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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운명 재촉한 '살인 물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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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운명 재촉한 '살인 물가'의 추억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8> 경제 개발, 열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0∼1970년대 경제 개발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사안 중 하나가 바로 노동 문제다. 오늘날 다수의 평범한 한국인이 매일 감당해야 하는 현실과 맞닿은 문제이기도 하다.

서중석 : 이 시기 한국 경제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정부가 노동자를 통제하고 노동조합도 통제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 재벌을 비롯한 기업들이 그런 정부에 의존해서 노동자를 압박하고 노조를 어용화해 이윤을 높이려는 쪽으로만 신경을 많이 쓰게끔 하는 면이 1970년대에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10인 이상 고용한 기업에서 일한 노동자를 보면 1970년에 108만4063명으로 집계됐는데 1975년에는 151만여 명이 된다. 1980년에는 이게 297만여 명이 된다. 전체 고용 노동자는 1970년에 378만 명, 1980년에 648만 명이다. 그러니까 한국이 고도 산업 사회로 들어간 것은 중화학 공업 때문만이 아니다. 이러한 노동자 상황을 보더라도 한국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산업 사회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 걸맞은 노동 정책이 있어야 하고 적절한 노동 운동도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업도 살고 노동자도 사는 건강한 사회로 한국이 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의 경우 권력이 그 길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이분이 분신자살하면서 노동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영세 기업들에선 근로기준법이 있는지도 1970년대에 거의 몰랐다고 돼 있고, 어느 정도 규모가 큰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근로기준법을 과연 제대로 지켰느냐고들 이야기하고 있다.

주당 근로 시간도 한국이 유난히 길었다. 1965년에 한국은 주당 57.0시간인 데 비해 필리핀은 45.6시간, 대만은 44.3시간이었다. 우리하고 대만은 비슷하게 발전했는데도 그랬다. 1970년에 한국은 52.3시간, 대만은 그보다 무려 10시간 가까이 적은 43.3시간이었다. 1975년을 보더라도 한국은 50.5시간인데 대만은 더 낮아져서 38.8시간으로 됐다. 1980년에는 한국이 53.1시간, 필리핀이 46.0시간, 그리고 싱가포르는 50.9시간으로 높게 나왔다. 그런데 대만은 41.1시간이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한국과 대만이 성장률에서 같은 페이스로 가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느냐, 이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 분신이 상징하는 참혹한 노동 조건, 박정희 정권이 부추겼다

▲ 남양주 모란공원에서 이소선 여사 3주기 추도식이 열린 2014년 9월 3일, 전태일 열사 동상의 눈에서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문제가 훨씬 심각했던 1960∼1970년대 기록들을 보면, 참혹하다는 말이 결코 지나치지 않은 노동 조건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놓여 있었다.

서중석 : 전태일 분신 44주년이던 2014년에 한 신문이 1970년대 의류 제조업체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 상황에 대한 기사를 실었는데 그걸 한 번 보자. "하루 노동 시간이 13시간에서 16시간, 휴일은 한 달에 이틀가량", 이건 전태일 전기(<전태일 평전>)를 읽어보거나 그 시기 청계천 피복업체에 대한 다른 여러 기록을 봐도 아주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정말 눈물 나는 게 얼마나 많나. "임금은 일당이 약 60원에서 100원, 그러니까 한 달에 1800원에서 3000원 정도 했다. 이때 신문은 20원, 새마을 담배는 10원, 서울 시내버스비는 10원이었다." 그 당시 작업 조건이 얼마나 나빴나. 폐결핵이 만연하고 한 사람이 수많은 병을 앓고 있는 경우가 참 많았다. 그런데도 건강 검진은 과연 제대로 받을 수 있었나? 그 시기 기록들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지 않나.

