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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피난민' 이승만, 서울시민엔 "가만히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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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피난민' 이승만, 서울시민엔 "가만히 있으라"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49> 한국전쟁, 이승만 실어나르던 철도
1945년 조선 해방 이후 한반도는 국제 정치공학의 복잡한 함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반도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해결책이 보이기는커녕 새로운 문제들이 덧씌워졌다. 남북분단은 양측의 주류로 등장한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대립되면서 고착화됐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지형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었다.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의 혁명세력은 자신들이 건설한 소련을 수호하는 것을 시대적 사명으로 여겼다. 2차대전 승전국의 일원이 된 소련은 그동안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등 추축국들과 대항해, 동맹 관계였던 자본주의 국가들과 새로운 전선이 형성될 것임을 알았다. 이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지역이 바로 한반도였다. 1949년 내전을 겪으며 출범한 중국 공산당은 한반도 전체가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경우, 겨우 성공한 혁명이 강력한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역시 한반도의 공산화는 일본까지 위험에 빠뜨릴 것으로 봤고, 동북아에서 미국의 입지가 소멸될 것을 두려워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소 양국은 분단된 38선을 기점으로 자신들의 체제에 부합하는 권력을 수립했다.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해관계 따위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1945년 9월 11일 남과 북을 연결하던 철길이 절단되었다. 남북철도 운행이 중지된 것이다. 38도선 북쪽을 점령한 소련군은 남쪽으로 이어지는 철도노선의 운행을 중지시켰다. 해방 된 지 10일 만인 8월 25일부터 서울-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은 신막에서 끊겼다. 서울-원산을 잇는 경원선은 전곡에서 더 이상 운행되지 못하게 됐다. 사리원-해주를 잇는 열차는 아예 운행을 중단시켰다. (경향신문 1972년 7월 17일자) 남과 북, 두 지역은 완전히 이질적인 공간으로 전화될 운명만 남았다. 시간은 그 어떤 것보다도 무서운 차단막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남과 북을 이어주는 철로는 녹이 슬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은 점점 거대해지며 공간을 갈랐다.

남과 북은 졸지에 경쟁 관계가 되었다. 권력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사람들은 적대시되었다. 소련의 지원 아래 수립된 북한 정권은 개혁정책에서 남한을 앞섰다. 친일청산과 토지개혁 등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정책들이 실행되었다. 평등한 세상의 실현이라는 사회주의적 가치는 식민지와 계급적 멸시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던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반면 사유재산의 부정과 부자들에 대한 재산 몰수 등은 재산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 북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들은 남한 사회에서 반공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북한 사회가 김일성과 북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체제를 정립시킨 반면 남한 사회는 여러 세력이 대립과 갈등을 겪었다. 분단 이후 남한 사회는 미군정 아래에서 반공산주의 체제의 기틀을 세우는 과정이었다. 공산주의는 절대 악으로 간주되었고 반대세력을 제압하는 만능열쇠가 되었다. 누구라도 공산주의자라는 올가미를 씌우고 공격하게 되면 수단의 폭력성 같은 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남한 곳곳에서 좌우익의 폭력대결이 벌어졌지만 일방적인 우세를 점한 것은 우익이었다. 많은 좌익 인사들은 우파의 테러를 피해 은신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좌익 인사들만이 아니었다. 비공산계 중도파에 대한 우익의 공격도 맹위를 떨쳤다. 맨 오른쪽에서 보면 중간에 있는 사람들조차 어차피 좌파였다. 더 나아가서는 같은 우파라도 정치적 반대파라면, 테러를 통한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우익의 백색테러는 경찰력의 비호 아래 자행되었기에 더 당당하게 법의 테두리를 뛰어넘었다.

▲ 미 국방부가 공개한, 6.25전쟁 발발 당시 한강 다리 폭파 모습. 이대 이승만 전 대통령은 서울을 떠나고 없었다. 그는 서울 시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다. ⓒ미국 국방부

이승만과 김일성, 독재자의 다른 두 표상

북한과 남한을 점령한 소련과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목표로 공동위원회를 구성했다. 1946년 3월 20일부터 시작된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10월 21일 소득 없이 해산되었다. 미소공위는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미국이 제안했던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안에 대한 입장 차이, 그리고 이를 둘러싼 좌우익의 공방 속에 시작됐었다. 남과 북에서 기득권을 이미 확보했거나 권력 장악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다고 여기는 세력에게 미소공위의 파행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된 조선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해방이라 여긴 많은 중도파 인사들은 미소공위가 반드시 성공하여 결실을 내주길 고대했다.

