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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때 꼭 닮은 박근혜 치하…'캄캄한 새벽'은 영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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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두환 때 꼭 닮은 박근혜 치하…'캄캄한 새벽'은 영원할 수 없다 [프레시안 books] 30주년 개정판 낸 박노해 <노동의 새벽>
1991년 뜨거운 여름, 어느 법정에 관한 기억

"증인이 교수로 재직 중인 학과에서 대학원생들 가르치고 있지요?"
"네. 15명 정도 제자들이 있습니다만…."
"대학원생들 중에 그 뭐더라, 무슨 무슨 체인가를 연구하는 학생들도 있나요?"
"뭐를 말씀하시는 건지… 혹시 '사회구성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여기서 그런 단어를 쓰진 마시고요."
"아, 네…. 아마 12명 정도가 그쪽 관계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만…."
"……."

지금으로부터 벌써 24년 전, 1991년 뜨거운 여름 어느 날 서울중앙지법의 한 법정에서 벌어진 풍경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를 법정 먼발치에서 처음 보았다. 당시 서른네 살의 피고인 이름은 박기평, 아니 예나 지금이나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위하여'의 머리글자를 딴 '박노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니 그 이름을 쓰기로 하자.

이날은 변호인 측이 신청한 증인 3명에 대한 신문이 진행되던 시점이었다. 3명 모두 현직 교수였는데, 그중 서울대 사회학과의 모 교수는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느린걸음, 2014년 12월 30주년 개정판 펴냄)에 대해 꽤 호의적인 서평을 기고했던 것 같다. 아마 그 때문에 변호인이 피고인 박노해에게 유리한 증인이라고 판단했을 법하다. 게다가 국립 서울대 교수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변호인의 많은 질문에 대해 그 교수는 중립적이고 모호한 얘기만 쏟아냈다. "참혹한 노동 현실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시집이라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하지만 시에 드러난 투쟁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는 심히 우려되는 바가 있다."

따분하게만 느껴지던 변호인과 검찰의 증인 신문이 끝나자, 곧바로 재판장이 증인에게 몇 마디 묻겠다고 나섰다. '사회구성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시점이었다. 당시 재판장이 왜 저 단어 사용조차 못하게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국립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생 중 재판장이 그토록 불경스럽게 여기던 무슨 무슨 체를 연구하는 이들이 무려 80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점은 방청석에서조차 꽤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그걸로 증인 신문이 끝나나 싶었는데 재판장이 "혹시 피고인이 증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시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이 기회가 없었다면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지도 못할 뻔했는데 말이다. 한 단어 한 문장 또박또박 뱉어내는 그의 말투는, 가끔씩 그의 시구절에 구수하게 배어 있는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라 완연한 서울 말씨였지만, 젊은 날의 내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 얘기가 되었다.

"저의 시에서 투쟁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았다고 하셨지요? 사실 저는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타협을 하고 싶습니다. 진짜로 타협을 거부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조용히 살고 싶다
돌아오는 건 낙인찍힌 해고와 배고픔
몽둥이에 철창신세뿐인 줄 빤히 알면서
소리치며 나설 자 누가 있겠느냐
그대들은 우리더러
노동문제를 일으킨다 하지만
우린 돌처럼 풀처럼 조용히 살고 싶다
다만 모래밭의 메마른 뿌리를
기름진 땅을 향해 뻗어 가야겠다
우리도 봄날엔 소박한 꽃과 향기를 피우고 싶다
우리로 하여금 소리치게 하고
돌사태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바람이 드세게 몰아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돌더러', <노동의 새벽> 117∼118쪽)

서슬 퍼런 군사 독재 뚫고 솟아오른 박노해의 절창, <노동의 새벽>

ⓒ느린걸음
지금으로부터 30년 하고도 9개월 전, 그러니까 그의 나이 스물일곱에 펴낸 시집 <노동의 새벽>은, 타협하고 싶어도 도저히 타협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의 실상을 현장 노동자의 살아 숨 쉬는 언어로 진지하게 그려내고 있다.

시집에서 그는 비록 이론은 깊지 않아도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으며 자본가의 술수를 꿰뚫어보는 활동가일 때도 있고('통박' '진짜 노동자'), 노조 결성을 위해 현장에서 기회를 노리는 이가 되기도 하며('당신을 버릴 때'), 참다 참다 끝내 노조를 결성해 몽둥이찜질과 탄압을 당하면서도 굳센 심지로 민주 노조를 사수하는 열성 조합원이 되기도 한다('밥을 찾아' '대결' '아름다운 고백' '어머니').

