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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이 튕기고 남측이 매달린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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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이 튕기고 남측이 매달린 '정상회담' [김기협의 냉전 이후] <62> '퍼주기 논란'과 盧 정부의 대북송금특검
임동원은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 출범 때부터 외교안보수석보좌관으로 일하다가 1999년 5월말 통일부장관으로 취임했다. 대통령의 그늘에서 정책을 기획, 입안하던 위치에서 집행하는 위치로 나온 것이다. 그 동안 햇볕정책의 구체적 추진방향도 세워져 있었고 미국 등 주요 관계국과의 정책 조율도 어느 정도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임동원은 불과 7개월 후인 1999년 연말에 국가정보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북관계에서 정상회담 추진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남한 정부의 대북관계 업무를 맡는 핵심부서로 통일부와 국정원이 있었는데, 통일부는 보이는 일에, 국정원은 보이지 않는 일에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임동원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서 국정원장 취임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12월 23일 갑자기 대통령에게 불려가 이튿날 국정원장으로 부임하라는 "뜻밖의"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자신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단호히" 고사했으나 대통령의 결심을 바꿀 수 없었다고 한다.

어떤 회고록이든 글 쓰는 목적에 따라 서술에 굴절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목적이 사사로운 이익에 있다면 참고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 임동원의 회고록은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내게는 보이는데, 그래도 이런 대목에서는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직책 변경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대북정책의 틀이 걸려있는 일이다. 그런 중요한 일을 본인 모르게 대통령이 확정해놓을 수 있었을까?

남북정상회담의 추진과정에 대해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수구세력이 집요하게 의혹을 제기했고, 그에 따라 특검 조사와 관계자 처벌이 있었다. 공방이 치열했던 문제이기 때문에 그 과정의 서술에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기 어려운 점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김대중과 임동원의 회고 양쪽에 모두 정부의 정상회담 검토가 2000년 1월말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즈음 북쪽으로부터 의미 있는 신호가 왔다. 1월 말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청와대 관저로 찾아와 뜻밖의 보고를 했다.

"현대가 북측 인사를 접촉해 보니 남북 정상 회담이 가능할 것 같다고 합니다."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현대는 금강산 관광과 소떼 방북 등 북한과 교류해 왔기 때문에, 그동안의 북한과 현대의 관계로 볼 때 역할이 가능할 것입니다. 현대에 연락해서 한번 알아보시오."

예감이 좋았다. 국정원의 주례 보고를 듣는 자리에서 임동원 원장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북한이 정상 회담 추진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현대 정몽헌 회장을 만났더니 북한이 정상 회담 추진 의사가 있다고 전했답니다. 국정원에서도 이 문제를 알아보고 검토하십시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 2-235쪽)

▲임동원 전 국정원장(왼쪽)과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2000년 2월 3일 목요일 오후, (…) 이날 보고를 마치자 김 대통령은 나에게 의외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북한이 정상회담 추진의사를 전해왔어요. 어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현대의 이익치 회장과 요시다라는 사람을 만나 북측의 정상회담 추진의사를 전달받았는데,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곧 제3국에서 박지원-송호경 접촉을 갖자는 제의도 받았다는군요. 그런데 이 제의가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또 실현가능성이 있는 것인지를 잘 모르겠어요"라며 국정원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검토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국정원장으로 취임한 지 이제 한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렇듯 종요한 대북관계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 대통령은 대통령취임사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제의한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측에 호응을 촉구해왔다. (<피스메이커> 25-26쪽)

1970년대 초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북한과의 비밀접촉에는 국정원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임동원의 국정원장 기용은 다른 무엇보다 남북정상회담 추진에 뜻이 있었을 것 같다. 그가 자리를 옮긴 한 달 후에 공교롭게 그 과제가 나타났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는 임동원의 서술이 곧이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선의로 취한 조치까지도 시빗거리로 삼던 그 후의 상황을 감안하면 이런 의문 때문에 그의 회고에 대한 불신감이 들지는 않는다. 앞뒤 상황을 감안하고 읽을 필요를 느낄 뿐이다.

