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질문 하나를 나 자신에게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동시에 던져본다. 태어나 성장한 지역이 인간의 품성과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 데 얼마만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 이 질문과 관련한 필자의 경험을 먼저 이야기해볼까 한다.
나는 1970년대 초반 부산에서 출생해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진 경상도 지역에서만 생활했다. 유년과 초·중·고교 시절을 모두 부산과 경상남도 마산에서 보낸 후, 20대 초중반의 기간 동안엔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태어나 성장한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나를 두고 친지와 선후배들은 걱정을 많이 했다. 이런 우려들이었다. "전라도 광주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데, 거기서 힘들면 어떡할래?" "생활 방식과 인심이 경상도와는 다른 곳이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을 수 있을 거야. 언제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고향으로 돌아와라." 등등.
하지만, 지인들의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인적인 경험에 한정해 이야기하자면 '전라도' 광주에서 만난 스승과 선배, 이웃과 후배의 열 중 아홉은 '경상도 사람'인 내게 따스하고 우호적이었으며, 교류하는 사람들로 인해 받았던 스트레스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생활양식과 인심도 이전까지 살았던 경상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전라도'의 각종 해산물 젓갈과 삭힌 홍어 등의 음식은 '경상도'에서 내가 좋아하던 음식들만큼 맛있고 입에 맞았다.
대학 시절을 보낸 광주에서 한 여러 가지 경험을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이것만은 말해두고 싶다. 내가 청년 시절 '전라도'에서 만났던 '전라도 사람'들은 이전 '경상도'에 살며 만난 '경상도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경상도와 전라도 모두 마찬가지로 선량한 사람이 있다면 악인도 있었고, 성실하게 제 삶을 경영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몇몇은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방법으로 제 이익을 취하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람이 사는 풍경은 내가 '태어난' 경상도나 '살아본' 전라도나 대동소이했다.
20대 후반에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만나서 사귀게 되는 사람들의 폭은 넓어졌고, 그 숫자 역시 많아졌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은 물론,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도와 제주도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이들과 골고루 교류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는 사람이 태어난 지역을 갈라 그곳 사람들의 특성을 지칭하는 수많은 풍문과 알게 모르게 만나게 된다. 'OO 사람은 느리고 의뭉스럽다', 'XX 사람들은 자기 잇속만 챙기고 교활하다', '△△ 쪽 사람들은 거칠고 지나치게 직설적이다', '◇◇ 출신들은 언제나 타 지역 사람들에게 배타적이다' 등등.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인간 하나하나는 우주만큼 복잡하고 해석이 어려운 존재다. 그런데, '출생지' 또는 '성장한 지역'이란 단순한 잣대 하나로 사람을 위와 같이 두부 자르듯 재단하는 게 가능한 것일까. 이 같은 '구별 방식'은 개별적인 인간을 해석하는 아주 많은 방법 중 하나는 될 수 있겠지만, 보편성을 얻기에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다시 내 경험에 한정해 말하자면, 나는 '조심성 없는 소문'처럼 떠돌아다니는 '지역적 특성으로 구분된 인간형'과는 전혀 다른 사람을 너무나 많이 보았고 만났다. 3년 전에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10개월쯤 해외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그 여행길에선 한국 사람들만이 아닌, 수많은 외국인을 만났다. 한국 내에서 지역을 갈라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에 관한 선입견을 말하듯, 우리는 태어난 국가를 갈라 그 나라 사람들의 특성도 함부로 말하곤 한다. '미국인은 합리적인데 오만하다', '프랑스 사람들은 예술적 감각이 넘치지만 새침하다', '일본인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다' 또는 개별 국가에서 그 영역을 조금 넓혀 '중동 국가 사람들은 종교적 도그마에 빠져 폭력적이다', '아프리카 국가 사람들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등등. 그러나 단언컨대 이런 선입견과 편견을 벗어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사실 인간의 품성과 행동 양식은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출생지가 아닌, 자신의 의지에 의해 후천적으로 결정되는 교육 등의 인격 형성 과정에 더 크게 영향 받는 게 아닐지. 그래서였을 것이다. 10개월간 20여 개 나라를 떠돌며 내가 얻은 결론은 '단 하나의 잣대로 재단되는 인간이란 세상에 없다'라는 것이었다.
