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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사회에서 '어린이 참정권'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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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사회에서 '어린이 참정권'이 필요한 이유 [김기협의 자본주의 이후]<8>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정치를 멈춰야 한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자연과의 관계에서 긴장감을 잃은 결과 지속 가능성이 없는 자본주의 체제로 세상을 바꿔 온 것이 이제 한계에 이르러 전면적인 체제 변화를 필요로 하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이 문명사 공부를 통해 내가 얻은 관점이다. 그 관점 위에서 떠올린 한국사회의 몇 가지 과제들에 대한 생각을 지금까지 적었다.

이 생각 중에는 일반 독자들에게 엉뚱하게 보이는 것이 많을 것이다. 내가 소개하는 관점 중에 우리에게 오랫동안 익숙하던 '세상의 이치'를 벗어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끝으로 참정권에 관한 생각을 적는 것은, 엉뚱하게 보이는 주장도 선입견 없이 따져보면 타당성을 생각할 여지가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적당한 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린이 참정권' 생각을 처음 떠올린 것은 2012년 10월, <해방일기> 작업 중의 일이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1947년 5월 제정한 보통선거법에서 선거권을 만 25세 이상으로 규정한 것을 보면서 선거권의 연령 제한이 보통선거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위키피디아>를 들춰보고 '데미니 투표권'이란 이름의 아동 투표권 운동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우리 사회의 경우 아동 투표권 도입은 미성년자를 자녀로 둔 30대와 40대의 선거권을 대폭 늘려주는 결과가 될 것이니, 그 연령층에게 인기 없는 정당의 '결사 반대'가 예상된다. 그러나 아동 투표권이 실행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갓난아이의 부모들이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이의 장래를 위한 선택을 생각하는 모습. 초등학생의 부모들이 아이 자신의 선택을 분명히 해주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들어갈 때 민주주의의 모습이 더 완벽해질 것이다.

그때는 어린이 참정권이 있으면 없는 것보다 좋겠다는 정도 생각이었고, 이런 점도 생각할 여지가 있지 않느냐는 글 하나 쓴 후 나도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러다 지난 봄 세월호 침몰과 그 뒤 이어지는 상황을 보며 절실한 생각이 들었다. 국가의 정책 여하가 어린이들의 행복은 물론 생명까지도 좌우하는 일이 많은데, 그 '당사자'가 미성년이라 해서 정책 결정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그래서 참정권에 관해 더 알아보고 더 생각해 보니 어린이 참정권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두들 민주주의를 외치는 세상에서 그렇게 필수적인 제도를 지금까지 내버려두고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근대민주주의의 역사적 조건에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민 주권'의 원리도 '보통 선거'의 원칙도 미성년자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 선거 연령의 제한은 현실정치의 민주주의가 미숙하기 때문에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결함이다.

백여 년 전 여성 참정권은 지금 어린이 참정권이 엉뚱하게 보이는 것 못지않게 엉뚱하게 보이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여성을 배제한 '보통 선거'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여성 참정권이 겪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어린이 참정권이 걸어갈 길을 내다볼 수 있다.

여권 운동과 평화 운동의 결합을 보여준 자네트 랭킨

'보통 선거'란 성별, 종족, 신분,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공평한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이념이다. 그런데 왜 '연령'이란 기준만은 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한단 말인가? 미성년자는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19세기 중엽 '보통 선거권'이 처음 거론될 때는 '연령'만이 아니라 '성별'의 기준도 무시되었다. 그 전에는 심지어 신분과 재산으로 투표권을 제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했다. 미국 독립전쟁 때의 널리 알려진 구호 "대표 없이 세금 없다!"를 생각해 보라. 참정권을 납세 의무와 연계한 것이니, 세금 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선거권도 없다는 뜻이었다.

