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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일 홈페이지 실린 철도 파괴범 사진…실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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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일 홈페이지 실린 철도 파괴범 사진…실상은?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41> 철도 건설과 일제의 끔찍한 만행들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게 된 일본은 경의선 철도의 신속한 건설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1904년 2월 21일, 일본은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를 설치, 군의 관할 아래 경의선 속성 건설에 나선다. 일본 해군이 뤼순의 러시아 함대와 요새를 공격, 러일전쟁이 발발한 지 2주일도 안 된 시점이었다. 이미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2월 6일 일본정부는 경의선을 일본 군용 철도로 부설할 것을 결정했다.

일본군이 경의선 건설에 나서는 것은 국제법상으로도, 상법상으로도 위법한 일이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군에 부설권을 허가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애초 경의철도 부설권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있을 때인 1896년 프랑스의 피브릴르 회사에 허가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정부와 프랑스 공사 간의 철도부설 관련 교섭이 진행됐다. 프랑스는 경의철도의 소유권을 99년간 갖겠다고 주장했으나 조선 정부는 15년 한도에 10년씩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수차례의 교섭 끝에 1896년 7월 조선과 프랑스는 '경의철도합동' 조약을 체결했다. 소유권에 관한 한 조선정부의 주장에 따르긴 했으나, 철도 부설 용지를 조선 정부가 제공하기로 하는 등 일방적으로 프랑스에 유리한 내용이 담긴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파기될 상황에 처했다. 3년 이내에 기공할 것을 조건으로 맺었지만, 기한 내에 공사를 사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브릴르 회사의 자금 부족이 원인이었다. 피브릴르 측은 공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부설권을 명목으로 한 몫 챙기자는 생각을 굳히고 선행된 예를 지침으로 삼았다. 경인선 부설권을 고가에 매각한 모스가 그 모델이었다. 프랑스는 일본 측에 경의선 부설권을 사갈 것을 제안했다. 일본은 프랑스가 제시한 조건이 터무니없다며 거부했다. 설사 프랑스 측이 일본 측의 구미를 당길만한 조건을 제시한다 해도 경부선 건설 자금조차 겨우 조달하고 있는 일본이 쉽게 경의선 부설권을 매입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결국 프랑스에 넘어갔던 경의선 부설권은 다시 조선 정부로 환원되었다. 이 틈을 타 조선 내부에서는 철도 부설 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앞장선 사람이 박기종이었다. 박기종은 조선에 철도가 도입 될 당시부터 철도를 놓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는 철도 부설의 특성상 번번이 자금난으로 꿈을 접어야 했다. 발바닥이 닳도록 양반 재력가들과 정부 요인들을 만나 철도에 대해 투자요청을 했지만,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이런 가운데 박기종은 1899년 7월 6일 대한철도회사를 설립하고 조선 정부에 경의철도 부설권을 청원했다. 철도 부설권 때문에 수많은 열강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온 조선 정부였다. 여기에 자국의 이권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도 싹트고 있었다.

정부는 경의철도 부설권을 외국인에게 매도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대한철도회사에 경의철도 부설권을 허락했다. 열강들의 아귀다툼 속에 튀어 오른 공을 조선인이 잡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대한철도회사의 주머니는 철도 부설에 대한 열망의 크기와 반비례했다. 사실상 빈털터리였는 데다, 박기종은 부산-하단포 철도 건설 실패에 따라 3만5000원의 부채를 떠안고 있었다. 대한철도회사는 철도부설권을 실질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일단 공사를 시작해야 했지만, 돈을 마련할 길은 없었다. 박기종은 최후의 수단으로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생각했지만 그것은 곧 겨우 확보한 부설권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어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선의 이권을 지키자는 여론이 퍼져나갔고 독립협회와 서울의 민중들 사이에서 이권수호운동이 일어났다. 철도·전신·광산·산림 등이 이권수호 운동 대상이었다. 대한철도회사의 경의선 부설이 지지부진해지자 결국 대한제국 정부가 나섰다. 1900년 9월 궁내부(宮內府) 내장원(內藏院)에 서북철도국을 설치하여 경의선에 대한 직접관리에 나섰다. 서북철도국은 우선 정부 예산 300만 원으로 서울-개성 간 철도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공사에 들어갔다.

