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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맞잡은 남북정상, 신뢰 회복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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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손 맞잡은 남북정상, 신뢰 회복 시작되다 [김기협의 냉전 이후]<66> 북한의 김일성 묘소 참배 요구는 '짜고 치는 고스톱'?
아직도 남한사회에는 북한의 실상이 잘 알려져 있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감추려 드는 문제도 있겠지만, 더 앞서는 문제는 남한정부의 정보 차단 정책이다. '재미동포 아줌마'가 나름대로 북한 실상을 알리려고 애쓰는 것을 '종북 콘서트'로 몰아붙이는 데서 이 정책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신은미 씨가 허위정보를 퍼뜨리는 것이라면 사실과 대조해서 그 거짓을 밝혀야 할 것 아닌가. 사실 여부는 제쳐놓고 '의도'만 문제 삼는 것은 북한 관계 정보를 정부가 독점하던 시절로 돌아간 꼴이다.

벌써 15년이나 되었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교류가 늘어나면서 다양한 분야,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하게 되면서 북한의 실상에 대한 남한사회의 실질적인 이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교류가 막히기 시작해, 7년이 지난 지금은 15년 전으로 되돌아간 감이 있다.

2000년 정상회담은 1953년 정전상태에 들어간 이래 가장 중대한 남북 간 접촉이었고 1945년 분단 이래 관계 전환을 위한 가장 획기적인 계기였다. 이 접촉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55년간의 대결 상태 동안 쌓인 앙금을 정리해야 할 것이 많이 있었다.

정리할 앙금 중에 상징성이 가장 큰 문제 하나가 김일성에 대한 남한 측 태도였다. 김일성은 1946년에서 1994년까지 북한체제를 대표한 인물이었고 북한에 대한 남한의 적개심이 집중된 초점이었다. 죽은 후에도 '영원한 수령'으로 상징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김일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은 북한체제를 대하는 태도를 비쳐 보여주는 문제였다.

김일성 생전에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은 모두 그와의 정상회담을 원했다. 김일성을 대화상대로 인정한 것이고, 그렇다면 북한을 북한 주민을 대표하는 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속마음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남북정상회담이 국내정치에 가져올 이득을 생각해서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만나는 모습. ⓒ연합뉴스

남북정상회담을 원하는 또 하나의 대통령 김대중을 놓고도 북한 측에서는 비슷한 의심을 할 수 있었다. 김일성의 묘소인 금수산기념궁전 방문 여부가 민감한 문제였다. 남한 대통령이 금수산궁전을 방문한다면 북한 지도부는 남한 측의 북한에 대한 존중이 충분하다고 여길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 정부에게는 부담이 큰일이다.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만 표하더라도 분단의 죄인과 한국전쟁의 원흉에 대한 '참배'라며 목청을 높일 세력이 있었다.

6월3일 김대중의 특사로 김정일을 만난 임동원이 이 문제를 타진해봤다.

김정일 위원장의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태도에 적이 안도한 나는 마침내 예민한 문제인 금수산기념궁전 방문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김 위원장의 진의를 탐색하고자 했다.

"북측이 요구하는 대통령의 금수산기념궁전 방문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난 다음에 할 수 있다고 대통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특사인 저는 이 문제를 이미 김용순 비서를 통해 말씀 드렸습니다만, 우리 국민들의 정서를 존중하여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방문 일정을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김 위원장 역시 그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금수산궁전은 반드시 정상회담 전에 방문해주셔야 합니다. 왜 남쪽 국민의 정서만 생각합니까? 우리 북쪽 인민들의 정서는 왜 안 중요합니까? 인민을 위해서나 상주인 나를 위해서도 상가에 와서 예의를 표하는 것쯤은 조선의 오랜 풍습이요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남과 북이 모두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다는 점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안 된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되는 방안을 좀 강구해봅시다. 아예 오시기 전에 금수산궁전을 방문한다고 공개하여 야당도 설득하고 국민도 납득시키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때까지 평양 방문을 연기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을 겁니다." (<피스메이커> 63쪽)

김정일의 말이 이치에 맞다. 제한된 범위의 책임과 권한을 가진 관리들끼리 만나 업무를 처리하는 자리가 아니라 국민을 대표하는 국가원수들이 만나 총체적 관계 발전을 의논하는 자리라면 상대방의 국가적 상징에 대한 예의를 서로 표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런 기초예의도 차릴 형편이 못 된다면 회담을 늦출 수도 있는 일이다.