여성 참정권이 널리 확립된 것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였다. 1913년 노르웨이에서 주권국가 최초로 채택될 때까지 여성참정권은 식민지나 지방정부에서만 실현되고 있었다. 덴마크와 아이슬란드(1915), 네덜란드와 소련(1917),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와 스웨덴(1918), 독일과 룩셈부르크(1919), 그리고 미국(1920)이 그 뒤를 따랐다. 민주주의의 본산인 영국과 프랑스에는 1928년과 1944년에야 도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여성참정권이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제도의 표준이 되었고, 1952년에는 유엔총회에서 '여성참정권 협약'이 채택되기에 이른다.

20세기 전반기에, 특히 세계 대전을 계기로 여성참정권이 확립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함께 작용했다. 가장 많이 지적되어 온 이유는 여성의 전쟁 노력 동원을 위해 참정권 확대의 약속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가 식민지의 자치수준 향상이나 전쟁 후의 독립을 약속하는 데도 작용했다. 1948년 2월 혁명 후 프랑스 제2공화국에서 평민층까지 참정권을 확장한 최초의 '보통선거' 도입의 이유도 이와 비슷한 데 있었다.

또 하나 큰 이유가 여권 운동과 평화 운동의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까지 여성 참정권 운동과 전쟁 반대 운동은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다. 당장 벌어진 전쟁만 끝나면 다시는 전쟁을 겪지 않을 평화 정책으로 나아가겠다는 정부의 약속이 여성 참정권 보장에 곁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여권 운동과 평화 운동 사이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람이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의원 자네트 랭킨(1880-1973)이었다.

▲자네트 랭킨.
랭킨은 미국에 여성 참정권이 확립되기 4년 전인 1916년 몬태나에서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그는 하원 의원으로서 별로 할 수 없는 일이 없었다. 취임 직후의 세계대전 참전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것이 치명적 악재였다. 당시 반대표를 던진 의원이 49명이었는데, 모두 비애국자로 몰려 정치적으로 매장되었다. 하물며 유일한 여성의원 랭킨은 의원활동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배척을 당했다.

여권운동계에서는 랭킨의 참전 반대가 여권 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비판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랭킨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항변했다. "전쟁에 '안 돼요.' 말할 기회를 가진 첫 여성으로서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감을 느꼈습니다."

1940년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또 벌어진 상황에서 미국인들이 참전 여부를 놓고 첨예한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랭킨은 참전 반대를 공약으로 다시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1년 후 진주만 폭격 뒤의 참전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랭킨 하나뿐이었다. 만장일치를 위해 뜻을 바꿔달라고 가까운 동료들이 부탁할 때 랭킨은 이렇게 대답했다. "여성인 나는 전쟁터에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리로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정치인으로서 랭킨은 다시 매장되고 말았으나 20여 년 후 반전 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87세의 나이로 다시 의사당 앞에 선 것이 1968년 1월 15일의 일. '랭킨 부대'(Jeannette Rankin Brigade)를 자칭하는 5000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하원 의장 존 매코맥에게 '평화 청원'을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20세기 여성이 투표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

20세기 전반부에 여성 참정권이 확립된 또 하나의 이유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있었다. 19세기 말까지 유럽에는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생활을 하는 여성의 수가 극히 적었다. 보통선거의 원리는 가장들이 투표권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볼 수 있었다. 여성의 의사는 남편의 투표권을 통해 표출될 만큼 표출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여성 참정권 운동에 대한 가장 큰 반대 이유는 전통적 가정 질서에 대한 위협에 있었다. 아내가 남편과 별도의 투표권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가 종래의 바람직한 부부관계를 해치는 것으로 흔히 인식되었다. 여권 운동가들은 공산주의자와 함께 파괴적 존재로 미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못 생기고 성질 나쁜 부적응자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19세기 말 이래 여성 참정권이 성장한 경로를 보면 식민지나 주변부가 앞장선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90년대에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식민지에서 먼저 채택되기 시작하고 뒤이어 핀란드(1907, 당시에는 러시아 예하의 대공국이었음), 노르웨이 등 주변부 국가들로 이어진 까닭이 기존 사회질서의 저항이 비교적 약한 데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미국에서도 여성 참정권을 먼저 채택한 지방정부는 와이오밍(1869), 유타(1870) 등 준주(territory, 새로 획득하여 아직 주로 만들지 못한 지역의 행정조직)였다.