▲코레일 홈페이지에는 해당 사진이 '철도 파괴범' 공개처형 장면이라고 설명돼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보면 이들은 '의병'들에 가깝다. ⓒ코레일 홈페이지 화면 캡처

식민지 지배계급, 친일파의 끔찍한 맨얼굴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경의선 공사가 시작되자 가장 당황한 것은 일본이었다. 경부선에 이어 경의선까지 한반도 종관철도 장악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일본 입장에서 조선이 자력으로 철도를 건설하는 것은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은 유명무실해진 대한철도회사를 경의선 장악의 교두보로 삼았다. 일본 정부는 친일파인 이재완을 대한철도회사 고위직으로 밀어 넣었다. 대한철도회사의 전권을 휘두를 수 있도록 이재완과 박기종 투톱 체제를 구성한 뒤 정부기관인 서북철도국 무력화에 나섰다. 대한철도회사가 경의선 건설을 담당하게 하고, 서북철도국은 형식적인 감독만 담당하게 만들기 위한 공작이 진행됐다.

대한철도회사 간부들에게는, '경의선 건설 공사 비용을 차관 형식으로 일본이 제공하겠다'는 미끼가 주어졌다. 1903년 5월 3일 대한철도회사의 경영진 박기종·정현철·홍긍섭 등이 서북철도국 총재 이용익에게 경의선 공사 일체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일본이 막후에서 대한철도회사와 황실을 두루 조정한 결과, 1903년 7월 13일 서울-평양 간 경의철도 건설을 대한철도회사에 맡긴다는 칙령이 내려졌다. 일본은 내친김에 대한철도회사 정현철 사장과 '경의철도차관계약'을 체결하여 경의철도 장악을 위한 마지막 수순을 밟았다.

그러나 러일전쟁으로 경의선 속성 건설이 필요한 일본은 대한철도회사에 경의선 건설을 맡길 수 없었다. 일본군은 전쟁수행을 위해 조선에서의 완전한 활동 보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대한제국 정부를 무력화시키는 일이 필요했다. 러일전쟁이 터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국외중립을 선언하여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터였으나, 서울은 이미 일본군 천지였다. 중무장 군인들이 장악한 서울에서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간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된다. 일본 측의 일방적 요구를 수용한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이 가운데 제4조는 경의선을 찬탈하기 위해 마련된 조항이었다.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황실안녕과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할 것이며, 그리고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

일본은 의정서의 제4조를 근거로 경의선의 군용철도화를 선언한다. 대한철도회사가 비록 일본의 차관을 제공받았지만 명목상으로는 조선인 회사였고 사장 또한 조선인이었다. 정부로부터 양허 받은 부설권도 대한철도회사의 고유한 권리였다. 일본이 직접 경의선 건설에 나서고자 한다면 대한철도회사와의 차관계약을 폐기하는 협상을 해야 하고, 부설권에 대한 권리도 양도받아야 한다. 그러나 일본군은 공문 한 장으로 경의선 부설권을 강제로 빼앗았다.

3월 12일 대한철도회사 사장 정현철 앞으로 일본의 공문이 전달됐다.

"경의철도는 제국군대에 의해 부설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항력이 생겼기 때문에 경성·의주 간에 사설철도를 부설하는 것은 불가능함"

