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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레지스탕스, 철도를 파괴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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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레지스탕스, 철도를 파괴하지 않았다면…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47>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철도
독일 치하의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은 고통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라트비아, 폴란드 등 많은 국가에서는 독일의 앞잡이가 된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그룹이 물 만난 고기처럼 유대인에 공격을 가했다. 유대인 색출, 은신처 기습뿐 아니라, 직접적인 물리적 공격도 감행했다. 반유대주의는 유럽에 넓게 퍼져 있었다.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물인 공황은 롤러코스터처럼 주기적으로 다가왔다. 불만이 가득 찬 사회에서 유대인은 찾기 쉬운 속죄양이었다. 반면 사회주의적 가치가 훼손되지 않았거나 공동체의 협력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유대인을 보호하고 연대하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네덜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4가지 과제를 천명했다. 첫째는 네덜란드를 나치 독일과 같은 국가사회주의당이 장악한 국가로 만들어 독일의 위성국으로 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네덜란드의 산업과 노동력을 독일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유대인의 말소였다. 네 번째는 독일에 적대 되는 모든 활동, 즉 연합군에 정보를 제공하는 간첩 활동이나 태업이나 파업, 무장 저항 운동 등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나치에 반대하는 네덜란드 시민들은 지하조직을 결성해 저항에 나섰다. 유대인에 대한 독일의 공격은 1940년 가을부터 시작됐다. 첫 번째 공격 대상은 네덜란드의 유대계 공무원과 대학교수였다. 이에 라이든(Leiden) 대학의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델프트(Delft) 기술대학 학생들이 파업을 조직해 맞섰다. 1941년 2월 17일 암스테르담에서는 나치 친위대와 유대인 무장 세력과의 충돌이 있었다. 3일 뒤 이에 대한 보복으로 600명의 친위대 병력이 출동해 400명의 유대인 젊은이를 색출해 체포해갔다. 이들은 친위대의 군홧발에 짓이겨지면서 부헨발트(Buchenwald)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친위대의 보복 조치에 가장 먼저 분노한 것은 공산주의 노동자 그룹이었다. 노동자들은 친위대의 만행을 알리는 전단지를 비밀 지하 인쇄소에서 만들어 거리에 뿌리고 총파업을 조직했다. 부두 노동자들이 결합했고 시내 운송을 책임지는 트램 기사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파업은 전 산업으로 퍼졌다. 공장이 정지됐고 상점들은 현관 입구에 '닫혔음'이라는 표찰을 내걸었다. 공공기관도 문을 닫았다. 80만 명의 암스테르담 인구 중 30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고 이들은 시 중앙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암스테르담 노동자와 시민들의 총파업에 대해 독일군은 가혹한 폭력으로 응징했다. 수백 명의 보안경찰과 중무장한 친위대 병력이 진압에 나섰다. 진압군은 사전 경고도 없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했고, 무차별 체포가 이루어졌다. 암스테르담 시장은 시 공무원들에 대한 복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시장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시 공무원뿐 아니라 노동자와 지식인, 예술가, 농부들은 독일에 너나 할 것 없이 저항했다. 암스테르담 경찰은 유대인 체포에 나서는 것을 거부했고 농부들은 독일군에 대한 농산물 판매를 거부했다.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마지막이자 가장 큰 저항은, 1944년 9월 철도 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됐다. 네덜란드 철도 노동자는 더 이상 유대인들을 절멸수용소로 실어 나를 수 없다며 파업에 돌입했다. 또한 연합군의 공세를 피해 본국 방어를 위해 독일로 재배치되는 병력의 이송도 거부했다. 네덜란드 국철, NS 철도 노동자들은 파업 집회에 모이는 대신 꼭꼭 숨어버렸다. 다급해진 나치 당국은 독일 철도 노동자들을 네덜란드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같은 철도 노동자라도 고유의 숙련성이 요구되는 철도 업무가 쉽게 정상화될 수는 없었다. 독일은 파업에 대한 보복으로 네덜란드 지역 내에서의 식량 운송을 중단시켰다. 네덜란드 시민들은 "1944 대기근"이라고 역사에 기록될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네덜란드 시민들만 고통받은 것은 아니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 독일로부터 네덜란드 주둔군으로 수송되어야 할 석탄과 가스, 식량의 보급에 심각한 타격이 생겼다. 독일군은 더 춥고 황량한 1944년의 겨울을 보내야 했다. 다음해 봄, 연합군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패주하게 되는 것은 예고된 운명이었다.

