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프 미안과 아미르 수피의 <빚으로 지은 집>(열린책들, 2014년 10월 펴냄)은 2007∼2008년의 미국발 금융 위기에 관해 쓰인 매우 중요한 책들 가운데 하나다. 독자들은 저자들이 원용하고 있는 실증 자료의 양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저자들이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도 상당히 체계적이라는 점을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안과 수피는 책 서두에서 셜록 홈스의 말을 빌려 '이론을 세우기에 앞서 자료를 먼저 집대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특정한 이론 혹은 가설 없이 집대성될 수 있는 자료가 과연 존재하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이 남지만, 적어도 실증 자료에 대한 꼼꼼한 분석을 통해서 가다듬어진 저자들의 세심한 추정과 주장들은 이 책이 지닌 여러 가지 강점들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저자들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탁월함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마치 잘 쓰인 르포 기사를 읽을 때 느끼는 명료함을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 자칫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경제학 전문 용어와 금융 용어도 역자의 세심한 고려와 편집진의 노력 덕분에 말끔하게 번역된 것처럼 보인다. 문장의 길이와 호흡도 적절해서 번역서라는 느낌을 전혀 갖지 않고 빠르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책의 구성과 개요
이 부분에서 미안과 수피는 미국 주택 시장에서 발생한 문제가 일시적인 불경기를 야기하는 데서 대충 수습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비우량 주택 구입 융자금 대출자들의 파산과 은행들의 부분적인 손실 정도로 끝났을 수도 있었을 금융 위기가 오늘날과 같은 장기에 걸친 대침체의 상황으로까지 악화된 데에는, 저자들이 레버드 로스(levered losses)라고 부르는 일련의 누적적인 요인들이 작용했다.
레버드 로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채 축소 노력이 경제 전체적으로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을 지칭한다. 미국 주택 시장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불거지는 과정에서 과도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던 가계들이 급격하게 소비를 줄였고, 이것은 다시 비금융 기업들의 판매 감소와 이윤율 하락을 가져왔다.
이에 덧붙여 은행들의 무분별한 주택 압류(foreclosure)와 헐값 판매(fire sales) 시도가 주택 가격의 추가적인 하락을 가져오고, 이것이 다시 경제 내의 총수요를 감소시켜 대침체라고 불리는 현재의 상황을 야기했다.
이 책의 2부("거품의 형성", 6장에서 8장까지)에서 미안과 수피는 분석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 2000년대 초반부터 왜, 어떻게 미국 주택 시장에서 거품이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저자들이 특히 주안점을 두는 것은 급격한 신용 팽창과 이에 따른 주택 구입 융자금 대출 붐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이다.
이와 관련해서 저자들은 우선 1990년대 말 동아시아 외환 위기 이후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취했던 외환 보유고 증대 노력이 결과적으로 미국 금융 시장의 유동성 증대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덧붙여 저자들은 미국 금융 시장의 규제 완화로 인해 민간 금융 기관들이 부실화될 가능성이 높은 주택 담보 증권(mortgage-backed securities, MBS)을 앞다투어 발행하고 판매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결과 주택 시장 내의 유동성이 더욱 증대하고 신용 공급이 확대되었으며 이것이 약탈적 대출 행위와 맞물려 주택 시장의 거품과 투기 및 거품의 붕괴에 따른 금융 위기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 3부("악순환의 고리 끊기", 9장에서 12장까지)는 과도한 부채로 인해 발생한 심각한 경기 침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리고 과연 정부 차원에서 어떠한 정책을 취했어야 했는지를 논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저자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미안과 수피는 대침체를 야기한 과도한 부채와 부채 축소 노력에서 비롯된 수요 감축 문제를 대규모의 신속한 채무 계약 재조정(부채 원금 탕감)을 통해서 해결하는 게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금융 시스템 전반을 경직적인 부채 위주의 금융 계약이 아니라 미래 자산의 수익과 손실을 채권자와 채무자가 적절하게 공유하는 방식의 금융 계약이 지배적인 형태로 바꾸는 것, 말하자면 주식 형태의 금융 계약이 지배적인 계약 형태로 자리 잡는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채무 계약의 경직성과 위험의 비대칭성
이제 책의 순서를 따라가면서 몇 가지 중요한 쟁점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미안과 수피는 "채무자의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는 경직적인 채무 계약"(5쪽)이 갖는 "가혹함"(6쪽)과 위험성을 줄곧 강조한다. "부채의 가장 큰 특징은 자산 가격의 하락으로 인한 손실을 채무자가 가장 먼저 져야 한다"(34∼35쪽)는 데 있다. 대부자가 우선 청구권을 갖는 반면, 대출자-채무자는 후순위 청구권을 갖게 됨에 따라 자산 가격이 하락할 때 모든 손실을 채무자가 떠안게 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2007∼2008년 미국 부동산 시장에서 발생한 문제는 주택 구입 융자금 대출이라는 채무 계약이 갖는 이 같은 경직된 성격에서 기인한 바 크다. 금융 위기가 불거져 나왔을 때 많은 수의 미국인들이 집값보다 더 높은 모기지 대출 부담을 끌어안고 깡통 주택에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모기지 대출금을 연체한 사람들에 대해서 은행들은 무분별하게 주택 압류 처분을 단행했고, 그렇게 압류된 집들은 시장에 투매되어 집값을 더욱 끌어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44∼50쪽).
