와 수돗물 가격은 하늘과 땅 차이죠. 대략 천 배쯤 됩니다.
이쯤에서 슬슬 궁금해질 것 같네요. ''의료 민영화' 기획이라더니, 웬 수돗물 타령이야?' 어쩌면 짜증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수돗물 관계기관과 뒷거래가 있는 것 아냐?'
오해를 피하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네요. 국민건강보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기획의 핵심입니다. 앞서 8편의 글이 실리는 동안, 독자들로부터 다양한 반응이 전해졌습니다. 대부분 진지한 내용인데요. 기획 담당자 입장에선 흐뭇한 일입니다. 댓글과 메일을 찬찬히 읽어보면, 몇 가지 단어로 내용이 수렴됩니다.
맨 앞에 놓일 단어는 역시 국민건강보험이죠. 어떤 독자들은 시장논리가 지배하는 미국 의료 현실에 분노를 토로합니다. 이와 함께 국민건강보험이 있는 한국에 대해선 안도감을 드러내죠. 드물지만, 어떤 독자들은 국민건강보험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국가가 의료를 통제하는, 사회주의 의료라고 합니다. 그보다 조금 많은 경우는 국민건강보험이 있는 한국 의료를 지지하지만, 의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체제라며 못마땅해 합니다. 이른바 '수가'에 대한 불만이죠. '수가'란 건강보험 공단이 정한 의료행위의 가격인데요. '수가'가 원가보다 낮다는 게 의료계의 주장입니다. 반면, 의사들을 공격하는 반응도 많습니다. 여전히 고소득, 기득권층이라는 거죠. '수가'가 낮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못 미더워합니다.
글머리에서 왜 수돗물 이야기를 했는지, 설명할 때가 됐습니다. 비유하자면, 국민건강보험이 수돗물입니다. 민간의료보험은 생수죠. '비용 대비 효과', 온라인에서 흔히 쓰는 표현을 빌자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비율)라고 해야겠죠. 이런 측면에서 수돗물이 생수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앞서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국민건강보험이 민간의료보험보다 훨씬 우월합니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에서 활동하는 가정의학과 의사 김종명의 분석에 따르면, 민간 보험사 암보험 상품의 지급률은 30~40% 수준입니다. 굳이 암보험 상품을 분석한 건, 상품 구성이 단순하기 때문인데요. 결과에 대해 시비가 붙을 이유가 없는 거죠.
암보험 지급률 = (암에 걸릴 확률 × 암에 걸렸을 때 받을 보험금) ÷ 납부한 보험료
'암에 걸릴 확률'만 알면, 지급률을 쉽게 계산할 수 있죠. 그리고 암에 걸릴 확률은 정부가 발표하는 암 발생률 통계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계산한 값이 30~40% 수준이라는 겁니다.
반면, 국민건강보험의 지급률은 무려 168%(2009년 기준)에 달하는데요. 가입자가 낸 것보다 더 받을 수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현행법상 기업이 직장 가입자 건강보험료의 50%를 부담하고, 정부는 이렇게 확보된 전체 보험료 수입에서 총 20%를 다시 국고로 지원하도록 돼 있습니다. 정부가 국고로 지원하기로 돼 있는 돈을 지급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기업과 정부가 지원하는 구조입니다. 또 민간의료보험과 달리, 국민건강보험은 마케팅 비용을 많이 쓸 필요가 없죠. 이익을 외부로 빼돌릴 수도 없고요.
마트에서 파는 생수가, 수질 및 안전성 면에서 수돗물과 차이가 없음에도 가격이 천 배나 비싼 것과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생수 병 및 포장, 마케팅, 복잡한 유통 과정, 기업주의 이익 등으로 많은 돈이 새나간 탓에 생수 가격이 비싸죠. 비슷한 이유로, 민간의료보험은 '가성비'가 불량합니다.
아울러 생수 업체 및 생수 유통과정에 대해 투명한 감시가 어렵듯, 민간보험사 역시 속을 들여다보기 어렵습니다. 보험 가입자의 개인정보가 어떻게 쓰이는지, 보험금 접수 및 관리, 심사, 지급 등의 과정에 문제는 없는지 등에 대해 가입자는 알 길이 없습니다.