이런 가운데 네덜란드의 비밀 조직에 의해 숨겨진 2만5000명의 유대인 중, 발각되지 않은 1만6000명이 살아남은 것은 소중한 성과였다.

▲ 영화 바스터드 : 거친녀석들 중 한장면.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과 프랑스 레지스탕스 이야기 등을 담았다. ⓒ유니버셜픽쳐스

포로수용소에서 '지하철'을 뚫은 그들의 의지

전쟁이 격화될수록 포로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전격전으로 기세를 올린 독일은 곳곳에서 연합군을 무장해제시키고 포로로 수용한다. 폴란드 슐레지엔(Schlesien)의 사강(Sagan)에 위치한 슈틀라크 루프트 3(Stalag Luft3) 수용소는 영국해군 항공단과 미 육군 항공대 소속 출신의 포로들을 수용했다. 포로 수용소로는 가장 규모가 컸는데 사단 병력에 육박하는 1만 명의 포로들이 8킬로미터(Km) 둘레의 철조망 안에 갇혀있었다. 이곳에서 포로들에 의해 지하철이 건설됐다. 바로 탈출용 땅굴이었다. 수용소는 지리적으로 스위스 등 중립국으로 가기에는 멀었다. 모래흙으로 이루어진 토양은 땅굴을 파기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포로수용소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수용소 측은 탈출을 막기 위해 숙소를 지면으로부터 60cm 위에 떠 있는 구조로 만들었고 지진계까지 설치했다. 땅굴을 파기위해 굴착을 할 경우 바로 감지해내기 위해서였다.

연합군 포로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탈출용 땅굴을 팠다. 주기적으로 이뤄지는 검사에 들키지 않기 위해 벽난로 밑을 땅굴 입구로 삼았다. 지진계에 쉽게 잡히지 않기 위해 깊이도 9미터에 달하도록 팠다. 포로들은 체력단련을 한다며 땅굴 위에 나무 뜀틀을 놓아 달리고 착지하는 동작으로 충격을 주었다. 지진계가 땅굴 작업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땅굴의 직경은 60센티미터(cm)로 만들어졌다. 포로용 침대의 매트리스를 지지하는 베드보드의 길이가 60센티미터였기 때문이다. 이 매트리스 지지판을 땅굴의 버팀목으로 삼았다. 포로들은 톰, 딕, 해리라는 이름의 굴 3개를 팠다. 하나가 발견되더라도 다른 땅굴이 또 있으리라고는 추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땅굴 안에서의 이동은 나무로 만든 운반차를 이용했다. 목재 철로 위에 얹힌 운반차가 굴 중간중간 설치되어 있는 거점에서 연결된 로프에 의해 견인되는, 트롤리형 지하철이었다. 3개의 땅굴 중 딕은 건설이 중단됐다. 땅굴의 출입구로 삼으려고 했던 철조망 밖의 숲이 없어지고 독일군의 새 건물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1943년 여름 남은 2개의 땅굴 중 톰이 발각되었다. 이제 남은 노선은 지하철 3호선 해리뿐이었다.

