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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국, 일본…누구와 미래를 함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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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국, 일본…누구와 미래를 함께할 것인가? [동아시아를 묻다] 중화 세계의 근대화
중화 세계의 문명화

20세기를 전후로 중화 세계가 해체되고 근대 세계로 진입했다는 것이 통설적인 견해이다. 조공 질서가 조약 질서로 전환되었음이 정설로 굳어졌다. 겉으로는 그럼직하다. 전통적인 조공과 책봉의 의례가 사라졌다. 다시 부활하지도 않을 성싶다. 그럼에도 실상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중화 세계가 그 나름의 논리에 따라서 근대화되어 갔던 도저한 흐름도 역력했기 때문이다.

명청 교체부터 시야에 둘 필요가 있다. 이미 조공 체제가 크게 흔들렸다. 임진년에서 병자년에 이르도록 천하의 대란이 거듭되었다. 열도와 반도, 북방 및 중원, 서역까지 온통 전장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막후에는 포르투갈의 조총과 스페인의 선교사가 있었다. 대항해 시대, 세계 체제의 때 이른 파장이었다.

이 대란을 수습하고 재편된 중화 세계는 왕년의 조공-책봉 관계로만 수렴되지 않았다. 번부와 조공, 호시와 조약의 복수적인 관계망이 구축되었다. 이로써 형성된 동아시아 질서를 일컫는 몇몇 개념들이 있다. '흔들린 조공 질서', '중화 사상 공유권', '화이변태(華夷變態)' 등이다. 그 표현의 다양함에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중화의 탈중심화'이다. '중화'가 중원의 독점에서 벗어남으로써 동아시아의 공공재로 거듭났던 것이다.

만주족은 태평천하를 복원시킨 자신들이야말로 더 이상 이적이 아니라 중화라고 자임했다. 그리하여 '대청제국'을 선언했다. 반하여 '소중화'를 자칭하던 조선은 내심으로 청을 내켜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진정한 중화의 계승자라며 '조선 중화'를 자부했다. 베트남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월남'(越南)을 '대남'(大南)으로 고치고 '제국'(帝國)까지 보태었다. 대남제국이야말로 중화 문명의 보루이자 '중국'(中國)임을 자처하며 유교 문명의 동남아로의 확산에 매진했다.

중화 세계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도쿠가와 막부조차도 19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중국화' 현상을 노정했다. 칼을 찬 사무라이가 학교에서 유교 경전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붓을 든 사대부가 되어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을 중화의 축으로 삼는 '일본형 화이 질서'를 궁리했다. 즉 저마다 '탈중국화를 위한 중국화' 현상이 만개했다. 중원이 '중화'를 독점하던 위계적 상황이 해소되고 문화적 대등함의 표출과 자기 정체성의 재구축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동향이 중화 세계로부터의 이탈이나 해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즉 '흔들린 조공 질서'가 '흔들린 중화 세계'를 뜻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중화 세계의 확산과 심화, 즉 '중화 세계의 민주화', '중화 세계의 평등화'로 독해하는 편이 한층 적절하다. 화/이(華/夷)의 분별과 차별이 흐려지고, 화/화(華/華)의 관계로 재편되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중화 세계의 장기적인 '문화'(文化는 동사이다. 내치도 외교도 武를 거두고 文으로 전환해가는 과정이 동방형 '문화'이다)의 과정, 즉 중화형 문명화의 소산이었다고 하겠다. 즉, 유럽형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의 도입 이전에 이미 문명적 대등함의 수준에서 '평등' 의식이 동아시아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에는 대청제국과 대남제국에 대일본제국과 대한제국까지 존재하는, 저마다 중화이고 모두가 제국인 동아시아의 새 판도가 그려졌던 것이다.