얼마나 급박하게 공사를 서둘렀는지 측량과 시공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일본이 공사를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조선 백성들의 원한은 커져만 갔다. 이미 경부선 건설 과정에서 조선 백성들은 땅을 빼앗겼고 강제노역과 다름없는 철도공사 현장에 동원되었던 터였다. 철도 역부로 끌려가면 살아서 나오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군대에 의해 강제 동원되고 집행되는 경의선 공사 현장은 지옥의 중노동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철도용지 수용을 위한 작업이 시작되자 조선과 일본의 브로커들이 활개를 쳤다. 지방 관리들의 사기와 횡령은 백성들을 더욱 절망케 했다. 일본인 중에는 철도원 공문을 위조해 헐값으로 조선인의 땅을 사들이는 이도 있었다.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한성부판윤 박의병은 앞장서서 일본의 이해를 관철시켰다. 한성부판윤이란 관직은 수도 한성의 행정과 사법을 동시에 책임지는 자리였다. 지금의 서울시장과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장의 역할을 하는 막강한 직책이었다. 이런 직위에 있는 자가 농간과 협잡으로 백성들의 목을 졸랐다. 박의병의 활약은 일본을 고무시켰다. 한성부판윤 취임 다음 해인 1906년 박의병은 일본으로부터 '욱일장'이라는 훈장을 수여받았다. 훗날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발탁된다. 지배 계급의 맨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일제 수탈의 끔찍함은 철도 건설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전국 곳곳에서 땅을 빼앗긴 사람들에 대한 보상금은 형편없었다. 시세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곳이 허다했다. 조선인들은 거의 무상으로 땅을 헌납하고 생존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반면 외국인들이 보유한 땅은 시세를 그대로 인정받았다. 언더우드는 서빙고와 왕십리 사이 철도 부설 예정지에 소유하고 있던 512평의 땅을 넘겨주고 보상금으로 9000원을 받았다. 평당 18원 상당이다. 반면 도성에 가까운 남대문 주변의 한국인 토지 소유주가 받은 보상금은 평당 2원이었다. 이마저도 제대로 지급된 것이 아니었다. 일본 측은 해당 가액의 10분의 2를 수수료로 공제했다. 그나마 이런 형편없는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었으면 다행이었다. 군수나 면장 등 관리들이 중간에 개입해 보상비 일부를, 심지어는 전부를 착복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을 취재하던 잭 런던이 조선의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백성들을 등치는 도둑놈들이라고 말할 만했다.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온 서방 기자 중에는 잭 런던 말고도 영국일간지 데일리메일의 특파원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가 있었다. 잭 런던은 러일전쟁을 취재하고 돌아간 뒤 다시 조선을 방문하지 않았지만, 메켄지는 이후에도 몇 차례 조선을 찾았다. 1919년 메켄지가 마지막으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그는 3·1운동을 목격했다. 메켄지는 1919년 4월 경기도 수원 제암리 교회에서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 사건의 진상을 세계에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메켄지는 1908년 <대한제국의 비극>이라는 책에 일본의 토지 수용 실태를 고발했다.

"토지는 명목상 전쟁을 위하여 군대가 몰수하였다. 몇 개월 안에 그 토지의 대부분은 일본인 건축업자와 상점 주인에게 되팔렸으며, 일본인 거주자의 수는 점차로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토지 수탈은 약소민족에게 자행할 수 있는 가장 범죄적인 포악이었다. 이로 인하여 지난날에는 호강스럽게 살던 많은 사람들이 거지가 되었다."

서울과 평양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집단으로 항의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토지 수용 문제로 곳곳에서 분쟁이 발생하자 대한제국정부는 실태조사위원을 임명하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수습은커녕, 사태는 악화됐다. 평양군용지조사위원, 경의철도조사위원, 진해만조사위원으로 임명된 자가 한성부판윤 박의병이기 때문이었다. 박의병은 평양의 토지 소유자에게 평당 7전씩을 강제로 지급하도록 결정했다. 평양 주민들은 차라리 무상으로 국가에 헌납하겠다며 토지 보상비 수령을 거부했다. 박의병은 일본 헌병을 앞세우고 군수 등 관리들을 동원하여 땅 주인들이 보상비를 수령하도록 협박하고 다녔다. 일부 주민들은 회유와 협박 속에 헐값에 땅을 넘겼다. 이런 가운데 박의병을 비롯한 지방 관료들과 토지 브로커들이 보상비를 가로채는 일도 벌어졌다. 분노한 평양 외성민 5000명이 집단으로 평안남도 관찰사를 항의방문 했지만 관찰부의 답은 폭력 진압이었다. 수많은 부상자만 남긴 채 시위대는 해산됐다. 일본인과 대한제국정부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철도는 조선인들에게 땅만 빼앗아 간 것이 아니었다. 철도 건설은 대규모 인력을 필요로 한다. 현재와 같은 중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공사는 사람의 힘으로 해결해야 했고 일의 강도도 높았다. 일본군은 공기 단축을 위해 조선인 인부를 강제로 동원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각 지방 군수에게 일본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도록 훈령을 내렸다. 일본군의 지배 아래 있는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의 협조공문을 받을 때마다 무기력하게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한일의정서 제4조를 들이밀며 대한제국정부를 압박했다.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이라는 한일의정서에 따라, 철도 공사를 위한 노동자를 제공해 달라는 주한 일본공사와 주차군 사령관의 공문이 수시로 대한제국 외무대신과 내부대신에게 전달됐다.