미안과 수피는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과 같은 금융 시장의 충격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가계 소비 지출의 감소와 기업 투자의 정체 현상이 나타났다는 점에 착안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 전체의 카운티들을 집값 폭락으로 인한 순자산 감소 정도에 따라 크게 5개 집단으로 나누고, 이 카운티별 소비 지출의 감소 폭을 살펴보고 있다. 그 결과 급격한 금융 시장 충격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인 2007년 1분기부터 집값이 하락한 지역에서 급격한 소비 지출 감소 현상이 나타났으며, 그 편차는 2009년에 접어들어 더욱 큰 폭으로 확대되었다(58∼61쪽).
미안과 수피는 이 같은 지역별 편차에 대한 고려 이외에도 주택 가격의 하락에 따른 소비 지출의 변화를 한계 소비 성향이 서로 다른 가계를 비교하면서 분석하고 있다. 그들은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과 같은 급격한 금융 시장 충격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이전부터, 소득이 낮고 가계 부채가 많았으며 따라서 한계 소비 성향이 높은 가계들이 급격하게 소비를 줄이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기업들은 생산 가동률과 설비 투자를 줄이고 노동 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65∼68쪽). 저자들이 보기에 이것이 바로 금융 충격의 뒤를 이어 실물 경제의 대침체가 나타난 근본 원인이다.
물론 미안과 수피의 이와 같은 진단은 전혀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케인스가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이하 <일반 이론>)에서 이미 언급했던, 대부자와 대출자 간의 비대칭적 위험 인식과 이에 따른 비경제 상황은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부채의 경직성과 위험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더불어 케인스의 논의를 따르는 포스트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 가운데 가령 하이먼 민스키는 경기 순환 국면에서 특정 경제 주체(가계, 기업, 정부)들의 채무 상태(헤지 금융, 투기 금융 그리고 폰지 금융이라고 불리는 금융상의 지위)가 어떻게 동적으로 바뀌는지, 그리고 이들 채무 계약에 대한 이행 여부가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과 경기 순환의 진폭을 결정하는 중심적인 변수가 될 수 있는지를 선구적으로 논의한 바 있다.
또한, 자산 가격의 초반 하락이 자산 투매를 낳고 이것이 자산 가격을 더욱 끌어내려 채무 불이행을 증대시키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이미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국면에서 어빙 피셔가 선구적으로 분석한 바 있는 부채 디플레이션(debt deflation)이다.
신고전파 모델 대 레버드 로스 이론
미안과 수피가 보기에 경제학 영역에서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군림하고 있는 신고전파 경제학 모델들은 부채 문제의 심각성과 이로부터 발생될 수 있는 경기 순환 및 침체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단일한 생산 함수와 효용 함수를 지닌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경제 주체를 전제로 해서 거시 경제 모델을 세우는데, 이 모델은 희소한 자원들을 효과적으로 결합해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문제들을 다룰 뿐 수요가 생산량의 규모와 고용량을 결정하는 데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는지 고려하지 않는다.