중화 세계의 근대화 :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그러나 중화 세계와 세계 체제의 전면적인 조우는 동아시아의 내재적 흐름의 역류를 촉발시켰다. 세계 체제에 적응하는 과정 속에서 중화 세계의 궤적은 굴절되었다. 이번에는 모두가, 저마다, 제국주의를 지향했다. 그 파국적 사태가 갑오년 청일 전쟁이었다. 양속 관계였던 류큐가 대일본제국에 병합되자, 이제는 조선의 식민화를 두고 대청제국과 대일본제국이 경합했다.

갈수록 흐릿해져가던 상국-하국 관념도 다시 환기되고 재소환 되었다. 번부가 누리던 자율성은 종식되었고, 조공국도 식민지로 삼기에 이른 것이다. 이홍장부터 원세개, 쑨원까지 조선과 월남, 류큐 모두가 중화 제국의 '내지(內地)'로 편입되어야 한다고 간주했다. 중화 세계의 위계성을 억압적으로 강화함으로써 근대의 제국주의를 모방코자 한 것이다. 그럼에도 대일본제국의 기민함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일본은 류큐와 대만에 이어 조선, 만주, 대륙으로 진격했다. 파격적이었고, 파상적이었다. 가장 늦게 중화형 문명화에 진입했기에, 가장 이르게 서구형 제국주의로 전환할 수 있었다, 소위 '탈아입구'(脫亞入區)였다.

결국 대한제국이 대일본제국에 병합된 이듬해 대청제국도 붕괴되었다. 그리고 '중화민국'이 들어섰다. 누천년 제국이 공화국으로 전변된 것도 각별하지만, '중화'가 일국의 국호로 승격된 점도 특별한 사건이었다. '중화'를 내다버리지 않고 기어이 고수했음을 두고두고 기억할 일이다.

그리고 항일 전쟁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섰다. 반제국주의의 깃발을 들어 올렸다. 청일 전쟁과 중일 전쟁 사이의 질적인 차이이다. 제국주의 대 제국주의에서, 제국주의 대 반제국주의로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명일 전쟁(임진왜란), 청일 전쟁, 중일 전쟁을 일이관지할 필요가 있겠다. 명일 전쟁이 세계 체제의 벽두에 발발해 중화 세계를 수호해낸 전쟁이었다면, 청일 전쟁은 중화 세계가 완숙한 세계 체제에 편입됨으로써 제국주의화하는 전쟁이었다. 그리고 중일 전쟁은 중화 세계의 회심과 반전을 일구는 반제국주의전쟁의 시발이었다.

그래서 중화민국은 항일 전쟁과 독립 운동을 전개하는 아시아 제민족들의 집합적 무대가 되었다. 각국의 임시정부나 망명 세력들이 중화민국의 우산 아래 거처를 마련했다. 더 중대한 흐름도 생겨났다. 대장정이다. 대장정은 옌안으로 귀결되었다. 반제, 반식민주의 운동의 집합적 거점이었다. 한족과 소수 민족과 주변 민족이 협동하고 협력하는 연합 전선의 근거지였다. 대국과 소국의 상호진화를 연마하는 공동의 수련장이었다. 그리고 기어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일구어내었다.

즉, 중화민국의 수립이 한족이 만주족을 대체하는 일국사적 사건에 그쳤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은 아시아 제민족의 통일 전선이 빚어낸 지역사적 사건이었다. 국/공의 권력 교체를 능가하는 심대한 차이로 전후 아시아사의 일대 분수령이었다. 좌/우 대결로만 수렴되지 않는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의 단초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동/서구와 일선을 긋는 '동방'의 발진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보답해야 했다. 한반도에서는 (북)조선인들을 도왔고, 인도차이나에서는 (북)베트남인들을 거들었다. 항일 전쟁에 이어 항미 전쟁도 공동으로 수행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청불 전쟁, 청일 전쟁과는 판이했다. 더 이상 월남과 조선을 속국이나 식민지로 삼기 위한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북)베트남과 (북)조선의 독립을 원조하기 위해 파병한 것이었다.