남북정상회담! 수십 년간 적대상태로 지내던 남북한이 정상회담을 연다는 데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시늉만의 긴장 완화였던 1972년의 7.4공동성명은 제쳐놓고, 1980년대 말부터 긴장 완화의 추세가 분명히 나타났다.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이 나오고 유엔 동반 가입이 이뤄졌다. 그러나 휴전선의 군사대치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한쪽 국가원수가 휴전선을 넘어가 상대방을 만난다면, 그 만남 자체가 휴전선의 의미를 크게 바꾸고 남북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정상회담을 열 동기는 양쪽에 모두 있었다. '한반도 평화' 같은 원대한 목적 외에도 현실정치를 위한 구체적 동기가 있었다.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을 겨우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고립상태를 벗어나지 않고는 장래를 바라볼 길이 없었다. 상당 수준의 경제발전을 이뤄놓은 남한에게는 군사적 긴장을 벗어나는 것이 초미의 과제가 되어 있었다.

양측의 동기를 굳이 비교한다면 북측의 동기가 더 절박하고 중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두환 시절 이래 정상회담 논의가 간간이 나올 때마다 남측에서 매달리고 북측에서 튕기는 모습이 거듭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경제상황으로 나타난 체제경쟁에서 북측이 불리하기 때문에 급격한 접촉 확대를 꺼린 것이다. 또 하나는 북측과 달리 남측에는 정권의 경쟁이 있기 때문에 정상회담 성사의 공로를 다투는 상황에 있었다. 노태우 정권은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일부러 고위급회담의 진행을 늦췄다는 지적이 있고, 김영삼 정권은 정상회담 욕심 때문에 대북정책이 혼란스러웠다는 지적이 있다.

2000년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현대그룹이 큰 역할을 맡았다. 앞서 연재 8회에서 박철언의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중 이런 대목을 인용한 일이 있다.

2월 2일, 정주영 회장이 귀국했다. 공항에서 동행을 요구하는 안기부 직원들을 따돌리고, 오후 1시50분경 바로 청와대의 내 사무실로 달려왔다. 정 회장은 "허담 비서가 '박 대표에게 정중한 안부를 전해 달라'고 당부하더군요. 허담 비서는 비방 방송의 중지 제의를 총리 회담 예비 회담에서 할 예정이라며,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내가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허 비서는 군비 축소도 주장했습니다"라고 허담과의 대화 내용을 설명했다. (…)

그러나 정주영과 내가 구상-추진했던 금강산 관광-개발은 엄청난 역풍에 부닥쳐야 했다. 물론 9년 후인 1998년 11월에야 역사적인 첫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졌으나, 당초의 구상대로였다면 1989년 7월에 첫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고 대북 경협도 10년은 빨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향적인 대북 정책과 자주 세계 외교 시대를 향한 북방 정책에 대한 안팎의 비판과 견제가 너무 심했다.(2권 57-58쪽)
1989년 2월 정주영이 평양 방문에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현대는 북한 관계 사업을 이미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삼 정권 아래 막혀 있다가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을 만난 것이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했을 것이다. 북한이 햇볕정책에 아직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던 1998년에 '소떼 방북'과 금강산관광사업을 이룬 것을 보면, 정부가 가로막지만 않을 경우 독자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길을 확보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로서는 남북 간의 정부 간 관계가 발전할수록 사업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대화 통로를 찾아주었을 뿐 아니라 이후의 교섭에서 남측 정부가 직접 충족시켜줄 수 없는 북측 요구를 대신 나서서 충족시켜주려고까지 했다. 남북정상회담 공동발표문은 세 차례 특사회담 끝에 2000년 4월 8일 합의가 이뤄져 4월 10일 발표되었다. 합의 직전 김대중 대통령이 박지원 특사에게 내린 지시를 임동원은 이렇게 기록했다.

4월 7일 아침, 김 대통령은 제3차 실무접촉 결과를 보고받고, 박지원 특사에게 이튿날 베이징에 가서 최종 합의할 것을 지시했다. 그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박 특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사는 형이 가난한 동생네 집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는 마당에 식량난 등 북한주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주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박 특사께서는 이번 정상회담 선물로 우리가 현금 1억 달러를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마지막 협상에 임하도록 하세요."