만약 생산량의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다면, 그들은 암묵적으로 생산에 영향을 끼치는 내재적 또는 외재적 기술적 요건들의 변화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저자들이 각종 통계 자료들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한 중요한 사실, 즉 과도한 부채와 부채의 청산이 급격한 소비 축소를 낳고 이것이 금융 위기 이후의 대침체를 야기한 핵심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신고전파 주류 경제학 모델은 설명하지 못한다(73∼76쪽).
이에 대한 대안으로 미안과 수피가 제시하는 게 바로 레버드 로스라는 분석틀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채무 차입과 채무 변제 계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중층화된 경제적 손실을 지칭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개별적인 차원에서는 합리적일지 모르는 행위들이 경제 전체적으로 비경제를 야기하는 상황인데, 저자들이 보기에 그 근저에는 부채 계약의 경직성과 손실 책임의 비대칭성이라고 하는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레버드 로스라는 분석틀은 이질적인 경제 주체들을 가정한다. 그들은 신고전파 경제학 모델이 가정하는 것과는 달리 단일한 효용 함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경제 행위자들은 채무자와 채권자로 구성되어 있고, 채무자들이 내는 빚의 규모와 만기일 구성도 서로 다르다. 더욱이 이 모델에서 채무를 많이 진 사람들은 자산 가격(주택 가격)이 하락하면 이에 대응해 급격하게 소비를 축소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더불어 은행들의 주택 압류로 인한 집값 하락은 채무자들의 한계 소비 성향 축소를 더욱 증폭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76∼80쪽).
미안과 수피는 이처럼 레버드 로스라는 프레임을 적용했을 때 왜 금융 위기 발생 이전 시점부터 가계 소비와 기업 투자가 급속하게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는지, 그리고 금융 위기 이후 왜 심각한 경기 침체가 발생했고, 더 나아가 그 대침체가 정부의 수많은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도한 유동성 공급의 핵심 원인, 민간 모기지 담보 증권의 발행
2000년대 초반 소위 닷컴 버블 이후 2007∼2008년의 금융 위기가 터져 나오기 직전까지 미국 경제는 급속한 신용 팽창과 이에 따른 주택 구입 융자금 대출 붐, 그리고 한계 대출자에 대한 대출 증가 현상을 경험했다.
예전에는 신용 등급이 낮아서 융자금을 전혀 빌릴 수 없었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부터 민간 은행과 비은행 금융 기관들로부터 융자금을 얻기 시작했고(111∼120쪽), 2003년부터 2008년 사이 전미 평균 주택 가격이 두 배나 오를 정도로, 금융 기관들의 경쟁적인 주택 구입 융자금 대부는 주택 가격의 추가적인 상승과 투기를 부채질했다(120∼125쪽). 더욱이 이 집값 상승은 기존 주택 소유자의 주택을 담보로 한 대출을 부추겼고, 특히 신용 등급이 낮은 사람들의 주택 담보 대출이 크게 증가했다(125∼133쪽).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일까? 저자들은 우선 2000년대 중반 미국 부동산 시장에서 발생한 급격한 신용 팽창의 배후에는 1990년대 말 동아시아 외환 위기 이후에 발생한 일들의 중첩된 결과가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동아시아 외환 위기 이후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해 자국의 금융 시장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충격에 대비하려고 해왔다. 그리고 동아시아 국가들의 이런 대규모 국채 매입은 다시 미국 금융 시장에 엄청난 유동성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138쪽).
그러나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과도하게 저축을 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미국 국채를 과도하게 구입했기 때문에 미국 금융 시장에 유동성이 과도하게 공급되었고 이것이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 진부한 주장은, 금융 위기 당시 그린스펀-버냉키 연준 총재와 폴슨-가이드너 재무장관 등에 의해서 줄곧 반복되었던 면피용 주장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국내 제도상의 변화가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들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금융 시장 탈규제와 자유화 정책 덕분에 민간 금융 기관들이 앞다투어 주택 담보 증권을 발행하고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애초 주택 담보 증권은 연방주택청이 설립한 주택 구입 융자 지원 관련 준정부 기관(GSEs)이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하던 증권에서 비롯되었다. 파니매와 프레디 맥과 같은 준정부 기관들은 개인과 가계에 주택 구입 융자금을 대출해준 민간 은행들과 비은행 민간 금융 회사들로부터 주택 구입 융자금 채무 권한을 사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주택 담보 증권을 발행해왔다.
