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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다시 나와야 나라 산다? '이명박근혜' 폐해 잊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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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 다시 나와야 나라 산다? '이명박근혜' 폐해 잊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0> 경제 개발, 열여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그동안 1960∼1970년대 고도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다각도로 짚었다. 이 사안과 관련해 더 살펴볼 문제로는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박정희 집권 18년의 경제에 관해 1970∼1980년대에 많은 학자가 우려한 것 중 하나는 과도한 해외 의존이다. 여러 면에서 너무 심하게 우리나라가 해외 의존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철환 교수의 글을 보면 국내 총생산에 대한 대외 의존도, 이건 수출과 수입을 합해 비율을 낸 것인데 이러한 대외 의존도가 1974년에 미국은 15퍼센트, 일본은 16퍼센트로 나오고 독일도 20퍼센트 미만으로 돼 있다. 그런데 한국은 1974년에 수입 의존도가 전체 국내 총생산의 53퍼센트, 수출 의존도가 38퍼센트로 나온다. 그래서 90퍼센트가 넘는다고 써놨다. 이 양반은 나중에 한국은행 총재를 지내는 인물로 수치에 밝은 사람이다. 물론 통계를 어떤 방식으로 내느냐에 따라서 이 수치가 다 달라지더라. 전철환 교수가 다른 글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어느 경우건 간에 한국이 유독 대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라는 건 틀림없다.

그래서 전에도 말한 것처럼 1980년대 초가 되면 외채 망국론이 나온다. 국제 수지가 누적적으로 적자를 보게 돼서 외채 원리금 상환조차 어렵게 된 것이다. 기일이 도래하는 원리금을 상환하기 위해 다시 신규 외채를 끌어 써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자료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는데, 한 자료에 따르면 1970년대 말에 200억 달러의 외채를 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다른 한 글에는 1980년까지 외자 도입액이 도착 기준으로 226억 달러, 확정 기준 그러니까 들어오기로 돼 있던 것 기준으로는 292억 달러였다고 돼 있다.

외채 망국 위기에 몰렸던 한국 경제, 내수 희생 위에서 성장한 한국 기업

프레시안 : 그 정도면 국가 경제가 빚더미에 깔려 허덕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이에 더해, 이 시기에는 특히 대일 무역 역조 문제가 심각했다.

서중석 : 해외 의존이 심한 것에 더해, 일본과 달리 한국은 내수를 희생하는 방식으로 수출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그 의존 형태가 더 나쁜 형태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1970년대 내내 한국 사람들이 겪은 것이지만 텔레비전이건 냉장고건 자동차건 한국 기업이 국내에 파는 것하고 외국에 파는 것의 가격 차이가 너무 심했다. 농민들에게 필수인 비료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국내 소비자의 희생 위에서 수출이 이뤄졌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국내 기업들이 국제 기업보다 싸고 좋은 상품을 만들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니까 국내에는 비싸게 팔고 외국에는 싸게 팔아야 경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료 가격을 보면 1970년 기준으로 톤당 2만7224달러였던 것으로 돼 있는데, 이건 일본보다 6344달러가 비싼 가격이었다. 농민들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내수 희생 위에서 수출이 이뤄졌다는 것도 문제가 심각한 건데, 중화학 공업을 다룰 때도 말한 것처럼 '일반 기계 공업의 수입 의존도가 대단히 높다. 그래서 한국 공업이 자립성이 약하다', 이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제조업 전체에서 일반 기계의 비중이 1960년에 2.4퍼센트였는데 1980년에는 2.0퍼센트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공작 기계가 중화학 제품에서 차지한 비중을 보면 1963년에 1.9퍼센트였던 것이 1981년에는 0.1퍼센트로 나와 있다. 산업용 기계가 차지한 비중을 보면 1963년에 3.2퍼센트였던 것이 1981년에 2.4퍼센트로 돼 있다. 이렇게 비중이 계속 낮아진 걸 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일반 기계 공업이 일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그로 인한 문제점이 당시 많이 지적됐다. 이건 공작 기계라든가 산업용 기계를 포함하더라도 마찬가지일 터인데, 어쨌건 그런 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예컨대 1978년 대일 무역 역조의 85퍼센트가 기계류 무역 역조로 돼 있다. 아울러 산업 기계 수입의 70퍼센트가 대일 의존이어서 한국의 중화학 공업은 일본에 종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이 시기에 우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실물 부문뿐만 아니라 금융 부문도 만만찮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되는 관치 금융 문제다.