포로들의 집중적인 노력으로 1944년 3월 총 길이 102미터의 탈출용 지하철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측정 오류로 숲으로 연결되어야 할 지하철 출구가 몇 미터 모자랐다. 출구는 철조망 바로 밖 앞으로 나 있었다. 탈출에 나선 포로들은 밖으로 나온 후에야 출구가 감시탑 서치라이트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멘붕'에 빠졌다. 3월 24일 밤에 감행된 탈주는 보초병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76명의 포로들만 성공할 수 있었다. 바로 전개된 독일군의 추격 작전에 의해 50여 명이 사살되었고 17명은 다른 수용소로 분산 수감된다. 3명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이 사건은 1963년 헐리우드에서 영화화되었는데 전쟁영화의 명작으로 꼽히는 <대탈주>에서 바로 이 해리 땅굴이 나온다. 당시의 대스타 스티브 맥퀸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오토바이 탈주신은 많은 영화광들의 뇌리에 아직도 깊이 박혀있을 것이다. 1965년에도 비슷한 소재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My way>를 부른 프랭크 시나트라가 주연한 <탈주특급>이다. 미육군 항공대 출신으로 포로수용소의 지휘관이 된 라이언 대령은 뜀틀 소음 속에 만들어진 땅굴을 이용해 수용소 탈출을 도모한다. 포로들은 독일군의 열차를 탈취해 이탈리아를 떠나 중립국인 스위스로 향하는데 프랑크 시나트라가 추격하는 독일군과 교전을 벌이며 열차를 타기 위해 달려오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은 영화이다. 이 두 영화는 가끔 <EBS>나 공중파 방송에서 틀어주니 언젠가 한 번쯤은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철도노동자의 힘, 나치를 물리치다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은 프랑스 철도의 운영을 책임졌다. 그러나 현장에서의 운영은 프랑스 철도 노동자들이 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를 통해 얻을 수 있거나 전달되는 정보를 모았다. 이런 정보는 당연히 연합군 측에 전달되었다. 소극적인 방식의 저항도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프랑스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 화물 송장이나 문서의 내용을 변경하거나 분실함으로Tj 적지 않은 화물이 엉뚱한 곳으로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프랑스 철도 노동자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열차를 지연시켰다. 기관차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장치인 전차대를 사용할 때는, 시속 5킬로미터 이하의 저속으로 양쪽의 접속 레일 방향을 정확히 조정해서 움직여야 함에도 실수를 가장, 기관차를 고속으로 돌진시켜 방향전환 장치를 고장 내거나 기관차를 탈선시키는 장애를 일으켰다. 증기 발생용 물이나 연료로 쓰이는 석탄을 부족하게 적재하여 기관차를 출고시켰다. 운행을 시작한 열차가 얼마 못 가 정지하여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저항은 1943년부터 무장 게릴라 조직인 레지스탕스와 철도 노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진행됐다. 시골 지역에서는 열차가 쉽게 탈선했다. 철도노동자들이 선로를 비롯한 철도시설을 은밀하게 조절해 놓거나 파괴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가 빈번히 발생하자 독일군은 열차 운행을 보호하는 장갑 무장 열차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열차 맨 앞과 뒤에 기관총과 대포를 장착한 장갑 객차를 연결하거나 아예 독립적인 무장 열차를 편성해 주요 화물과 병력 수송 열차의 앞에서 움직였다. 관측병은 열차 맨 앞에서 선로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만약 선로에 이상이 발견되면 그 주변 마을에 대한 혹독한 보복 조치가 있었다. 레지스탕스나 철도노동자가 발견되면 열차 안에서 대기 중인 추격대가 즉각 출동했다. 열차의 원활한 운행을 방해했던 프랑스 철도 노동자들은 독일에서 파견된 노동자들로 대체되는데 그 수가 1만 명이나 되었다.

1944년 영국 철도는 최고의 가동률을 기록했다. 영국 철도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연장근로로 과로 상태였다. 영국 남서부의 팃필드 선더볼트(Titfield Thunderbolt)라는 희한한 이름의 노선에는 딘톤, 티스버리, 우드버리, 브리드스토우 같은 역이 있었다. 평소 이 노선에는 온종일 이용하는 승객이라야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한적한 곳이었는데, 1944년 3월 이후에는 영국에서 가장 바쁘고 중요한 노선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모여든 미군을 비롯한 수십 만 명에 이르는 연합군 병사들의 훈련캠프와 집합장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륙작전을 앞둔 몇 달간은 영국 철도 역사상 가장 바쁜 시기였다. 하루에 600개의 예비 병력과 화물, 병원 열차들이 프랑스가 보이는 항구로 집중됐다. 병력 이동이 시작된 이후 상륙작전이 개시된 6월까지 3만 회가 넘는 열차편이 운영됐다.

