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미국의 진보 매체 <카운터펀치> 11일 자에 실린 '한반도 정치의 상처들 : 리퍼트 테러의 기호학'(Gashes in the Body Politic: The Semiotics of Face Slashing in South Korea)을 전문 번역한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미국이 무력으로 조선을 개국하려 했던 1866년 병인양요에서 조선의 망국, 한반도의 분단, 광주 학살, IMF 위기에 이르기까지 지난 150년간 미국이 한반도에 입힌 정치, 경제, 문화적 상처들을 하나하나 보여준다. 나아가 한국의 성형 열풍은 가해자인 미국을 닮으려는 왜곡된 자아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국인이 이러한 자기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뒤틀린 한미 관계를 바로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필자 K. J. Noh는 미국의 활동가이자 작가, 교사이다. (
주한 미국 대사 마크 리퍼트가 얼굴에 큰 자상(刺傷 : slash)을 입었다. 미국의 한반도 정치 간섭에 반대하는 김기종이라는 과격분자의 소행이었다. 그는 보안요원들에게 제압당하기 전에 "남북한은 통일돼야만 한다"고 외쳤다.
김기종은 한미 연례 군사훈련인 '폴 이글'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리퍼트 대사를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이 훈련은 지구상 최대의 실전 군사 훈련으로 20만 병력과 항공모함 전단 등이 동원돼 상륙작전 등을 모의 실행한다. 그 범위와 화력의 규모만으로도 이 훈련이 실시될 때면 남북한 간의 긴장은 항상 고조돼 왔다. 남북 간의 대화와 긴장 완화, 통일을 위한 노력을 방해해 왔다.
과거 여러 차례의 폭력 행사로 경찰에도 잘 알려진 김기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퍼트에 접근해 그의 얼굴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상처는 길고 깊어 80바늘을 꿰매야 했다. 다부진 얼굴에 피를 흘리며 공포에 질린 대사의 모습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김기종의 행위는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체면의 손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많은 한국인들이 리퍼트 대사에게 사과와 자책의 메시지를 보냈으며, 다른 이들은 거리에서 테러를 비난하고 대사의 쾌유를 기원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개고기가 상처 회복에 좋다며, 개를 사랑하는 리퍼트에게 개고기를 가져다준 한 시민의 행동은 한미관계의 모순을 절묘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대책 없는 관용, 쾌유를 바라는 마음과 동시에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적개심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긴 한국의 전통 미신은 죽어가는 부모를 살리기 위해 자식의 살점을 베어내 먹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번 행위가 한미관계를 손상시켰다며 김기종에게 살인미수, 폭행, 그리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까지 씌우려 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또한 북한이 연루됐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김기종은 김정일의 영화비평에 관한 책을 갖고 있으며, 정부의 허가 아래 나무 심기 등을 위해 북한을 7차례 방문한 바 있다.) 만일 집권 당의 의도가 관철된다면 이번 사건은 테러방지법 통과 및 말썽 많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도입의 빌미가 될 것이다. 테러방지법이 통과된다면 정치적 반대파는 누구나 친북으로 몰려 잡혀갈 수밖에 없으며, 사드 도입은 중국과의 긴장을 격화시킬 것이다.
친절하고 붙임성 있으며, 정보장교에서 외교관으로 변신한 리퍼트가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연사로 나설 예정이었던 조찬 모임에서 드러난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격렬한 열정, 그리고 깊은 상처였다.
리퍼트 대사의 명랑한 홍보 캠페인, 즉 한국어로 블로깅과 트위팅을 하며 한복을 입고, 대중 앞에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행위의 밑바닥, 그리고 일견 차분하고 원만해 보이는 한미관계의 밑바닥에는 때로는 격렬하게, 또는 폭발적으로 서로 충돌하는 깊은 조류가 흐르고 있다. 이것들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트라우마와 분노의 감춰진 격랑과 폭력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다.