민족주의 중도우파, 비공산계 중도좌파, 항일독립운동 계열 등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던 김구, 여운형, 김원봉 같은 이들은 분단의 영구화를 걱정하며 살얼음판 같은 정국을 헤쳐 나갔다. 그러나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진 친일파와 그들을 등에 업은 정치모리배들에게 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빨갱이들에 놀아나는 허수아비 짓으로 여겨졌다. 테러범의 총탄을 맞기 전까지도 여운형은 미소공위의 파행을 걱정했다고 한다. 김구는 미소공위기간은 무사히 넘겼지만 이승만과의 갈등 속에 1949년 6월 26일, 자택을 습격한 육군 소위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김원봉은 친일 경찰 노덕술에 끌려가 치욕적인 고문을 당한 것에 치를 떨었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친일했던 자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끌고 가 희롱했다는 것에 김원봉은 밤잠을 못 이루고 한탄했다. 계속되는 테러 위협에 남한을 탈출한 김원봉은 북한 김일성 체제 아래서 고위직에 오르나 한국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뒤 숙청을 당해 비운의 삶을 마감한다.

분단이 고착화된 후 38선을 넘은 마지막 열차가 운행된 것은 미소공위 기간이었다. 계속되는 파행으로 1947년 10월의 파국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8월 9일, 소련의 열차가 평양-경성을 2회 왕복한다. 1945년 해방되자마자 단절되었던 남북 간 열차 통행이 2년여 만에 재개된 것이었다. 이 열차는 미소공위에 참가하는 소련 측 인사들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지막 열차를 끝으로 남북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간다.

남한에서 권력 장악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이승만이었다. 40년을 주로 미국에서 보낸 70대의 노인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의 정체성으로 미국의 인정을 받았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음에도 공화국의 가치보다는 전제 왕정에나 어울릴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자신을 아버지로 여기고 백성을 자식으로 간주했다. 시민주권이라는 근대 공화국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몸에 배어 있는 조선인들에 대한 멸시는 백인들의 인종주의를 그대로 투영시킨 것이었다. 이승만의 최대 관심사는 미군정 이후 남조선과도정부를 대체할 대한민국의 권력 장악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남조선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이승만을 만나고 난 뒤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해방 직후 우호적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1년 만에 원수로 변했다. 하지는 이승만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이승만과 하지는 회의 중에도 서로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의 절망감은 이 고집불통 노인을 반공주의자라는 이유로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깊어졌다.

하지는 이승만이 권력을 잡자 자신이 지독한 고질적 증오감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1948년 5월, 남한 단독 선거 이후 하지는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자신을 최대한 빨리 해임해 달라고 간청한다. 이승만이 뜨내기 정상배 무리들을 데려올 것이 뻔한데 그 꼴을 옆에서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하지의 눈에 이승만은 조폭집단의 두목으로 보였다. 이에 대한 이승만의 보복은 참으로 이승만다웠다. 이승만은 하지를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임으로써 골수 반공주의자 하지의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하지는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로 필립제이슨(서재필)을 데려왔으나 서재필 역시 조선인들에 대한 멸시는 이승만 못지 않았다. 1947년 7월 인천에 도착한 서재필은 "조선인들은 비누 한 장도 만들 줄 모르면서 어떻게 독립정부를 갖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고 말함으로써 취재 나온 기자들을 황당하게 했다. 어쨌든 하지는 서재필이 1948년 선거에서 이승만의 대항마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서재필은 조선 방문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간 직후 죽었다. 이미 84세의 노인이었기에 서재필은 하지의 희망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하지의 예측을 빗나가게 하지 않았다. 친일청산작업을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친일파들을 옹호했다. 모든 행위들을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감수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합리화했다. 북한에서는 사회주의국가로의 전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에 성립된 사회주의는 북한 민중의 계급적 각성을 통한 혁명적 진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소련의 붉은 군대의 지원 속에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계열 항일 무장 투쟁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이식된 사회주의였다. 소련의 영향력은 당연히 스탈린식 통치 방식도 이전시켰다. 스탈린이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절대자였듯,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시작됐다. 공산주의가 역사 발전의 최고 단계이고 이것은 인민의 자발성과 계급적 역동성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한 인간의 신격화된 영도력은 공산주의 사상과는 양립할 수 없는 적대적인 것이다.