'디데이'가 가까워져 오자 런던으로부터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와 이와 연계된 철도노동자들에게 비밀 지령이 하달됐다. 사보타지와 열차 탈선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독일군의 이동을 지연시키라는 것이 암호문의 내용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5일 밤, <BBC> 방송은 레지스탕스에게 암호로 위장된 비밀 메시지를 전파로 날려 보냈다. 연합군의 공수부대가 6일 새벽 1시, 노르망디 배후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낙하산을 펼치기 몇 시간 전이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은 6월 1일부터 작은 라디오 스피커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BBC의 프랑스어 방송 아나운서는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정원에서 노는 것을 점점 지루해하고 있습니다" 는 등의 알 듯 말 듯 한 말을 전달했다. 운명의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5일 밤 방송에서 드디어 행동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노르망디 주변의 레지스탕스가 라디오에서 들은 암호문은 "주사위는 던져졌다"였다. 즉각 통신 케이블과 전신망을 끊으라는 지령이었다. 뒤이어 "그것은 수에즈를 뜨겁게 달구었다"라는 말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는데 모든 병참선을 공격하라는 말이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조직들은 총력 투쟁을 준비하면서 조직을 정비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조직은 철도노동자들의 저항조직인 레지스탕스 페르(Resistance Fer)였다. 페르는 독일군의 이동 현황 정보를 파악해 연합군에게 제공하는 훌륭한 정보원이었다. 독일의 제12친위 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에서 요청한 84대의 열차는 정확히 이 부대의 규모가 어떤지를 알 수 있게 했다. 이미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예정된 '디데이'를 앞두고 철도노동자들의 노골적인 방해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중이었다. 프랑스 철도 노동자들은 일부러 터널 안에서 열차를 탈선시켰다. 터널 안에서 탈선한 열차를 끌어내고 선로를 복구하는 일은 평지에서보다 몇 배나 힘든 데다, 더 많은 복구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차량기지에서는 특정 부품을 빼내 버리거나 고장을 내어 기관차나 열차의 가동률을 떨어뜨렸다. 프랑스 동부 지역과 독일을 연결하는 철도 수송은 어쩔 수 없이 중단되었다. 동부의 부르고뉴 지방으로 이어진 노선에서 37개의 선로가 끊겼다. 독일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수백 명의 철도노동자들을 처형했고 3000명을 수용소로 강제 이송했다.