역사적 상처들 : 식민지의 소용돌이
한반도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나라였다. '은둔의 왕국'으로 불렸던 조선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식민주의 세력들과의 교역과 교류를 거부했다. 이들에게는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외국의 야만인들과 섞여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믿은 것이다. 조선은 식민주의 세력을 "오로지 물질적 재화만 탐할 뿐, 인간의 도덕이나 품위에는 전혀 무지한 야만적 짐승"이라고 생각했다.
1866년 중무장한 미국 상선 제네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강요했을 때(병인양요 : 역자), 500년 전통의 조선 왕조는 고립의 미덕을 사수하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셔먼호는 돌아가라는 조선의 요구를 거부하고, 인질을 잡고 함포 사격을 했다. 그러나 조선군의 공격으로 배는 불타 침몰했으며 승무원들은 살해당했다. 조선을 개국시키려는 미 함포 외교의 1차전은 이렇게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상대방의 '노'(No)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미국은 1871년 완벽한 해상 침공의 준비를 갖추고 되돌아 왔다(신미양요 : 역자). 5척의 전함과 24척의 보조함, 그리고 650명의 병사를 동원한, 그야말로 '이교도와의 작은 전쟁'을 감행한 것이다. 이번에는 조선이 졌다. 조선의 병사와 백성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끝까지 저항했지만, 마지막 한 사람까지 미국에 학살당했다. 결국 1882년 상호 존중이라는 감언이설로 포장된 미-조 ‘우호’ 조약이 체결됐다.
당시 미국 측 서명자였던 슈펠트 제독은 기쁨에 겨워 다음과 같이 썼다.
"태평양 저쪽의 미국은 신랑이요, 중국 일본 조선은 신부라...이로써 동양과 서양은 하나가 됐고, 제국의 팽창은 종점에 이르렀으며, 인류의 힘은 절정에 달했다"
슈펠트 제독이 "마침내 신랑이 도착하니...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동양의 온갖 보물들이 마련된...신혼잠자리"에 대한 기대로 온몸을 부르르 떠는 한편, 누구도 신랑이나 신부에게 그 '신혼 잠자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물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상호 경원 속에 조약은 체결되고 비준됐으며, 짧은 밀월 기간이 지난 후 현실 정치가 상호 존중을 짓밟았다. 그리하여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전면적인 유린을 당했다.
혹자는, 역사를 수많은 비밀 금고를 가진 여인에 비유한다. 태평양의 깊은 물은, 그 소용돌이와 와류와 격랑 속에 수많은 기억과 원한을 간직하고 있다. 선량한 미국 대사 마크 리퍼트는 자신도 모르게 이 격렬한 역사의 격랑 속으로 빨려들어 간 것이다.
한반도 정치의 수많은 상처들 : 최근의 상처
한반도의 분단
1945년 8월, 미 육군의 젊은 대령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이 상부의 명령을 받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와 자(尺)를 가지고 한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38선에 선을 그었고(slash) 이에 따라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났다. 이로써 1300년 동안 계속됐던 단일 왕조의 영토는 갑작스런 종말을 고했다.
이 분단은 우선 내전을 초래했고, 결국은 1950년의 열전으로 이어졌다. 이후 한반도는 지금까지 분단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학자들은 불길한 조짐은 이미 그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고 말한다. 미국은 남한에 자리를 잡고서, 잠정적 분단 상태의 해소를 막기 위한 온갖 장벽들을 세웠다. 우선 한반도 전체의 총선거를 가로막았고, 일련의 호전적 지도자들을 옹립하고 지원했으며, 전쟁 이후 미군 철수를 거부했고(중공군은 북한에서 철수했다), (북한의) 불가침조약 요구를 한사코 거부했으며, 마지막으로 한반도를 냉전 구도라는 단단한 사슬에 옭매어 두었다.
