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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왕이 된 반공열사, 골든트라이앵글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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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왕이 된 반공열사, 골든트라이앵글의 비밀 [유라시아 견문] 21세기 중화망 : 치앙라이
2015년 새 연재 '유라시아 견문'이 3월 10일 닻을 올렸습니다. 그 동안 '동아시아를 묻다'를 통해서 한반도, 동아시아, 세계를 가로지르는 웅장한 시각을 보여줬던 유라시아 연구자 이병한 박사(연세대학교 동양사학과)가 앞으로 3년 일정으로 유라시아 곳곳을 직접 누비며 세계사 격변의 현장을 독자에게 전합니다. '유라시아 견문'은 매주 화요일, 독자를 찾아갑니다. (☞관련 기사 : ① 지금 '한미 동맹' 타령할 때가 아닙니다! 서구 몰락 예언한 유길준, 우리는 그를 몰랐다)

마에살롱(Maesalong)

<서유견문>을 읽어간 곳은 치앙라이(Chiang Rai)였다. 태국(타이) 최북단, 미얀마(버마)와 라오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이다. 부모님이 두세 달 겨울을 나시는 피한(避寒)지이다. 날씨는 포근하고 공기는 깨끗하며 물가는 저렴했다. 그곳에 진을 치고 앉아 오래된 여행기들을 하나씩 살펴갔다.

하루는 부모님이 짧은 여행을 권하셨다. 주변 지역 일대를 둘러보자는 것이다. 숙소를 떠난 차는 구불구불 산으로 향했다. 마에살롱(Maesalong)이라는 고산 마을에 가는 길이라 했다. 산세가 제법 근사했다. 흡사 운남(雲南)의 계림(桂林)을 닮았다.

▲ 치앙라이 마에살롱 전경. ⓒwikimedia.org

한참을 오르니 벚꽃이 피었다. 태국은 사시사철 여름인 줄만 알았다. 산 속은 또 그게 아닌 모양이다. 2월 초, 때 이른 봄맞이에 기분이 절로 청량했다. 산 중턱에 이르자 녹색 차밭이 넓게 펼쳐졌다. 차밭이 관광 코스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곳이라면 이미 여러 곳 둘러본 적이 있다. 오히려 내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커다란 공자상이었다. 옷차림이나 얼굴 생김새, 아무래도 공자였다. 태국 차밭에 어인 공자상인고? 의아하고 궁금했지만 물음을 삼켰다. 태국어는 모르고 영어는 통하지 않으니, 마땅히 물어볼 길이 없었다.


산을 더욱 오르자 길 주변으로 숙소와 찻집, 밥집이 늘어났다. 덩달아 한자 간판들도 불어났다. 표기의 순서는 산 아래와는 반대였다. 한자가 먼저이고 태국어가 뒤를 이었다. 신기한 일이로세, 흥미가 돋던 차 '興華中學(흥화중학)'이라는 표석이 눈을 찔렀다. 흥화, 中華(중화)의 重興(중흥)이란 뜻이렸다.

▲ "興華中學(흥화중학)이라는 표석이 눈을 찔렀다. 흥화, 中華(중화)의 重興(중흥)이란 뜻이렸다." ⓒ이병한

대체 이 마을의 정체가 뭐 길래? 호기심이 마구 솟아났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학교부터 카메라에 담았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을 찬찬히 살피니 유독 잦은 이름이 보였다. "段將軍(단장군)". 단장군 카페, 단장군 호텔, 단장군 식당 등 여럿이었다. 단장군의 묘지를 안내하는 표지도 있었다.


부모님은 시장 구경 중이셨다. 자연산 송이버섯을 고르며 흥정이 한창이었다. 곁에 이르자 이번에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이 귀를 찔렀다. "쩌이거싀하오츠더". 소리는 문자로 전환되었고, 의미가 되어 해독되었다. '这个是好吃的', '이거 맛있어요.' 어라? 나는 곧장 되물었다. "니싀쭝궈런마?(你是中国人吗?)" '중국인이세요?' "是的". 그렇단다.