이러한 열악한 노동 조건을 부추긴 건 정부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 '수출 자유 지역 설치법'이 만들어지고, 그해에 외국인 투자 기업의 노동조합과 노동 쟁의를 규제하는 임시 특례법이 또 만들어지지 않나. 그러면서 1971년에 악명 높은 국가보위법이 탄생하는데, 여기서는 단체 교섭권, 단체 행동권을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율성을 빼앗아 단체 교섭, 단체 행동을 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이에 더해 1972년 유신 쿠데타가 일어난 후 비상국무회의에서 1973년에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 같은 것들이 다 개정되지 않나. 비상국무회의라는 건 도대체가 법적으로 있을 수도 없고 헌법상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인데, 거기서 그렇게 했다. (법 제정 및 개정은 국회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한 후, 비상국무회의에서 국회의 권한을 행사하게 만들었다. 비상국무회의 의장은 물론 박정희 본인이 맡았다. '편집자') 이런 것들을 통해 국가 권력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노조 활동, 노동 운동을 통제할 수 있게끔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래서 유신 시대에는 단체 행동권이란 건 전면 규제된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정말 불가사의하다고 해야 할까, 신기하기 짝이 없다고 해야 할까 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뭐냐 하면 1972년, 1973년, 1974년 자료들을 보면 집단 노사 분규 발생 상황이 0으로 처리돼 있다. 그런 건 전혀 없다는 식이다. 한국노총 관련 자료에도, 다른 데에도 그렇게 돼 있다. 단체 행동권이 전면 규제된 상황이니까 집단 노사 분규가 발생할 수 없다고 연역한 모양이다. 그래서 공식적으로건 비공식적으로건 발표되지 않아 0이 돼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노동자가 많은 사회에서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 아닌가. 그러니까 이제 또 발표가 된다. 1975년에 133건, 1976년에 110건 이런 식으로 나온다.

중앙정보부·경찰·노동청 등을 총동원해 노사 관계에 개입

프레시안 : 노사 갈등 상황을 0으로 처리하는 어처구니없는 행태는 유신 쿠데타 세력이 어떤 사회를 원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노동자를 통제하려 했나.

서중석 : 사실 1960년대에는 정부가 임금 교섭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1971년부터 적극 개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임금에 적극 개입할 뿐만 아니라, 이제 노조를 과거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회유하는 정책으로 나아갔다. 노동청 등 정부 기관이나 경찰, 중앙정보부 등을 통해 일상적으로 노사 관계에 개입했다. 중앙정보부는 노총 및 각 산별 노조에 담당관을 두고 주기적으로 사찰했다. 또 일부 간부를 매수하거나 후원했고 그들과 긴밀히 결탁했다. 요직이던 노총 사무총장, 그리고 산별 노조 위원장급들에게 매월 기밀비를 지급했다. 그러면서 노동자 동태를 일일 보고하게 하고, 주요 노동 문제에 개입했다. 중앙정보부 요원은 노총 중앙위원회나 각종 회의에 동석했다. 그러면서 회의 안건을 미리 받거나 성명서, 담화문 같은 걸 사전에 검토하는 걸 볼 수 있다.

노사 분규가 일어나면 유신 정권은 바로 기동 경찰을 투입했다. 대규모 공단 등 산업 지대에는 관할 경찰서의 정보과를 중심으로 노사 관계 사찰을 담당하는 부서를 두고, 회사 경영진이 알려주면 해당 노동자라든가 그 노동자의 가족, 친구, 동료까지 조사했다. 윤진호 교수가 쓴 글에 의하면 수출 자유 지역 경찰과 경영진 대표가 매일 회의를 통해 친노조 성향 노동자를 색출했다고 그런다. 그리고 노동 운동 회유, 보상 정책으로 노동절이 되면 노조 간부들을 포상하거나 그들에게 훈장을 줬고, 중앙정보부 등에서는 노조 지도부의 개인 비리를 캐서 압박하고 회유하고 친정부적 인물이 위원장에 당선되도록 하는 작업을 벌였다.

프레시안 : 사회 전체를 커다란 병영으로 간주하고 구성원들을 틀어쥐려는 시도였다.