잔인한 괴뢰 : 한강의 비시 정권
한반도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됐을 때, 한국인들은 스스로의 정부(self-governance)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일제에 저항해 독립을 지향했던 수천 개의 인민위원회에 바탕을 둔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수립됐다. 인민위원회는 그 지향에서 대중적, 민주적, 민족적, 사회주의적이었으며, 이들은 효율적 행정과 함께 (일제가 두고 간) 재산을 재분배하고 공장을 집산화했다. 미 군정은 이러한 상황에 즉각 주목했고, 특히 한반도가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공산주의 출범에 매우 유리한" 인프라와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미군은 인민위원회와 인공을 불법화했고, 그 지도자들을 투옥했다. 나아가 일제의 모든 식민지 통치 기구를 원상 복구했다. 친일파가 복권되고 국방경비대가 수립됐다.
(일제에 협력했던) 경찰, 군, 판사, 검사, 관료들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잔인하고 사악하며 부패한 정부였다. 미군은 또한 대중들의 봉기를 탱크와 총칼로 짓밟았다. 1946년 10월 대구 봉기의 경우 300명이 사망하고 2만 6000명이 부상했으며 1만 5000명이 체포됐다. 또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이 요구한 한반도 전체의 선거를 가로막았다. 그 대신, 대중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강행해 이승만을 지도자로 앉혔다. 프린스턴대학에 수학한 이승만은 아첨꾼이자 광적인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잔인했으며 (미국 등) 제국주의 열강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각오가 돼 있었다.
이승만은 또 다른 형태의 상처를 낼 작정이었다. 이번에는 문자 그대로 한반도의 땅 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을 어떻게 다룰지는 내가 잘 알지...불도저로 거대한 구덩이를 파서 여기에 공산주의자들을 쳐넣고 흙으로 덮어버리면 된다. 말 그대로 지하에 있게 되는 거지"
이승만은 자신의 말대로 실행했다.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들을 이런 방식으로 제거한 것이다. 정체를 밝히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속아, 또는 단순히 할당 인원을 채우기 위해 강제로 서명을 했던 2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양민들이 살해당했다. '보도연맹 학살'이다. 1950년 여름의 몇 주 동안 이들은 무참히 살해됐고, 이승만이 얘기했던 거대한 구덩이에 파묻혔다. 미군은 이 학살을 기록했고 도왔다. 이 학살의 범위와 처리 속도, 규모는 현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학살을 주도한 이승만은 20세기 최악의 도살자 중 하나로 기록될 만하다.
그러나 20만이라는 숫자도 6.25전쟁 자체가 초래한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규모다. 그 잔인했던 동족상잔의 결과, 한국인 5백만이 사망했고(5명 중 한 명꼴), 세 가족 중 한 가족은 이산의 아픔을 겪었으며, 포화로 상처 입은 한반도의 모습은 마치 달 표면과도 같았다. 또한 분단의 상처와 공포는 너무도 커서 아무도 그 당시의 기억을 온전히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광주 : 시민들의 신체에 칼집 내기
30년 후, 미국이 지원한 독재와 쿠데타가 다시 한 번 한반도에 피로 물든 선명한 칼집을 낸다. 바로 광주다.
1980년 5월 18일, 미국의 묵인하에 자행된 군사쿠데타에 분노한 수백 명의 광주 시민들이 민주개혁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특전사 군인 3000명이 투입됐다. 특전사 군인들은 마구잡이로 시민들을 곤봉으로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베며,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는 화염방사기를 발사했고 여인들을 대검으로 벴다. 군인들은 시위대가 곤죽이 되도록(한 기록에 따르면 이들의 모습은 '옷에 싸인 고깃덩어리 같았다'고 한다) 총 맞고 두들겨 맞고 짓밟혔다. 잔인한 학살을 목격하고 겁에 질린 한 여자아이는 부모에게 "'우리 군인'은 언제 오는 거야?"라고 물었다. 여자아이는 (광주 시민을 학살한) 군인들이 한국 군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학살에 분노한 수십만의 광주 시민들이 공포와 테러를 떨쳐내고 일어섰다. 이들은 민병대를 결성해 군인들에 대적했으며 마침내 5월 21일 군인들을 몰아내고 광주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이었다. 신군부는 20사단의 2만 정예 병력과 헬리콥터, 탱크와 장갑차 등을 동원해 광주를 깔아뭉개고 반란을 진압했다. 사태는 진정됐지만, 수천 명이 사망했고 광주 시민들은 평생 테러의 공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광주 항쟁 진압에 미국이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국군의 모든 움직임은 미군의 통제 하에 있다는 사실이다(현재에도 그렇다). '지휘 계통', '작전 통제'와 같은 군사 용어가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미국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광주 항쟁의 결과는 반미 감정의 폭발이었다. 한국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 방화, 점거가 이어졌으며, 1989년에는 미 대사 관저에 대한 전면 자살 공격이 감행됐다.