절대 원수 스탈린의 행위는 모두 옳고 그에 대한 비판은 반동이듯, 북조선의 최고 통치자 김일성은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을 꿈꿨던 혁명가들은 커다란 실망에 빠졌다. 김학철은 조선 의용군 분대장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가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일본 땅에 수감되었다. 8.15해방으로 석방되어 조선으로 귀국한 김학철은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 월북하여 북한에 정착하게 된다. 이때 김학철은 항일투쟁의 추억을 진지하게 이야기했던 김일성이 아첨 분자들에 둘러싸여 "민족의 태양"이니 "세계 혁명의 지도자"니 떠드는 소리에 만족하는 것에 크게 실망했다. 김학철은 운이 좋아 한국전쟁 과정에서 중국으로 가게 되어 화를 면하게 되지만, 평생을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이상을 위해 헌신했던 많은 혁명가는 한때 동지라고 불렀던 김일성에 의해 제거당했다.

북한은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스탈린식 전체주의 위에 가부장적 군주체제가 자리 잡은 것에 불과했다. 여기에 과학적 사회주의 혁명 이론으로 치장한 남한 혁명노선이 다가올 비극을 준비했다. 북한은 이른바 '민주기지 노선'이란 남조선 해방 전략을 세웠다. 민중이 해방된 북조선의 정치, 사회, 군사체제를 더욱 발전시켜 남조선 해방의 기지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미제국주의와 친일 매국노에게 장악된 남조선 혁명의 기지로서 북조선의 역할이 핵심적이라는 게 민주기지 노선 전략이다. 이것은 내부 모순의 발현 속에 당사자 민중의 해방 의지가 결집되어 이루어진다는 사회주의 혁명의 원칙적 이론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민주기지 노선이란 혁명의 수출과 같다. 국경을 넘어 출입국 수속과 세관을 거치게 된 후 세상과 만나는 혁명은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들이 그렇듯,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게 마련이다. 토착화되지 않은 것들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김일성이 한반도 내부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만주와 시베리아를 근거지로 해 조선 독립 투쟁을 했던 것도 민주기지노선을 추진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분석했다. 든든한 사회주의 기지가 된 북한이 남한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감행하면 미제와 이승만 괴뢰 정권에 신음하던 남한 민중들의 봉기로 순식간에 혁명이 완수될 것이라는 위대한 수령 동지와 북한 수뇌부의 판단은,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을 만들어낸다.

6.25 '1호 피난민' 이승만, 서울시민엔 "가만히 있으라"

1950년 6월 25일 아침,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낚시를 하던 중 전쟁발발 보고를 받는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 전쟁사>에는 창덕궁의 비원에서 낚시를 하던 중 오전 6시 30분에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홍 총경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고 나온다.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의 일기에는 오전 10시쯤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다가 허겁지겁 달려온 신성모 국방장관이 전쟁 소식을 처음 전했다고 밝히고 있다. 어쨌든 낚시광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모처럼 즐기던 일요일의 행복을 방해받았다.

오후 2시에 이승만이 주재하는 국무회의가 열렸다. 긴급 현황보고에 나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북한 인민군을 충분히 격퇴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일본육사 졸업 후 조선 주둔 일본군 병기장교 출신의 야전 경험이라고는 아예 없었던 채병덕은 전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큰소리만 쳤다. 군총사령관의 장담과 달리 이승만에게 전달된 경찰의 정보보고는 상황이 위급함을 알렸다. 오후 늦게 서울 상공에 나타난 북한 공군의 야크기는 이승만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밤 9시 이승만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함께 미국대사 무초를 만났다. 무초는 이미 이승만이 생트집을 잘 잡고 변덕이 심한 사람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국난 상황에서 대통령이 심리적 안정을 갖고 의연하게 대처하도록 도울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무초를 보자마자 대통령이 공산군 손에 들어가면 나라가 곤란하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 서울을 빠져나가야겠다는 뜻을 전했다. 무초 대사는 수도 서울에 최대한 대통령이 머물러야 함을 주장했다. 이승만이 아무리 옹졸한 인성을 가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가위기 시기에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에 무초는 어이가 없었다. (한국전쟁-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 79쪽, 왕수쩡, 글항아리)

이승만은 한 번 고집을 부리면 그 누구라도 꺾기 힘든 사람이었다. 전쟁 발발 하루 만에 전선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겠다는 노인의 머릿속에 백성들은 없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안전한 곳만 전전했다. 전선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게 생명을 유지하거나 더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기에 수월하다는 것을 체질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프란체스카의 일기에 따르면 대통령은 침통한 모습으로 자정을 넘긴 채 잠을 잊었다.