서중석 : 금융 자율성 상실, 이것도 큰 문제로 지적됐다. 그야말로 관치 금융이라고 불리는 그대로여서, 우리가 IMF 위기 때도 그렇고 이런저런 국제 금융 위기를 만날 때마다 금융 허약이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지 않았나. 그런데 이게 박정희 정권 때, 특히 중화학 공업 시대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수출액 할당, 공장 용지 문제, 외자 도입 등 민간 경제에 대해 시시콜콜, 아주 구체적으로 간섭을 많이 했다. 기업 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겉모습은 은밀한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명령이었는데, 가장 강력한 간섭 수단이자 정부 개입을 노골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금융이다. 정책 금융 비중이 무려 80퍼센트나 된다는 것은 정권이 얼마만큼 금융을 통해 기업들을 통제하려 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만큼 금융 기관이 권력으로부터 억압을 받고 자율성을 상실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얼마만큼 자원의 합리적 배분이나 기업가 정신 같은 걸 저해했는가를 보여준다.

금융 시스템의 치명적인 약점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정부가 지속적으로 금융권에 간섭하고 저금리를 강제로 유지하도록 해서 은행의 자생력,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든 것이다. 그 때문에 금융 시스템이 계속 악화돼서 금융 산업 낙후가 20세기 끝까지 한국 경제에 많은 부담을 줬다고 박영구 교수는 분석했다. 이 점은 21세기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지 않았나. 또한 박영구 교수에 따르면 대출 시장에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금융 기관들에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고 이것이 1970∼1980년대에 은행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한 원인이 됐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강남 공화국'의 그늘…박정희 정권 거치며 투기 사회로 나아간 한국

프레시안 : 한국 자본주의의 오늘을 상징하는 곳 중 하나가 강남이다. '강남 공화국'이라는 말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다. 한적하던 강남을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바꾼 계기는 박정희 정권의 개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투기 확산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복부인이라는 말이 이 시기에 유행어가 될 만큼, 강남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이 투기로 몸살을 앓았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에서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점은 투기가 굉장히 조장됐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투기 성향이 이 시기에 아주 크게 나타나게끔 하는 정책이 되지 않았느냐, 이런 비난도 많이 받았다. 1970년대의 엄청난 물가 상승은 경제 성장력을 억압하면서 비생산적인 경제 활동, 특히 투기에 의한 부의 축적 성향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박 정권 경제의 큰 폐해 중 하나가 부동산 투기를 방임했고 또 때로는 조장한 것 아니냐, 이렇게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박 정권 말년에 가서야 부동산 투기를 규제하지 않나.

부동산 투기 하면 강남 땅 투기, 아파트 투기 같은 게 한국인들한테는 저절로 떠오르는데 지하철 2호선도 원래는 순환선을 계획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걸 서울시장이 밀어붙였고, 한홍구 교수에 의하면 어느 도시 계획 위원이 이를 반대하니까 그 사람한테는 연락도 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 2호선이 강남을 관통하게 된 것이다. (지하철 2호선은 본래 왕십리와 영등포를 잇는 노선으로 계획됐다. 이를 구자춘 서울시장(재임 1974∼1978)이 강남을 관통하는 순환선으로 바꿨다. 이는 강남에 많은 사람이 몰리게 만든 요인 중 하나다. '편집자')

<주택은행 20년사>를 보면 1977년 하반기부터 아파트 건설, 농촌 주택 개량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투기성 유휴 자금이 부동산 시장에 유입돼 1978년 초에 주택 경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쓰여 있다. 여기에는 강남고속터미널 주변에 정부가 아파트 단지를 조성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1978년 잠원동, 반포동 일대 이른바 신반포지구 아파트 건설 붐이 아주 거세게 일어나지 않았나. '아파트만 사두면 떼돈 번다', 이런 이야기가 대단히 크게 돌았다. 그래서 유휴 자금이 아파트 시장으로 몰려 강남 토지 투기에 동원된 것이다. 정부는 1978년 8월 8일에 가서야 '부동산 투기 억제 및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 대책'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하여튼 강남을 중심으로 한 투기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일어났느냐 하는 것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에 중동 건설 이야기를 할 때 이러한 투기가 중동 건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점도 작용을 많이 했다. (권력 핵심 인사도 강남 땅 투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70년대에 서울시 간부를 지낸 손정목의 책에는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이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의 지시에 따라 강남 땅을 사고팔아 거액의 차익을 챙겨 정치 자금을 만든 이야기가 나온다.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1971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부동산 투기와 관련해 이 시기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있다. 1978년에 터진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이다. 정관계 고위 인사는 물론이고 비리를 감시해야 할 언론인들까지 대거 현대 측으로부터 뇌물성 특혜 분양을 받았다가 들통 난 사건이다. 박정희 집권기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 이 사건에 연루된 인사만 200명이 넘었다. 수많은 서민들은 분노와 허탈감을 곱씹어야 했다.

