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 번째 이야기 주제는 조봉암과 진보당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프레시안 : 조봉암은 1899년에 태어나 1959년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에 한국인들은 국권 상실, 식민 지배, 해방, 전쟁, 독재 등 커다란 역사적 사건을 거듭 겪었다. 조봉암은 그러한 역사의 격류를 헤쳐 가고자 목숨을 내걸고 분투한 인물 중 하나다. 조봉암의 생애를 되짚는 작업을 통해 이 시기 한국인들이 걸어온 역정(歷程)을 찬찬히 다시 살폈으면 한다. 아울러 조봉암과 진보당을 통해, 예전에 '현대사 이야기'에서 부분적으로만 다룬 1950년대 한국 사회와 4월혁명기 진보 세력의 활동을 전반적으로 짚었으면 한다. 우선 조봉암은 어떤 계기로 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되나.
서중석 : 조봉암의 사회 활동은 1919년 3.1운동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은 조봉암뿐만 아니라 한국인 전체한테 큰 영향을 줬다. 당시 지식인, 학생,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던 여러 활동가들이 3.1운동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고, 조봉암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였다. 조봉암은 3.1운동으로 체포돼 1년 정도 투옥 생활을 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는데, 3.1운동 이전에 비해 아주 딴사람이 돼가지고 출소했다.
그 변화에 대해 나중에 조봉암은 "3.1운동을 통해서 나는 나라가 무엇이라는 걸 알게 됐고 내 민족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고 말한다.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진심으로 말하면 3.1운동이 터지고 내가 잡혀서 감옥으로 갈 때까지는 국가와 민족이 어떻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단순히 일본놈이 우리 조선 사람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데 대한 불만과 불평이 있었던 그런 청년일 따름이었는데, 3.1운동은 나로 하여금 한 개의 한국 사람이 되게 하였고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놈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애국 투사가 되게 한 공로자였다."
'죽었다'던 한국인을 살려낸 3.1운동…조봉암도 "한 개의 한국 사람"으로 재탄생
프레시안 : 근대에 들어 한국인의 민족의식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나.
서중석 : '우리에게 민족의식이 오래전부터 있었고 적어도 한말 이후엔 민족의식이 왕성해서 1910년대에도 그걸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들 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민족이나 민족의식은 저절로 생기는 현상이라는 식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대적 민족이라는 것은 근대적 민족의식 없이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민족이라는 말 자체를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쓴 말을 차용한 것이긴 한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된 후 근대적 민족의식, 애국심, 국가 의식 같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늘어났다. 그건 사실이지만, 한국인 전체를 놓고 생각하면 그 숫자는 소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1910년 일제한테 나라를 강탈당한 것 아니겠나.
그런 속에서 해외로 망명한 사람들은 민족의식을 1910년 이전보다 더 강하게 갖게 됐다. 이 점은 해외 이주민, 그러니까 북간도와 서간도에 살게 된 사람들 또는 노령이라고도 이야기하는 러시아령 연해주나 시베리아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아울러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여러 군데에서 그런 걸 고취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여전히 아주 소수였다. 1919년 이전으로 따지면 그저 몇 십만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인의 대다수는 한반도에 살고 있었는데, 1910년대에는 아주 억압적인 무단 통치를 받지 않았나. 그러면서 1910년 이전에 어렴풋이 느끼거나 알고 있었던 민족의식, 애국심 같은 것조차 마멸된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초래된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고양되는데 피압박 민족들, 당하고 억눌리던 민족들의 경우 민족의식이 굉장히 급속하게 확산된다. 그 점은 한국의 경우에도 아주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본에 간 유학생들, 미주에서 활동하거나 중국에 있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에 있던 지식인, 학생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민족의식에 눈뜨게 됐다. 그러나 일반 대중, 한국인의 대다수는 3.1운동 때 "만세!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속에서 민족의식 또는 민족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같은 공동체를 가져야 할 민족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국가를 가져야 한다', 이런 동일체 의식이 민중 다수한테 강한 형태로 퍼져 나가는 건 3.1운동을 통해서라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3.1운동 이전 한국 사회는 어떤 상태였나.
