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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옹호'가 보여준 '영웅 신화'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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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손석희 옹호'가 보여준 '영웅 신화'의 서사 [한윤형의 우왕좌왕] '노무현 이후'를 함께 고민해야 할 때
옹호할 일말의 구석도 없었다. 4월 15일 JTBC 방송에 나온 성완종 경남기업 전 회장의 경향신문 인터뷰 녹음파일 보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일단 해당 보도의 공익성을 전혀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경향신문은 해당 인터뷰 중에서 공익성을 지닌 부분에 대해선 10일에서 15일에 걸쳐서 신문 보도와 유튜브 공개를 통해 내용과 육성을 공개했다. 그리고 16일에는 신문에 인터뷰 전문 녹취록을 게재하겠다 밝힌 상태였다. 나머지 부분을 굳이 육성으로 들어야 할 이유의 공익성은 비유한다면 '성추문으로 사퇴한 어느 공직자의 집에 굳이 찾아가 울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찍어오는 수준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공익성이 없는 보도를 실정법과 업계 상도의와 보도윤리를 전부 무시하고 했다는 것에서 문제가 되었다. 경향신문과 성완종 전 회장의 대화 녹취록을 입수하여 양자 동의없이 공개한 상황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의 혐의가 있다. 디지털포렌식 전문가에게서 자료를 얻어낸 것은 전문가의 직업윤리 훼손을 유도하거나 방조했다는 지점이 있다. 언론사에서 타사 언론 보도를 활용하는 보도의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이와 같이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밝혀진 경우도 드물다.

이러한 정황은 제각각 분해해서 보자면 큰 일이 아닐 수 있다. 언론은 공익성이 없는 가십사안도 종종 보도한다. 통신비밀보호법을 어기더라도 노회찬의 'X파일 공개'는 칭송받는다. 정황상 타사 언론 보도에 기인한 추가 취재 없는 받아쓰기에 분명한 보도라도 과정이 적나라하게 밝혀지지 않으면 크게 문제삼기가 어렵다. 공익성만 있었다면 유족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보도를 강행했더라도 성완종 전 회장의 유지를 내세우며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JTBC 방송의 보도는 그 모든 것을 다 어겼기 때문에 옹호할 방도가 없다. 경향신문이 법정소송을 제기하는 것에 대한 가치판단은 각자 달리 할 수 있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더라도 JTBC는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손석희 사장은 왜 그랬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공익성을 오판했거나, 선정성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일 게다. 양자는 논리적으로야 명확하게 구별되지만 경험세계에선 뒤섞여있다. 경향신문이 녹취록 원본을 검찰에 제출하고 신문에 전문을 게재하기 전의 짧은 시간 동안, 손 사장은 급박한 상황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이는 비판받아야 하는 일이지만 그렇더라도 손 사장을 재기불능의 도덕파탄자로 몰아갈 일은 아니다. 사과하는 방식도 매우 아쉬웠지만 향후 JTBC가 제대로 된 보도를 한다면 그것은 이 사건과 별개로 평가해야 할 일이다.

JTBC의 실책보다 더 놀라웠던 것이 이 사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었다. 사람들은 JTBC 보도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공익성'을 적극적으로 창조해냈다. 그들은 경향신문이 박근혜 정부나 검찰과 '딜'을 할 가능성을 말했고, JTBC가 그렇게 보도하지 않았을 경우 검찰이 왜곡된 자료를 기타 종편 방송에 전달해 그들이 편향보도를 했을 가능성을 말했다.

그러한 분석들은 상황을 살핀다면 납득할 수 없는 '소설'이었다. 그렇게 긴 소설을 쓸 시간에 경향신문이 유튜브에 공개한 육성과 JTBC가 전문 공개한 육성을 비교해본다면, 경향신문에겐 거래의 여지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향신문은 인터뷰 중 공익성이 있는 부분은 이미 다 털어냈기 때문에 깔끔하게 수사에 협조하기 위해 검찰에 녹취록 원본을 제출한 상황이었다 해석해야 타당하다. 그렇게 일찍 녹취록을 제출한 행위에 대해 아쉬움을 표할 수는 있으나, 이 부분에야말로 선의로 본다면 경향신문이 그리 하지 않았을 경우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이 쓸데없는 시비를 걸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신문과 방송'의 차이를 말했지만 경향신문이 음원의 일부를 공개할 때 이미 방송에서도 따라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기타 종편 방송의 사실호도야 JTBC가 입수한 음원 전체를 깐 후에도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손석희 사장이 자사 보도의 이유를 설명한 방식은 대중들이 경향신문을 미심쩍은 언론으로 오해하도록 종용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조차 든다.

