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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과 맞붙은 20대 변호사, 25년 만에 또…비정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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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기춘과 맞붙은 20대 변호사, 25년 만에 또…비정한 한국

[프레시안 books] 김선수 <노동을 변호하다>

기시감이다. '부통령'으로 불리는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과 한 변호사의 이야기다. 1989년 5월 28일 참교육의 기치를 내걸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설립되자, 노태우 정부는 검찰총장 김기춘을 내세워 굿판을 벌였다. 김 실장은 1989년 9월 국정 감사에서 "8월 말 현재 전교조 문제와 관련해 입건된 교사는 국공립 391명, 사립 10명 등 총 401명이며 구속된 중고생은 3명"이라고 밝혔다(1989년 9월 24일 자 <한겨레>). '선생님을 돌려달라'고 외치던 어린 학생들까지 구속시킬 정도로 김 실장은 거침이 없었다. 법의 칼을 함부로 휘두르기는 쉽다.

그 서슬 퍼렇던 시절, 김 실장의 반대편에서 전교조 교사들의 해고 무효 소송을 담당했던 변호사 중 하나가 당시 20대이던 김선수 변호사였다.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서 조영래 변호사를 만난 후 구로공단 '공돌이', '공순이'들을 변호했던 김 변호사는 초유의 교사 대량 해고 사태에 직면, 해고의 부당함에 맞섰다. 한여름 밤의 꿈과 같던 88올림픽의 열기는 '공안 정국'의 차가운 공기로 대체됐다.

김 변호사는 노동자 대투쟁 시기에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노동 운동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팽창하던 때였다. 김 변호사는 "1989년이 되자 노동 사건이 물밀 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물론 반동은 거셌다. 노태우 정권은 악랄한 방식으로 노동 운동과 학생 운동을 탄압했다. 1989년 3월, 정주영 회장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하다 구속된 현대중공업 노동자 6명의 변호를 맡은 후 김 변호사는 본격적인 '노동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암울한 시절이었다. 1990년대 노동판을 온몸으로 부딪혀 온 김 변호사의 최근까지 이력이 <프레시안> 연재를 거쳐 <노동을 변호하다>(오월의봄, 2014년 10월 펴냄)라는 책으로 정리돼 나왔다.

김 변호사는 지금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 해산 심판 변론을 맡고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논란의 뒷배가 정권의 2인자, 김기춘 실장이라는 '설'은 여의도에서 상식이 된 지 이미 오래다. 김기춘과 김선수, 그리고 기시감. 세상은 물결처럼 흘러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같은 배에 타고 있다. 역사의 흐름도 유신 헌법과 공안 정국의 상징을 과거로 흘려보내지는 못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저들과 함께 배를 타야 할까. 그렇다. 옛날 옛적 어느 왕국의 첫째 공주가 궁에서 쫓겨난 후, 갖은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 궁전으로 돌아갔다는, 그런 기괴한 민담이 현실인 시절이다. 과거와 현재의 중첩, 그리고 환상과 현실의 뒤섞임. 21세기 대한민국을 설명하는 수사다. 참으로 괴이하고 기묘한 시절이다. 변한 것은 없다고, 한국 노동 변론의 역사가 담긴 이 책에서 김 변호사는 힘주어 설명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세상에 던진 묵직한 기록