서중석 : 3.1운동 이전에는 '한국인은 죽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신흥무관학교 교가에도 그렇게 나오는데 뭐냐면 "한국인은 썩어버렸다. 썩어지고 있다", 이런 식의 표현을 해외 이주민들이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무단 통치 하에서 한국인이 워낙 심한 압제를 받지 않았나. 그러면서 무기력하게 되고 사회 의식 같은 걸 갖기가 어려웠던 상태를 잘 말해주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국권 상실 직후인 1911년 서간도에 설립된 학교로, 수천 명의 독립군을 길러낸 항일 무장 투쟁의 요람이었다. 이회영 6형제와 이상룡, 김동삼 등이 주축이 돼 한인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만든 후 설립한 신흥강습소가 그 출발점이다. "썩어지는 우리 민족"이라는 표현은 신흥무관학교 교가 3절에 나온다.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론(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내어 / 새 나라 세울 이 뉘이뇨")
우리가 잘 아는 염상섭의 중편 소설 <만세전>, 이건 염상섭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원래 제목은 <묘지>였다. 처음에 그 제목으로 발표됐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이 현해탄을 건너 한국 땅에 오면서 느낀 여러 가지를 써놓은 건데, '3.1운동 이전 즉 만세 전 한국이란 그야말로 묘지와 같은 나라다', 그걸 표현한 것이다. 그런 상태를 잘 그린 소설이다.
그와 같은 상태에서 3.1운동이 터진 것이다. 만세 운동이 크게 고양되는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나도 민족의 일원이다', 다시 말해 '내가 한국인이다'라는 걸 느끼게 된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그건 '내가 인간이다'라고 느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함석헌도 자서전과 비슷한 글에서 조봉암과 거의 똑같이 표현했다. "3.1운동을 통해서 내가 민족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3.1절, 광복절을 굉장히 뜻깊은 날로 여기지 않나. 4대 국경일 중에서도 이 두 개가 유독 우리 가슴에 많이 와 닿는 국경일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3.1운동이 한국인한테 그만큼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런 3.1운동이 조봉암으로 하여금 "한 개의 한국 사람"이 되게 만들었고, 3.1운동을 계기로 조봉암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저 '일본놈들은 나쁜 놈들이다' 하는 정도의 불평불만을 넘어 3.1운동을 거치며 민족의식, 사회 의식을 갖게 됐다고 조봉암이 이야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조봉암뿐만 아니라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3.1운동을 통해 그와 같은 자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옥살이와 모진 고문 견뎌내고 일본에서 사회주의와 만난 청년 조봉암
프레시안 : 3.1운동을 계기로 조봉암은 사회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주의자가 되는데, 그 과정에서 아나키즘 단체로 알려진 흑도회에도 몸담는다. 이 시기에 아나키즘 관련 단체를 거쳐 사회주의자로 나아간 이가 조봉암만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눈에 띄는 경로라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직후인 1920년 YMCA 중학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됐다. 이때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조봉암을 '비행기에 태운다'면서 두 팔을 뒤로 묶고 천장으로 끌어올렸다 내렸다 하기도 하고, 혁대나 검도용 죽도로 마구 두들겨 팼다. 그뿐만 아니라 발가벗긴 궁둥이를 담뱃불로 지지기도 하고, 기절하면 냉수를 뒤집어씌우고 그랬다. 왜 이런 일을 당했느냐.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폭탄을 많이 만들어서 YMCA 중심으로 거사를 하려고 했다는 허위 제보가 들어가서 조봉암이 그렇게 당한 것이다. 훗날 조봉암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수십 차례 유치장살이를 해봤지만 이때보다 더 힘든 일은 없었다."
이처럼 한국에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하면서 조봉암은 세계를 보는 눈, 인간을 보는 눈, 민족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된다. 그 이듬해인 1921년 조봉암은 일본 중앙대학(주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하면서 박열 등과 함께 흑도회를 조직했다고 자료상에 나온다. 대개 아나키스트 단체에는 검을 흑(黑) 자가 많이 붙지 않았나. 그와 마찬가지로 검을 흑 자가 붙은 흑도회가 이 시기에 아나키스트 단체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니 이걸 아나키스트 단체로 여기기 쉽지만,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다. 우선 관련된 사람들이 과연 아나키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 조직에 들어갔느냐, 이 점이 문제다. 당시에는 젊은이들이 주로 일본 같은 데에서 여러 가지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중 어느 하나에 경도됐다', 이렇게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또 그 시기에 아나키즘이라는 것이 체계화된 형태로 들어올 수 있었는가,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이 한국 아나키스트한테 큰 영향을 끼치는데, 크로포트킨의 주요 사상이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건 1920년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몇 가지를 놓고 볼 때, 이 시기 흑도회가 아나키즘 단체라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보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프레시안 : 조봉암은 왜 사회주의자가 됐나.