이번엔 똥그래진 눈으로 그쪽에서 물어왔다. "어떻게 중국말을 해요? 홍콩 사람이에요?" "아니요. 한국 사람입니다. 중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에요. 베이징이랑 상하이에서 공부한 적도 있습니다." 통성명이 끝나자 말문이 터졌다. 마침내 이 마을에 대한 궁금증을 해갈해줄 분을 만난 것이다.

"여기는 언제 오셨어요?" "중국 어디서 오셨어요?" "저기 저 단장군이라는 분은 누구죠?" 나는 점점 20세기 중엽, 동아시아 냉전사의 한복판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 '단장군' 묘지 입구. ⓒ이병한

냉전의 마을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일어섰다. 공산당이 국민당을 밀어내고 중원을 차지했다. 그러나 대륙은 원체 크고 넓었다. 건국 선언에도 大一統(대일통)은 미완이었다. 특히 서남부 내륙이 그러했다. 운남성에는 여전히 중화민국을 받드는 세력이 있었다. 93사단과 237사단을 주축으로 한 소위 '국민당 잔군'들이다. 그들에게 베이징은 아득한 곳이었다.

인민해방군이 남진하여 이들과의 격전 끝에 쿤밍(昆明)을 장악한 것은 1950년 1월이었다. 항복을 거부한 일부는 남하하여 버마(미얀마)의 정글로 숨어들었다. 항일 전쟁기 미국이 중(화민)국의 물자 보급을 도왔던 '버마 로드(Burma road)'가 국민당판 '대장정'의 피난길이 되었다. 갓 독립(1948년)한 버마는 잔군들이 불편했다. 그러나 항일 전쟁과 국공 내전으로 단련된 그들의 전투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잔군들은 버마의 만사(Mansa, 孟薩)를 국민당의 '옌안(延安)'으로 삼고자 했다. 이름도 거창했다. 雲南反共救國軍(운남반공구국군)이라 개칭했다. 와신상담의 기회는 때 이르게 찾아왔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신중국이 참전했다. 서남부에 배치되었던 인민해방군이 대거 북진했다. 군사력의 공백이 생겨난 것이다.

운남성 탈환과 대륙 수복, 대역전의 틈이었다. 국민당과 미국도 기민하게 대응했다. 대만(타이완)은 전술 훈련을 담당할 교관을 파견했다. 사상 교육을 담당하는 反共抗俄大學(반공항아대학)도 세웠다. 抗日(항일) 이후의 抗俄(항아)를 선전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의 괴뢰라고 가르쳤다. 중국의 내부 정보에 굶주리던 CIA(미국 중앙정보국)는 구국군을 낙하산 부대로 훈련시켜 내륙으로 침투시켰다. 그래서 1952년까지 총 7차례 운남성 공격을 감행했다. 1953년 한반도의 휴전 협정에도 불구하고, 서남부 전선은 총성이 멈추지 않았다.

구국군은 갈수록 세를 더했다. 버마와 태국 산악 지역에 살고 있는 소수 민족들도 끌어들였다. 중국인과 아시아 제민족 연합이라는 명분 아래 東南亞人民反共聯軍(동남아인민반공연군)을 결성했다. 곤혹스런 버마 정부는 국제 사회에 호소했다. 유엔 총회에서 중화민국을 꼬집어 지목했다. 버마의 영토 주권을 침해하고 있으니, 잔군을 철수시키라는 요구였다. 당시 중화민국은 엄연히 유엔 상임이사국의 하나였다. 세계 5대국의 체통이 달려 있었다. 장제스는 운남반공구국군의 해산을 선포했다. 그러나 시늉뿐이었다. 약 1만 명에 달하는 정예 부대는 남겨 두었다. 자신의 명령을 어긴 불복자들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며 발뺌했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5년 반둥회의 이래 탈식민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다. 직접 장제스에게 완전 철군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만에 대한 군사, 경제 원조를 중지하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1961년 두 번째 철군이 단행되었다. 이번에는 대규모였다. 대만에선 대대적인 '귀국' 환영 행사가 열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부는 남았다. 그들에게 대만은 낯선 땅이었다. 歸國(귀국)이 아니라 歸鄕(귀향)을 꿈꾸었다. 결국 중화민국 군적 자료는 소각시켰다. 잔군은 이제 '고군(孤軍)'이 되었다. 타향을 떠도는 무적자(無籍者)였다.