우리가 여기서 맥락을 섬세하게 살피지 않고 사태를 재단하는 대중을 비난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너무 손쉬운 일이겠다. 더 생산적인 일은 대중이 창의적으로 만들어낸 이 서사에서 '손석희'와 '경향신문'과 '박근혜 정부 및 검찰 및 여타 종편'이 표상하는 것이 무엇이며, 이러한 서사는 왜 나왔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따져볼 때 나는 우리가 가진 개혁적 정치, 혹은 정치개혁의 상이 '노무현 이후'를 전망하지 못하고 지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마도 사람들의 환상 속에서 '손석희의 JTBC'는 기득권에 유능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 있는 영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식대로라면 경향신문은 기득권에 대응한다고 말하나 힘이 없는 주제에 보도이득을 독점하려고 한 이기적인 존재가 된다. 정의로운 척 하지만 힘이 없기에 현실세계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고 가정된 이 존재는 심지어 '적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까지 받는다. 한편 나처럼 JTBC의 보도가 어째서 잘못되었는지를 말하는 이들은 설명을 섬세하게 하면 할수록 '악당에 대항하는 영웅의 힘을 빼는 각다귀들'이 된다. 개혁세력의 언어를 빌리면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논평가들'이 되고, 잠깐 '일베' 친구들의 어휘를 빌리면 '씹선비질'이 된다.

이 도식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영웅'의 조건은 이중적이다. 그는 악당에 분노해서 싸움을 시작할 만큼 윤리적이어야 하지만 악당에 대항할 힘을 기르는데 방해가 될 만큼 윤리적이어선 안 된다. 그리고 이 역설은 우리에게 '현실적 조건'이기 때문에, 이를 외면하는 이들은 제아무리 사회개혁이나 정의를 외친다고 한들 결국 현실인식이 부족하거나 제 자신의 자존감을 위해 운동하는 이기심 충만한 이들이란 게 이들의 생각이다.

손석희 사장은 2013년 5월 JTBC에 보도담당 사장으로 합류한 이후 만 2년 동안 이러한 '영웅'의 이미지를 쌓아왔다고 볼 수 있다. 삼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알려진 보수언론의 종편 방송에 들어가 중앙일보와는 다른 결의 보도를 보여주면서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 특히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JTBC 보도는 공중파의 그것과 대비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경향신문이 '힘없는 방해꾼'의 위치를 부여받은 현실은 신문 산업의 퇴조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영웅 서사는 어째서 생겨나는 것일까. 우리는 한국 사회에 사는 개혁적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그들이 정치권력을 제어하기를 간절하게 원하지만 시민들 스스로의 관심과 참여로는 권력견제가 안 되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상황에서 이러한 환상극을 만들어 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국가란, '시민사회가 구성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를 모방하여 독재정권이 적극적으로 구성한) '이미 주어진 것'으로 존재한다. 한국 사회의 중앙정치란 그 국가권력을 소유하기 위한 양대당파의 싸움이며 두 당파의 세력은 균등하지도 않다. 그런 실정에선 정치문제에 민감한 시민일수록 역설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정치권에 투입하는 것을 유보하고 '영웅'이 악당에게 승리하기를 바라게 되는 상황이 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웅 서사는 현상적으로는 '팬덤 정치'로 보이지만 실은 개인에 대한 충성도가 아주 높지도 않다. 이들의 서사에서 영웅은 사실 시민의 요구를 대행할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최근 프로야구계에서 가장 핫한 김성근 감독의 한화 이글스를 떠올리면 된다. 어떤 팬들은 '김성근 감독이기에' 한화 이글스를 응원할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한화팬들은 '김성근 감독이 한화의 성적을 올려줄 것이기에' 김성근 감독을 응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성적을 내줄 감독을 수호해야 하기에' 김성근 감독을 비판하는 논평가나 기자들에게 몰려가 '화력'을 과시한다. 그러다보면 김성근 감독을 '악의적으로 흔드는' 기사 뿐만 아니라 '상식 수준에서 우려를 표하는' 기사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가지게 된다. 현상적으로 바라보면 강고한 팬덤으로 보이지만 실은 한화 이글스의 성적을 올리고 싶어서 하는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도구화된 영웅 서사'에서 진보세력이나 논평가들이 '악당의 하위 파트너' 역할을 꿰찼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제1야당의 지지자들의 꾸준한 주장이었으나, 이것이 대중들에게 결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정국이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 진보언론도 그 정국에서 오류를 범했음이 명백했기에 이런 생각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경향신문은 여타 진보언론에 비해서도 참여정부 시절 정권과 대립각을 심하게 세웠고 서거 정국에서도 전임 대통령을 심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이미지로 박혔다. 경향신문과 JTBC의 다툼에서 어떤 이들이 '경향신문의 과거'까지 떠올리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JTBC 보도에 대한 기자 그룹과 대중의 반응의 괴리는 바로 이러한 문맥 하에 서 있다. 이렇게 분석될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손석희의 팬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현상적으로 손석희에 충성을 바치는 것으로 보이는 그 팬덤은 손석희에게 '기득권 악당에 대항하는 영웅'의 가능성이 더 이상 없어 보일 때 손쉽게 손바닥을 뒤집고 다른 이들에게 갈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문재인, 박원순, 안철수, 안희정 등 야권의 대권주자들이 아닌 언론인에게 이러한 서사가 나타났다는 것 정도다.