서중석 : 우선 당시 일본 도쿄대, 교토대의 주요 청년 학생들 중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울어진 사람이 많았다. 최고 선진분자,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돼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일본도 그랬고, 아나키즘이 강한 영향을 끼친 중국에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조봉암 같은 고학생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은 흑도회 같은 데 들어갔다가, '이게 뭐냐. 사상이라고 할 만한 게 뚜렷하지 않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갖기 쉬웠다. 그와 달리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아주 뚜렷한 세계관을 제시했고 무엇보다도 이론 체계가 정연할 뿐만 아니라 반제국주의 논리가 분명했다. 조직적으로도 '이렇게 조직해서 싸워야 한다', 이런 걸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았나. 그런 면에서도 아나키즘하고 달랐다.
그러면서 '식민지의 참담한 상황을 볼 때 이런 급진적인 사상이 우리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여기는 젊은이들이 국내외에서 급격히 늘었다. 3.1운동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야말로 정말 새로운 빛이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눈뜨게 만들고 투사로 싸울 수 있게 했다', 이런 것이 폭풍이라고 할까, 굉장히 강렬한 섬광처럼 젊은이들의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속에서 조봉암도 아주 예민한 20대 초반의 고학생으로서 일본에서 이미 공산주의 쪽으로 기울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정확히 알았느냐 하는 건 별개 문제다.
서중석 : 조봉암의 사회 활동은 1919년 3.1운동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은 조봉암뿐만 아니라 한국인 전체한테 큰 영향을 줬다. 당시 지식인, 학생,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던 여러 활동가들이 3.1운동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고, 조봉암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였다. 조봉암은 3.1운동으로 체포돼 1년 정도 투옥 생활을 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는데, 3.1운동 이전에 비해 아주 딴사람이 돼가지고 출소했다.
그 변화에 대해 나중에 조봉암은 "3.1운동을 통해서 나는 나라가 무엇이라는 걸 알게 됐고 내 민족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고 말한다.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진심으로 말하면 3.1운동이 터지고 내가 잡혀서 감옥으로 갈 때까지는 국가와 민족이 어떻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단순히 일본놈이 우리 조선 사람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데 대한 불만과 불평이 있었던 그런 청년일 따름이었는데, 3.1운동은 나로 하여금 한 개의 한국 사람이 되게 하였고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놈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애국 투사가 되게 한 공로자였다."
'죽었다'던 한국인을 살려낸 3.1운동…조봉암도 "한 개의 한국 사람"으로 재탄생
프레시안 : 근대에 들어 한국인의 민족의식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나.
서중석 : '우리에게 민족의식이 오래전부터 있었고 적어도 한말 이후엔 민족의식이 왕성해서 1910년대에도 그걸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들 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민족이나 민족의식은 저절로 생기는 현상이라는 식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대적 민족이라는 것은 근대적 민족의식 없이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민족이라는 말 자체를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쓴 말을 차용한 것이긴 한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된 후 근대적 민족의식, 애국심, 국가 의식 같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늘어났다. 그건 사실이지만, 한국인 전체를 놓고 생각하면 그 숫자는 소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1910년 일제한테 나라를 강탈당한 것 아니겠나.
그런 속에서 해외로 망명한 사람들은 민족의식을 1910년 이전보다 더 강하게 갖게 됐다. 이 점은 해외 이주민, 그러니까 북간도와 서간도에 살게 된 사람들 또는 노령이라고도 이야기하는 러시아령 연해주나 시베리아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아울러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여러 군데에서 그런 걸 고취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여전히 아주 소수였다. 1919년 이전으로 따지면 그저 몇 십만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인의 대다수는 한반도에 살고 있었는데, 1910년대에는 아주 억압적인 무단 통치를 받지 않았나. 그러면서 1910년 이전에 어렴풋이 느끼거나 알고 있었던 민족의식, 애국심 같은 것조차 마멸된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초래된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고양되는데 피압박 민족들, 당하고 억눌리던 민족들의 경우 민족의식이 굉장히 급속하게 확산된다. 그 점은 한국의 경우에도 아주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본에 간 유학생들, 미주에서 활동하거나 중국에 있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에 있던 지식인, 학생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민족의식에 눈뜨게 됐다. 그러나 일반 대중, 한국인의 대다수는 3.1운동 때 "만세!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속에서 민족의식 또는 민족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같은 공동체를 가져야 할 민족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국가를 가져야 한다', 이런 동일체 의식이 민중 다수한테 강한 형태로 퍼져 나가는 건 3.1운동을 통해서라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3.1운동 이전 한국 사회는 어떤 상태였나.