▲ 단장군, 뚜안시원(段希文). ⓒ이병한
버마서도 쫓겨난 이들은 다시 산을 타고 넘었다. 그리고 정착한 곳이 마에살롱이었다. 그 4000명의 군인과 식솔들을 이끌었던 이가 바로 단장군, 뚜안시원(段希文)이었다.

그러나 거처가 마련되었다고 해서 생계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국민당의 지원마저 끊어진 마당에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피난길을 상로(商路)로 전환시켰다. 버마와 태국의 국경 무역을 중계했다. 상품은 단연 아편이었다. 해발 1800미터의 고산 지대라 양귀비를 재배하기에 적격이었다.

단장군은 이렇게 강변했다. '우리는 공산주의 원수와 계속 싸워야 한다. 싸우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고, 군대는 총이 필요하다. 총은 돈이 있어야 하며, 이 산지에서 돈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편뿐이다.' 그리하여 버마, 태국, 라오스의 강줄기가 만나는 골든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은 냉전기 동남아 아편 무역의 허브가 되었다.

생계책을 세웠다 해도 무적자의 신분은 불안한 것이었다. 태국 정부 또한 공짜로 망명지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들을 태국의 반공 작전에 투입키로 했다. 버마를 접경한 북부 산악 지대는 태국 공산당의 거점이었다. 신중국을 추종하는 '붉은 화교'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을 토벌하는데 전직 국민당군의 복수심을 활용키로 한 것이다.

1970년 12월 단행된 대규모 토벌 작전에도 이들이 맨 앞자리에 섰다. 5년간 지속된 토벌로 1000명 이상의 빨치산을 소탕했다. 태국이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베트남 전쟁에 깊숙이 개입했고 신중국이 북베트남을 지원하고 있었던 사정까지 고려한다면, 태국 북단에서도 동남아의 좌우 대결로서 유사-베트남 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것이다.

완전 진압은 1982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태국 정부는 상찬을 표했다. 덕분에 한반도나 베트남, 중국처럼 태국이 분단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국왕이 직접 노고를 치하하며 태국 국적까지 부여했다. 마침내 합법적인 주거의 권리를 얻은 것이다. 이로써 운남에서 버마로, 태국으로 이어진 피난과 유랑 생활도 마감할 수 있었다. 총을 내려놓고 차를 재배했다. 생활 세계의 탈냉전이었다.

단장군이 눈을 감은 것은 1980년이었다. 그의 무덤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중국풍이 물씬한 사당처럼 꾸몄다. 그의 인솔 아래 중국공산당, 버마공산당, 태국공산당과 차례로 싸우다 숨진 부하들의 명패도 모셔져 있었다. 일종의 반공열사릉이었던 셈이다. 파란의 동아시아 현대사가 응축된 상징적인 장소였다.

좌파(Left)를 청춘의 패션으로 치장했던 20대 시절이었다면 우익분자들이라며 싸늘하게 등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마저 좌/우로 갈랐던 저 우매한 20세기와는 작별을 고한 지 이미 오래였다. 나도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그들의 소망이었던 '興華'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 반공열사 명패.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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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토벌로 통제되었던 마에살롱은 1994년부터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태국 정부는 산티키리(Santikhiri)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평화의 언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마에살롱'에 각인되어 있는 냉전의 추억과 아편의 흔적을 지우려는 것이다. 지금은 그 예외적 역사적 배경에 자연 풍광이 어울려 태국의 10대 여행지 중 하나가 되었다.

저 푸르고 너르던 차밭이 본래는 양귀비를 키우던 곳이었다는 말이다. 마약 기운이 스며든 땅에서 자란 차인지라 특히나 맛있다는 우스개도 있었다. 산티키리는 운남성 본산의 고급 우롱차를 주로 생산한다. 해발 1200~1400미터가 우롱차 재배의 최적지이다. 그래서 치앙라이 주 생산량의 80%를 이 마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커피와 과수, 약초 재배도 시작했다. 산티키리의 판로는 다국적, 초국적이었다. 태국은 물론이요 중국과 대만, 동남아 화교/화인 사회까지 넓게 퍼져있었다. 中華網(중화망)의 한 연결 고리였다.