한국 경제에 칼집 내기 : 국치(國恥)
1997년 남한은 6.25전쟁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았다.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위기가 아시아 국가들로 번졌으며, 11월에는 "태풍과도 같은 기세로" 남한을 덮쳐 한국 경제를 사실상 파탄냈다. 한국은 미국과 IMF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다. 그때까지 한국은 경제적으로 미국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으며, 소련과의 냉전 대결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의 본보기로 상찬됐다. 따라서 한국은 1980년대의 외채 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제 냉전을 끝났고, 따라서 한국에 대한 특별대우도 끝났다. 남한은 신자유주의적 규율의 엄청난 위력과 잔인함에 온전히 노출된 것이다.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은 래리 서머스를 한국에 파견해 무지막지한 개혁을 강요했다. 한국은 재정 지출 삭감 등 경제 전체를 구조조정 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은 순종을 강요당했고, 경제 규모는 축소됐으며, 재벌도 분해되고, 정부도 감축됐다. 단 두 달 만에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1000달러에서 6600달러로 줄어들었고, 세계 경제에서의 순위는 11위에서 17위로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노숙자들이 늘어나고, 매춘과 대출 사기, 일상적 폭력과 자살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절망에 빠진 부모들에 의해 버려졌다(IMF 고아). 미국은 기쁨에 겨워 "월스트리트가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반면 이전에는 특별한 정치적 성향이 없었던 일반 한국인들은, 이 급격한 운명의 반전에 분노한 나머지 이 사태를 '국치일'이라고 불렀다. IMF 외환위기가 일본의 조선 병탄에 맞먹을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6.25 이후 허리가 부러질 정도의 희생과 노력으로 번영을 이룩했던 한국인들은 5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 경제 및 세계 금융 체제에 종속된 자신들의 경제적 위상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깨달았다. 이후 한국인들은 세계 경제를 주목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냉소적이 됐다.
위안부 문제(차가운 위안)
(한반도에 대한) 가장 중대한 칼집 내기-모욕은 한일관계에 대한 최근 웬디 셔먼의 언급이었다.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일제는 약 20만 명의 여성을 성노예('위안부')로 강제 동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여성은 일제의 제국주의 전쟁에 나선 일본군 병사의 성노리개로 희생됐는데, 대다수가 조선 여성이었다(일본은 이외에도 조선인 1백만 명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파시스트 성향의 현 아베 정부는 이 역사적 잔혹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전 정부의 사과마저 부인하고 있다.
국무부 서열 4위의 고위 관료인 셔먼은 이 복잡한 역사 논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어 한일 양국은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로 전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으려" 노력하거나 민족주의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한일 관계가 경색된 데(박근혜와 아베는 취임 이후 단 한 번도 정상회담을 갖지 않았다) 대한 짜증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을 동원해 중국을 봉쇄하려 하는데 경색된 한일관계가 이같은 미국 전략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셔먼의 발언은, 이미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에 분노했고 역사 문제에 수동적 태도로 일관하는 미국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던, 한국의 정치 계층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초래했다. 분노한 시위대가 미 대사관 앞에 모였고 반미, 반일 구호가 난무했다. 셔먼은 경찰의 호위 속에 조용히 스포트라이트를 피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욕이 준 상처는 하얗게 불타오르고 있으며,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한국인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비록 공개적으로 논의되고 있지는 않지만, 위안부 문제는 한국인 매춘부에 대한 미군 병사의 오랜 착취와 모욕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1882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미관계의 왜곡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 자체가 미군 위안부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경제 전략으로 활용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학대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1992년에 일어난 윤금이 씨 강간살해 사건, 그녀의 죽음은 제국주의적 굴종의 잔혹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국부에는 코카콜라 병이 꽂혀 있었다. 그녀의 항문에는 우산대가 27센티미터 깊이로 박혀 있었다...그녀의 몸과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얼굴에는 세제 가루가 덮여 있었다"
제국이 낸 상처는 깊고 피투성이였다.