서중석 : 3.1운동 이전에는 '한국인은 죽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신흥무관학교 교가에도 그렇게 나오는데 뭐냐면 "한국인은 썩어버렸다. 썩어지고 있다", 이런 식의 표현을 해외 이주민들이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무단 통치 하에서 한국인이 워낙 심한 압제를 받지 않았나. 그러면서 무기력하게 되고 사회 의식 같은 걸 갖기가 어려웠던 상태를 잘 말해주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국권 상실 직후인 1911년 서간도에 설립된 학교로, 수천 명의 독립군을 길러낸 항일 무장 투쟁의 요람이었다. 이회영 6형제와 이상룡, 김동삼 등이 주축이 돼 한인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만든 후 설립한 신흥강습소가 그 출발점이다. "썩어지는 우리 민족"이라는 표현은 신흥무관학교 교가 3절에 나온다.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론(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내어 / 새 나라 세울 이 뉘이뇨")
우리가 잘 아는 염상섭의 중편 소설 <만세전>, 이건 염상섭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원래 제목은 <묘지>였다. 처음에 그 제목으로 발표됐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이 현해탄을 건너 한국 땅에 오면서 느낀 여러 가지를 써놓은 건데, '3.1운동 이전 즉 만세 전 한국이란 그야말로 묘지와 같은 나라다', 그걸 표현한 것이다. 그런 상태를 잘 그린 소설이다.
그와 같은 상태에서 3.1운동이 터진 것이다. 만세 운동이 크게 고양되는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나도 민족의 일원이다', 다시 말해 '내가 한국인이다'라는 걸 느끼게 된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그건 '내가 인간이다'라고 느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함석헌도 자서전과 비슷한 글에서 조봉암과 거의 똑같이 표현했다. "3.1운동을 통해서 내가 민족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3.1절, 광복절을 굉장히 뜻깊은 날로 여기지 않나. 4대 국경일 중에서도 이 두 개가 유독 우리 가슴에 많이 와 닿는 국경일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3.1운동이 한국인한테 그만큼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런 3.1운동이 조봉암으로 하여금 "한 개의 한국 사람"이 되게 만들었고, 3.1운동을 계기로 조봉암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저 '일본놈들은 나쁜 놈들이다' 하는 정도의 불평불만을 넘어 3.1운동을 거치며 민족의식, 사회 의식을 갖게 됐다고 조봉암이 이야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조봉암뿐만 아니라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3.1운동을 통해 그와 같은 자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옥살이와 모진 고문 견뎌내고 일본에서 사회주의와 만난 청년 조봉암
프레시안 : 3.1운동을 계기로 조봉암은 사회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주의자가 되는데, 그 과정에서 아나키즘 단체로 알려진 흑도회에도 몸담는다. 이 시기에 아나키즘 관련 단체를 거쳐 사회주의자로 나아간 이가 조봉암만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눈에 띄는 경로라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직후인 1920년 YMCA 중학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됐다. 이때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조봉암을 '비행기에 태운다'면서 두 팔을 뒤로 묶고 천장으로 끌어올렸다 내렸다 하기도 하고, 혁대나 검도용 죽도로 마구 두들겨 팼다. 그뿐만 아니라 발가벗긴 궁둥이를 담뱃불로 지지기도 하고, 기절하면 냉수를 뒤집어씌우고 그랬다. 왜 이런 일을 당했느냐.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폭탄을 많이 만들어서 YMCA 중심으로 거사를 하려고 했다는 허위 제보가 들어가서 조봉암이 그렇게 당한 것이다. 훗날 조봉암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수십 차례 유치장살이를 해봤지만 이때보다 더 힘든 일은 없었다."
이처럼 한국에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하면서 조봉암은 세계를 보는 눈, 인간을 보는 눈, 민족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된다. 그 이듬해인 1921년 조봉암은 일본 중앙대학(주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하면서 박열 등과 함께 흑도회를 조직했다고 자료상에 나온다. 대개 아나키스트 단체에는 검을 흑(黑) 자가 많이 붙지 않았나. 그와 마찬가지로 검을 흑 자가 붙은 흑도회가 이 시기에 아나키스트 단체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니 이걸 아나키스트 단체로 여기기 쉽지만,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다. 우선 관련된 사람들이 과연 아나키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 조직에 들어갔느냐, 이 점이 문제다. 당시에는 젊은이들이 주로 일본 같은 데에서 여러 가지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중 어느 하나에 경도됐다', 이렇게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또 그 시기에 아나키즘이라는 것이 체계화된 형태로 들어올 수 있었는가,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이 한국 아나키스트한테 큰 영향을 끼치는데, 크로포트킨의 주요 사상이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건 1920년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몇 가지를 놓고 볼 때, 이 시기 흑도회가 아나키즘 단체라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보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프레시안 : 조봉암은 왜 사회주의자가 됐나.