이처럼 애초 준정부 기관들이 민간 은행들과 비은행 금융 회사들로부터 주택 구입 융자금이라는 채권 또는 미래의 현금 흐름 수취 권한을 구입한 것은, 주택 시장에서 필요한 자금 흐름을 원활하게 돕고 이를 통해 민간의 자가 주택 소유 비율을 높인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금융 시장의 탈규제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민간 금융 회사들의 증권화는 미국 주택 시장의 현금 흐름과 위험의 할당 및 분산의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적어도 준정부 기관들의 증권화가 주택 구입 자금 대출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안에는 "기초 자산이 되는 모기지 대출들은 미리 정해 놓은 기준을 충족시켜야" 했고, 이 때문에 이 자산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주택 담보 채권의 신용 위험은 적절하게 통제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규제를 받지 않은 민간 부문 발행 증권화(private label securitization)"는 "비우량, 부적격 대출을 위한 새로운 시장"을 열게 되었다. "2002년부터 2005년 사이 민간 부문 증권화는 급증했고, 전체 주택 저당 증권 발행액에서 민간 부문 증권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2년에 20퍼센트 미만이었으나 2006년에는 50퍼센트"(142쪽)가 넘을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금융 위기 이전 미국의 주요 투자은행들과 민간 상업 은행의 대안 투자(alternative investment) 부서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서로 다른 신용 위험을 지닌 주택 구입 융자금을 한데 묶어 2차, 3차 파생 금융 상품을 만들었다. AIG와 같은 거대 보험회사들은 이 금융 상품의 디폴트가 생길 경우 손실금을 상환해 준다면서 신용 부도 스와프(credit default swap)라는 일종의 보험 상품을 팔면서 이득을 챙겼다. 게다가 전 세계에서 발행되는 채권의 90퍼센트 이상에 신용 등급을 매긴다는 미국의 3대 신용 평가 회사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이 파생 금융 상품들에 최고의 신용 등급(triple As)을 매겨 주었고, 그 대가로 두둑하게 뒷돈을 챙겼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여름, 이런 관행에서 비롯된 거의 모든 문제들이 극적인 형태의 금융 위기로 드러났다.
금융 위기 후 효과적인 정책 대안 - 직접적인 부채 탕감
2007∼2008년 터져 나온 금융 위기 국면에서 미국 연방 정부 정책 결정자들은, 통상의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이례적인 재정 및 금융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비전통적 유동성 정책의 이면에는 은행 산업을 구제하면 자동적으로 지급 결제와 자금 중개 및 신용 대출 기능이 회복되어 경제 전체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안과 수피는 금융 위기 이후 발생한 장기 경기 침체는 "부채를 진 가계들이 지출을 급격하게 줄"이고, 이것이 "기업들의 매출" 감소로 나타났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고 거듭 강조한다(187쪽). 그런데 대침체의 근본 원인이 유효 수요의 부족에서 비롯된 구조적인 문제라면, 은행 자금 중개 기능을 보조한다고 해서 문제가 금방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저자들은 미국 정책 결정 당국이 가계의 과도한 부채를 줄이거나 재조정하기 위한 직접적인 조치들을 취했어야 했다고 강조한다(197∼199쪽).