물론, 수돗물이라고 문제가 없겠습니까. 다만 생수보다는 감시가 쉽다는 거죠. 국민건강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국정감사에서 건강보험관리공단 직원들의 방만한 개인정보 관리 실태가 도마 위에 올랐죠. 헤어진 애인의 병원 기록을 임의로 들여다 본 사례도 있었습니다. 수사기관에 함부로 정보를 넘기기도 했고요. 이는 분명 심각한 문제입니다. 반드시 바로잡아야죠. 그런데 민간보험사라고 이런 일이 없을까요. 민간보험사 직원이 건보공단 직원보다 더 윤리적으로 행동해야 할 동기는 없습니다. 비슷한 문제가 있지만 감시가 없는 탓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잘못이 안 드러나는 건 실제로 잘못이 없어서가 아니라, 잘못을 감시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투명한 감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디나 있기 마련인 잘못, 그게 곪아서 썩지 않게끔 하는 최소 조건이니까요.
그렇다면, 건강보험이 국회와 언론, 시민단체의 감시를 받는다는 것, 그래서 때때로 잘못이 드러나기도 한다는 점은 상당한 장점입니다.
그리고 '수돗물-생수'라는 비유로는 담아낼 수 없는 민간의료보험의 약점도 많이 있습니다. 민간보험사에서 파는 이른바 실손 보험이 가입자의 노후까지 지켜 줄지는 의문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질병 위험이 높아져서 보험료 부담도 함께 뛰거든요. 수입이 계속 늘어나지 않는 한, 감당하기 힘든 구조입니다. 보험을 해약하게 될 가능성이 크죠. 정작 의료비 부담이 큰 노후에는 힘이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민간의료보험은 이미 몸이 아픈 사람에게 불리합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의료비 보장이 더 간절한 데 말이죠.
'민간 의료보험 드느니 로또를 사라' '민간 의료보험 드느니 카지노에 가라' 등의 표현이 꼭 어색하지만은 않죠. 아울러 우리 국민이 민간 의료보험에 쓰는 돈을 국민건강보험에 돌린다면, 환자와 의사 모두 지금보다 더 만족스러운 상황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환자 입장에선 건강보험 보장성이 높아져서 의료비 지출을 줄일 수 있죠. 의사 입장에선 수가 인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평균적인 의료 수준도 높아지겠죠. 마치 우리가 생수를 사는 돈을 모아서 수돗물을 개선한다면, 훨씬 좋은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처럼.
끝으로 의사 김종명이 실제로 겪은 사연을 소개합니다.
"40대 초반의 남자, 췌장염으로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한 후 진단서를 발급받으려고 진료실을 방문하였다. 수년 전 가입한 실손보험이 있어 그 혜택을 보기 위해서다. 총 진료비는 180만 원, 그 중 본인부담금은 50만 원이었다. 실손보험은 본인부담금 50만 원 중 45만 원을 돌려준다. 나는 환자에게 물었다. 실손보험료는 얼마를 내냐고. 한 달에 10만 원이라고 답했다. 다시 국민건강보험료는 얼마를 내냐고 물었다. 4만 원을 낸다 했다. 안타까웠다. 국민건강보험료가 얼마인지를 알면, 월 소득이 얼마인지 알 수 있다. 150만 원이었다. '가계 살림도 빠듯할 텐데, 10만 원씩이나 사보험에 넣고 있다니….'
그에게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당신이 부담하고 있는 4만 원의 국민건강보험료 덕택으로 총 치료비 180만 원 중 130만 원이 해결되었다고. 그리고 나머지 45만 원을 해결하기 위해 당신은 월 10만 원씩 따로 실손보험료를 내고 있는 거라고. 만일 당신이 지금 내고 있는 국민건강보험료의 30% 정도인 1만2000원만 더 낸다면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병원비 부담이 거의 사라지게 된다고, 1만2000원을 더 지출하는 것 같지만 실손보험에 가입할 필요가 없어 월 10만 원은 고스란히 아낄 수 있다고."
- 의료 민영화, 재앙인가? 축복인가? <1> 50대 男, 대장 내시경 비용 미국 570만 vs. 한국 20만? <3> 미국 병원 맨얼굴, "떼인 병원비 받아드립니다!" <4> '오바마의 꿈'은 왜 미국인을 사로잡지 못했나? <6> "중국 브로커는 어떻게 강남 성형외과를 망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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