하지만 누가 뭐래도 박노해의 시가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힘은, 활동가나 열성 조합원이 되어 자본가의 타락상과 사회 불평등을 폭로하는 대목이라기보다, 용기가 부족하고 나약한 심성을 가진 평범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참혹한 노동 현장의 현실을 노래하는 곳에서 나온다.

그는 포장마차에서 동료들의 술자리 담화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마음씨 좋은 술친구가 되기도 하고('포장마차'), 같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자이자 인생의 동반자인 부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바보 남편('신혼일기')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손이 잘려나간 노동자의 아픔에 눈시울을 적시는 동료('손 무덤'),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젊은 청년('바겐세일'), 미싱사를 꿈꾸는 시다('시다의 꿈')가 되어 독자들과 대화한다.

시집이 발간된 1984년만 해도 전두환 군사 독재의 서슬 퍼런 칼날이 번쩍이던 시절이다. 어용 노총의 일부 활동을 제외하면 노동조합이란 건 불온시되던 때, 현장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가슴 한편에 서러움과 분노를 가득 품긴 했지만, 그 분노를 터뜨렸을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당시 노동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박노해의 시에는 바로 그런 노동자들이 가슴에 담고만 있었던 심리와 정서가 현장의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참다 참다 분노를 터뜨려 민주 노조를 결성하고 마음껏 싸울 수 있게 된 통쾌함이 드러나는 시구절보다, 죽지 못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숙명 같은 삶을 표현한 문장들이 더욱 가슴을 후벼 파는 건 나만 느끼는 것일까?

전력을 다 짜내어 뛰어도
갈수록 멀어져만 가는
황새를 뱁새걸음으로,
공작새를 장닭으로
승용차를 맨발로 따라 뛰며
죽기까지 손발을 멈출 수 없지
걷고 싶어도 주저앉고 싶어도
채찍보다 더 무서운
살아야 한다는 것,
노동자의 운명은
죽음이 아니라면 멈출 수 없지
('멈출 수 없지', 18∼21쪽)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노동의 새벽', 103∼105쪽)

그래 어쩔 수 없다
골병이 들어도 손이 잘려도 죽기까지라도
이 가난을, 노동일을
모진 목숨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106∼108쪽)

<노동의 새벽> 잉태한 노동 현실과 오늘날 미조직·비정규직 처지, 어찌 이리도 닮았단 말인가

물론 지금 시대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21세기 하고도 15년째이다.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으로 민주 노조가 곳곳에서 결성되었고, 1995년 결성된 민주노총은 어느새 올해로 20돌을 맞는다. 1996∼19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이 한 달여 진행되며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만들기도 했고, 노동자 정치 세력화 운동이 시작되어 민주노동당은 단숨에 원내 10석의 제3당을 차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박노해의 노래가 30년이 지난 지금도 울림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의 시구절에 배어 있는 삶이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그것과 참으로 닮았기 때문이리라. 노동조합을 갖지 못한 수많은 미조직 노동자들의 삶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기 때문이리라. 일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민주 노조를 통해 자신들이 중산층에 포함되었다고 믿을 정도의 삶을 누리고 있지만, 노조를 갖지 못한 90퍼센트의 미조직 노동자들과 최저임금 수준에 허덕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30년 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하루 14시간
손발이 퉁퉁 붓도록
유명브랜드 비싼 옷을 만들어도
고급오디오 조립을 해도
우리 몫은 없어,
우리 손으로 만들고도 엄두도 못 내
가리봉 시장으로 몰려와
하청공장에서 막 뽑아낸 싸구려 상품을
눈부시게 구경하며
이번 달엔 큰맘 먹고 물색 원피스나
한 벌 사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가리봉 시장', 44∼46쪽)

1987년 민주 노조 세대로선 이해하기 힘든 노동조합들, 즉 청년유니온·알바노조·패션노조 등이 만들어졌다. 알고 보면 그 세대의 자녀들이 만든 신세대 노조들인데, 청년의 생기발랄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들이 폭로하는 현실은 1984년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시절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았던 청년 노동자들의 그것과 왜 이리도 닮았단 말인가.