예를 들어, 주택 구입 융자금 전액 탕감과 같은 정책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미안과 수피는 "(융자) 원금 탕감은 주택 시장 붕괴에 따른 손실을 고르게 부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205쪽)고 주장한다. 특히 "채권자에 비해 채무자가 소득 수준이 낮고 레버리지가 높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손실을 보다 공평하게 나누는 것은 한계 소비 성향이 낮은 계층으로부터 높은 계층으로 부를 이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이는 경제 전체의 수요를 증가시키는"(205쪽)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
물론 주택 담보 채권의 발행 과정 자체가 주택 구입 융자금 상환과 재조정을 복잡하게 만들어 온 것이 사실이다. 주택 담보 채권의 발행자와 판매자가 다르고, 채권 보유자의 이익과 이 채권 발행의 기초가 된 주택 구입 융자금 채무자들의 상충하는 이익을 전부 다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안과 수피는 "[주택 융자금 상환 및 탕감에 관한] 효율적인 재협상을 위해 모기지 관리 기관을 협상 과정에서 제외하고, 그 대신 정부가 임명한 신탁 관리자에게 증권화 풀에 들어 있는 모기지들에 대한 재협상 권한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212쪽). "이런 방식의 개입을 통해 채무 부담을 경감해 주는 효율적인 모기지 재협상이 일어날 수 있으며 주택 소유자, 모기지 투자자 모두 압류에 비해 이득을 얻을 수 있으며 심지어 납세자의 희생도 크게 따르지 않는다."(213쪽)
또한 저자들은 "파산 법원의 판사에게 모기지 채무를 재조정하여 상환 부담을 낮출 수 있는 권한을 허용하자"(213쪽)는 제안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한다. 다시 말해, 미국의 현행 파산법 13장을 수정하여 파산 법원 판사에게 주택 구입 융자금 재조정 및 탕감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부여하자는 제안이다.
금융 시스템 개혁 방향 - 위험 분담과 자본 이득의 공유를 금융 계약의 핵심으로
이와 같은 금융 위기 국면의 정책 처방과는 별도로, 미안과 수피는 현재의 금융 시스템을 채무 계약의 경직성을 줄이는 방식으로 장기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앞으로 미국 금융 시장에서 맺어지는 금융 "계약은 하방 위험(downside risk)이 발생했을 때 손실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규정해야 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그들은 금융 계약 내용이 "경제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 되도록 하고, "금융 시스템"에 대한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마디로, 금융 계약의 지배적인 형태가 "부채"(debts)에서 "주식"(equity)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247쪽).
미안과 수피는 더 구체적인 예로 주택 구입 융자금과 같은 장기 금융 계약의 경우, "책임 분담 모기지(shared-responsibility mortgage)"를 대안적인 계약 형태로 떠올려 볼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 모기지 상품의 특징은 "하방 위험 보호 조항"을 계약 내용에 담고 있어서 "채권자가 채무자를 하방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 상품을 통해 구입한 주택의 가격이 오르면 "자본 이득 공유 조항"을 통해서 "채무자는 가격 상승으로 인한 이득의 5퍼센트를 채권자에게 지불한다는 내용"을 담을 수 있다(250쪽).
미안과 수피는 책임 분담 모기지와 같은 사례가 점차 확대되면 미국 금융 위기와 대침체의 원인이 되었던 레버드 로스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금융 계약에 내재된 "하방 위험 보호 조항이 총수요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자본 이득 공유 조항은 채권자에게 책임 분담 모기지 계약을 맺을 동기를 부여"(255쪽)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아쉬움
이 책에 실린 진단과 각종 주장들은 실증적인 차원에서 아주 미세하게 분석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저자들의 진단과 정책 처방은 아무런 논리적 비약 없이 일관되게 맞닿아 있다. 이 책이 지닌 강력한 장점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서평자는 주식 성격의 장기 금융 계약 위주로 금융 거래의 비중을 늘리자는 제안이 현재와 같은 복잡화된 금융 시장 제도들과 어떻게 효과적으로 연계될 수 있을지 판단하기 힘들다.