경의선 철로가 건설되는 지역 주민들은 집단 히스테리에 걸릴 지경이 되었다. 일본군의 인부 모집 방식은 간단했다. 일본 헌병이 군수에게 가서 노동자를 모집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김포군에서는 300명을 요구했다. 자원자를 모집했으나 단 한 명도 나서지 않자 각 면·리마다 인원을 할당했다. 이렇게 강제 동원된 인원을 군인들이 철도 공사 현장으로 데리고 갔다.

교하군에서도 인부 모집이 시작되자 주민 수천 명이 모여 강제 모집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바로 일본군이 출동해 시위 주민을 포위하고 주민 대표들을 불러내 꿇어 앉혔다. 일본군 장교는 당장 인부들을 차출해내지 않으면 주민 대표들을 사살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런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 제 발로 나서서 철도 공사에 인부를 제공하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있었다. 송병준은 일본군 사령관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이 대표로 있는 일진회는 성전을 수행하는 일본에 신뢰의 의지를 표시하며, 그 뜻에 따라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의 일진회원들의 노동력을 경의철도 공사에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일본군은 송병준을 치하하고 일진회의 선의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일진회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겠다고 송병준에게 답했다. 일진회와 일본은 의좋은 형제처럼 양보 경쟁을 했다. 일진회는 일본 측이 제공하는 임금 중 식대를 제외한 나머지를 다시 일본 정부에 헌납하기로 결정했다. 일진회의 헌납금은 러시아를 응징하는 데 필요한 방위성금으로 쓰여야 한다는 게 송병준과 친일 단체 일진회의 입장이었다. 송병준 역시 일본으로부터 귀족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오르고 1921년에는 조선일보의 판권을 인수하기까지 한다. 동포를 팔아 잘 먹고 잘사는 자들의 횡포는 조선 백성들에게 일본보다 더 큰 원한을 갖게 했다.

1905년 5월 군내 전체 호수가 4000호에 불과한 고양군에서는 6개월간 1550명이 매일 동원되었다. 생업인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게 되면서 생존권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일산역과 부대시설을 만들기 위해 중노동에 투입된 고양 군민들의 한숨이 경의선 철로를 타고 길게 이어졌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조금만 한 눈을 파는 기미가 보이면 곤봉세례를 당했다. 게으름을 피운다고 맞아 죽거나 담배를 피워 작업 속도를 못 맞춘다고 총격을 받기도 했다. 일본인 감독의 혹독한 대우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은 즉결 처형을 당했다. 충남 전의군의 경부선 공사 현장에서는 일본인 감독관이 조선인 노동자를 총살한 사건도 발생했다. 일본인 감독관의 조선인 피살은 여러 곳에서 일어났지만 가해자에 대한 심판은 솜방망이에 불과했다.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기껏 기소된다 해도 일본인 법정에서 나는 결론은 뻔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들에게 주어진 고통은 철도 연변의 토지 수용과 강제 노역 이외에도 더 있었다. 철도 건설을 위해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의 행패였다. 그들은 일본군의 비호 아래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다. 1903년 2월 24일 자 황성신문에는 일본인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고발하는 기사가 실렸다. 1903년 2월 경북 청도군 성현의 선로공사에 참여했던 일본인이 민가에 난입하여 부녀자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남편이 달려들었지만 일본인이 쏜 총에 그는 허벅지를 관통당했다. 일본인은 부녀자의 옆에 있던 13세 된 아들에게도 총을 쏘아 즉사시켰다. 강간을 하려 했던 부녀자에게는 칼을 휘둘러 중상을 입혔다. 마침 임신 상태였던 여성은 낙태를 하게 되었다. 분노한 주민들이 격투 끝이 일본인을 붙잡았으나 소식을 듣고 떼거리로 달려온 일본인 노동자들이 그를 구출해갔다. 이 끔찍한 만행은 소문을 타고 조선 각지로 퍼졌고 대한제국 정부도 여론에 밀려 살인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일본에 요청했다. 일본도 눈치를 보다가 살해범을 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죄의 대가는 금고 5개월이었다.

파주군에서도 경의선 철도 건설에 투입되었던 일본인이 민가에 난입하여 여자를 요구한 일이 발생했다. 파주 군민 성봉구는 일본인의 파렴치한 요구에 항의했지만 일본인이 휘두른 칼에 절명했다. 평산군에서도 조선인 여성이 일본인의 칼에 숨졌다. 옥천, 전의, 금산, 개령 등 철도 연변을 따라 전국 각지에서 일본인과 군경의 무자비한 만행이 잇따랐다. 식민지시대 조선의 철도는 선로 마디마디에, 침목 하나하나에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이 스며들었다. 한의 철로였다.