신문에선 물가가 제자리 숫자라는데
주인네는 셋돈을 올려 달라 하고
공공요금 고지서가 무거워만 가고
아내는 시장에 다녀올 때마다
가벼워진 바구니를 들며 울상이다
임금동결 정책에 넋을 잃다가
매주 4시간을 더 연장노동해도
적자가계부를 들여다보며
아내는 어두운 한숨이 늘고
프로야구장엔 환호가 일고
프로축구장엔 열기가 뜨겁고
우린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
('모를 이야기들', 65∼68쪽)

가계 부채가 1000조를 넘어섰건만, TV에서 틀어주는 광고 시간은 예전보다 훨씬 늘었다. 케이블TV의 광고 시장을 이미 장악해버린 각종 '론', '머니' 등 대출업체들의 존재는, 30여 년 전 2부 이자, 3부 이자를 받아먹던 고리대금 사채업자들을 연상케 한다. "빚을 내서 소비하고, 빚을 내서 집을 사라"는 목소리는 이제 자본가들만이 아니라 경제 부총리에게서도 들을 수 있는 말이 되었다.

'88만 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청년들의 저임금 노동과 실업률 수치는 심각하지만, 1년에 88억쯤은 유흥비로 탕진하는 부자들도 수두룩하다. 실질임금은 이미 물가상승률을 넘지 못해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지만, 기업들은 30년 전에 비해 수십 배의 이윤을 챙겨가고 있다. 가계소득 증가율은 기업소득 증가율의 1/10 수준으로 추락해 버렸다.

"저축이 경제 부흥의 열쇠"라는 말만 믿고 안 쓰고 안 먹으며 은행에 저축을 늘렸건만, 지난 30년 동안 그 돈은 죄다 재벌들에게 저금리로 내주어왔다.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가계는 저축할 여유가 전혀 없어 부채가 늘어나고 있는 형편인데, 기업들은 1000조 안팎의 돈을 사내 유보금이란 형태로 저축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30년 전 박노해의 시에서 오늘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철새도 아닌데
뜬구름도 아닌데
일찍이 제 먹을 것 찾아
노오란 고향길 눈물 적시며
서울로 서울로 떠나왔제

철커덕 쇳소리가 귀에 익을 때쯤
세끼 식권비와 매점 외상값 제하고 난
몇 푼 박봉이 나를 밀어
정들만 하면 시말서가 등을 떠밀어
이 공단 저 공장 떠밀려 다녔제
('떠다니냐', 130∼132쪽)

그래, 정말 어쩌면 이리도 똑같단 말이냐. 비정규직 평균 근속 1.7년, 평생 20회 이상 이직을 하면서 떠돌아야 하는 인생이다. 정들만 하면 정규직화 부담을 덜기 위해 잘린다. 사장과 관리자들 하는 짓이 너무 개 같아서 "내가 여기 아니면 벌어먹을 곳이 없나" 하며 홧김에 사표를 쓰고 나온 적도 부지기수다. 시급이 10원만 많아도 이게 어디냐 싶어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어느새 비정규직 인생은 '유목민(Nomad)'에 비유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수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오아시스 인근에 정착촌을 만들었지만, 그곳을 한 발짝만 벗어나면 물 한 방울 발견하기 힘든 사막이다.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막에서 유목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정권과 자본은 지속적으로 사막화 정책을 펼치느라 정착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진짜 노동자'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 대투쟁…21세기 비정규직 유목민에게도 기회는 있다

박노해의 시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의 노동자들 삶 역시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공단 저 공장 떠밀려" 다닐 수밖에 없는 현실, 그런데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이 현실을 뒤집어 놓았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고향은 다르지만 모두 몸뚱이 하나 팔면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 착취를 경험해온 노동자들은, 더 이상 유목민처럼 떠다니지 않고 자신의 작업장에서 민주 노조라는 오아시스를 만들어 저마다의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업장별 정착촌이 함께 연대하여 지노협, 전노협을 만들고 마침내 20년 전인 1995년에 민주노총이 건설되었다.