서중석 : 이정우 교수가 쓴 글을 보면 박정희 정권 시기가 역대 여러 정권 집권기 가운데 지가 상승률이 제일 높은 것으로, 유난히 높다고 이야기해도 좋을 만큼 높은 것으로 나와 있다. 1963년에서 1979년 사이에 연평균 지가 상승률이 무려 33.1퍼센트나 됐던 것으로 나와 있다. 전두환 정권 시기인 1980년에서 1987년에는 14.9퍼센트, 노태우 정권 시기에는 17.7퍼센트로 나와 있는데 그것에 비해 월등 높다. 박정희 정권 시기였던 1963년에서 1979년 사이에 전국 지가 총액이 3.4조 원에서 329조 원으로 100배 가까이 폭등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33.1퍼센트가 나온 것이다. 이정우 교수는 이렇게 해석했다. "이러한 지가 폭등은 독재 정권의 저돌적 목표 달성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장 지상주의, 실적주의가 개발 위주 정책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무조건적 개발주의로 전국의 땅을 파헤치고 길을 닦고 시멘트를 거기다 들이부었다. 호주 역사학자인 개번 매코맥 교수는 일본을 토건 국가라고 부르면서 이 토건 국가 속에 정경유착의 부패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GDP에서 건설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일본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보다 높은데, 한국은 그런 일본보다도 높은 것으로 나오고 그랬다. 투기를 조장, 방관하면서 정부가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한국을 투기 사회로 가게 한 것 아닌가. 그러면서 사회적 위화감을 극대화한 면이 있다. 사실 이 당시 건설업자는 투기성이 상당히 강했다.

서민 주택 정책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속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니, 아무리 근면 성실하게 일해 월급을 받아봤자 투기꾼들이 버는 돈과 비교해보면 정말 허망하기만 했다. 그 당시에는 아파트 한두 채만 전매하면 노동자들이 몇 년 저축한 것보다도 더 커다란 이득이 떨어지지 않았나. 아파트를 여러 채 갖고 있거나 토지를 좋은 데 사두면 평생 놀면서 부자로 살 수 있는 사회가 돼버린 것이다. 요즘에도 장관들을 임명할 때 이 투기 문제가 항상 등장하지 않나.

투기성 경제와 연관성이 큰 것으로 소비 성향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건 내수와 상관없는 문제다. 투기성이 강하다고 해서 내수가 좋아지는 건 아니지 않나. 1인당 GNP가 100달러를 겨우 넘어선 1960년대 중반부터 개발 경기에 편승한 고소득층이 생기면서 사치품 골프 문제가 발생했다. 1960년대에는 골프 치는 것이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고급 주택에다가 돈을 마구 쓰는 소비 패턴이 더욱 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룸살롱이 번성하면서 '사회가 타락하고 있다'는 개탄이 참 많이 나왔다. 그러다가 결국 1990년대 후반 IMF 위기를 맞으면서 '우리가 너무 낭비해왔다'는 반성도 많이 나왔지만, 투기 경제와 연결된 소비 풍조는 마치 한국인의 습성이 된 것처럼 쉽게 조정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랬다.

▲ 1981년 12월 10일, 잠실 주변에서 아파트 등 개발이 한창인 가운데 개발에서 소외된 수서동에 수확한 볏단들이 쌓여 있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이 오늘날과 대조적이다. 19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 오늘날 강남 지역의 상당수는 이런 모습이었다. 수서동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진 속 모습과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재탄생한다. ⓒ연합뉴스


홍보·선전에 치중한 박정희 정부와 형식주의

프레시안 : 기초를 튼튼히 하고 내실을 다지지 않으면 경제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한국인들은 IMF 구제금융 위기 때 뼈아프게 경험했다. 수치상으로는 IMF 위기를 극복했다고들 하지만, 위기가 와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강인한 체질로 경제가 다시 태어났는지는 의문이다.