그 상부상조의 결실은 공식적인 정책으로 입안되었다. 1954년 "평화 공존 5원칙"이 그것이다. 1954년이었던 까닭이 있었다. 한반도에서도, 인도차이나에서도 (일시적으로) 포성이 멈추었다. 청일 전쟁으로 촉발된 천하대란 이래 꼬박 60년 만이었다. 마침내 왕년의 천조국과 조공국 간 새로운 관계가 제도화될 수 있었다. 주권의 상호 존중을 합의했다. 누천년래 중국과 주변국 간 최초의 일이었다.

주권이란 천조국만 누리던 유일무이한 권리였다. 이제는 각국이 분점하고 공유하게 되었다. 알음알음했던 내정 불간섭도 명문화하였다. 이로써 조공국들의 독립 국가, 주권 국가로의 이행이 완수되었다. 중화 세계를 구성하던 상국과 하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중국(中國)의 상대말이었던 외국(外國) 또한 일반 명사가 되었다. 오로지 자국과 타국의 구별이 있을 뿐이었다. 중화 세계의 두 번째 근대화, 반제국주의적 근대화였다.

즉, '죽의 장막' 너머에서는 명청 교체 이래 누적되었던 중화 세계의 근대화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보편적 이념으로 삼되 각자가 독자적으로 주체화, 토착화는 과정을 노정했다. 마오쩌둥 사상, 김일성 사상, 호치민 사상을 국시로 내세우는 독특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 집합적 동력으로써 냉전 체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항미 전쟁을 수행하며 미국과 적대하는 반면으로, '사회주의 제국주의'와도 길항하며 소련의 위상에 균열을 가했다. 즉, '상호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이라는 평화 공존 5원칙은 중국과 주변 사이에 한정되지도 않았다. 사회주의 진영과 제3세계의 판도 또한 크게 출렁이게 했다. 그 집합적이고도 개별적인 이행 과정을 통하여 미소가 주도하는 냉전 체제를 돌파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중국과 아시아 신생 국가들과의 관계는 전통적 주종 관계도 아니요, 20세기 초반의 제국-식민 관계도 아니며, 동시기 소련과 동유럽의 위성국가나 미국과 아시아 동맹국들과는 판이한 역동성을 연출할 수 있었다. '탈중국화를 위한 중국화' 혹은 '주체적 중국화'의 길항으로 작동했던 중화 세계 질서의 유산이 변용되고 '진화'한 결과였다.

따라서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의 균열선 또한 탈중화와 재중화의 길항으로 접근하는 편이 한층 적실할 것이다. 한쪽은 중화 세계의 근대화로서 '중화 사회주의권'을 형성했다. 서구화와 동구화를 거스르는 동방화, 즉 재중화의 궤적에 진입했던 것이다. 반면 다른 한쪽은 탈중화의 지속으로서 제국 일본을 계승하는 '미국식 조공 체제'에 편입되었다.

비유컨대 자강파와 이식파의 갈등이었고, 좌/우보다는 고/금 간의 길항이었다. 휴전선은 그 날카로운 분계선이었다. 냉전 체제를 이식하여 '제3세계'를 관리하려는 세계 체제의 압력과, 중화 세계의 내부에서 전개되어 오던 지역 질서의 진화를 통하여 동서구가 경합하는 냉전 체제에 저항하며 '제3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힘이 교착하고 갈등하는 난처(難處)이자 난국(亂局)이었다.

반정(反正)과 경장(更張)

유럽과 동아시아는 탈냉전의 경로도 판이했다. 유럽에서는 동구의 몰락이 서구로의 흡수로 이어졌다. 소비에트연방(Soviet Union)을 대신한 유럽연합(European Union)이 출범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승리였고, 그래서 '역사의 종언'에도 딱 들어맞았다.