비암이라고 다 비암이 아니여
독이 있어야 비암이지
쎈방이라고 다 쎈방이 아녀
바이트가 달려야 쎈방이지
노동자라고 다 노동자가 아니제
동료와 어깨를 꼭 끼고 성큼성큼 나아가
불도쟈 밀어제껴 우리 것 찾아 담는
포크레인 삽날 정도는 되아야
진짜 노동자지
('진짜 노동자', 97∼98쪽)

유목민처럼 이 공단 저 공장을 떠돌던 노동자들은 자본가에 맞서 민주 노조라는 정착촌을 만들며 비로소 '집단으로서 노동자' 즉 계급을 형성했다. 박노해는 노동자가 다 노동자가 아니며, 자본가에 맞서 단결했을 때 '진짜 노동자'가 된다는 말로 계급 형성 과정을 쉽게 설명한다.

그렇게 형성된 계급, 즉 1987년 대투쟁을 직접 겪었거나 곁에서 목격했던 당시의 젊은 세대들이 바로 현재 민주노총의 주력군이라 할 40∼50대 정규직 집단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비정규직'이란 말도 없었고, 따라서 '정규직'이란 단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홀로 개별화되어 이 직장 저 직업을 떠다니던 같은 세대 노동자들이 '진짜 노동자'가 되어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근속 2년을 채우지 못하고 해고되거나 사표를 던지고 다른 직장으로 옮겨 다니는 비정규직 유목민들에게도 기회는 있다는 말이 된다. 1987년 대투쟁 이전에 노동조합을 갖지 못했던 노동자들의 삶 역시 현재 비정규직과 다를 바 없었지만, 대투쟁과 민주 노조의 물결 속에서 집단적인 계급으로 자신들을 스스로 조직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안의 100여 개에 달하는 사내 하청업체에서, 시급 10원만 더 주면 다른 업체로 옮겨가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2003년에 비정규직노조가 결성되고 정규직과 단결해 하나둘씩 권리를 외치기 시작하자 업체 간 이직률은 0에 가까워졌고, 1만에 달하는 사내 하청 노동자들은 자신의 업체에서 동료들과 단결해 처우 개선과 정규직화 투쟁에 나선 바 있다.

하나로통신, 데이콤, LG유플러스, SK브로드밴드의 하청업체들을 전전긍긍하며, 일감이 조금이라도 많은 업체 쪽으로 이동하던 비정규직 수리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2001년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의 500여 일에 걸친 처절한 투쟁을 끝으로 노동조합의 깃발은 내려졌지만, 그 뒤를 이어 10여 년 동안 통신업계를 떠다니던 수리 기사들은 마침내 2000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의 단결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오늘까지 100일 가까운 파업 투쟁을 전개하고 있지 않은가. (관련 기사 :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가 땅 짚고 돈 버는 비결)

▲ 10일 구본무 LG 회장 자택 앞에서 농성하는 LG유플러스 비정규직 노동자. ⓒ연합뉴스


동료들과 엉켜들어 벽을 쳤을 때 피에 젖은 장벽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길들여진 노동자였을 때
저임금의 응달 속을 장시간 노동에 지쳐
캄캄한 장벽을 운명으로 알고 살아왔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높고 두터운 장벽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내렸다

내가 외쳤을 때
내 입은 봉해졌고
메아리쳐 온 허망한 상처뿐이었다

내가 뛰어가 부딪쳤을 때
장벽은 끄떡도 하지 않았고
동료들은 차갑게 피를 닦아 주었다

내가 속삭이며,
긴 세월을 절뚝이며 속삭여
동료들과 함께 엉켜 들어
맨몸으로 수없이 벽을 쳤을 때
피에 젖은 장벽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마로 구멍을 뚫고
긴긴 밤을 숨죽이며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렸을 때
콰르르르 거대한 장벽은 무너지고
너와 나 사이 가슴 속의 장벽도
무너져 내렸다

우리가 환히 열린 언덕으로 뛰어갔을 때
캄캄한 장벽 밑마다
쿵쿵 까부수는 소리
에워싸며 구멍 뚫는 소리
참혹한 비명 소리

우리들은 또다시 전열을 추스르며
수없이 불어난 동지들과
탄탄한 연대 위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우리들의 평등한 푸르른 대지를 향해
너는 함마
나는 다이나마이트
살덩이로 불꽃으로 불도쟈로
갈수록 무겁고 힘찬, 치밀하고 확실한
노동자의 전진을 내어 딛는다

우리들의 숙명인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 사라질 때까지
억압과 착취와 분단의 장벽이
사라질 때까지
('장벽', 152∼154쪽)

▲ 1991년 선고 공판 법정에 들어서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 ⓒ연합뉴스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봐도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단순히 노동자로서 자신을 자각하고, 착취에 분노하여 민주 노조를 결성하고 떨쳐 일어선다는 스토리가 아니다. 그렇게 홀로 분연히 일어섰을 때 돌아온 것은 "메아리쳐 온 허망한 상처뿐이었다." 장벽은 끄떡도 하지 않았고, 동료들은 차갑게 피를 닦아 주었을 뿐이다.