사실 그동안 우리 측에서는 1억 달러 규모의 식량이나 비료 등 물자를 선물로 제공할 것인가, 아니면 북측이 희망하는 현금을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줄곧 있어왔다. 그리고 3년 후 특검을 통해 밝혀졌지만, 사실상 이 1억 달러 현금 제공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피스메이커> 34쪽)

김대중, 임동원을 비롯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관계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지만 이 발표의 타이밍은 참 고약했다. 총선 사흘 전이었던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꼭 필요한 지원과 협력까지도 '퍼주기'로 손가락질하는 세력 앞에서 정상회담 발표의 이런 타이밍 결정은 너무 교활하거나, 아니면 너무 우둔한 것이었다. 이 타이밍에 북한이 보조를 맞춰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대가를 지불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현금 1억 달러' 제공도 '퍼주기' 논란의 빌미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려운 동포들을 위해 해줄 좋은 일을 회담장에 가서 약속하는 것은 좋지만, 만남 자체를 위해 거금을 공식적으로 건네준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결국 이 안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협상이 다급할 때 너무 무리한 제안을 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때문이 아니었을지.

북한과의 교섭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임동원은 총선 3주일 후에 알았다고 한다. 5월 4일 박지원이 현대 측 인사들을 만났을 때 현대가 북측과 '7대 경협사업'의 독점권에 합의했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그 날 밤 전화로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임동원이 즉각 조사한 결과 합의 내용이 아래와 같이 파악되었다. 합의의 대가로 현대가 4억 달러를 미리 지불하기로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피스메이커> 42-43쪽)

* 북측은 모든 SOC와 기간산업시설에 대한 사업독점권을 현대에 30년간 부여한다.
* 이 중 경의선 철도연결 및 복선화사업을 비롯하여 서해안 산업공단 건설사업, 통신현대화사업, 발전시설사업 등 7개 사업을 조속히 추진한다.
* 현대는 국내외 기업과 관계기관을 망라한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해당 사업을 추진한다.
* 북측은 토지 무상제공을 비롯하여 경제특구에 적용되는 모든 혜택을 현대에 보장한다.

가변성이 큰 현실 위에서 이런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계약은 투기성이 너무 큰 것이었다. 정상회담 추진 단계까지 현대는 남북관계 진전에 큰 동력을 제공하며 지저분한 일을 떠맡는 '핸디 맨' 노릇을 했지만, 너무 큰 역할을 너무 오래 지킨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남북관계가 현대 사업에 좌우되는 기형적 상황을 생각할 수 있었다.

이 일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을 때 반응과 조치 내용을 임동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며칠 후 이기호 수석은 현대 측과 협의한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자리에는 박지원과 내가 동석했다. 대통령은 현대와 북측의 처사에 대단히 불쾌하다는 태도로 반응했다. 현대가 정상회담 성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고 남북경제공동체 건설을 위해 정부와 한 배를 탄 것도 인정하지만 이렇듯 독단적인 행보는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

또한 김 대통령은 북측의 태도도 용인할 수 없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남북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이런 대규모 사업은 당국 간 협조 없이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알 텐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하려는 것인지 못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김 대통령은 이기호 수석에게 "책임지고 현대를 설득하여 바로잡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통일부는 현대의 사업승인요청을 '서류 미비' 등의 이유로 접수를 거부한 상태였다. 그러나 현대가 이미 저질러놓은 일을 쉽사리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현대가 우리정부의 사전승인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일이라 해도 북한과 이왕 합의한 이상 정부가 나서서 취소시킬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3년 후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이 특별검찰을 임명하여 조사하도록 했던 이른바 '대북송금사건'은 이렇게 잉태되었다. (같은 책 44-45쪽)

2003년 특검을 통해 4억5000만 달러의 금액이 국정원 계좌를 통해 북한으로 송금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여러 관계자들이 처벌받고 현대의 정몽헌 회장이 투신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 흠집은 남북관계의 발전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1990년대 중엽의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좋은 여건을 잃어버린 결과 2000년의 정상회담 추진에 무리한 조건이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파생된 문제들을 '실정법' 차원에서 까밝힘으로써 관계 발전의 동력을 잃어버린 과정을 보면 민족문제에 대한 남한 사회의 미숙한 인식이 남북관계 발전의 큰 걸림돌이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의 정치철학을 전반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내 관점으로도 2003년의 특검 진행은 이해할 수 없는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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