미안과 수피도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금융 위기는 아무런 규제 없이 작동하던 광범위한 비은행 2차 금융 기관들의 존재, 무분별한 민간 자산 유동화 관행, 얽히고설킨 파생 금융 상품의 범람 때문에 급속하게 미국의 실물 경제와 전 세계 경제로 파급되고 확산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미국식 금융 시장을 특징짓는 이 같은 문제들을 그대로 두고 주식 성격의 금융 상품 비중을 늘린다는 제안이 실현 가능한지 모를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서평자는 최소한 민간의 자산 유동화와 2∼3차 파생 금융 상품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관철되어 금융 계약의 성격을 획기적으로 단순화하는 게 먼저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한 비은행 금융 기관들의 과도한 레버리지와 이에 따른 경기 순환 증폭적 성격은, 설사 주식 성격의 장기 금융 상품의 비중이 획기적으로 늘어난다고 해도, 단기 금융 자본 조달이 민간에 의탁되는 현재와 같은 관행이 지속되는 한, 어쩌면 영원히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점에서 서평자는 미안과 수피가 시야를 조금 더 넓혀 자신들의 주장이 다른 경제학 이론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다른 이론적 패러다임과 맺은 관계를 분명히 하는 과정에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측면에서 서평자는 저자들의 정책 제안이 큰 틀에서는 포스트 케인스주의 분석틀에 매우 잘 부합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미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부채의 경직성으로 인한 총수요의 감축과 이에 따른 경기 침체에 관한 논의는 케인스가 <일반 이론>에서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 그리고 많은 포스트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 특히 하이먼 민스키가 일관되게 강조했던 메시지였다.
물론 케인스-민스키의 시각에서 보면, 호황기의 부채 증가 현상과 불황기의 급격한 부채 청산 노력이라는 사이클은 자본주의적 금융 시스템에 내생적인 것이다. 따라서 민스키의 시각에서 보면, 책임 분담 모기지와 같은, 자산 가격의 등락에 따르는 손실과 수익을 채권자와 채무자가 분담하는 금융 상품의 비중을 늘린다고 해도, 자본주의에 내생적인 주기적인 금융 위기는 불가피할 것이다.
또한 한계 소비 성향이 높은 가계가 소비를 급격하게 줄이지 않게끔 정책적으로 지원한다는 미안과 수피의 제안, 따라서 부채 탕감 방안을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저자들의 모습도, 비록 저자들이 쉽게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케인스와 특히 미하우 칼레츠키와 같은 포스트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에게는 너무나 상식적인 정책 제안 가운데 하나였다.
바로 이 때문에 케인스-칼레츠키는 유연 임금(flexible wages)에 대비된 안정 소득제(stable incomes)를 완전 고용을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정부 정책 가운데 하나로 제시했고, 투자의 사회화(socialization of investment)와 금융 자산가 계급의 안락사(euthanasia of rentiers)라는 이름으로 주요 산업 부분과 금융 시스템을 정부 통제 하에 둘 것을 제안했다.
다만 칼레츠키의 입장에서는 주식과 같은 금융 상품의 비중을 늘리는 게 해법이 아니라 한계 소비 성향이 높은 노동 계급의 임금 소득을 지속적으로 높이는 게 가장 중요한 해법이다. 그는 이렇게 증대된 소득이 국내 유효 수요의 하락을 막고 이것이 다시 거시 경제를 안정화하는 메커니즘이 되는 정책 패키지를 선호할 것이다.
결국 서평자는 주식 성격의 금융 계약이 차지하는 비중을 늘리자는 저자들의 참신한 주장이 제대로 빛을 발휘하려면 금융 시장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통해서 내재적 불안정성을 줄이고 임금 소득의 꾸준한 증대를 통해 거시 경제의 안정성을 도모한다는 민스키, 칼레츠키 같은 사람들의 주장들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들의 진단과 처방이 아쉽게도 일국적인 맥락에서만 내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저자들이 말한 대로 부채의 경직성과 위험성은 대내 부채건 대외 부채건 모두 공통된 속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높은 단기 수익률을 쫓아 실시간으로 국제 금융 시장을 넘나드는 금융 자본과 이 단기 해외 부채가 야기하는 외환 시장의 불안정성은 1990년대 말 동아시아 외환 위기를 경험한 바 있는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자들도 동의할 것처럼 아직까지 국제 금융 시장에서는 책임 분담 모기지와 같은 부채의 경직성을 탈피한 금융 계약 수단을 찾기 힘들고, 외환 위기가 발생했을 때 채권자와 채무자에게 공평하게 손실 책임을 부과하는 국제적 거버넌스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남미와 아시아 국가들에서 외환 위기가 터질 때마다 항상 긴축 위주의 재정 및 금융 정책을 강요하고, 이 때문에 해당 국가들의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국제통화기금의 관행이 숱하게 비판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미국적인 맥락에서 교훈을 찾고 해결책을 고민하고 있는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지극히 제한된 의미만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때문에 서평자는 외환 금융 시장에 대한 중앙은행의 강력한 모니터링과 통제, 민간 기업과 가계가 맺는 해외 단기 채무에 대한 총량적 규제, 그리고 외환 시장의 불안정성이 증폭되는 국면에서 강력한 자본 통제와 같은 전통적인 좌파 케인스주의자들의 정책 제안이 한국 사회에서는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제안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서 직접 차용해 볼 수 있는 금융 계약상의 시사점들이 어떤 게 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평자로서는 이 책이 직접적으로 시사하는 바를 찾기 힘들다.