더 큰 문제는 이 서사에서 누구를 '영웅'으로 지목하건 간에 논평가나 진보언론은 '악역'이 되는 상황 그 자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을 생각해본다면 참여정부 시기 정부와 진보진영, 노동계, 진보언론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다시 한번 성찰해 볼 필요성이 생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정국에서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이 잘못했다고 말하기는 쉽다. 문제는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을 때 그에 대한 대답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대중이 사랑하는 우리편 정치인'에 대한 무한신뢰를 가지라고 요구하면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를 보도로 하지 말아야 한단 식의 논점을 잡을 수 있을 텐데, 사실 한겨레와 경향신문 뿐 아니라 모든 언론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에도 그 부분은 지키지 않고 있다. 진보언론이 노 전 대통령을 죽였다고 욕했던 이들조차 보수적 정치인에 대한 검찰 수사의 피의사실 공표에 대해선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또 진보언론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정국에서 잘못했다 하더라도 참여정부 집권 기간 동안 그들의 정권 비판이 오류라고 말하는 건 다른 문제다. 이는 '씹선비질'이라 조롱당하는 윤리적 층위가 아니라 현실정치적 층위에서도 마찬가지다. 경험한 바 야권은 대권을 쟁취하더라도 여권의 대통령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수준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행정과 사법과 재계와 언론 등 사회 각 영역에서 보수의 우위가 너무나도 확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명의 영웅이 대통령이 되는 것 이상으로 각각의 영역에서 보수에 대한 대항세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의 힘이 더 강력했다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벌에 대해서 그들을 개혁하든 달래든 간에 훨씬 운신의 폭이 넓다고 느꼈을 것이다. 노동조합의 지지를 통해 진보정당이 성장한 유럽의 사례까지 가지 않더라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등이 노동조합의 설립을 장려한 것은 그가 단순히 '착한 정치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이 권력자원 배분에서 보수세력에게 대항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한국 사회의 개혁정치가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오히려 현존하는 노동조합과 대립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협소한 중앙정치적 시선에선 그것이 현실적인 일로 보일지라도, 장기적인 문맥으로 봤을 때는 자신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일이 된다.

정치영역에서는 누구나 선의를 가지고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선의를 존중하면서도 오류를 논할 수 있다. 이 영역을 건너뛰고 개혁세력의 처신에 반대하던 소수집단들을 '악당의 하위 파트너'로 치부하는 서사를 유지한다면 정권을 교체하더라도 정치개혁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우리에겐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그들의 방법론은 뛰어넘는 새로운 개혁정치인에 대한 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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