이치에는 맞지만 현실의 요구가 달랐다. 남북관계 진전이 너무 늦춰져 있었다. 민족문제 해결이라는 근본 과제는 제쳐놓고, 냉전 해소에 따른 세계정세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남북 양쪽에 엄청난 손해를 일으키고 있었다. 존립의 위험을 겪어온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도 막대한 국방비부터 시작해 대륙 방면의 물류 문제, 북한과의 경제권 단절로 인한 기회비용의 상실 등 경제적 손해만 해도 국운이 걸린 문제였다. 냉전의 벽을 허물어버린 전 세계 다른 지역과의 경쟁에서 큰 핸디캡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국론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라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정상회담의 실현은 그 자체로 국론 정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정상회담 계획 발표 후 환영이 우세한 남한 여론도 그런 전망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 묘소 참배'라면 극한적 반대를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고, 그럴 경우 여론의 풍향까지도 불안할 수 있었다.

금수산궁전 방문 문제는 1주일 전인 5월27일 임동원이 특사로서 첫 번째 평양에 갔을 때도 거론된 것이었다. 그때는 상호 의견 접근이 전혀 되지 않았다. 북측에서는 상주인 김정일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을 것이라면 형식적 국가원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나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두 번째 갈 때는 정상회담이 끝난 뒤 금수산궁전을 방문하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뜻을 받아 갔다. 정상회담 전의 방문은 북한 측에 대한 지나친 굴복으로 보일 수 있으므로 도저히 할 수 없고, 정상회담 후라면 자발적인 방문으로 보일 수 있으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런데도 6월3일에 임동원이 만난 김정일은 금수산궁정 방문에 대한 뜻을 바꿔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에 도착한 6월13일 두 정상이 같은 차에 타고 카퍼레이드를 벌일 때도 임동원은 그 차가 금수산궁전으로 방향을 돌리지나 않을까 마음을 졸여야 했다. 이튿날 아침까지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어서 임동원이 김정일에게 한 장의 건의서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남한 국가정보원장이 북한 지도자에게 건의서를 보내다니, 어찌 보면 좀 황당한 장면이다.

"북측의 정서와 주장은 이해합니다. 이제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남과 북이 화해하고 협력하는 미래를 개척해나가야 하며, 바로 그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하여 정상회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냉엄한 현실도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남북협력사업을 위한 예산은 국회를 통과해야 하나 국회는 야당이 장악하고 있고, 언론의 협조를 얻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확고한 국민의 지지가 필요한데 국민의 70% 이상이 금수산궁전 참배를 반대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좋게 해주어야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북측이 원하는 경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금수산궁전에 참배하면 김 대통령의 지도력이 상처를 받게 되고, 정상회담의 의미는 퇴색되어 합의사항의 이행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쌍방이 모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풀어가야 할 것입니다. 상주인 김 위원장에게는 적절한 조의를 표하게 될 것입니다. 금수산궁전 방문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기를 건의합니다." (<피스메이커> 82쪽)

6월 14일 아침에 이 건의서를 보내고 오후에 정상회담이 있었다. 그에 이은 만찬장에서 두 정상이 남북공동선언 합의를 선포했는데, 그 후 김정일이 임동원을 자기 테이블로 불러 이렇게 귓속말을 했다고 한다. 정상회담 내용에 충분히 만족했다는 제스처로 이해된다.

