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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반인 박정희? 위인도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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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반인 박정희? 위인도 못 된다

[프레시안 books] 박형기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하오샹…니부쓰쭝궈런(好像你不是中國人)?" (너, 중국 사람 아닌 것 같은데?)

1994년 2월 춘절(설날)을 3일 앞둔 광저우발 베이징행 열차 딱딱한 침대(硬卧)칸. 전날 오전 10시에 탔는데 다음 날 오전 10시께가 되자 맞은편 40대 초중반 중국 남자가 말을 걸었다. 중국인은 의심이 많다. '1박 2일'을 하며 나를 관찰한 결과 외국인으로 보이니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워쓰한궈런(我是韓國人)." (한국인이에요.)

중간 침대에 누워 우리 대화에 귀 기울이던 50대 후반 아주머니가 한마디 했다. "한궈가 어디 있는 나라죠?"

"한궈쓰난차오시엔(韓國是南朝鮮)." (한국은 남조선이라고요.)

(1997년 8월, 대선을 앞두고 새정치연합 소속 이석현 국회 부의장(당시는 새정치국민회의)은 해외용 명함에 영어·러시아어와 함께 韓國·南朝鮮이라고 표기했다가 보수 쪽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급기야 탈당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그 무렵만 해도 '한국'을 아는 중국인은 소수 식자층이었다. 라오바이싱(老百姓, 보통 백성들)은 '남조선'은 알아도 '한국'은 금시초문이었다.)

2시간 정도 잡담했다. 담배를 나눠 피우고 맥주도 몇 잔 했다. 말이 통한다 싶었는지 그는 정치 얘기를 꺼냈다.

"지금 중국은 '乱七八糟다(개판이다)'."
"왜요? 개혁·개방으로 훨씬 더 잘살게 되지 않았나요?"
"나는 사업한다. 먹고살 만하다. 하지만 이 나라, 문제 많다고 본다. 열흘 전 새벽에 선전역 부근에서 권총 강도 당했다. 돈 다 털렸고 죽을 뻔했다. 마오 주석(마오쩌둥)이 살아 있을 땐 안 그랬다. 문화대혁명 때 나도 홍위병이었다. 문혁 갖고 말 많지만 그때는 중국인 도덕 수준이 최고였다."
"엥? 그래요?"
"문혁 때는 불빛 하나 없는 외진 길을 걸어도 무섭지 않았다. 도둑·강도가 없었다. 길에 떨어진 물건, 아무도 안 주워갔다. 지금은 사람들이 돈만 밝힌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게 중국이다."

덩샤오핑 덕분에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비즈니스'를 분쇄했던 마오쩌둥을 찬양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 박정희 VS 마오쩌둥>(알렙, 2014년 10월 펴냄)을 읽으며 떠오른 옛 기억이다. 이 책은 백성을 먹인 덩보다 굶겼던 마오가 왜 인기 폭발인지 밝힌다. 저자 박형기는 <광주일보> 홍콩 특파원, <머니투데이> 국제부장, 온라인 총괄부장 등을 지냈다.

필자가 중국 취재 여행을 다닐 때, 중국인들에게 "왜 당신들은 잘살게 해준 덩샤오핑보다 수천만 명을 아사시킨 마오쩌둥을 더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약속이나 한 듯 "덩샤오핑은 우리에게 돈을 벌게 해주었다. '마오주시(毛主席, 그들은 반드시 이렇게 부른다)'는 우리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돈은 언제라도 벌 수 있지만 한번 깎인 체면은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는 답을 듣곤 했다. (6쪽)

여기서 체면에는 개인적 체면은 물론 민족적 체면까지 들어간다. 민족 자존심이다. 민족 자존심이 문턱 하나만 넘으면 중화주의다. 중화주의가 실력 없이 나대면 '중국적 거만함'이고 루신은 <아Q정전>에서 이를 '정신 승리법'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1999년 5월 미국이 유고 베오그라드의 중국 대사관을 폭격해 중국인 3명이 숨졌다. 반미 시위가 격렬했다. 당시 국가주석 장쩌민은 미국을 향한 분노가 반정부 시위로 번질까 두려웠다. 빌 클린턴의 공식 사과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라오바이싱들은 "마오 주석이 살아계셨다면 미국이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갔겠느냐?"고 분개했다. (가끔 '사오정식 행동'으로 조롱받았던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93세까지 장수하지 않았다면 마오의 후계자 화궈펑 꼴이 났을 것이다.)