식민지와 주변부에서는 본국이나 중심부에 비해 가족구조 등 사회경제적 변화가 먼저 진행되고 있었다. 1860년대 와이오밍이나 유타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새로운 땅의 개간을 위해, 황금을 찾아, 철도건설에 종사하기 위해 서쪽으로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가정을 갖지 않은 남성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그런 사람들은 투표나 선거에서 지역사회의 안정보다 투기 기회의 확대를 위해 표를 던지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참정권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사람들의 입장이 과잉대표되는 데 대해 여성뿐 아니라 가정을 가진 남성도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본국이나 중심부에 비해 근대문명이 새로 이식되는 개척지에서는 전통의 저항이 약했기 때문에 개인주의의 확산도 더 빨랐다. 정상적 가족생활이 이뤄지는 가정 안에서도 가부장적 권위가 전반적으로 약화되었다. 변동이 많은 생활조건 속에서 여성의 역할이 요리와 뜨개질에 국한될 수 없는 상황을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변화들을 본국과 중심부에서도 뒤따라 겪게 되었다. 성인 남성 대다수가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주부들은 전에는 남자들이 맡던 많은 일을 맡게 되었다. 사회의 운영방향 결정을 위해 의견을 내는 일도 그중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는 여성 참정권을 그 10여 년 전처럼 엉뚱한 생각으로 보는 사회가 별로 없었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정치를 멈춰야 한다

백여 년 전 여성 참정권 도입을 주장한 사람들은 물론 '만인 평등'의 이념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 실제 도입 과정을 살펴보면 이념보다 현실조건의 변화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만인 평등'은 18세기 중엽 이후 계몽사상의 핵심 명제였고 미국독립전쟁과 프랑스대혁명의 구호였지만, 독립한 미국과 프랑스 제1공화국의 참정권에는 신분과 재산의 제한이 있었다. 그때의 '만인'은 후세의 '만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개인주의가 19세기를 휩쓸었지만 여성은 '개인'이 아니었다. 여성은 가정의 부속물로서만 가치를 인정받는 존재였다. 개인주의의 시대에 '개인'이 아니었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총체적 모순을 드러낼 때 여성의 역할이 부각되었다. 그 역할은 양면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모순된 체제를 연장하기 위해 여성의 동원이 필요했고, 또 한편으로는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평화운동의 주체로 나타난 것이다.

여성 참정권의 양면성은 지금까지도 여성의 정치 활동에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으로 살벌한 정글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줄 희망을 풍기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남성 정치인이 따라오지 못할 불통의 '철의 여인'으로 체제의 모순을 굳건하게 지키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든 여성의 정치적 역할은 불가결한 것이 되어있다.

여성의 정치적 역할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했던 것처럼 이제 말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린이의 정치적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백여 년 전까지 여성이 그랬던 것처럼 어린이는 지금까지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정치적 입장을 가장이 대표해 주는 것이 충분하다고 여겨진 것처럼, 어린이의 정치적 입장은 부모가 대표해 주는 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여겨져 왔다.

여성이 자기 입장을 스스로 내놓을 필요가 왜 생겼는지 생각해 보자. 가족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 성인 남성의 비율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는 주민의 대다수가 비슷한 구조의 가정 속에서 비슷한 방식의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산업화의 진척에 따라 가정의 구조도 달라지고 가정 내의 이해관계도 복잡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남성만이 참정권을 가진다면 사회의 안정보다 맹목적 발전만 원하는 주장이 과잉대표되어 파국을 향하게 된다는 사실이 현실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지금 어린이 참정권의 필요성도 '사회의 노령화' 때문에 절실한 것이다. 중앙선거에서나 지방선거에서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당장의 풍요에만 집착하는 세력이 유리한 위치에 서는 까닭이 무엇인가. 30년 후 이 사회의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이 과잉대표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부채 증가 추세를 보라.