서중석 : 1970년대 유신 체제는 병영화된 사회라고 얘기할 수 있다. 제일 먼저 학원 병영화가 강력하게 추진됐고, 그와 함께 병영화 현상이 공장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장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그러한 병영화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 전문가 이원보가 쓴 글을 보면 공장 새마을운동은 1940년 일제의 산업보국회와 유사하다고 돼 있다. 1977년까지 3개소의 공장 새마을 연수원이 상공부 소속으로 지정돼 운영됐다고 한다. 왜 공장 새마을 연수원이 상공부에 속했는지도 의문인데, 하여튼 여기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무려 3만8797명이라고 돼 있다. 놀라운 일이다.

이 공장 새마을 연수원에서 교육받은 한 여성 노동자가 쓴 글을 보면, 운동장에서 군대식으로 점호를 했고 교관 호령에 맞춰 같이 달렸다고 한다. 공장 새마을운동은 정부 방침 하에 경영 측에서 일방적으로 지휘, 명령하는 것이었다. 봉건적, 온정적, 권위주의적 가족주의 아래서 노사 협조 의식을 주입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노사 간 대립의 본질을 은폐하고, 기업 주도 아래서 노동 시간을 연장하고 열악한 작업 조건을 감내하면서 품질 향상에 힘쓰도록 하고, 생산성 향상 운동을 벌이도록 무보수로 노동자를 동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 공장 새마을운동이라고, 그 시기에 섬유노조 간부였고 그 후 노동 전문가로 활약하는 이원보 씨 글에 나와 있다.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이렇게 노동자와 노조를 통제 대상으로만 봤다. 그 때문에 노동자들은 아주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하면서 저임금을 받았다. 물론 중화학 공업은 꼭 저임금은 아니었다. 1970년대에 임금이 많이 오른 때도 있었다. 작은 사업장일수록 저임금이었다. 양면을 다 봐야 한다.

와우아파트와 김현옥, 그리고 '작은 박정희들'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은 작업장에서 이처럼 노동자들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작업장 바깥을 살펴보면, 박정희 정권의 서민 정책은 어떠했나.

서중석 : 이런 노동 정책을 썼으니까 서민을 위한 정책은 어땠겠느냐는 불문가지인데, 몇 가지만 이야기하자. 1960∼1970년대 하층 노동자, 빈민 등과 관련 있는 서민 정책을 상징하는 것으로 두 가지를 많이 이야기한다.

하나는 와우아파트 도괴(倒壞) 사건이다. 1970년 4월, 5층 아파트 건물이 성냥갑 무너지듯 폭삭 주저앉아서 33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다쳤다. 이 와우아파트 사건이 상징하는 것은 단순히 '서민 아파트가 이렇게 무너져내렸다', 이것만이 아니다. 그 아파트를 짓게 한 사람이 바로 김현옥 서울시장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불도저 건설'을 한 사람으로 아주 유명하다. 박 정권 경제 정책을 상징하는 한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가장 쉽게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마도 이 김현옥 시장이 아닐까 싶다. 김현옥은 군인 출신으로 부산에서 이미 불도저 시장으로 유명했고, 그걸 바탕으로 서울시장으로 올라온 사람이다. 이 사람은 와우아파트 사건 때문에 해임을 당하지만 바로 내무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이런 걸 보더라도 김현옥이 얼마나 상징적인 인물인가를 알 수 있다.

김현옥 서울시장 때 만든 시민 아파트를 보면 전부 다 언덕바지에다가 아파트를 지어 놨다. 서울이 언덕바지로 돼 있는 도시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렇게 한 게 아니었다. 그 당시 서울시 간부였고 나중에 교수가 되는 분이 쓴 글에 그 이유가 나와 있는데, 언덕바지에 지어 놔야 박정희 대통령이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잘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계 고가 도로, 이것도 박 대통령한테 잘 보이기 위해 지었다고 돼 있다.