전쟁 발발 직후, 고위관료를 실은 기차는 서울을 떠났다

전쟁 발발 다음날인 6월 26일 새벽 6시 주미대사 무초의 성명이 방송됐다. 대통령보다 빠른 입장 발표였다. 피난 계획에 정신이 없던 이승만이 성명 발표 따위에 신경쓸 겨를은 없었을 것이다. 국회에서는 26일 내내 서울 사수와 철수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다.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토론 끝에 찬반투표로 이어졌고 서울 사수로 최종 결정되었다. 국회 대표들은 이 결정을 대통령에 알리고자 경무대를 찾았으나 대통령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서울 탈출 피난민 제1호의 영예는 이승만의 차지였다. 이승만은 지금의 태평로 프레스센터 맞은편 서울시의회자리의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서울사수 문제로 토론을 벌이던 시간이었던 새벽 3시, 경무대를 나섰다.

경무대에서 서울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태평로의 국회 앞을 통과했을 텐데, 불을 환히 밝힌 차창 밖의 국회 모습을 보면서 이승만은 무슨 생각을 했을 까? 국회에 알리지도 않고 미 대사에게도 비밀에 부친 이승만은 새벽 3시 반이 채 안된 시각, 서울역에 도착했다. 대통령 부부와 비서관 황규면, 경호책임자 김장홍 총경이 일행의 전부였다. 새벽 4시 긴급 준비된 특별열차가 서울역을 떠났다. 급조된 열차라 대통령이 타고 가는 열차임에도 차창이 깨져 있는 3등 객차였다.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온, 두꺼운 먼지가 앉은 객차였다. 정신없이 달린 특별열차는 오후 12시 30분 대구역에 도착하자마자 열차를 되돌려 다시 대전으로 북상했다. 너무 멀리 온 것 같다는 지적에 이승만도 '뻘쭘'했던 것이다.

이승만 일행은 대전역에 오후 4시 30분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하루 종일 남북을 달린 대통령은 충남지사 관사로 이동해 피로를 푼 뒤 비서관을 불러 방송문을 받아 적게 했다. 이어 서울의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대통령 특별 연설을 녹음했다. 연설문의 핵심은 "가만히 있으라" 였다. 유엔에서 남한을 도와주기로 했고 국군도 적을 격퇴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고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방송을 들은 서울 시민 상당수는 피난을 가기 위해 쌌던 짐을 풀었다. 대통령도 서울에서 방송을 하고 있는 마당에 굳이 떠날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몇 년 전 남과 북의 대립이 극심해져 전쟁 위기설까지 나돌 때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오랜 해외 체류를 마치고 들어오자, 서민들 사이에서 전쟁위기설이 눈 녹듯 사라졌던 일이 있었다. 권력 있고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져도 안전하다는, 한국에서 오랜 기간 학습되어 사회적으로 체화된 집단의식의 반영인 셈이었다.

서울시민들이 안심하고 가만히 있는 동안, 대통령이 서울을 탈출한 사실을 안 고위 공무원들과 권력자들은 앞 다투어 서울을 빠져나갔다. 대통령도 야반도주할 정도면 전황이 매우 긴박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 여겼다. 6월 27일 새벽 1시, 서울에서는 비상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때에도 신성모 국방장관은 북한군을 격퇴할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초대 국무총리이자 국방부장관이었던 이범석 같은 이들은 서울 철수가 불가피함을 파악하고 있었다. 국무위원 대다수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일단 수도 서울의 수원 천도 결정이 내려졌는데 그것은 정부의 이전일 뿐이었다. 서울 시민들에 대한 대책은 안건으로 꺼내놓지도 못했다.

국무위원과 고위 공직자들은 시급히 짐을 챙겨 자동차에 실었다. 상당수는 서울역으로 향했다. 27일 오전 7시,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로 불리는 피난민을 태운 열차가, 서울역을 출발했다. 12시에 또 한 대의 열차가 역시 고위층 인사들을 태우고 서울역을 떠났다. 이것이 북한 인민군에 서울이 함락되기 전 서울역에서 떠난 마지막 열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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