반면 동아시아는 여전히 중국과 베트남과 북조선, 라오스가 건재하다. 어느 한쪽 체제의 일방적 와해와 흡수는커녕 중국의 부상과 연동되어 '아시아의 세기'를 전망하기도 한다. 이념과 체제의 차이가 여전하면서도 지역적 협력은 나날이 심화되고 있다. 다르면서도 어울리는(和而不同) 평화 공존의 원칙이 1990년대 이래 꾸준하게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1992년 한중 수교와 한-베트남 수교 또한 유럽형 탈냉전과는 전혀 상이한 성격의 동방형 탈냉전이라 하겠다. 중국은 수교 20년 만에 한국의 경제 구조를 바꾸어 놓고 있고, 한국은 호치민이 잠든 하노이의 스카이라인을 날로 새로 그리고 있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군사(武)적으로 적대하던 국가 사이에 다시 문화(文)가 꽃피고 있으니, 그 첫 봉우리가 한류(韓流)였다 하겠다. 왕년에 지식인들이 필담으로만 향유하던 '문예 공화국'이 인민과 시민의 차원으로 민주화되고, 민중화된 것이다. 즉 동아시아의 탈냉전은 '역사의 종언'과는 판이하다. 오히려 역사의 귀환, 역사의 재귀라고 할 수 있다.

애당초 역사에 '진보'는 없었다. 최소한 동방인의 감각으로는 그렇다. 하기에 '종언' 또한 있을 수가 없다. 어지러운 시대와 가지런한 시대가 있을 뿐이다. 난세와 치세가 돌고 돈다(一治一亂). 20세기는 어지러운 시대였다. 세계 체제의 주변부가 되면서 중화 세계의 원리가 흐려졌다. 천하대란, '흔들리는 동아시아'의 시발이었다.

그 대란기가 끝내 저물고 있다. 세계 체제가 말기 국면에 진입했다. 가지런한 시대로의 반전, 중화 세계의 환생이 여릿하다. 단순회귀는 아닐 것이다. 세계 체제에 적응하기 위한 일백 년의 대장정이 있었다. 각국이 100년의 민족 해방 투쟁을 때로는 협동하며 때때로 갈등하며 집합적으로 경험해 왔다. 중화 세계의 근대화로 담금질이 되고 세련(洗鍊)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갱신(更新, Renewal)이라는 말이 더욱 어울린다. 중화 세계가 버전 업(Version up), 업데이트(Update)된 것이다. 병통은 그 반대편이다. 탈중화(=신냉전)의 관성을 고수하려는 세력이 안팎으로 여전하다. 목하 반전의 조류와 반동의 역류가 합류하여 태평양이 격하게 요동치고 있다.

그럼에도 반동파만을 탓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그럴수록 반전 시대를 맞이하는 준비가 성글지 못했음을 철저하게 반성하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자강(自强) 운동을 펼쳐야 하겠다. 실력 양성 운동을 재개해야 하겠다. 한때 '균형자(balancer)'라는 말이 돌았다. 여전히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을 중시하는 국제 관계적 발상과 문법에 그쳤다. 동아시아의 언어와 발상의 복구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재균형'의 되치기에 요령부득이다.

따라서 패도의 시대를 끝내고 왕도의 세기를 개창하기 위해서는 말부터 바로 잡아야 하겠다. 소위, 정명(正名)이다.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고, 문체의 반정(文體反正)이다. 실로 동아시아는 '세력 균형'을 통해 평화를 달성하지 않았다. 세력이 균형을 이루던 시기는 대저 난세였다. 합종연횡이 횡횡하는 완력의 시대였다.

동아시아적 평화, 즉 태평천하는 늘 세력 불균형 상태였다. 다만 그 무(武)의 불균형을 문(文)으로 조율해가는 역동적 균형의 시대였다. 대국의 덕(德)과 소국의 예(禮)를 교환하는, 즉 선물과 증여로 국제 질서가 작동하는 상부상조의 시대였다. 21세기의 '동아시아의 평화' 또한 천하위공을 으뜸의 가치로 삼는 '동아시아적 평화'를 회복해가는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본디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re-volution)이야말로 동방형 혁명(革命)의 본령이기도 하다. 2014 갑오년, 경장(更張)의 본디 뜻을 깊이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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