프레시안 : 불도저 시장 하면 김현옥 외에 떠오르는 인물이 또 있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이다. 서울시장 시절 MB도 그렇게 불렸다. MB식 불도저가 공공성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는 토건 자본의 배만 불리고 생태계를 망가뜨린 4대강 사업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MB건 김현옥이건 그 행태와 방식을 보면 '작은 박정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비싼 수업료를 치른 한국인들이 그런 '작은 박정희들'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지가 한국 사회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변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오면, 박정희 정권의 서민 정책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서중석 : 또 하나는 1971년 8월에 일어나는 광주 대단지 사건이다. 다 알다시피 당시 서울에는 엄청나게 많은 무허가 빈민 주거소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한편으로는 시민 아파트 같은 걸 지어서 거기에 살게 하기도 했고 무허가 주택을 양성화하는 작업도 했지만, 제일 큰 정책 중 하나는 이 무허가 주민들을 서울 밖으로 나가서 집단 거주하게 한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장소가 지금은 성남으로 불리는 광주 대단지였다. 5만여 명이나 그리로 몰아냈다. 정부에서 이주만 시켜놓고 방치하자, 이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 각종 세금 면제, 토지 불하 가격 인하, 실업자 구제 등을 요구했다. 양탁식 서울시장이 약속을 어기고 나타나지 않자, 이 사람들이 성남 출장소에 방화하고 사업소 본부 건물과 차량을 불태우고 지나가는 차량을 빼앗아 거리를 질주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게 박정희 정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한 건 아니었지만, 그 당시 굉장히 큰 사건이었고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줬다. 특히 운동권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

이 시기 빈민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는 조세희가 1978년에 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난쏘공'), 우리나라에서 최장기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그 책에 잘 드러나 있다. 언덕바지 서울과 서울 주변의 그 많은 언덕바지, 개천가, 뚝방촌 같은 데에 얼마나 버림받은 사람들이 많았나.

ⓒ이성과힘
프레시안 :
'난쏘공'은 2005년 200쇄를 돌파했다. 그해 조세희 작가는 비정규직과 농민 문제를 이야기하며, 200쇄 출판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운 기록"이라고 말했다. 비참한 시대를 기록한 소설이 200쇄를 돌파하며 계속 읽히는 것은 작품의 밑바탕이 된 시대의 불행이 여전하기 때문이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카메라를 들고 투쟁 현장을 찾아다니며 시대의 아픔과 함께한 작가다운 이야기였다. 다시 돌아오면, 박정희 정권 시기의 급격한 공업화는 환경 문제도 불러일으켰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 때는 지금과 달리 환경 문제는 고려하지 않았다. 환경 문제를 얘기하면 '사치다. 지금 그런 얘기를 꺼낼 때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고 그랬다. 공해 대책이라는 걸 세우던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장이 들어선 공단 등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공해가 크게 문제가 됐다.

예컨대 진해화학을 보면, 진해 주변에 수많은 공해 물질이 배출돼 큰 어려움을 줬다. 서울 주변인 안양천 일대도 그랬다. 특히 제일 큰 공단이 들어선 울산은 대기 오염, 폐수 등으로 농수산물 피해가 아주 컸다. 그래서 울산 일대에 대한 기자들의 긴 취재 기사, 원고 매수가 200∼300매에 이르는 취재 기사도 나오고 그랬다. 서울 대기 오염은 1965년보다 1967년에 5배, 1969년에 8배가 증가하는 걸 볼 수 있고, 1967년에 한강물의 34퍼센트가 상수도로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오염돼 있었다. 또 소음 공해도 아주 심각했지만, 이런 것을 돌본다는 건 사치라고 여기던 사회였다.

중화학 공업이 이러한 공해를 더 가중시키는 역할을 했다. 당시 중화학 공업은 공장에서 나오는 부산물 재처리라든가 공해 방지 시스템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기술적 어려움도 따랐겠지만 '기업 비용이 늘어나면 빨리빨리 성장하는 데 어렵다', 이런 것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1978년을 보면 황이산화물 배출이 아주 높아진 것으로 돼 있는데, 그렇게 된 원천을 공장에서 50.4퍼센트나 제공한 것으로 나와 있다.