서중석 : 우선 당시 일본 도쿄대, 교토대의 주요 청년 학생들 중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울어진 사람이 많았다. 최고 선진분자,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돼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일본도 그랬고, 아나키즘이 강한 영향을 끼친 중국에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조봉암 같은 고학생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은 흑도회 같은 데 들어갔다가, '이게 뭐냐. 사상이라고 할 만한 게 뚜렷하지 않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갖기 쉬웠다. 그와 달리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아주 뚜렷한 세계관을 제시했고 무엇보다도 이론 체계가 정연할 뿐만 아니라 반제국주의 논리가 분명했다. 조직적으로도 '이렇게 조직해서 싸워야 한다', 이런 걸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았나. 그런 면에서도 아나키즘하고 달랐다.
그러면서 '식민지의 참담한 상황을 볼 때 이런 급진적인 사상이 우리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여기는 젊은이들이 국내외에서 급격히 늘었다. 3.1운동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야말로 정말 새로운 빛이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눈뜨게 만들고 투사로 싸울 수 있게 했다', 이런 것이 폭풍이라고 할까, 굉장히 강렬한 섬광처럼 젊은이들의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속에서 조봉암도 아주 예민한 20대 초반의 고학생으로서 일본에서 이미 공산주의 쪽으로 기울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정확히 알았느냐 하는 건 별개 문제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다시 시베리아 거쳐 모스크바로
프레시안 : 일본으로 건너간 지 1년 만인 1922년 조봉암은 조선으로 돌아온다. 귀국 후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나.
서중석 : 조봉암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공산주의자로서 활동했는데, 이때 어디서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자료는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1922년 시베리아 베르흐노이진스크(베르흐네우딘스크, 오늘날 울란우데)에서 한국 공산주의자 통합 회의가 열렸을 때 조봉암이 정재달과 함께 국내 대표로 참여하는 걸 볼 수 있다.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베르흐노이진스크 통합 회의는 당시 긴급하게 요구되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사회주의 운동이 시베리아, 연해주 쪽에서 1917년경부터 파급됐다고들 이야기하는데, 1921년 (고려)공산당이 조직될 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이 두 개로 갈라져서 심각한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상해파의 주요 지도자들 중에는 러시아에 이주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와 달리 이르쿠츠크파에는 러시아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물론 나중에 여러 한국인도 이르쿠츠크파로 분류되기는 한다. 그리고 상해파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있다', 다시 말해 '덜 볼셰비키적이다', 이런 비판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에 비해 이르쿠츠크파는 '공산주의 조직 논리와 이론에 더 철저한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반면 '러시아에 너무 기울어지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도 듣고 그랬다. 이러한 양 파가 워낙 심하게 대립, 갈등하니까 러시아 쪽에서 그 갈등을 어떻게든 조정해 양 파가 같이 일할 수 있게 하려 했다. 공산당이 그런 식으로 갈라지면 안 된다고 보고 통합 회의를 열었던 것이다. 물론 이건 성공할 수가 없었다. 바로 깨지고 만다.
그러고 나서 조봉암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갔다. 이제 공산주의 수업을 제대로 받게 됐다고 볼 수 있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년도 채 안 됐다. 거기서 그렇게 충분히 학습한 것 같지는 않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 활동가를 양성하고자 1921년 코민테른이 모스크바에 세운 교육 기관이다. 조봉암을 비롯한 한국인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호찌민, 중국의 덩샤오핑 등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꾼 거물들도 이곳에서 교육받았다.)