독일군은 어쩔 수 없이 도로를 이용해 상당수의 병력과 장비를 이동시켜야 했다. 하지만 도로 이용은 그 자체로 독일군의 전투력을 약화시켰다. 기갑부대를 구성하는 전차와 장갑차의 궤도는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한정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이동으로 궤도의 장력이 소실될 경우 전장에서의 신속한 기동을 장담할 수 없다. 궤도뿐만 아니라 장시간 운용에 따른 엔진을 비롯한 여러 부품과 장비의 보수에 시간과 인력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장시간 직접이동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도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연합군 공군이 독일의 연료 저장기지와 정유 시설 등을 전략 목표로 삼아 폭격을 하는 바람에 독일군은 심각한 연료 부족 상태에 빠져있었다는 점이었다. 두꺼운 철판으로 무장한, 수십 톤(t)에 달하는 기갑차량은 연비가 형편없는 기름 먹는 하마였다. 독일군이 도로를 이용하면 할수록 전투력이 고갈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노르망디 해안을 중심으로 대서양 방어를 고민하던 로멜은 히틀러와 독일 고위 장성들의 방어 전략을 안타까워했다. 아프리카 전선에서의 대승리로 '사막의 여우'란 별칭을 얻은 독일의 명장 로멜은 고립되어 있었다. 독일군 참모들은 연합군의 공격에 자신만만해 했다. 히틀러는 로멜의 집중적인 해안 방어 전략보다는 독일의 자랑인 기갑부대를 이용한 내륙에서의 역습을 주장하는 참모들을 지지했다. 로멜은 상륙작전 방어를 위해 제시한 육군과 공군의 통합지휘체계가 히틀러에 의해 거부되자 불같이 화를 냈지만 히틀러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로멜은 전선 뒤에 머물러 있던 기갑사단이 결정적인 역습으로 적을 타격해야 하는 순간에 전투 현장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서양 방벽이 무너지게 되면 전쟁의 승패가 결정 날 것이라는 예측 속에서 로멜은 방어 진지 구축과 장애물 조성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단위 부대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로멜의 지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진지 구축과 개선에 내몰린 병사들은 연일 이어지는 노동으로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계획을 기획했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속도였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대서양 방어 방벽을 독일의 지원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돌파해야 했다.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독일의 정예 기갑사단과 친위 보병사단이 대서양 방어 부대에 합류하게 되면 연합군의 대다수는 물고기밥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연합군이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전투에서 실패한다면 전쟁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관건은 수송수단의 봉쇄였다. '디데이' 다음날인 6월 7일 룬투슈테트의 독일군 서부전구 사령부는 파리 서쪽 대서양 연안 브르타뉴와 남쪽 루아르에 주둔하고 있던 지원군 부대들을 북쪽으로 전진 배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독일군의 이동은 연합군이 곧 힘겨운 싸움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합군이 믿는 것은 두 가지였다. 공군의 대규모 폭격, 레지스탕스의 철도 파괴와 습격으로 독일군 지원부대의 전선 집결을 차단하거나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묘사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드림웍스

2차대전을 끝낸 것은 '레지스탕스'…친독파는 어떻게 됐을까?

레지스탕스가 노르망디 전투에서 기여한 가장 큰 공로 중의 하나는 독일군 전투 사단 다스 라이히 사단의 발을 묶은 것이었다. 런던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조직인 자유프랑스(FFI)에 날아온 명령에 따라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루아르에 있는 다스 라이히 사단의 이동을 지연시켰다. 기관차와 화물차를 고장 냈고 선로를 폭파시켰다. 연료를 가득 채운 수송탱크들도 파괴시켰다. 도르도뉴에서도 이동하는 독일군 부대를 48시간 동안 저지시켰다. 이 작전에 참가한 레지스탕스 대원은 28명이었는데 대부분이 현장에서 전사했다. 다스 라이히 사단은 예정보다 3일이나 지체해 17일 만에 전선에 도착했다. 상륙작전에서의 3일은 연합군의 교두보 확보를 위한 천금 같은 시간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바꾼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 배경 중의 하나는 철도망을 파괴해 프랑스 남부와 동부, 아프리카 북부의 독일군 주력부대의 발을 묶어 놓은 것이었다.