서중석 : 1970년대에 기자들이라든가 경제 관련 인사들이 대만에 갔다 오면 많이 한 이야기가 있다. '대만은 과도한 홍보, 선전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지무지하게 발전해 이렇게 잘산다는 식의 얘기를 잘 안 한다. 오히려 그런 걸 감추면서 내실을 기한다.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하지 않느냐.' 1970년대에 기자들이 쓴 글 같은 것을 보면, 이런 점에서 대만하고 큰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홍보, 선전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5.16쿠데타를 일으킨 주역이 정보 장교여서 이들이 중앙정보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어쨌건 이 사람들은 쿠데타 직후부터 홍보, 선전을 굉장히 많이 했다. 1967년 선거 때도 보면, 크게 나온 건 아니지만 마이카 이야기도 나온다. 앞에서 한국 사회가 투기와 연관해 소비 사회로 가는 걸 이야기했지만, 너무나 겉에 치중하고 허세, 사치 풍조 같은 게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많았다. 군사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수치를 주로 담은 차트를 딱 놓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형식주의인데, 그런 형식주의라든가 관료주의, 관료와 기업체의 업적주의 같은 것들이 형식만 중시하는 허세적인 면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벼 수확량 같은 것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어떤 때는 그냥 몇 백만 석이 늘어나고 그랬다. 책상 위에서 늘어난 것 아니겠나.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분위기를 만든 것 아니냐고 당시에 이야기하고 그랬다. 수출 목표나 성장 목표 달성을 위해 아주 강하게 채찍질을 하고 그러면서 경제 논리, 경제 현실을 무시한 채 목표를 채웠다. 심지어 다음 해에 수출할 것을 그해 안에 다 수출하게 하는 식의 것들도 신문에 보도되고 그랬다.

이 문제는 텔레비전을 통한 선전, 홍보와도 관련 있었다. 이런 것들이 텔레비전 같은 것을 통해 '이렇게 우리 경제가 굉장하게 발전했다', 이런 선전으로 나가고 그랬는데 그것도 좀 허세적인 측면이 있지 않느냐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서 그런 걸 본 사람들 중에는 '우리 박 대통령이 정말 열심히 일한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들이 많은 것 같더라. 그러면서 그때 받은 인상이 계속 남아 나중에 작용하는 면도 나타나고 그런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이뤄진 이런 홍보, 선전 부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의롭고 정직·성실하면 무능력자 되는 세상 만든 박정희식 성장 만능주의

프레시안 : 그간 경제 개발과 관련된 문제를 짚으면서 대만과 여러 차례 비교했다. 이에 대해 대만 경제의 긍정적인 측면만 주목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서중석 : 당시 대만에는 중소기업을 적극 육성하고 중화학 공업화도 재벌 중심으로 하지 않은 점, 부정부패를 철저히 추방하려 한 점, 물가 안정과 농촌 개발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 점 등 박정희 정권과 다른 지점이 여럿 있었다. 여러 면에서 좋게 볼 수 있는 대목 아닌가. 물론 1990년대 이후에는 양안 관계의 특수성 등 때문에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는 면도 있긴 하지만, 1970∼1980년대에 한해서 보면 그런 주목할 만한 면이 분명히 있었다.

이제 박정희 집권 시기의 경제 정책, 경제 운용 문제들을 전반적으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 시기의 경제에 대해서 당시부터 천민 자본주의라는 비판이 많았다. 전에 내가 하향 평준화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시기 경제와 관련해서도 '도대체 이게 경제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인가. 권력이건 기업주건 그렇지 않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들었다. 권력과 결탁하거나 권력의 비호를 받으면, 투기 같은 걸 잘하면 일확천금할 수 있는데 뭣 때문에 힘들게 일하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강남 땅이나 서울 근교 땅을 1970년대에 사들였거나 아파트 몇 채를 끌어안으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도 부자로 잘사는 사람이 많지 않나. 이래서 재벌이나 기업주들도 부동산 투기에 아주 적극적이었고 사업 못지않게 그런 쪽에 신경을 많이 쓰는 걸 볼 수 있다. 해방 직후에 친일파 청산을 못한 것이 한국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친 것처럼 이런 천민 자본주의, 또 성장 제일주의나 성장 만능주의는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의식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회 가치관, 정의에 대한 관념, 성실의 개념 같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천민 자본주의라는 비판을 많이 받은 박정희 집권 시기의 자본주의는 금융 특혜를 비롯한 각종 특혜, 정경유착, 각종 이권 등이 말해주는 것처럼 경제 논리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권력과 맺은 관계에 의해 좌우된 경우가 많았다. 그와 함께 기업주들에게 기업 윤리 의식이 있느냐 하는 것도 계속 문제가 됐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잘산다든가, 미국 등으로 자금을 도피시켜놓는다든가, 부당한 방식으로 중소기업 영역에 침범하고 중소기업을 도산시킨다든가, 부동산 투기에 너무 깊숙이 개입돼 있다든가 하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았다.