ⓒ오월의봄
김선수 변호사가 꾹꾹 눌러쓴 25개 사건의 변론 기록은 묵직하고, 또 끈질기다. 때론 가슴 아픈 사연도, 때론 훈훈한 사연도 나온다. 캐디노조 설립 신고 행정소송, 병원노련 합법성 쟁취 사건, 서울대병원 법정수당 소송, ILO 공대위 전국노동자대회 사건, IMF 위기 직후 채용 내정 취소 사건, 포항제철 퇴직금 사건, 공무원노조 창립대회 사건, 비판 교수 해고 사건, 콜트·콜텍 해고 사건, 일제고사 거부 해직 교사 사건, 사무직 노조 설립 사건 등, 열거된 제목만 훑어도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관통하는 우리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 유익한 정보도 많다. 악명 높았던 '제3자 개입 금지'의 역사, 공무원과 노동 기본권의 변천사 등, 노동자가 '인간'의 지위를 얻고자 한 걸음씩 내디뎌 온 과정도 친절하게 설명돼 있다. 각종 노동 관련 규정에 대한 설명처럼 꼭 필요한 상식도 들어 있다. 여기에 부당노동행위 근절을 위한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 및 노동법원 도입 등 미래 지향적 제언까지 담아냈다. 실제 김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 시절 사법개혁위원을 지내 정책에도 밝다.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처럼 보이는 25개의 사건은,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땅에서 노동해 먹고살기가 얼마나 고달픈지 보여준다. 일례로 이 책에 소개된 사례의 주인공 중 1999년 12월 31일, 밀레니엄을 앞두고 해고된 문광부 산하 기관의 연구자가 있다. 그는 20세기의 마지막 날 해고를 당한 후 만 8년 8개월 8일 동안 복직을 위해 법정 투쟁에 나서야 했다. '고난과 역경'을 뚫고 진일보한 판례를 쟁취해낸 사건이다. 그러나 그동안 마음고생 한 이 노동자는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는 해고 후 시간강사로 전전하며 온갖 고초를 겪었다. 분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절에 들어가기도 하고, 미얀마 등지에 가서 수양도 했다고 한다.

한 대학이 노조 간부들을 막무가내로 해고하고 대형 로펌을 동원해 힘없는 노동자들에게 재판의 짐을 지게 한 것은 또 어떤가. 이 일로 인해 두 명의 노조 간부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재판 그 자체로 노동자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심리적 고통에 노출된다. 자본력이 막강한 기업주는 소파에 앉아 법무실에 전화 몇 통 넣으면 그만이지만, 그들의 부당한 행위에 맞서 정당함을 입증해야 하는 노동자는 어림할 수조차 없는 시간 동안 일도, 가정도, 동료도 팽개쳐야만 한다.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했다는 '죄'로 노동자는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한 액수의 손배소를 맞기도 한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지난 2012년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는 유서에 "태어나 듣지도 못한 돈 158억, 내가 못 가진 것이 한이 된다.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고 썼다.

21세기에 이런 일들이 일상처럼 일어나고 있다. 지난 2009년 대규모 정리해고 이후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테이저건을 동원, 무차별 진압하던 야만적 사건이 있었다. 해고자들은 이후 25명의 동료와 가족을 떠나보냈다. 그러나 법은 가진 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차가운 판결문이 인쇄돼 나왔다. 복직 희망은 기각당했다. 쌍용차 노동자 이야기다. 우리 삶은 나아지는가? 세상은 진보하는가? 참으로 이상한 시절이다. 김 변호사는 이 책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 변론) 27년째에 접어들고 있지만, 우리 사회 노동권의 현실은 얼마나 나아졌는가 생각해보면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 평화적인 단순 파업을 이유로 노동조합 간부들을 업무방해죄로 형사처벌하고, 천문학적 액수의 손해배상으로 옥죄고 있는 실정이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기업은 여전히 무노조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광풍 속에 거세게 추진된 노동 유연화와 민영화 등의 정책 기조는 비정규직 양산과 사회 양극화로 이어졌다.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나는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가?

한 가지 덧붙일 말이 있다. 1989∼1990년, 쌀자루에 구멍을 내고 복직 구호를 앞뒤로 적어 뒤집어쓴 채 종로 한복판에서 외롭게 농성하던 한 기자가 있었다. 혹은 언론 노동자라 해도 무방하다. 대기업에 인수될 당시에 신문사의 노조 간부로 활약하다 해고당한 언론 노동자의 외로운 해고 무효 소송 과정에서 김선수 변호사는 변론을 맡게 된다. 법원은 결국 눈엣가시 같은 언론 노동자를 해고한 신문사에 대해, 해고가 부당하다며 젊은 언론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은 언론 노동사의 중요한 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 젊은 언론 노동자는 신문사에 복직했고, 후에 <프레시안> 창간에 뛰어들었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의 이야기다. 김 변호사는 어쩌면 <프레시안>의 창간에 기여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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