연합군은 상륙작전에 성공하자마자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파괴한 철도를 재건했다. 한 달 만에 쉘부르에서 카랑탕까지의 철도노선이 복구되어 열차가 운행됐다. 철도 재건은 전선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늘 최전선 가까이까지 이루어졌다. 때문에 철도건설부대의 운이 좋지 않은 경우 독일군의 공격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봐야만 했다.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 공군은 주요 열차 노선에 대한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선로가 꼭 필요했던 독일은 주요 역과 노선 주변에 철도 복구반을 대기시켰다. 철도 복구반은 연합군 공군의 공습이 끝나자마자 파괴된 선로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투입되었다. 복구 작업에는 많은 인력이 소요되었는데 죄수들과 전쟁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유대인들까지 동원되었다. 1944년 4월 22일 밤 독일 베스트팔렌의 햄 역과 주변 선로에는 연합군 공군의 폭격기들로부터 1300발이 넘는 폭탄이 투하되었다. 이 공습으로 햄 역의 철도시설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데, 공습이 끝나자마자 6000명의 인부가 투입되어 바로 복구 작업이 시작됐다. 공습이 끝난 24시간 뒤에는 다시 열차 운행이 가능했다. 철도를 두고 숨바꼭질을 하는 꼴이었다. 이렇게 철도시설에 대한 공격과 복구가 끈질기게 반복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철도의 기능 마비가 곧 전투력의 상실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병력, 연료, 탄약의 대량수송 없이는 그 수많은 전선에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 당국의 분석에 따르면 1944년 봄부터 1945년 3월 까지 9000회의 공습으로 철도차량으로 운송되는 독일의 생산품 4분의 3을 파괴시켜 독일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디데이' 이후 연합군은 독일군의 반격에 주춤하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진격을 계속했다. 전선에서 독일군이 밀리고 있다는 소문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도 퍼져나갔다. 독일의 파리 점령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중장은 시름에 잠겼다. 이미 휘하의 병력 2만5000명은 패튼 장군이 이끄는 파리 진격부대를 막기 위해 전선으로 차출됐다. 콜티츠가 나중에 전범 재판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파리에 남은 병력이라고는 나이 든 병사들이 주축인 1개 보안연대와 전차 4대, 별 효용성이 없는 프랑스 장갑차 17대를 가진 1개 대대였다. 콜티츠의 걱정은 코앞까지 진격한 연합군이 아니라 파리 레지스탕스의 봉기였다. 이 걱정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8월 12일 SNCF, 즉 프랑스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파업 전에는 파리 지역에서 자유프랑스 FFI를 이끌던 공산주의자 롤 탕기 대령이 파리의 독일군 진지들에 연결된 통신선을 모두 끊으라고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려 곳곳에서 독일군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고 있었다.

8월 17일에는 독일군 고위 장성들이 파리 시내를 가로질러 떠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이들의 차량에는 루이 16세 시대의 예술품을 비롯해 수많은 약탈품이 실려 있었다. 세익스피어앤컴퍼니 서점의 창립자 실비어 비치는 파리 시민들이 탈출하는 독일군을 향해 야유하는 모습을 보면서 파리 해방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8월 18일 파리 시내 전역에는 봉기를 촉구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벽보가 붙었다. 8월 22일에는 FFI가 "모두 바리케이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독일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날 콜티츠에게는 베를린에서 긴급 전문이 전달됐다. 히틀러로부터 온 전문의 내용은 "파리를 파괴하라!"였다. 콜티츠는 고민 끝에 파리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하고는 투항을 준비한다. 만약 콜티츠가 최후까지 히틀러에 맹종했다면 현대의 파리 관광객들이 에펠탑이나 노트르담 성당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은 찍을 수 없었을 것이다.

8월 24일 오후 7시 30분 드론 대위가 이끄는 프랑스군 제2 해병기갑연대 제9중대 병력이 반궤도 장갑차를 앞세워 파리 시내로 진격했다. 제2기갑연대의 퓌츠 사령관 대대의 선두 중대였다. 퓌츠는 스페인 내전 당시 국제여단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휘관 중의 한 명이었고 이 중 제9중대의 대다수는 스폐인 공화국군 출신이었다. 제9중대가 탑승한 장갑차의 이름들은 "마드리드", "과달라하라", "부루네테"로 이름 붙여졌는데 모두 스폐인 내전 때의 전투 이름들이었다.

파리 시민들은 자신들을 해방하기 위해서 진격한 용사들이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감격에 겨운 시민들은 병사들과 함께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와 혁명의 노래 "인터내셔널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프랑스 사회는 오늘날에도 철도노동자들에 대한 뜨거운 지지를 마다하지 않는다. 철도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귀족 노동자들의 '철밥통 지키기'라는 공격을 일삼는 대한민국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것은 프랑스가 노동권에 대한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는 것 이외에도 고난의 시절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철도노동자들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해방과 대비되는 것은 대한민국의 해방이다. 프랑스는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지원이 있었지만 국내 무장 저항조직과 해외 망명 정부를 비롯, 해방 투쟁에 나섰던 주역들이 침략자를 몰아내고 다시 공화국을 세웠다. 독일에 부역했던 친독파의 몰락과 단죄는 필연이었다. 반면 권력에 눈이 먼 노인이 초대 대통령이 되고 친일파들에 의해 장악된 대한민국은 아직도 그 역사적 굴레를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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