프레시안 : 베르흐노이진스크 통합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난 지 1년 만인 1923년 조봉암은 다시 귀국한다. 돌아온 후 조봉암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조봉암은 귀국 후 1923년부터 청년 운동을 많이 했다. 당시엔 실제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내가 사회주의자다' 이렇게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런 사람들을 포함해 사회주의자들이 노동 운동, 농민 운동의 현장으로 직접 뛰어드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노농 단체(노동 단체와 농민 단체)의 간부로 활동하거나 청년 단체의 간부를 많이 했다. 서울파로 불린 서울청년회계도 그랬고 화요파로 불린 화요회계도 그랬다. 1920년대 중반 양대 세력이라고들 하는 이 두 공산주의자 그룹에선 청년 운동을 많이 했다. 박헌영도 그때쯤 되면 감옥소에서 나와 조봉암과 함께 신흥청년동맹에서 활동한다. 박헌영은 화요회에서도 조봉암과 함께 활동한다. 칼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이어서 단체 이름을 화요회로 했다고 한다.
조봉암은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어서, 신흥청년동맹에서 활동할 때에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들과 함께 강연회, 연설 같은 것을 많이 했다. '새로운 사회 의식에 눈을 떠라. 청년들의 사명은 이러저러한 것들이다', 주요 내용은 이런 것 아니었겠나.
그런 속에서 공산당을 조직하는 활동이 이뤄진다. 새로운 공산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움직임은 그전부터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있었지만, 특히 이 시기가 되면 그런 것들이 구체화된다. 1924년 4월이 되면 '양대 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청년총동맹, 조선노농총동맹이 조직되는데 두 조직을 기반으로 새로운 공산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화요파와 서울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다. 그러면서 1925년 4월 17일, 화요파가 중심이 돼 아서원이라는 중국집에서 조선공산당을 비밀리에 만들어낸다.
제1차 조선공산당의 중심인물로 활약
프레시안 : 제1차 조선공산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조봉암은 어떤 역할을 했나.
서중석 : 이때 조봉암이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느냐 하는 것은 간접적인 자료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조봉암은 제1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됐을 때 중앙검사위원 직책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책임비서가 되는 김재봉 그리고 김찬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여러 군데에 나온다. 조선공산당을 만든 다음 날인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의 자매 단체라고 볼 수도 있고 하부 단체라고도 볼 수 있는 고려공산청년회(고려공청)가 박헌영 집에서 만들어진다. 이때 조봉암이 사회를 본 것을 통해서나 7명의 중앙집행위원 중 한 명이 된 것을 통해서 보더라도 역시 박헌영, 김찬과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봉암은 이 두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다음 달인 5월이 되면 고려공청 대표이자 조선공산당 부대표 자격으로 모스크바로 떠났다. 코민테른과 국제공산청년동맹의 승인을 얻기 위해 간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조봉암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때 조선공산당 대표로 조봉암과 함께 간 사람은 조동호다. 자료에 따라 조동우라고도 나오는 사람인데, 활동을 아주 많이 한 인물이다.
코민테른과 국제공산청년동맹 양쪽에서 승인을 받아내는데, 그와 함께 국제공산청년동맹에 '우리 고려공청의 학생들을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받아줄 수 없느냐'고 요청했다. 그래서 유학생 21명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보내는 것을 승인받는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유학생 중에는 권오직(고려공청 제2대 책임비서인 권오설의 동생)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특히 유명한 여성 활동가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고명자, 김명시, 김조이 등 그 후 쟁쟁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이때 교육받으러 러시아로 떠난다. 김명시는 훗날 중국 연안(옌안)에 가서 대단한 활동을 해 김명시 장군이라고도 불리는 사람이다. 김조이는 조봉암과 부부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돼 있고, 고명자는 나중에 김단야의 애인이 되는 사람이다.
프레시안 : 제1차 조선공산당은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 후 조봉암은 어떤 활동을 펼치나.
서중석 : 1925년 11월 유명한 신의주 사건이 터지면서 조선공산당이 와해된다. 이 사건으로 고려공청과 조선공산당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검거되는데, 이런 큰 사건이 일어난 직접적인 계기는 사회주의 청년들이 (술자리에서) 친일파들을 습격한 것이다. 경찰이 '뭔가 수상하다' 해가지고 청년들 집을 수색하는데, 그때 박헌영이 조봉암 쪽으로 보내는 문서를 발견했다. 그러면서 사건이 확대된 것이다.
그 후 조봉암은 김찬, 김단야와 함께 조선공산당 해외부라는 걸 설치해 거기서 활동한다. 이때 국내에서는 제1차 조선공산당에 이어 비밀리에 강달영을 중심으로 제2차 조선공산당이 조직된다. 그리고 1926년 조선공산당에서 만주총국을 설치할 때 조봉암은 책임비서라는 요직을 맡는다.