시집 <노동의 새벽> 거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한 위 시에서 내가 탄복해 마지않는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내가 속삭이며, / 긴 세월을 절뚝이며 속삭여 / 동료들과 함께 엉켜 들어 / 맨몸으로 수없이 벽을 쳤을 때" - 박노해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패배의 쓰라린 기억들, 그걸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는 기나긴 세월을 절뚝이며 속삭이고 동료들 속에 엉켜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차에서 비정규직노조를 만들고 나서, 때로는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기대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의 운동은 썩었으니 비정규직 스스로 분리 독립을 해야 한다고 외치기도 했던 나, 말 그대로 '좌충우돌'을 하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노동운동을 배워온 내 입장에선 아직도 이 시를 다시 읽으며 배우고 또 배우며 깨우침을 얻곤 한다. 그런데 이런 이치를 그는 어떻게 20대 중반에 노래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건 아마도 그가 시집의 이름으로 선택한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대정신에 있는 것 아닐까. 1980년 광주항쟁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백의 원혼들을 기억하며, 달도 차면 기울 듯이 서슬 퍼런 군사 독재도 언젠가는 종말이 올 것임을 굳게 믿고, 비록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머지않아 새벽 어스름이, 그리고 먼동이 터올 것임을 예감하는 노동의 '새벽'.

거짓말처럼 시집이 발간된 다음 해(1985년) 구로동맹파업과 대우자동차 파업 등 민주 노조 운동은 대중 파업을 조직하며 노동의 새벽을 넘어 이제 드디어 어스름이 다가왔음을 예고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87년 미포만과 거제에서 구로까지 족쇄를 깨고 민주 노조의 물결을 만들며,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새벽에 종지부를 찍고 노동의 새 아침을 맞이했다.

다시 '노동의 새벽'을 노래해야 하는 이유

하지만 1996∼19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을 정점으로 민주 노조 운동은 점차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IMF 경제 위기를 겪으며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가 도입되었고, 수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해고된 자리가 임금은 절반이요 고용조차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 규모는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해 이제 정규직의 규모를 훌쩍 넘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리하고 둘 사이에 장벽을 설치해 분할 통치하는 수법을 사용한다. "분할을 뛰어넘자"는 주장은 무성했지만 민주 노조 운동은 아직 이 장벽을 깨뜨리지 못했다. 1987년 대투쟁의 전사들은 어느새 40∼50대가 되어 1세대는 정년퇴직을 하기 시작한 노병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은 모조리 비정규직 또는 실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세대는 노동의 여명을 열었지만, 다음 세대는 여전히 캄캄한 새벽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30년이 지난 <노동의 새벽>을 다시 읽어야 한다. 아니, 다시 읽기만 해선 안 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된 현실에 맞게 편곡을 하고 리메이크를 해야 한다. 이 공단 저 공장을 떠돌던 유목민들이 민주 노조라는 정착촌을 만들어 집단적인 계급으로 스스로 형성해갔던 그 역사를, 이제 정착민과 유목민이 뒤섞여 서로 경쟁하게 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되살릴 것인지를 진지하게 살펴봐야 한다. 이제 우리 세대의 언어로 노동의 새벽을 다시 노래하자.

나는 처음 노래했지만
노래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누구의 가슴에나 이미 있었고
누구라도 받아쓰지 않으면 안 될
우리들 가난한 사랑의 절규였다

인간의 삶이란, 노동이란
슬픔과 분노와 투쟁이란
오래되고 또 언제나 새로운 것
묻히고 다시 일어서고
죽으면 다시 살아나는 것
('스무 살의 새벽 노래', <노동의 새벽> 발간 20주년을 맞아 2004년에 박노해가 쓴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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