출생지에 따라 품성이 다르다? 하나의 잣대로 재단되는 인간은 없다
<메이드 인 경상도>란 책의 매력은 무엇보다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답이라 말해버리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김수박은 자신의 유소년 시절 기억을 끄집어내 그것을 펼쳐 놓고 있을 뿐, '이러이러한 역사적 배경 탓에 경상도 사람들의 기질이 굳어졌다' 혹은, '경상도의 무뚝뚝함과 직설적인 표현 양식은 정치적 보수주의 탓이다'라는 따위의 어설프고 설익은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저 앞서 언급한 자신의 경험을 순차적으로 나열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김수박의 만화는 화려한 직조 기술로 만들어진 화사한 드레스가 아닌, 단색의 밋밋한 무명 바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무색무취한 담담함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때로 작가는 자신의 주관을 숨길 줄도 알아야 한다.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선 주관보단 객관(성)이 훨씬 더 유용한 지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메이드 인 경상도>는 보여준다.
김수박의 이번 책이 가진 두 번째 미덕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살아가는 모습을 인위적으로 채색하지 않고, 솔직담백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메이드 인 경상도>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소년 '갑효'의 부모와 그들의 지인, 어린 시절 친구와 시장통 인근 장사꾼들, 교사와 동네 건달들까지. 그들의 언어와 행동은 작가가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꾸며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의문을 품었던 '경상도의 지역 정서'를 효과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꼭 필요한 인물만을 등장시켜 쉽고 효과적으로 답을 찾아가는 방법도 분명 있었을 텐데, 김수박은 그런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답답한 방식이지만 이런 우직함 탓에 독자들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를 '경상도' 대구에서 살아낸 사람들의 일상을 좀 더 넓은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메이드 인 경상도>의 미덕은 진실함이다. 책을 쓰는 사람이 간혹 빠지는 함정 중 하나가 자신이 의도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작위와 과장을 함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수박의 책에선 그런 작위와 과장이 보이지 않는다. 일견 건달처럼 보일 수 있는 '폭력적인' 아버지의 에피소드를 그릴 때도 김수박의 시선은 아들이 아닌 제3자의 그것처럼 담담하다. 조금은 입에 담기 민망한 소년 시절의 성적인 장난을 묘사할 때도 작위적인 미화를 사용하지 않고, 부끄러운 첫사랑의 기억을 끄집어낼 때 역시 과장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이런 솔직함은 김수박의 책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성실하고 꼼꼼하게 그려진 경상도 소년의 진실된 초상'. <메이드 인 경상도>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 앞서 말했던 질문에 답할 차례다. 김수박은 <메이드 인 경상도>를 통해 "경상도 사람들은 대체 왜 그래?"란 물음과 지역감정(지역 갈등)을 넘어설 묘안을 찾아냈을까?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사실 이런 문제에 명쾌하게 답을 내려줄 사람은 없다. "경상도 사람들은 왜 그래?"란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왜 그럴까?"의 문제에 닿아 있는데, 세상에 어떤 현자가 있어 사람이 지닌 품성과 행동 양식의 모든 이유를 몇 줄의 문장으로 해석해낼 수 있을까. 그렇다고, <메이드 인 경상도>가 지닌 의미를 저평가하고, 김수박의 작업이 무의미했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김수박은 저자 서문을 통해 "과거의 이야기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와 깊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란 믿음을 전제로 (이 책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려는 노력. 이는 '작가적 열정'에 다름없고, 그 열정은 경상도 사람, 아니 지역을 넘어서 보편적 인간의 내면과 외부를 해석하는 주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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