그와 함께 조선공산당 해외부는 국내에서 1926년 6.10만세운동을 전개하도록 권오설 쪽에 강력하게 전달했다. 조선공산당 해외부는 김단야가 중심이 되고 김찬, 조봉암도 다 연결돼 있었으니 이들이 함께 논의한 것일 텐데, 이걸 '전달'이라고 표현한 것도 있고 '지시'라고 표현한 것도 있다. 해외부는 주로 상해(상하이)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사실 상해부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당시엔 해외부가 상당히 강했다. (권오설은 조봉암과 함께 제1차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고, 제1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된 후에는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과 고려공청 책임비서로 활약한 인물이다.) 6.10만세운동 직후인 1926년 7월 조봉암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해 상해에 있던 코민테른 원동부 위원으로 활동한다. 한국 공산주의자를 대표해 그렇게 됐다고 볼 수도 있다.
이처럼 1924년에서 1926년에 걸쳐 조봉암은 공산주의 활동가로서 대단히 중요한 활동, 어느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활동을 많이 했다고 할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아흔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프레시안 : 일본으로 건너간 지 1년 만인 1922년 조봉암은 조선으로 돌아온다. 귀국 후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나.
서중석 : 조봉암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공산주의자로서 활동했는데, 이때 어디서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자료는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1922년 시베리아 베르흐노이진스크(베르흐네우딘스크, 오늘날 울란우데)에서 한국 공산주의자 통합 회의가 열렸을 때 조봉암이 정재달과 함께 국내 대표로 참여하는 걸 볼 수 있다.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베르흐노이진스크 통합 회의는 당시 긴급하게 요구되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사회주의 운동이 시베리아, 연해주 쪽에서 1917년경부터 파급됐다고들 이야기하는데, 1921년 (고려)공산당이 조직될 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이 두 개로 갈라져서 심각한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상해파의 주요 지도자들 중에는 러시아에 이주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와 달리 이르쿠츠크파에는 러시아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물론 나중에 여러 한국인도 이르쿠츠크파로 분류되기는 한다. 그리고 상해파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있다', 다시 말해 '덜 볼셰비키적이다', 이런 비판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에 비해 이르쿠츠크파는 '공산주의 조직 논리와 이론에 더 철저한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반면 '러시아에 너무 기울어지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도 듣고 그랬다. 이러한 양 파가 워낙 심하게 대립, 갈등하니까 러시아 쪽에서 그 갈등을 어떻게든 조정해 양 파가 같이 일할 수 있게 하려 했다. 공산당이 그런 식으로 갈라지면 안 된다고 보고 통합 회의를 열었던 것이다. 물론 이건 성공할 수가 없었다. 바로 깨지고 만다.
그러고 나서 조봉암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갔다. 이제 공산주의 수업을 제대로 받게 됐다고 볼 수 있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년도 채 안 됐다. 거기서 그렇게 충분히 학습한 것 같지는 않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 활동가를 양성하고자 1921년 코민테른이 모스크바에 세운 교육 기관이다. 조봉암을 비롯한 한국인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호찌민, 중국의 덩샤오핑 등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꾼 거물들도 이곳에서 교육받았다.)
프레시안 : 베르흐노이진스크 통합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난 지 1년 만인 1923년 조봉암은 다시 귀국한다. 돌아온 후 조봉암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조봉암은 귀국 후 1923년부터 청년 운동을 많이 했다. 당시엔 실제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내가 사회주의자다' 이렇게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런 사람들을 포함해 사회주의자들이 노동 운동, 농민 운동의 현장으로 직접 뛰어드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노농 단체(노동 단체와 농민 단체)의 간부로 활동하거나 청년 단체의 간부를 많이 했다. 서울파로 불린 서울청년회계도 그랬고 화요파로 불린 화요회계도 그랬다. 1920년대 중반 양대 세력이라고들 하는 이 두 공산주의자 그룹에선 청년 운동을 많이 했다. 박헌영도 그때쯤 되면 감옥소에서 나와 조봉암과 함께 신흥청년동맹에서 활동한다. 박헌영은 화요회에서도 조봉암과 함께 활동한다. 칼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이어서 단체 이름을 화요회로 했다고 한다.
조봉암은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어서, 신흥청년동맹에서 활동할 때에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들과 함께 강연회, 연설 같은 것을 많이 했다. '새로운 사회 의식에 눈을 떠라. 청년들의 사명은 이러저러한 것들이다', 주요 내용은 이런 것 아니었겠나.