중국인들 가슴속에 마오쩌둥이 살아 있는 이유

ⓒ알렙
문과적 낭만주의자 마오쩌둥(1893∼1976)과 이과적 테크노라트 덩샤오핑(1904∼1997)은 달랐다. 마오쩌둥의 리더십은 다음과 같다. (분류는 저자가 했지만 바로 뒤 설명은 필자가 했다.)

* 정통성 : 마오는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한 12명 가운데 하나였다.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한다'는 중국식 혁명론의 창시자이고 대장정을 이끌었다. '신중국'의 건국자다. 중국 현대사 인물 가운데 마오만한 정통성을 지닌 인물은 '국부' 쑨원뿐이다.

* 지적 능력 : 마오가 무력은 강했지만 무식했다고 보는 한국인들이 대부분이다. 비적 떼 두목 정도로 안다. '김일성은 가짜였다'라는 설만큼이나 무식한 견해다. 마오는 독서광이었다. (흡연광이기도 했다. 8만5000명이 출발해 10퍼센트만 옌안에 도착한 대장정 때 담배를 구할 수 없어 풀을 말아 피웠던 게 제일 불편했다고 말했을 정도.)

마오의 <모순론>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위치가 상당하다. 그의 신민주주의론은 제3세계에 큰 영향을 줬다. 레닌이즘은 이제 책 속에서나 볼 수 있지만, 네팔·인도·필리핀에는 여전히, 칼라슈니코프 돌격 소총(AK-47)을 들고 인민 해방을 외치는 마오주의자들이 있다.

* 자주 : 마오는 56세 때인 1949년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게 처음 외국에 나가본 거였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마오의 평생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 선생(馬克思, 마르크스의 중국어명)과 열 선생(列寧, 레닌의 중국 이름)'의 혁명 이론을 중국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았다.

아마 세계 역사상 중국 농민만큼 인내심이 강하고(펄 벅의 <대지>에 잘 나와 있다) 혁명성이 강한 농민들은 없을 거다. 중국은 농민 반란으로 왕조가 자주 교체됐다. 진나라 때 진승·오광의 난(BC 209)에서 시작해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1630∼1640년대)으로, 청나라는 태평천국의 난(1850~1864)으로 무너졌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즐겨 읽고, 북송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을 17번 완독했던 마오쩌둥은 자국 역사에 해박했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농민은 포대 속의 감자와 같다. 감자는 스스로 서지 못한다. 오직 포대 속에 담겨야 설 수 있다"고 야유했지만, 마오쩌둥은 정반대였다. 마오가 도시 노동자 계급 중심의 볼셰비키 혁명 모델을 추종하지 않고, 농민 중심의 혁명 전략을 세운 건 단지 '자주성' 때문이 아니다. 중국 역사에 천착한 '현실감각' 때문이었다.

* 폭력 : 마오 어록 넘버원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다. 생사를 함께했던 동지들도 거슬리면 처단했다. 류사오치·펑더화이·린뱌오 등 '마오쩌둥 옆에 가면 모두 죽었다.' (249쪽)

한데 트랙터 수리 공장으로 쫓아냈던 덩샤오핑(당시 65세)만은 살려줬다. "마오가 덩샤오핑을 미워했으나 재능이 너무 아까워 차마 죽이지 못했다"고 말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아무튼 덩샤오핑도 정권 장악 뒤 "마오 주석의 공은 7, 과는 3", "마오 주석의 초상화는 톈안먼 광장에 영원히 걸려 있을 것"이라며 화답했다.