박정희 이어받은 전두환도 투덜거린 박정희 집권기 '살인 물가'

프레시안 : 박정희 집권기 경제 개발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물가 문제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 시대에 물가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심하게 했나. 이게 1979년 10월 부마항쟁을 불러일으킨 큰 요인 중 하나였다. 또 엄청난 투기를 불러일으킨 중요 요인이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런 부분들을 잘 모른다. 왜냐하면 전두환 정권 이래 지금까지 30년 넘게 우리는 한 자릿수 물가에서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자릿수 물가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특히 서민, 노동자, 빈민들을 살기 어렵게 하는 것인지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직접 겪어본 사람들은 그 고통을 잘 안다.

한 정치가가 유신 시대에 박정희 정권은 3대 환상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성장률은 높을수록 좋다', '수출 실적은 많을수록 좋다', '모든 가격은 억제할수록 좋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성장, 수출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한국은 인플레이션 중병에 걸린 것이다. 이것도 대만과 큰 차이가 나는 걸 볼 수 있다. 1970년대에는 성장을 위해 환경만 희생한 게 아니라 물가도 희생했던 것이다. 중단 없는 대외 의존적 성장 지상주의 정책을 추진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이다.

이와 달리 대만은 가격 안정 그리고 농촌 개발에 상당히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서, 성장에 집착한 박정희 대통령과는 대조적이었다고 한다. 대만을 통치하던 국민당이 박정희 정권과 아주 다르게 부정부패를 철저히 추방하려고 했던 것도, 부패 때문에 중국 본토에서 쫓겨난 경험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들 이야기하지 않나. 이와 더불어 국민당은 본토에서 패배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인플레이션 만연이었다고 분석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때로는 성장 속도를 제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한 1977년에 대만은 93억 달러를 수출했다. 인구가 우리나라의 반절밖에 안됐는데 굉장한 것 아닌가. 또 이해 성장률 역시 한국만큼 높지는 않았어도 8.1퍼센트를 기록했다. 그런데 도매 물가 상승률은 2.8퍼센트, 소매 물가 상승률은 7퍼센트였던 것으로 돼 있다.

그러면 한국은 어떠냐. 이미 1960년대에도 물가 상승률이 두 자릿수인 때가 많았는데 특히 1970년대에는 아주 심각했다. 도매 물가 상승률을 보면 1974년에 41.9퍼센트, 1975년에 26.1퍼센트를 기록했다. 1980년에는 38.9퍼센트를 기록했는데, 이게 초기 자료에는 40퍼센트가 넘는 것으로 나오나 보더라.

그래서 <전두환 육성 증언>을 보면 물가 얘기도 많이 나온다. '정권을 맡게 됐을 때 물가 때문에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느냐. 1980년에 도매 물가 상승률이 40퍼센트를 넘었다', 전두환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유신 체제 말기와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건 1971년에서 1980년 사이에 도매 물가 상승률이 연평균 18.8퍼센트였다. 서울 소비자 물가는 같은 기간에 연평균 16.4퍼센트씩 올랐다. 이 시기에 물가 문제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프레시안 : 그 정도면 살인적인 물가 상승률이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 시대에 있었던 엄청난 물가 상승은 노동자, 서민들의 생활을 크게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비생산적인 경제 활동에 의해 부를 축적하겠다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투기가 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성장력을 억압하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키워 결국 박정희 유신 정권의 운명을 재촉하게 되지 않나.

비정상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었는데도, 박정희 정권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도성장을 하겠다고 집착했다. 그러다가 결국 부마항쟁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박정희 정권 시대의 물가 통계는 정부의 물가 안정 정책에 따른 강력한 가격 규제를 기초로 작성됐기 때문에 실제 물가가 온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여든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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