그런 속에서 공산당을 조직하는 활동이 이뤄진다. 새로운 공산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움직임은 그전부터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있었지만, 특히 이 시기가 되면 그런 것들이 구체화된다. 1924년 4월이 되면 '양대 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청년총동맹, 조선노농총동맹이 조직되는데 두 조직을 기반으로 새로운 공산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화요파와 서울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다. 그러면서 1925년 4월 17일, 화요파가 중심이 돼 아서원이라는 중국집에서 조선공산당을 비밀리에 만들어낸다.
제1차 조선공산당의 중심인물로 활약
서중석 : 이때 조봉암이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느냐 하는 것은 간접적인 자료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조봉암은 제1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됐을 때 중앙검사위원 직책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책임비서가 되는 김재봉 그리고 김찬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여러 군데에 나온다. 조선공산당을 만든 다음 날인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의 자매 단체라고 볼 수도 있고 하부 단체라고도 볼 수 있는 고려공산청년회(고려공청)가 박헌영 집에서 만들어진다. 이때 조봉암이 사회를 본 것을 통해서나 7명의 중앙집행위원 중 한 명이 된 것을 통해서 보더라도 역시 박헌영, 김찬과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봉암은 이 두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다음 달인 5월이 되면 고려공청 대표이자 조선공산당 부대표 자격으로 모스크바로 떠났다. 코민테른과 국제공산청년동맹의 승인을 얻기 위해 간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조봉암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때 조선공산당 대표로 조봉암과 함께 간 사람은 조동호다. 자료에 따라 조동우라고도 나오는 사람인데, 활동을 아주 많이 한 인물이다.
코민테른과 국제공산청년동맹 양쪽에서 승인을 받아내는데, 그와 함께 국제공산청년동맹에 '우리 고려공청의 학생들을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받아줄 수 없느냐'고 요청했다. 그래서 유학생 21명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보내는 것을 승인받는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유학생 중에는 권오직(고려공청 제2대 책임비서인 권오설의 동생)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특히 유명한 여성 활동가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고명자, 김명시, 김조이 등 그 후 쟁쟁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이때 교육받으러 러시아로 떠난다. 김명시는 훗날 중국 연안(옌안)에 가서 대단한 활동을 해 김명시 장군이라고도 불리는 사람이다. 김조이는 조봉암과 부부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돼 있고, 고명자는 나중에 김단야의 애인이 되는 사람이다.
프레시안 : 제1차 조선공산당은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 후 조봉암은 어떤 활동을 펼치나.
서중석 : 1925년 11월 유명한 신의주 사건이 터지면서 조선공산당이 와해된다. 이 사건으로 고려공청과 조선공산당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검거되는데, 이런 큰 사건이 일어난 직접적인 계기는 사회주의 청년들이 (술자리에서) 친일파들을 습격한 것이다. 경찰이 '뭔가 수상하다' 해가지고 청년들 집을 수색하는데, 그때 박헌영이 조봉암 쪽으로 보내는 문서를 발견했다. 그러면서 사건이 확대된 것이다.
그 후 조봉암은 김찬, 김단야와 함께 조선공산당 해외부라는 걸 설치해 거기서 활동한다. 이때 국내에서는 제1차 조선공산당에 이어 비밀리에 강달영을 중심으로 제2차 조선공산당이 조직된다. 그리고 1926년 조선공산당에서 만주총국을 설치할 때 조봉암은 책임비서라는 요직을 맡는다.
그와 함께 조선공산당 해외부는 국내에서 1926년 6.10만세운동을 전개하도록 권오설 쪽에 강력하게 전달했다. 조선공산당 해외부는 김단야가 중심이 되고 김찬, 조봉암도 다 연결돼 있었으니 이들이 함께 논의한 것일 텐데, 이걸 '전달'이라고 표현한 것도 있고 '지시'라고 표현한 것도 있다. 해외부는 주로 상해(상하이)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사실 상해부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당시엔 해외부가 상당히 강했다. (권오설은 조봉암과 함께 제1차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고, 제1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된 후에는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과 고려공청 책임비서로 활약한 인물이다.) 6.10만세운동 직후인 1926년 7월 조봉암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해 상해에 있던 코민테른 원동부 위원으로 활동한다. 한국 공산주의자를 대표해 그렇게 됐다고 볼 수도 있다.
이처럼 1924년에서 1926년에 걸쳐 조봉암은 공산주의 활동가로서 대단히 중요한 활동, 어느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활동을 많이 했다고 할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아흔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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