일본이 조선에 철도 건설 공사를 진행하면 할수록, 조선 백성들의 반일 감정은 극도로 확산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에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조차 철도 건설 과정을 통해 제국주의 침탈의 맨얼굴을 확인했고, 적대적으로 돌아섰다. 항의와 소요가 줄을 이었다. 조직적인 저항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의병운동으로 확대되기까지 했다. 한반도에서 철도는 근대를 개척하는 기관차가 아니라 민중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탈의 도구였고 침략의 총칼이었다. 백성들은 본능적으로 철도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코레일 홈페이지에 실린 철도 파괴범?…실상은…

조선의 항일의병이나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보면, 초기에 등장하는 사진이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비롯해 대한제국 말기의 일제 침략을 고발하는 여러 책자와 신문에 실린 사진이다. 십자가 형태의 나무에 흰옷을 입은 세 사람이 묶여 있다. 어떤 사진에는 이 세 사람을 향해 일본군이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또 다른 사진에는 총살형이 끝난 뒤 이미 절명해 목을 늘어뜨린 시신을 일본군이 확인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총살형이 집행된 장소는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이다. 마포구 도화동은 용산에서 개성을 향해 철도 건설을 시작한 경의선 공사구간의 시발 지점이다.

용산역에서 시작한 경의선 철도는 효창과 서강을 거쳐 수색으로 이어지는데 이 사진에 등장하는 곳은 효창고개를 넘어 공덕동으로 이어지는 도화동 야산이다. 지금은 아파트촌이 들어서 있다. 용산과 마포를 잇는 도화동 언덕길에는 철도 건널목이 있었다. 일본군은 이 철도 건널목 옆 공터를 사형장으로 삼았다. 1904년 9월 21일 오전 10시, 철도 건널목 옆 사형장에 구경꾼들이 몰렸다. 나무 십자가 세 개가 세워지고 세 사람의 조선인이 흰 천으로 눈이 감긴 채 묶였다. 일본군 장교가 최종 신원 확인 절차를 거친 뒤 뒤로 물러섰다. 십자가 앞에 일렬로 서있던 일본 육군 보병 분대가 총을 겨눴고 장교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총구는 불을 뿜었다.

일본군은 막 부설된 경의선 옆에서 강제로 주민들을 동원해 사형장면을 구경하게 했다. 조선인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함이었다. 이 세 사람의 이름은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였다. 이들은 1904년 8월 27일 경의선 철도를 폭파시켰다. 세 사람의 원래 목표는 용산역에 있는 일본군 보급기지창을 폭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엄한 경계로 엄두를 못 내고, 대신 고양군으로 들어가 경의선 철로를 폭파시켜 20여 일이나 철도를 마비시켰다. 사건 직후 일본군에 체포된 세 명의 의병은 경의선 철도 공사처럼 속성 재판을 받게 된다. 사건 발생 한 달도 안 되어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바로 다음날, 그들은 마포 경의선 철로 변 언덕 기슭으로 끌려가 십자가 형틀에 묶였다. 조선인의 철도에 대한 공격에 대해 일본군은 특별히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대응했다.

마포 도화동 사형집행 관련 자료 사진을 구하기 위해 코레일의 사진 데이터베이스 사이트를 찾아 검색했다. 검색어에 '공개처형'을 집어넣으니 사형집행 상황이 담긴 사진이 나왔다. 그런데 사진 제목이 어이없다. 한국철도공사가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웹 사이트에서 "철도 파괴범의 공개처형 장면"이란 제목으로 사진이 올라가 있었다. 사진 설명도 1904년 있었던 사건을 1905년의 일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하기는커녕 방치하고 있다.

일본군의 강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철로 위에 장애물을 놓거나 시설물을 훼손하는 조선인들의 저항이 끊이지 않자 일본군은 '철도와 전선에 해를 가하는 자는 잡히는 대로 총살하겠다'는 군령을 발포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군의 군령을 철도 노선 주변의 주민들에게 알리는 수고를 해줬다. 무고한 조선인의 피해를 막겠다는 취지였다. 기력이 소진된 왕조가 백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포구 도화동의 야산은 조선인들의 골고다 언덕이었다. 십자가에 묶인 채 흰옷을 붉은 피로 물들이며 죽어가야만 했던 세 사람의 운명은 식민지를 살아가야 할 조선인들의 앞날을 미리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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