프레시안 : 이 시기 기업주들의 행태가 잘 드러난 사례 중 하나가 경제 쿠데타로 불리는 1972년 8.3조치 후 사채 신고 현황이다. 당시 사채 신고액의 3분의 1이 '위장 사채', 즉 기업주가 자기 기업을 상대로 사채놀이를 한 것이었다. 아울러 1979년 박정희 정권 몰락을 앞당긴 YH사건 역시 경영진의 자산 빼돌리기와 관련돼 있었다. 잘나가던 회사의 자산을 경영진이 해외로 빼돌린 후 노조를 탓하며 폐업 공고를 내면서 YH사건이 불거졌다. (관련 기사 : "박정희는 2000명, 박근혜는 5000명…상황 더 나빠졌다") 경제 발전에 말 그대로 헌신한 다수의 노동자들이 고도성장의 과실을 공정하게 누릴 수 없었던 시대의 풍경이다.

서중석 : 여기서 박정희 대통령이 내세운 조국 근대화라는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18년 동안 참 많이 나온 말인데,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지만 근대화라는 것은 정치의 근대화, 그러니까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의 진전, 그리고 사회 의식과 시민 의식의 성숙 같은 것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조국 근대화라는 말은 사실상 경제 발전만 의미했다. 그 경제 발전과 관련해서도 성장 만능주의, 성장 제일주의에 매달렸다. 그렇게 성장 만능주의에 매달렸기 때문에 그 당시에도 물신 숭배주의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반공주의와 결합한 정보 정치가 횡행하면서 정치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쿠데타나 계엄, 긴급 조치와 같은 적나라한 권력이 장기간 존재했다. 그러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너무 경제에만 빠져 있는 것 아니냐', 이런 비판이 많이 나오게 되니까 한때 대안으로 제시됐던 것이 제2경제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신년 기자 회견에서 "조국 근대화 작업에 있어 외형적인 것, 즉 생산, 수출, 건설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1경제라고 하고 정신적인 측면, 즉 근대화의 철학적 바탕에 대한 이해나 국민들의 올바른 마음가짐들을 통틀어 편의상 '제2경제'라고 불러본 것"이라며 제2경제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른바 정신 측면의 후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편집자')

그러나 당시 연설문 등을 보면 이 제2경제는 몇 번 언급돼 있을 뿐이고 그것도 그렇게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 있지는 않다. 어쨌건 국민교육헌장 주입 같은 국가주의 교육에서 한국은 벗어나지 못했고, 제2경제와 관련해 정신문화원이라는 게 만들어졌는데 그 정신문화원이라는 것도 유신 체제를 옹호하는 유신 정신 교육 센터가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2경제라는 것도 국가주의와 얽혀 유신 체제를 합리화하는 기능을 할 뿐이었고 단속, 탄압, 획일주의, 국가주의 같은 것들이 여기에서 많이 엿보인다는 것이었다.

고영복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산업화 이념이 한국의 사회 구조 형성을 제약했다고 보고 그 이유로 몇 가지를 들었다. 우선 사회의 자율성이 살아 있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성격 구조의 유지, 강화에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계층 구조를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자본 축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생활 방식마저 부박한 풍조에 물들게 했고 밀수, 탈세, 특혜, 투기 등의 부조리가 공공연하게 횡행하게 했다고 고 교수는 비판했다. 계층 상승은 개인 능력에 따라 이뤄지지 않고 현실을 교묘히 이용한 부정부패자에게나 가능했으며, 정직이나 성실이라는 건 무능력자를 가리키는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고 교수는 재벌이 끊임없는 불신과 증오의 대상이 된 것은 그러한 근대화 시책의 소산이며, 그러다보니까 결국 우리 사회의 목표 체계 확립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 2006년 8월 30일, 경북 구미의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박 전 대통령의 사진을 관람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정희가 다시 나타나면 한국의 어려움이 해결된다? 위험한 착각

프레시안 : 박정희 집권기에 만들어진 한국 자본주의의 기본 틀은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숱한 문제를 발생시켰는데도, 1990년대 이후에 박정희 신드롬이 나타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여러모로 걱정스러운 현상이다.