물론 주택 구입용 장기 융자 금융 상품을 개발하거나 금융 거래 손실을 처리하는 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미안과 수피가 강조하는 손실 및 책임 분담의 원리는 매우 중요한 원리다. 그렇지만 이 원리는 현재 한국의 행정부가 취하는 거시 경제 정책 결정과 집행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무기력한 공론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2014년 현재 한국 사회는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라는 기본적 게임 룰이 도처에서 무너지는 상황에 처해 있다. 선거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 게임 룰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은 집단이 부정한 방법으로 행정 권력을 장악했고, 그 집단이 이해 당사자들의 직간접적인 심의와 조정도 거치지 않고 거대 경제권과 무분별하게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같은 집단이 의료 서비스 시장을 사영화하는 등 광폭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몰아붙이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부동산 투기를 조장해서 명목 경제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위험천만한 정책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이것에 대해서 그 어떤 효과적인 저항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 사회의 정책 결정 맥락을 고려할 때 저자들이 강조하는 금융 계약상의 손실 및 책임 분담의 원리는 너무나 고매한 이상처럼 들린다. 금융 계약상의 손실과 책임 분담의 원리를 강화한다는 원리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어쩌면 한국 사회는 자유민주주의 법치 질서를 먼저 확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번역상의 문제에 관한 의견300쪽이 넘는 책을 매우 쉽게 읽을 수 있었을 만큼, 이 책은 서평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훌륭한 번역서라고 생각된다. 다만 아래의 번역 용어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고려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1. 독립 지출(autonomous spending) (19쪽). 소득의 변화와 상관없이 집행되는 가계의 소비 지출. 가계의 총 소비 지출은 이 지출분과 소득이 변화함에 따라 함께 변하는 지출분의 합계. 후자는 가계의 한계 소비 성향과 그 가계의 수입을 곱한 것. 가계의 소득 변화에서 독립된 지출이라는 측면에서 독립 지출이 옳은 번역인 것 같으나, 자동 지출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는 생각도 든다.2. 야수적 충동(animal spirits). 문자 그대로 '동물적 감각'이라고 번역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말은 원래 <일반 이론>에서 케인스가 통계적으로 확정 가능하지 않은 위험과 그 위험 아래에서 내려지는 기업가들의 투자 결정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했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 언제 얼마만큼 투자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업가들의 동물적 감각이라고 번역하는 게 훨씬 더 적절한 번역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야수적 충동은 피상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뉘앙스가 전혀 다른 것은 아닌지.3. 미국 주택도시개발부(140쪽, 197쪽, 215쪽)는 어느 부서를 지칭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원어를 병기해 주었더라면 그것이 개별 주 또는 시 정부 담당 부서인지 아니면 연방 정부 부처인지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연방주택금융청(203쪽)도 마찬가지다. 각 연방 정부 부서가 각각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4. 이 책에서 '정부 지원 기관'(GSEs, government-sponsored enterprises)(140쪽, 141쪽, 142쪽, 182쪽, 203∼204쪽 등)으로 번역된 준정부 기관은 가계의 자가 주택 소유(home ownership)를 돕기 위해 연방주택청(Federal Housing Administration) 산하에 설립된 주택 구입 융자금 대출을 전문으로 하는 준정부 기관을 뜻한다. 대표적으로는 파니매(Fannie Mae)와 프레디 맥(Freddie Mac)이 있다. 따라서 '정부 지원 기관'이라는 번역어보다는 '(주택 융자 전문) 준정부 기관'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이 때문에 이 서평에서도 '준정부 기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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