"오늘 아침 임 원장의 건의를 보고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 대통령께 '금수산궁전에는 안 가셔도 되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렸어요. 임 원장이 이겼습니다." (<피스메이커> 125쪽)

남측이 정상회담에 매달리는 반면 북측이 튕기는 모습이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이런 추세의 원인 두 가지를 앞서 짚어놓았다. 하나는 경제상황으로 나타난 체제경쟁에서 북측이 불리하기 때문에 급격한 접촉 확대를 꺼린 것이고 또 하나는 북측과 달리 남측에는 정권의 경쟁이 있기 때문에 정상회담 성사의 공로를 다투는 상황이다.

2000년에 앞서 정상회담 성사의 전망이 떠올랐던 것은 1994년의 일이다. 카터 전 미 대통령의 평양 방문 때 김일성으로부터 남북정상회담에 응하겠다는 언질을 받아 남한에 전하자 김영삼은 그 동안 북한을 적대시하던 입장을 덮어놓고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김일성의 죽음으로 회담이 불발되자 또 다시 표변, '조문 파동'을 일으켰다. 며칠 전까지 대화상대로 인정하던 사람에게 조문조차 못하게 하다니, 그의 냄비 바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일의 하나다.

1994년에 김일성이 정상회담에 응한 것은 남북관계 자체에 기대감을 가진 것보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였다. 김일성은 전두환 이래 정상회담을 간절히 바라는 남한 대통령을 보아 왔다. 그에게 정상회담은 아무 때나 꺼내 쓸 수 있는 와일드 카드였다. 한편 남한 대통령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 진지한 태도로 회담에 임할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북한이 곤경을 벗어날 열쇠는 남한이 아니라 미국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2000년 김정일의 관점에는 1994년 김일성의 관점과 얼마간의 차이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첫째로, 미국과의 관계에 '정면 돌파'가 어렵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북한에 대해 비교적 포용적인 클린턴 행정부를 상대로도 북한이 원하는 조건을 얻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궁극적 열쇠를 미국이 갖고 있다는 인식은 그대로라 하더라도 남한과의 관계 변화를 앞세우는 우회적 노력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둘째로, 6년 동안 북한의 사정이 더 절박해졌다. 기근 사태를 극복하는 데 국제사회의 도움을 얻기 위해 다수의 서방 요원을 받아들여야 한 것은 건국 이래 없던 사태였다. 최악의 상황을 겨우 벗어나기는 했지만, 경제를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중국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도움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의 중국은 'G2'를 칭하는 지금의 중국이 아니었다.

유리한 무역조건을 지키기 위해 '개발도상국'의 위치를 스스로 주장하던 시절이었다.

셋째로, 종래의 남한 대통령과 달리 김대중 대통령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실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김대중이라 해서 대북관계 전개와 관련해 정략적 동기를 전혀 안 가진 성인군자는 아니라 해도, 근 30년간 대북 포용정책을 일관성 있게 제창해 온, 남한 정치인으로서는 희귀한 존재였다. 대통령 취임 후 2년 동안에도 그 일관성이 지켜지고 있었다.

또 하나 북한 측 입장에 변화를 가져왔음직한 요인은 한국 재계와의 접촉 경험이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상당 부분 실현되어 모습을 드러냈지만, 대우그룹 역시 현대 못지않게 적극적인 자세로 대북사업에 임한 것이 분명하다. 1999년 여름의 도산으로 인해 실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내용도 밝혀지지 못한 것이다. 당시 남한의 3대 재벌 중 두 곳의 적극적인 태도를 보며 남북관계 발전이 북한에 가져올 실익을 구체적으로 내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요인을 확실히 논할 수 있을 만큼 실상이 밝혀져 있지 못하다.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인해 김정일은 김대중과의 만남에 적극적으로 임한 것으로 보인다. 금수산궁전 방문 요구도 교조적 집착이 아니라 남한 측 태도를 떠보거나, 김대중의 입장을 더 편하게 해주기 위해 일부러 이슈로 부각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김대중은 '정상회담 후 방문'의 입장으로 유연성을 보였고, 김정일은 그마저 면제시켜 줌으로써 신뢰를 과시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는 남북공동선언의 문면 만이 아니라 두 지도자 간의 '짜고 치는 고스톱' 수준의 깊고 두터운 신뢰를 확인한 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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