(필자는 문혁 때 쫓겨났던 덩샤오핑이 마오에게 보낸 편지를, 10년 전 중국의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본 적이 있다. 겉은 품위 있었지만 속은 아부의 극치였다.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구구절절 하소연한 뒤 복직만 시켜주시면 충성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위대한 영수 마오쩌둥 동지 만세'로 편지가 끝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천하의 덩샤오핑도 고달프니 어쩔 수 없구나', 쓴웃음이 났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믿음, 덩샤오핑도 마찬가지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는 덩샤오핑과 박정희 리더십의 특징을 이렇게 평한다. (이 책의 뒤표지 날개에 적혀 있는 내용을 그대로 소개한다.)

덩샤오핑
- 화합 : 정치의 달인인 그는 '친구의 극대화, 적의 극소화'라는 명제를 뼛속 깊이 체화한 인물이었다.
- 권위 : 덩샤오핑은 권력이 아닌 권위로 중국을 통치했다.
- 유연 : 덩샤오핑은 유연한 발상을 했다. 덩샤오핑은 발상뿐 아니라 정치 리더십도 부드러운 지도자였다.
- 보편 : 덩샤오핑은 평화를 지향했고, 합리적이었다. 그는 특히 세계의 보편적 질서를 존중했다.

박정희
- 가난 극복 : 박정희의 개인적 가난은 그 자신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우리 국민에게는 행운이었다. 그의 가난 극복 리더십이 경제 발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 실력과 소탈 : 박정희는 탁월한 실력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 박정희는 실력과 인격을 겸비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 마이웨이 : 박정희는 반대가 많아도 국익 또는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면 자신의 길을 걸었다.
- 폭력 : 집권 이후 박정희 리더십의 요체는 폭력이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을,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는 빠른 승진을 선물했다.

날카로운 견해도 보인다. 예를 들어 다음 내용이다.

만약 20년에 걸친 국공 내전에서 장제스가 이겼더라면 중국은 일본처럼 영원히 미국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2차 대전 후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들어갔다. 그 순간 일본이 세계 최강국이 될 가능성은 사라졌다. 중국도 미국의 핵우산 아래 들어갔다면 제2의 일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마오가 정권을 잡은 중국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로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마저 성공함으로써 중국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발돋움했다. (122∼123쪽)

그러나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를 읽으면서 필자와 다른 견해도 눈에 띄었다. 우선 저자가 마오쩌둥 리더십의 특징 중 하나로 '폭력'을 꼽으면서 덩샤오핑 리더십에는 이를 넣지 않은 대목이다. 덩샤오핑이 화합형 인물이었고 권력보다는 권위로 중국을 통치한 건 맞다. 그렇다고 덩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를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989년 6.4 톈안먼 학살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이는 '빨갱이들'만의 생각은 아니다.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는 톈안먼 학살을 적극 지지했고 덩샤오핑과 친했다. 리콴유는 박정희도 높게 평가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동아시아 전통적 지도자들의 생각 아닐까? 대만 민진당 지지자들 자부심 가운데 하나가 이거다. "우리는 수천 년간 전제 왕조만 있던 중국에서도 민주주의와 직접 선거가 가능하다는 걸 실증했다."