기실 치앙마이(Chiang Mai)에 속해 있던 치앙라이가 독립된 한 주로 승격된 것부터 탈냉전의 소산이었다. 중국과 태국을 잇는 고속철이 통과하는 지역으로 낙점되면서 투자 건설이 부쩍 활발해졌다. 고속철 노선도를 따라서 호텔과 리조트, 레스토랑이 속속 세워지고 있었다.

마에살롱의 2세와 3세들에게도 기회의 창이 열렸다. 중국어를 구사하는 덕에 산 아래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주요 여행지의 안내 표지는 한자로 표기되어 있고, 호텔 조식의 식단 또한 변해가고 있었다. 커피만큼이나 우롱차를 마시며, 베이컨과 스크램블의 옆자리에는 쌀죽과 국수가 자리했다. 햄버거 대신에 만두를, 콜라보다는 매실차를 마실 날이 머지않았다.

▲ 태국 최북단의 미얀마, 라오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치앙라이는 또 다른 운남성으로 변하는 중이다. 말 그대로 21세기 중화망의 현장이다. ⓒ이병한

실은 마에살롱에서 점심 끼니를 때웠던 국수집에서부터 중국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막을 보니 간체자, 대만이 아니라 대륙 방송이었다. 짐작으로는 운남성에서 발신하는 방송이지 싶다. '작은 운남' 마에살롱은 그렇게 위성 전파망을 통하여 고향과 접속하고 있었다. 그들이 향수(鄕愁)하는 대상 또한 國土(국토)보다는 鄕土(향토)에 가까웠다. 혹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보다 한층 근원적인 대지로서 역사적/문화적 '中國(중국)'을 향한 것이었다. 운남과 마에살롱, 향토와 향토를 잇는 연결망, 인터로컬리즘(Inter-localism)의 발현이다.


태국의 영자 신문을 사려고 들렀던 편의점에서는 중국어 신문이 두 종류나 배치되어 있었다. 내가 고른 것은 <세계일보(世界日報)>였는데, 읽다보니 태국의 화교/화인 신문이었다. 번체를 고수하는 것만 보아도 중화민국의 후예들이었다. 그럼에도 사설은 남달랐다. 오는 9월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대만의 총통도 초대해서 공동 행사를 열라며 시진핑에게 제안하고 있었다. 실제로 1945년 항일 전쟁 승리의 주역은 국민당이고 장제스였다. 태국의 화교/화인들에게 할아버지/아버지 시절의 국공 분열, 좌우 투쟁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신세기 새 세대들이 양안의 화해와 통합을 선도하고 있었다.

이처럼 신세기 중화망은 대륙과 대만의 안과 밖으로 국민 국가(nation state)를 돌파하고 있었다. 안으로는 중화제국의 갱신으로서 복합 국가로 진화 중이며, 밖으로는 전 지구적 화교/화인 사회와 연결된 네트워크 국가로 변모하고 있었다. 둘을 합하면 '네트워크 중화 제국'의 부상이다.

따라서 양안의 통일 또한 못다 이룬 영토국가의 때늦은 달성과는 성격을 달리 할 것이다. 국민 국가의 완성이라기보다는 중화 제국의 복원과 네트워크 국가의 실현에 가까울 법하다. 마에살롱의 뿌리, 운남성이 동남아와 인도양을 잇는 해양 실크로드의 핵심 거점이 되었음은 상징적이다.

지난 세기 국공내전의 파장으로, 양안 분열의 확산으로,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동남아의 내전과 냉전이 거듭되었다. 대륙은 그 규모로 말미암아 언제나 주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제는 네트워크 중화 제국의 굴기가 이웃으로 커다란 파급을 일으키고 있다.

목하 중국풍이 드세게 불고 있는 제주도의 고뇌 또한 국지적인 동시에 지역적이며 세계적인 현장이라 하겠다. 아직은 순풍일지 삭풍일지 가늠하기 힘들다. 일대일로 건설로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될 21세기 중화망이 낙수 효과를 선사할 것인지, 침수 효과를 빚어낼 것인지 신중하게 관찰하고 판단해야 하겠다.

마침 태국의 영자 신문 <방콕 포스트(Bangkok Post)>에서는 중국의 해양 실크로드 구상과 아세안의 미래를 토론하는 학술 회의가 예고되어 있었다. 단박에 솔깃한 주제였다. 현장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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