나는 근대문명의 지나친 개인주의 풍조를 우리가 겪어온, 그리고 겪고 있는 많은 문제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개인주의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방적 폭주를 멈추고 유기체론과 어울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의 정합성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정합성을 갖추지 못한 개인주의는 모든 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특정 범위의 개인들에게 이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의 정합성을 위해서도 어린이참정권은 꼭 필요한 요소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

어린이 참정권에 대한 생각을 들은 사람들이 흔히 "일리는 있는데…" 수긍하면서도 선뜻 찬성하지 못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직접 투표의 원칙이다. 투표권에 연령제한을 두는 이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성장 과정에 있는 어린이에게 책임 있는 권리 행사를 맡길 수 없다는 데는 합리적 타당성이 있다. 모든 어린이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투표권 행사는 보호자가 대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직접 투표의 원칙은 보통선거의 원리에 비해 부수적인 것이다. 미성년자의 재산권 행사나 학교 선택 등 꼭 필요한 법률적 행위를 보호자가 대행해 주지 않는가? 어린이의 정치적 입장을 직접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아예 무시해버리기보다는 보호자로 하여금 대신 표현하게 하는 것이 어린이 본인을 존중하고 정치의 대표성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더 바람직한 길일 것이다.

직접 투표와 비밀 투표의 원칙은 주권자가 주권 행사에 타인의 압력을 받지 않도록 해주는 방어 장치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 아닌 모든 사람을 '타인'으로 규정해서 일체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 꼭 바람직한 일일까? 미성년자의 투표에 대리투표를 행하는 보호자(부모)의 의견이 본인 의견 대신 나타나는 것이 꼭 잘못된 일일까?

부모 중에 자녀 본인에게 해로운 선택인 줄 알면서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표를 던지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부모는 자녀를 위해 좋은 것이 어느 쪽인지 성심껏 판단해서 그에 따라 투표를 할 것이다. 잘못된 투표는 어떤 완벽한 조건 속에서도 있기 마련이다. 부모의 대리투표와 건강이 안 좋은 노인들의 직접투표 중 어느 쪽에 잘못된 투표가 더 많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잘못된 투표가 더러 있더라도 자격 있는 사람의 모든 투표를 존중하는 것이 보통선거의 원리다.

국가 운영 방법은 어린이까지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당장의 경기 부양만을 위한 '규제 완화'가 노년층의 집중적 지지를 받아 정책으로 채택되고 지금의 어린이들이 수십 년 후에 악화된 환경과 고갈된 자원, 그리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국가를 물려받게 해도 되는 것인가? 어린이들이 가장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재난이 빈발하는 세상을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19세기에 근대국가가 만들어질 때는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복지국가'의 이념이 표준이 되어있다. 복지정책의 핵심 요소인 '기본 소득'에 대한 김종철의 관점은 참정권 문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 기본소득을 단지 새로운 형태의 복지 프로그램으로 간주할 게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원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즉 기본소득을 '시민배당금'으로 정의하자는 거죠. '배당금'이라고 하면, 수급자를 선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의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줄 때 누구는 주고, 누구는 배제한다는 식의 분배는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배당금은 모든 주주의 권리이기 때문에 지급하는 것이니까요. 기본소득도 한 사회, 한 공동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주주'로 간주하는 토대 위에서 시행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게 논리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그렇게 시행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알래스카에서 지난 30년 동안 해온 방식이 바로 그렇습니다. 알래스카에는 '알래스카영구기금'이라는 게 있는데, 그 기금을 이용해서 매년 알래스카 주민 전체에게 일정한 액수의 현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 영구기금은 대부분 알래스카에 있는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생산 및 판매에 의한 수입금입니다. (…)

그런데 알래스카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점은 석유라는 자원을 알래스카 주민 전체의 공유자원으로 인식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구성원 전원에게 배당금으로 고르게 배분해야 한다는 발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래스카가 30년이 넘게 꾸준히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 석유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물론 그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석유자원이 있는 지역, 국가라고 해서 다 알래스카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압니다. ("근대문명의 반생명성, 민낯을 드러내다" <말과 활> 2014. 5-6, 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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