'자주'를 마오쩌둥 리더십의 특징 중 하나로 거론하면서 덩샤오핑 리더십에는 넣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덩샤오핑은 유연했지만 자주성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1982년 9월,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와 홍콩 반환을 놓고 담판을 벌여 판정승했다. 대처는 홍콩을 중국에 넘겨주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덩과 회담한 뒤 너무 실망해 계단을 내려가다 실족하고 말았다. (271쪽)


반신반인? 위인 범주에 넣기도 힘든 박정희

저자가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를 쓰게 된 계기는 지난 2013년 11월 14일 '박정희 대통령 96회 탄신 기념행사'에서 남유진 구미시장이 한 말 때문이다. 남 시장은 "박정희 대통령은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하늘이 내렸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반신반인으로 대우받는데, 과연 박정희가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저자는 박정희의 경제 성과를 인정한다. 그의 의지와 실력도 평가한다. 그러나 저자의 결론은 박정희는 반신반인은커녕 위인도 되기 힘들다는 거다.

박정희가 대한민국 사회에 남긴 가장 부정적인 유산은 '가치관 전도 현상'일 것이다. 박정희는 반칙을 일삼고도 출세했다. 이후 한국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출세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됐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원칙을 지키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오히려 바보 취급을 받았다. (328쪽)

사실 박정희는 반신반인은 물론 위인의 범주에 넣기도 힘들다. 위인은 보고 배울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위인이라면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리도 없지만.

"앞으로 식민 시대가 다시 온다면 식민 종주국에 충성해라. 앞으로 다시 군부 독재 시절이 온다면 군부 독재에 협력해라. 그리고 반칙을 일삼더라도 무조건 출세해라." (333쪽)

경제로만 한정해도 '박정희 반신반인론자들'의 기준대로라면 덩샤오핑은 전신(全神)이다. 중국 면적은 남한의 100배, 인구는 27배다. 덩샤오핑이 1978년 권력을 장악했을 때는 '10년 대란'(1966∼1976)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 직후였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제대로 산업화 경험을 겪은 적이 없다. 1911년 신해혁명 뒤에는 군벌 쟁투, 만주사변, 중일전쟁, 22년에 걸친 국공 내전, 한국전쟁 참전(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사실 미국과 중국의 싸움이었다. 중국인들은 이 전쟁에서 미국에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 참전은 중국 지도부 모두 반대했는데 오직 마오의 결단으로 가능했다.),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을 겪었다. 1978년 개혁·개방 전까지 약 140년간 경제를 제대로 돌볼 틈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해외 화교 자본이 투자했다고 하지만, 이 거대한 땅과 인구를 개혁·개방으로 이끌고, 개혁·개방 36년 만에 G2로 우뚝 서는 기틀을 만든 게 덩샤오핑이다.

중국 역사의 3분의 1은 이민족 지배 역사라지만 그래도 자주파가 승리한 적이 많다. '이민족 지배 다음에 한족 지배'가 되풀이됐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보면 고구려 이후 자주파가 득세한 적이 없다. 민족 배신자(중국에서는 한간漢奸이라 부른다)를 단 한 번도 심판한 적이 없다.

보수 논객들은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고 대놓고 얘기하지만, 그 영리한 중국인들이 '자존심은 결코 자동으로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걸 몰라 '민족적 체면'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겠는가?

이 책은 세 명(마오쩌둥, 덩샤오핑, 박정희)의 동아시아 지도자를 비교했지만 한국인과 중국인의 '밑바닥 문화 코드'를 드러낸다. 체면은 한두 번 잃을 수도 있다. 한나라 한신도 백정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 '돈은 언제라도 벌 수 있지만 한번 깎인 체면은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며 중국인들이 마오를 숭상한다지만, 사실 체면은 10번이라도 깎일 수 있다.

문제는 체면 깎이는 게 습성이 되는 거다. 깎인 체면을 부끄러워하는 사람과 수치심을 못 느끼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

* 추신 :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이 경제적 측면에서 그리 재앙이었다면, 개혁·개방을 시도한 지 불과 36년 만에 중국이 G2가 될 수 있었을까? 개방하고 외국 자본이 들어와서? 그렇다면 항상 개방 상태였던 '미국의 위성국가들'은 왜 중국처럼 성장하지 못했을까?

사막에 물 몇 번 뿌린다고 바로 옥토가 되지 않는다.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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