서중석 : 박정희 집권기, 특히 유신 시기의 천민 자본주의나 박정희의 성장 만능주의, 성장 제일주의 곧 조국 근대화론은 한국 사회에 지우기 힘든 영향을 끼쳤다고 난 본다. 한국 사회를 불구로 만든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IMF 위기 시기 이후에도 그런 현상이 있었고 2000년대에 국제 금융 위기를 맞이하면서도 조금은 그런 현상이 보였는데, 박정희가 다시 나타나면 한국 경제의 어려움이나 한국의 여러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난 2007년 대선을 보고 정말 크게 놀랐다. 그 시기 한 후보가 여러 가지로 많은 의혹을 사고 있었고 그건 대통령의 자격과 관련해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건 상관없다. 별 문제가 아니다. 한국 경제가 발전하고 성장만 하면 되는 것이고 그 후보를 당선시키면 그렇게 될 것 같다', 이런 식의 분위기가 수많은 유권자를 휩쓸면서 그런 의혹을 지워버리고 말더라. 그와 관련해, 대선에서 승리한 그 후보의 집권 후반기에 선대인경제연구소장 선대인이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인상적이더라.

"지난 대선에서 우리는 박정희 코스프레를 한 이명박 대통령을 택했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을 중심으로 한 토건 경제, 부동산 거품 떠받치기에 올인한 부동산 거품 경제, 친재벌 경제, 인위적 고환율을 바탕으로 한 극단적 수출 의존 경제 등 박정희 경제를 고스란히 재현했다. 그 결과 지금 민생 경제가 살아났는가. 그런데도 이번 대선에서 여전히 박정희 향수에 젖어 투표한다면 한국 경제는 회복 불능 상태로 빠져들 것이라고 장담한다."

2012년 10월 선거 기간에 나온 글이다. 박정희 코스프레, 그러니까 박정희 흉내를 낸 후보를 택한 결과가 그렇다는 것인데 난 이것이 시사하는 게 상당히 있다고 본다.

아울러 이와 같은 성장 제일주의, 투기·특혜·정경유착의 천민 자본주의와 정치가 부재한 권력 지상주의는 박정희 추종 세력에게 영향을 끼쳐, 건강한 보수주의가 자라지 못하고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도 수구적 냉전 세력으로 퇴행·퇴화하게 했다. 이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의 '작은 박정희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 한 사람만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4대강 사업 등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작은 박정희들'을 택한 대가를 한국 사회가 톡톡히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박정희 정권 18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작은 박정희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서중석 : 박정희 집권 시기 경제적 결함을 여러 가지로 지적했는데, 그 결함이 크다 보니까 그것이 마치 체질처럼 돼서 수정할 방법을 찾기가 힘들게 됐다. 예컨대 과도한 해외 의존이라든가 내수 시장 빈약, 경제력이 소수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재벌 중심 경제, 부동산 투기 등에서 볼 수 있는 투기성 경제, 타율적 금융, 노동 통제 같은 것들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게 된 것이다. 문제가 있는 경제에서 수십 년 동안 살다보니까 잘못된 것을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끼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걸 대폭 수정하겠다고 나서면 오히려 선거에서 크게 외면받을 수 있는 상황이 돼버렸다. 2007년 선거 같은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성장 제일주의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우리 경제를 크게 수정해야 한다. 고통을 같이 감수하자. 힘들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면 오히려 그야말로 유권자로부터 외면받기 쉬운 상황이 된 것이다. 금융 위기 등 국제 경제에 큰 위기가 올 때마다 '이건 참 큰 문제다', 이렇게들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면 또 '이제는 뭐∼' 하면서 잘못된 관행, 과거의 경제 모습에 그대로 안주하는 상태다. 정말 큰 위기가 와야 정신을 차릴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건 정말 문제 아니겠나.

현재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전자, 자동차 같은 것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재벌 기업이 미국의 GM, 일본의 소니, 핀란드의 노키아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이것과 관련해, 한때 세계의 핸드폰 시장을 지배했던 노키아로 유명한 핀란드의 전직 대통령 그리고 총리가 한 이야기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부분을 짧게 언급하는 것으로 이 부분을 마무리하자. 2014년 10월에 핀란드 전직 여성 대통령인 타르야 할로넨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대형 기업 한두 곳에 집중한 것이 우리의 실수였다. 지금은 중화학 산업에서 콘텐츠와 네트워크 산업, 그리고 중소기업에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했다. 또 같은 해 11월에 방한한 핀란드 현직 총리는 창의성 있는 중소기업을 키우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아흔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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