미국인을 닮기 위한 '제 얼굴에 상처 내기'
이제 수수께끼의 마지막 조각이다.
드라마틱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미국의 영향력에 대한 불만으로 자기 얼굴에 잔인한 상처를 입은 사람은 리퍼트 대사 혼자만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매년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자기 얼굴에 칼을 대고 있다. 상처를 내는 사람은 과도를 든 싸이코패스가 아니라 외과 의사다. 얼굴에 칼을 대는 이유는 위에 말한, 미국 정책에 대한 불만 때문이 아니다. 자기 외모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한국 도처에 만연한 미국의 문화적 영향이 빚어낸 일이다.
한국은 단연 세계 제일의 성형수술 천국이다. 자신의 외모를 혐오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나라도 한국에 견줄 수 없다. 매년 수십만 명의 한국 여인들이 칼로 자신의 눈을 째고, 코를 높이며, 턱뼈를 깎는 등 자신의 얼굴을 훼손한다. 이 모두가 서양인 같은, 또는 미국인 같은 외모를 갖기 위해서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계 미국인 코미디언 마거릿 조도 바로 이러한 자기혐오를 통해 성공했다)
매년 수십 명이 성형수술 도중 사망한다. 젊은 직장 여성들은 성형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하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굶어가며 돈을 모은다. 서울 강남 거리를 걷다 보면 수많은 성형외과 병원을 볼 수 있다. 주유소나 네일 샵, 편의점보다도 많다. 서울 거리 곳곳에서 수술 전과 후의 달라진 얼굴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광고판을 볼 수 있다.
요즘의 한국인들은 서양의 명품 브랜드 옷과 식품에 열광하며 유치원 때부터 영어 교육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전통적 음악과 언어, 문화 등을 보다 서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훼손하고 있다. 언젠가 한국의 저명한 영화감독 임권택은 이제 더 이상 전통적 한국 영화를 만들 수 없다고 불평했다. 거의 모든 젊은 여성이 성형 수술을 통해 서구적 외모로 변모한 탓에 한국적인 얼굴의 여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상징적 폭력에 대해 말한다. 특정한 문화적 상품과 상징, 취향, 생활방식 등에 권력과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자행되는 폭력을 말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거의 모두 코에 피어싱을 하거나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쌍꺼풀 수술을 하는 등 이 상징적 폭력에 깊이 젖어 있다. 서양 남성을 동경하는 젊은 한국 여성, 또는 성형을 통해 서양인을 닮으려는 젊은이들은 모두 문화적 제국주의의 위력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남보다 앞서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국인들이 내면화했고 자기 훼손을 계속하고 있는 이 상징적 폭력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 사회적 폭력과 함께 이른바 한국의 '진보'의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 또한 한미관계의 뒤틀린 불균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단단하게 고착된 한미관계에서 한국은 미국의 경제, 문화, 상징적 폭력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갑작스럽고 예측불허의 폭력이 행사될 수 있다. 자해의 위험이 언제든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체면'이 모든 것인 나라, 체면 손상이 곧 사회적 죽음을 의미하는 나라이다. 이런 나라에서 성형을 위해서 제 얼굴에 칼을 대는 것은 뒤틀린 민족적 자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계속되도록 만든다. 그 결과 생겨난 '얼굴 인식 불능증'(prosopagnosia)은 갑작스런 난도질, 폭발적인 폭력으로 자신을 드러내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싫고, 또 스스로를 혐오하는 우리 자신이 싫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이 혐오감이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기억하고, 무엇보다 이 혐오감의 원천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